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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인내의 경계선에서 – 7대 죄악 3 ‘분노’ –

요나 4: 1 ~ 4

김지철 목사

2014.03.09

요나는 차라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멘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멘탈이 붕괴됐다는 표현의 줄임말로,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는 어이없고 정말 화가 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라는 인물에게도 바로 이 멘붕의 상태가 온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받아들이기가 싫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적대하고 미워할 수는 없었지만 부글부글 화가 끓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다시 부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 나 좀 내버려두세요. 그냥 죽게 놔두세요. 나는 살아있는 것이 싫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거둬 가세요!” 라며 죽음의 선언을 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4:3)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해 본 적 있으십니까? 예언자였던 요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자기의 삶을 거둬 가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일까요?
사순절을 맞이해서 오늘은 ‘일곱 가지 악’이라는 주제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분노와 인내의 경계선에서’라는 제목으로 쉽게 화를 내는 우리의 모습과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요나서는 총 4장으로 기록된 아주 짧은 예언서입니다. 5분에서 10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책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유머가 들어 있습니다. 분노와 참음의 경계선에서, 분노하시면서도 오래 참음을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언자가 이렇게 대화를 많이 하는 장면은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날 요나에게 임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요나야, 니느웨에 가거라. 이방민족인 니느웨의 죄악과 부패가 너무 심하구나. 그곳이 너무 타락했구나. 그러니 가서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백성을 심판할 것이다. 이 성읍이 멸망할 것이다!’라고 선포해라.”
그런데 예언자 요나는 거절했습니다. 아니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전해야 할 심판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잘못은 했지만 기회를 주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다시 한 번 노력해 보라는 것입니다. 네 인생을 바꿔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민족인 니느웨 백성에게 이것을 말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유는 그의 정의감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악한 자는 멸망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니느웨는 악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정의감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니 심판 당할 것을 미리 말해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회개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만을 사랑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배타적인 민족주의였습니다. 요새말로 말하면 국수주의였습니다. 내 민족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된다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분이셨습니다. 절대로 악을 내버려 두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정의보다는 사랑과 긍휼로 용서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요나는 그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 백성에게로 가지 않고 도망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나의 이 비뚤어진 마음, 편협한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나만 잘 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전도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아, 하나님이 귀한 역사를 베푸셨구나!’ 하는 찬탄이 마음에 퍼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잘 아는 사람, 그것도 그동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교회에 나오면 어떻습니까? 갑자기 마음이 흔들립니다. 당혹스러워집니다.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는데… 저런 사람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축복을 이렇게 빨리 받으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조금은 들지 않습니까? 바로 그 마음이 요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요나의 마음을 화나게 했습니다.

요나의 이 완악한 마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단순히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설득하시기 시작합니다. “네가 나의 정의와 공의를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마음, 오래 참는 마음도 알아다오. 그래야 네가 참 예언자가 되는 거란다.”
하나님은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요나가 탄 배를 폭풍우로 뒤흔드셨습니다. 요나 때문에 폭풍우가 온 것을 안 선원들은 요나를 사나운 바다 가운데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해서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요나는 하나님께서 강제로 자기를 니느웨로 몰고 가신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올립니다.

…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요나 2:6)

“나를 저 구덩이에서 건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에게 말씀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시 요나에게 전달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증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이제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싫지만, 저들에게 회개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귀찮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니느웨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니느웨 성은 아주 큰 성이었습니다. 성인이 3일 동안 돌아다녀도 다 돌아다닐 수 없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위해서 요나는 3일이 아니라 단 하루 성을 돌아다닙니다. 요나서 3장 4절에는 이런 요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4)

그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룻길만을 갔습니다. 사흘 동안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들으려면 듣고, 싫으면 관둬라 하는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요나가 기대하고 예상한 것은, ‘이들이 이 메시지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백성이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왕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요나에게는 이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니느웨 백성들이 내 말을 듣고 저렇게 회개를 해버리면 어떡하나!’ 그리고 그보다 더한 충격은, 하나님이 이 회개를 받으시고 심판의 메시지를 거두어 가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을 징계하시려던 것을 멈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용서가 요나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투정을 부립니다. “알아요, 나도.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지요. 하나님은 은혜가 많지요. 하나님은 용서를 잘 하시죠. 내가 그래서 니느웨에 안 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요나는 화가 난 것입니다.
이 요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요나는 자신의 생각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시하시는 것 같아. 하나님이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 같아.’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라 해도, 정의를 먼저 행하시고 사랑하셔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런 마음에 하나님께 화를 낸 것입니다.

잘못된 분노는 나와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처음부터 요나는 자기 속에 있는 분노를 하나님께 직접 대항하며 대들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가 한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도망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두려움이 묶이면 이렇게 도망치게 됩니다.
최근에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디즈니에서 만든 ‘겨울왕국’입니다. 공주 엘사에게는 만지거나 밟으면 모든 것이 얼음으로 바뀌는 마법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그 능력을 본 아버지가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 능력은 쓰면 안 돼!” 그리고는 딸의 손에 장갑을 끼워줍니다. 아버지의 이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추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숨어 지냅니다. 동생과도 즐겁게 놀 수 없었습니다. 여왕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화를 내는 순간에 내리치는 것마다 공격적인 무기로 바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백색의 얼음과 눈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얼음궁전에서 혼자 외롭게 살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두려움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Let it go’입니다. 다 잊자, 다 떠나버리자 하는 가사입니다.
영화는 눈과 얼음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가를 그려 줍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얼음과 눈 속에서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겨울의 세계만으로는 인간이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사랑만이 얼음의 세계, 겨울의 왕국을 봄의 세계, 꽃 피는 세계, 아름다운 여름의 세계로 바꿀 수 있다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남녀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자매간의 사랑도 그러함을 알려줍니다.
분노는 얼음덩어리를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치 얼음 꼬챙이로 찍듯이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줍니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존중 받지 못한다는 생각, 사랑 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인한 이 분노는,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어둠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즉 분노로 인간관계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분노하라는 것입니다. 화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거짓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분노는 우리가 바르게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질병이 있습니다. 바로 화병입니다. 속에 있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놓다가 어느 날 터지는 것이 화병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함부로 화를 내면서 생기는 질병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 조절장애입니다. 분노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생기는 질병입니다.
분노가 두려움과 만나면 무력해집니다. 자기 정체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도망가게 됩니다. 또한 분노가 너무 쉽게 함부로 터지게 되면 남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남에게 깊은 상처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아침에 분노하면서 일어나십니까, 아니면 감사한 마음으로 일어나십니까? 분노하며 일어난다는 것은, 응어리진 아픔이 있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며 일어난다는 것은 분노가 사라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분노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악에 대해서 분노해야 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바른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셨고,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믿음의 선배들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좋은 분노입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분노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분노가 아닙니다. 잘못된 분노, 제어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노하는 요나와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분노를 어떻게 치유하셨을까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를 어떻게 치유하실까요? 첫 번째, 하나님은 요나를 대화 상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존감이 망가질 때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물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4)

화내고 있는 네게 매몰당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너 자신과 분노하는 너를 일치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할 때, 그런 너 자신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분노하지?’ 분노하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옆에서 보아야 분노를 조절할 수 있고, 다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성을 내고 있구나. 내 모습이 이렇구나.’ 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분노를 객관화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요나에게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그래도 저 니느웨를 무너뜨리세요. 저들 좀 징계해 주세요.” 말하며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성이 망하나 안 망하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뙤약볕에 지켜보고 있으려니 자기도 괴로웠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박넝쿨 잎사귀로 뜨거움을 가리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의 마음이 조금 위로되었습니다.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박넝쿨을 만드셨구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음날 다시 니느웨 성을 보러 언덕 위에 올라가보니, 어제까지 잘 자라던 박넝쿨이 벌레가 먹어서 시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오늘 다 읽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8절에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를 죽여주세요. 저를 우습게 여기셨군요. 제가 이 박넝쿨을 아꼈는데 이렇게 다 시들게 하시다니, 도대체 하나님 뭡니까! 이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나아요!”
이렇게 항의하며 대드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요? “요나야, 하루 살다가 죽어버리는 그 박넝쿨을 네가 그렇게 소중히 여겼느냐. 내가 그 마음 안다. 그런데 니느웨 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축도 가득하단다. 저들이 회개해서 내가 용서했다. 네가 하룻밤에 시들어 버리는 박넝쿨을 그렇게 아꼈거든, 내가 저 백성을 아끼는 것이 네가 그렇게 화낼 일이더냐?”

하나님의 오래 참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적대자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자들입니다.
화를 자주 낼 일이 우리에게 뭐가 그렇게 많이 있습니까? 아내에게 쉽게 화를 내는 남편들이 계십니까? 화를 멈추세요. 아내가 나만을 바라보고 결혼해서 충성하고 사랑하며 섬기지 않습니까? 남편만 보면 화를 내고 잔소리 하는 아내들이 계십니까? 이제 그만 화를 멈추세요. 남편이 가정을 꾸리기 위해 바깥에서 얼마나 수모를 받으며 일하는지 아십니까? 남편을 좀 세워 주세요.
화를 함부로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존감이 깨지고 있다는 증거고, 우리의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증거입니다. 의로운 분노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것 아닌 것으로 아내 탓하고, 남편 탓하고, 부모 탓하고, 자녀 탓하면 우리의 삶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쉽게 성을 내시는 분이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 받은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화를 멈추시기 바랍니다. 대신 품고 사랑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놀라운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모든 삶의 현장으로 실천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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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4: 1 ~ 4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요나는 차라리 죽기를 원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멘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멘탈이 붕괴됐다는 표현의 줄임말로, 정신이 무너질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는 어이없고 정말 화가 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라는 인물에게도 바로 이 멘붕의 상태가 온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받아들이기가 싫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적대하고 미워할 수는 없었지만 부글부글 화가 끓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다시 부르셨을 때, 그는 “하나님, 나 좀 내버려두세요. 그냥 죽게 놔두세요. 나는 살아있는 것이 싫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거둬 가세요!” 라며 죽음의 선언을 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 4:3)

이런 고백을 하나님 앞에 해 본 적 있으십니까? 예언자였던 요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자기의 삶을 거둬 가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일까요?
사순절을 맞이해서 오늘은 ‘일곱 가지 악’이라는 주제의 세 번째 시간입니다. ‘분노와 인내의 경계선에서’라는 제목으로 쉽게 화를 내는 우리의 모습과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시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요나서는 총 4장으로 기록된 아주 짧은 예언서입니다. 5분에서 10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책에는 하나님의 풍성한 유머가 들어 있습니다. 분노와 참음의 경계선에서, 분노하시면서도 오래 참음을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언자가 이렇게 대화를 많이 하는 장면은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날 요나에게 임한 것으로 시작됩니다. “요나야, 니느웨에 가거라. 이방민족인 니느웨의 죄악과 부패가 너무 심하구나. 그곳이 너무 타락했구나. 그러니 가서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백성을 심판할 것이다. 이 성읍이 멸망할 것이다!’라고 선포해라.”
그런데 예언자 요나는 거절했습니다. 아니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전해야 할 심판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잘못은 했지만 기회를 주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다시 한 번 노력해 보라는 것입니다. 네 인생을 바꿔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이방민족인 니느웨 백성에게 이것을 말하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이유는 그의 정의감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악한 자는 멸망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니느웨는 악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정의감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니 심판 당할 것을 미리 말해 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회개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요나는 이스라엘만을 사랑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배타적인 민족주의였습니다. 요새말로 말하면 국수주의였습니다. 내 민족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된다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운 분이셨습니다. 절대로 악을 내버려 두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정의보다는 사랑과 긍휼로 용서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요나는 그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 백성에게로 가지 않고 도망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나의 이 비뚤어진 마음, 편협한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나만 잘 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무너졌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전도했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합니까? ‘아, 하나님이 귀한 역사를 베푸셨구나!’ 하는 찬탄이 마음에 퍼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잘 아는 사람, 그것도 그동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교회에 나오면 어떻습니까? 갑자기 마음이 흔들립니다. 당혹스러워집니다. ‘아,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는데… 저런 사람은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축복을 이렇게 빨리 받으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 조금은 들지 않습니까? 바로 그 마음이 요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요나의 마음을 화나게 했습니다.

요나의 이 완악한 마음을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단순히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를 설득하시기 시작합니다. “네가 나의 정의와 공의를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내 사랑하는 마음, 오래 참는 마음도 알아다오. 그래야 네가 참 예언자가 되는 거란다.”
하나님은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요나가 탄 배를 폭풍우로 뒤흔드셨습니다. 요나 때문에 폭풍우가 온 것을 안 선원들은 요나를 사나운 바다 가운데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다에 빠진 요나를 위해서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요나는 하나님께서 강제로 자기를 니느웨로 몰고 가신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올립니다.

…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요나 2:6)

“나를 저 구덩이에서 건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에게 말씀하셔서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시 요나에게 전달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증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이제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싫지만, 저들에게 회개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귀찮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니느웨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니느웨 성은 아주 큰 성이었습니다. 성인이 3일 동안 돌아다녀도 다 돌아다닐 수 없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위해서 요나는 3일이 아니라 단 하루 성을 돌아다닙니다. 요나서 3장 4절에는 이런 요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 3:4)

그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룻길만을 갔습니다. 사흘 동안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들으려면 듣고, 싫으면 관둬라 하는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요나가 기대하고 예상한 것은, ‘이들이 이 메시지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백성이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그 메시지를 듣고 왕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요나에게는 이것이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니느웨 백성들이 내 말을 듣고 저렇게 회개를 해버리면 어떡하나!’ 그리고 그보다 더한 충격은, 하나님이 이 회개를 받으시고 심판의 메시지를 거두어 가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을 징계하시려던 것을 멈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용서가 요나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투정을 부립니다. “알아요, 나도.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지요. 하나님은 은혜가 많지요. 하나님은 용서를 잘 하시죠. 내가 그래서 니느웨에 안 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요나는 화가 난 것입니다.
이 요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요나는 자신의 생각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무시하시는 것 같아. 하나님이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 같아.’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라 해도, 정의를 먼저 행하시고 사랑하셔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런 마음에 하나님께 화를 낸 것입니다.

잘못된 분노는 나와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처음부터 요나는 자기 속에 있는 분노를 하나님께 직접 대항하며 대들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가 한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도망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피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두려움이 묶이면 이렇게 도망치게 됩니다.
최근에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디즈니에서 만든 ‘겨울왕국’입니다. 공주 엘사에게는 만지거나 밟으면 모든 것이 얼음으로 바뀌는 마법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그 능력을 본 아버지가 엄하게 꾸짖습니다. “그 능력은 쓰면 안 돼!” 그리고는 딸의 손에 장갑을 끼워줍니다. 아버지의 이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여 감추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숨어 지냅니다. 동생과도 즐겁게 놀 수 없었습니다. 여왕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화를 내는 순간에 내리치는 것마다 공격적인 무기로 바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백색의 얼음과 눈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얼음궁전에서 혼자 외롭게 살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두려움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Let it go’입니다. 다 잊자, 다 떠나버리자 하는 가사입니다.
영화는 눈과 얼음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가를 그려 줍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얼음과 눈 속에서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겨울의 세계만으로는 인간이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사랑만이 얼음의 세계, 겨울의 왕국을 봄의 세계, 꽃 피는 세계, 아름다운 여름의 세계로 바꿀 수 있다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남녀간의 사랑만이 아니라 자매간의 사랑도 그러함을 알려줍니다.
분노는 얼음덩어리를 만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마치 얼음 꼬챙이로 찍듯이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줍니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존중 받지 못한다는 생각, 사랑 받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인한 이 분노는, 사람을 살리기보다는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어둠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즉 분노로 인간관계가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분노하라는 것입니다. 화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거짓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분노는 우리가 바르게 조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질병이 있습니다. 바로 화병입니다. 속에 있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놓다가 어느 날 터지는 것이 화병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함부로 화를 내면서 생기는 질병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노 조절장애입니다. 분노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생기는 질병입니다.
분노가 두려움과 만나면 무력해집니다. 자기 정체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도망가게 됩니다. 또한 분노가 너무 쉽게 함부로 터지게 되면 남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남에게 깊은 상처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아침에 분노하면서 일어나십니까, 아니면 감사한 마음으로 일어나십니까? 분노하며 일어난다는 것은, 응어리진 아픔이 있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며 일어난다는 것은 분노가 사라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분노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입니다. 악에 대해서 분노해야 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바른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셨고,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믿음의 선배들도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좋은 분노입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분노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분노가 아닙니다. 잘못된 분노, 제어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노하는 요나와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분노를 어떻게 치유하셨을까요?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분노를 어떻게 치유하실까요? 첫 번째, 하나님은 요나를 대화 상대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존감이 망가질 때 분노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불러 물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4:4)

화내고 있는 네게 매몰당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너 자신과 분노하는 너를 일치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노할 때, 그런 너 자신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분노하지?’ 분노하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옆에서 보아야 분노를 조절할 수 있고, 다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성을 내고 있구나. 내 모습이 이렇구나.’ 하면서 자신 속에 있는 분노를 객관화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요나에게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그래도 저 니느웨를 무너뜨리세요. 저들 좀 징계해 주세요.” 말하며 언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성이 망하나 안 망하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뙤약볕에 지켜보고 있으려니 자기도 괴로웠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박넝쿨 잎사귀로 뜨거움을 가리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의 마음이 조금 위로되었습니다.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박넝쿨을 만드셨구나.’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다음날 다시 니느웨 성을 보러 언덕 위에 올라가보니, 어제까지 잘 자라던 박넝쿨이 벌레가 먹어서 시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오늘 다 읽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8절에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를 죽여주세요. 저를 우습게 여기셨군요. 제가 이 박넝쿨을 아꼈는데 이렇게 다 시들게 하시다니, 도대체 하나님 뭡니까! 이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나아요!”
이렇게 항의하며 대드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요? “요나야, 하루 살다가 죽어버리는 그 박넝쿨을 네가 그렇게 소중히 여겼느냐. 내가 그 마음 안다. 그런데 니느웨 성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축도 가득하단다. 저들이 회개해서 내가 용서했다. 네가 하룻밤에 시들어 버리는 박넝쿨을 그렇게 아꼈거든, 내가 저 백성을 아끼는 것이 네가 그렇게 화낼 일이더냐?”

하나님의 오래 참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적대자 되었을 때,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빚진자들입니다.
화를 자주 낼 일이 우리에게 뭐가 그렇게 많이 있습니까? 아내에게 쉽게 화를 내는 남편들이 계십니까? 화를 멈추세요. 아내가 나만을 바라보고 결혼해서 충성하고 사랑하며 섬기지 않습니까? 남편만 보면 화를 내고 잔소리 하는 아내들이 계십니까? 이제 그만 화를 멈추세요. 남편이 가정을 꾸리기 위해 바깥에서 얼마나 수모를 받으며 일하는지 아십니까? 남편을 좀 세워 주세요.
화를 함부로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존감이 깨지고 있다는 증거고, 우리의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증거입니다. 의로운 분노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것 아닌 것으로 아내 탓하고, 남편 탓하고, 부모 탓하고, 자녀 탓하면 우리의 삶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쉽게 성을 내시는 분이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 받은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화를 멈추시기 바랍니다. 대신 품고 사랑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놀라운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의 가정에서부터 모든 삶의 현장으로 실천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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