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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쌓아둘 때 삶이 혼돈에 빠집니다.
올해 들어 창세기 말씀을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관점에서 그동안 하나님의 창조사를 전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이었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심은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겠다는 선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이 타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분노하는 가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파산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 존재인가를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인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시기하는 자’, ‘질투하는 자’, ‘폭력을 행하고 사랑하는 동생마저 쳐죽인 살인자’라는 오명이 떠오를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종종 인간을 향해 질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안타까워하시며 확인하시려 했다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겠니?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느냐?”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여러 질문이 나오는데, 그중 두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6절에 보면,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네 마음에 그토록 격동되는 게 무엇 때문이냐? 못마땅한 게 왜 그렇게 많냐? 네가 지금 화를 내는 게 적절하냐? 네 내면세계를 다시 돌아보지 않겠느냐?” 이런 물음입니다. 그리고 9절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는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외면세계도 망가지고 있구나. 네 옆의 동생, 그는 너의 사랑하는 동생이 아니냐? 그런데 그를 어떻게 했느냐? 네 아우가 어떻게 되었는지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라는 물음입니다. 즉 내면과 외면의 질서가 모조리 깨졌다는 뜻입니다. “네 삶이 혼돈에 빠졌구나!”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섞인 질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길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파하시며 질문하시는 것일까요?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둘은 잘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농사꾼으로, 아벨은 목동으로 자신의 역할에도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인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외면하신 것입니다. 반면 동생 아벨이 제물을 드리자 그것은 아주 기쁘고 즐겁게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당시 가인이어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나를 동생과 비교해요? 내가 동생보다 못난 게 뭐죠? 그래도 내가 형인데 나를 우대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를 무시하는 것입니까?” 그는 분노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동생을 죽이는 극단으로 자신의 분노를 몰아갔습니다.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물음 또한 여러 차례 고민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가, 아니면 불공평한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는 분인가? 왜 멀쩡한 형제 사이를 이간질 하신 것일까? 둘의 제물을 다 받으시면 좋았을 것을 왜 한 사람의 제물만 받으신 걸까? 하나님은 동물의 피는 좋아하고, 곡식은 싫어하시는 것일까? 동물이 곡식보다 더 소중하고 값어치가 나가기 때문인가?’
그런데 오늘은 우리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원하십니다. 6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세기 4:6)
하나님이 가인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내가 보니, 지금 네가 위기에 처해 있구나. 네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돌아보아라. 내가 너에게 경고한다.” 이는 단순한 책망뿐만이 아니라 사랑을 품은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변하길 원하시며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치명적인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기 전, 6절에 이어 7절에서도 계속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7)
‘선을 행하면 왜 얼굴을 들지 못하겠냐’ 하시며 죄가 너의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죄가 살아 있는 인격체처럼 나타납니다. 사람 앞에 엎드려 웅크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나운 맹수가 기회를 타 기습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죄가 우리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신약성경에도 나타납니다. 죄가 인격화 된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고 넘어뜨리려 한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입니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8 중)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넘어뜨리려 합니다. 이처럼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죄가 인간을 억압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죄가 너를 미혹하고 다스리려 할 때, 죄가 유혹과 욕망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 결국 그 죄를 넘어서야 할 사람은 너다. 네가 죄를 물리쳐야 한다. 네가 죄를 다스려야 한다. 내가 너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것은 네게 모든 책임을 허락했다는 뜻이다. 네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하고 행하라. 이미 죄를 다스릴 용기와 지혜를 너에게 주었다.”
죄를 다스릴 자가 바로 인간, 나 자신이란 사실을 하나님이 명확히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회개할 기회마저 놓쳤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사랑해야 할 동생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행합니다. 이처럼 죄에 붙잡히면 내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가 나를 붙잡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고집이 생기며 교만해지고 강퍅함까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가인이 행한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결국 어떻게 했을까요? 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세기 4:8 중)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입니까? 가인은 형이며 아벨은 동생입니다. 별다른 이유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는 우발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의도적인 살인입니다. 즉 가인은 마음속에 분노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범죄를 계획하며 실행하려 했습니다. 그는 점차 죄의 노예가 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 한 것도 우발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는 준비했고, 계획을 짰습니다. 예수님을 적대하는 제사장들, 종교 지도자들과 야합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우발적이었습니다. 그의 배신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위기가 닥쳐오자 두려웠습니다.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고, 이후 후회하며 통곡했습니다.
분노를 마음에 쌓아놓으면 어느 날엔 크게 터져 버립니다. 물론 분노를 피하거나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분노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움 한 번 갖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마음속에 쌓아두는 건 다릅니다. 내 속에 부정적인 마음들을 쌓아두다 보면 의도성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죄악성이 나를 붙들게 되고, 거기에 내가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9절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세기 4:9 중)
가인은 이제 거짓말까지 합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상대를 더는 사랑할 수 없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완전히 파산시켜 버린 것입니다. 가인의 삶이 미움으로 가득 찬 삶으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만약 가인이었다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했을까요?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면, 내가 드린 봉사와 헌금을 열납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마 가인은 속으로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드려서 피의 제사를 드렸고, 나는 땅의 곡식으로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 이렇습니다. 동물의 피로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고, 동물의 피가 아닌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그래서 가인의 제물이 잘못된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적절한 해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속죄제를 드리는 구약 레위기 전통에서도 때로는 곡식을 드려도 괜찮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이지 제물의 종류에 따라 속죄 여부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입니까?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세기 4:4 중)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벨이 먼저 나오고 그의 제물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쓰여 있는 게 아니라 ‘아벨’이란 사람도 받으시고 그가 드리는 ‘제물’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5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창세기 4:5 중)
여기서도 가인이 먼저 등장하고 그의 제물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아벨을 기쁘게 받으셨고, 가인은 거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아벨의 모습을 보셨고, 그의 마음을 살펴보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제물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게 아니라 가인이란 사람의 태도와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태도와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이었지만, 가인의 태도와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열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도 다음과 같이 둘의 예배를 평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4)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드렸지만, 가인은 믿음 없이 예배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형식뿐인 예배, 진심이 없는 예배, 제물만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서 있습니까?
가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가인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3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오랫동안 반복된 삶의 역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도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위해 제물을 드리는 게 아니라 네 만족을 위해 드리고 있구나. 네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경배하는 모습만 갖고 있구나. 너는 너 자신이 더 중요하고, 나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가인 속에 담긴 자기중심적인 교만을 보시고, 그의 제사를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가인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가 거부당했을 때 자기를 돌아보며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역정 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가득 찬 분노를 발산하며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가 분노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동안 그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 또한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형식화 되었습니다. 습관화 되고 화석화 되었습니다. 처음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마음, 곧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5년, 10년, 30년, 50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앙생활하며 신앙이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축적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왔는지, 그분 앞에 어떤 존재로 나왔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두렵고 떨림이 살아 있는지, 하나님만을 나의 하나님만으로 고백하며 예배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경고가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 땅만 밟는구나. 너희들이 주는 제물의 향내도 이제는 지겹구나. 너희들의 속은 어떤 마음이냐? 예배자로 서 있느냐? 너희들이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없이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드리는 예배가 진짜냐? 네가 드리는 교회의 섬김과 이웃 사랑이 진정한 것이냐? 네 직분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냐? 네가 드리는 헌금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냐?”
또한 우리가 드린 것을 받지 않겠다고 하실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후 하나님이 가인에게 한 번 더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가 났느냐?” 그때 가인은 대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왜 안 받으셨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차라리 이렇게 묻고 정확히 원인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되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 중심적으로 예배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고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지 기억하며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완전한 출구입니다.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분노가 생길 때, 제일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터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터뜨리지 말고, 아내나 남편에게 터뜨리지 말고, 자식에게 터뜨리지 말고, 하나님께 토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 가르쳐 주십시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예물을 원하는 게 아니라 너를 원한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너 자신이다.” 그때 우리의 불평이 변해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제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할까요? 어떻게 내 인생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영혼의 감사가 가득 찰 수 있을까요?”
저는 시편을 좋아하는데, 시편의 내용이 대부분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불평으로 시작되는 시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평을 하나님께 터뜨리자 그것이 기도가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도 이루어집니다. 마음속 깊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결국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감사 찬양을 드리게 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큰 고통과 아픔 가운데서 분노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분노하지 않으셨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토해 내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하며, 하나님께 도전하고 항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시며,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분노가 있습니다. 미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쌓아두면 안됩니다. 쌓아두었다가 터지면 내가 망하고 이웃이 망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터뜨려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쏟아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때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영혼에 기쁨이 다시 솟아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분노가 있습니까? 그것이 나를 얽어매고 있습니까? 깨뜨려야 합니다.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과 평안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창세기 4: 1 ~ 8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분노를 쌓아둘 때 삶이 혼돈에 빠집니다.
올해 들어 창세기 말씀을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관점에서 그동안 하나님의 창조사를 전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이었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심은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겠다는 선언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이 타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낳은 가인과 아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분노하는 가인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파산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악한 존재인가를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인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시기하는 자’, ‘질투하는 자’, ‘폭력을 행하고 사랑하는 동생마저 쳐죽인 살인자’라는 오명이 떠오를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이 종종 인간을 향해 질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바로 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안타까워하시며 확인하시려 했다는 것입니다. “얘야, 네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겠니?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느냐?”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여러 질문이 나오는데, 그중 두 가지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6절에 보면,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냐?”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네 마음에 그토록 격동되는 게 무엇 때문이냐? 못마땅한 게 왜 그렇게 많냐? 네가 지금 화를 내는 게 적절하냐? 네 내면세계를 다시 돌아보지 않겠느냐?” 이런 물음입니다. 그리고 9절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는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외면세계도 망가지고 있구나. 네 옆의 동생, 그는 너의 사랑하는 동생이 아니냐? 그런데 그를 어떻게 했느냐? 네 아우가 어떻게 되었는지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라는 물음입니다. 즉 내면과 외면의 질서가 모조리 깨졌다는 뜻입니다. “네 삶이 혼돈에 빠졌구나!”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섞인 질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길래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파하시며 질문하시는 것일까요?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결혼해서 낳은 두 아들이 가인과 아벨입니다. 둘은 잘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농사꾼으로, 아벨은 목동으로 자신의 역할에도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인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외면하신 것입니다. 반면 동생 아벨이 제물을 드리자 그것은 아주 기쁘고 즐겁게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당시 가인이어도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나를 동생과 비교해요? 내가 동생보다 못난 게 뭐죠? 그래도 내가 형인데 나를 우대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를 무시하는 것입니까?” 그는 분노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동생을 죽이는 극단으로 자신의 분노를 몰아갔습니다.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물음 또한 여러 차례 고민해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인가, 아니면 불공평한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당신 마음대로 하시는 분인가? 왜 멀쩡한 형제 사이를 이간질 하신 것일까? 둘의 제물을 다 받으시면 좋았을 것을 왜 한 사람의 제물만 받으신 걸까? 하나님은 동물의 피는 좋아하고, 곡식은 싫어하시는 것일까? 동물이 곡식보다 더 소중하고 값어치가 나가기 때문인가?’
그런데 오늘은 우리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질문을 들어야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원하십니다. 6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세기 4:6)
하나님이 가인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내가 보니, 지금 네가 위기에 처해 있구나. 네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돌아보아라. 내가 너에게 경고한다.” 이는 단순한 책망뿐만이 아니라 사랑을 품은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변하길 원하시며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치명적인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기 전, 6절에 이어 7절에서도 계속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7)
‘선을 행하면 왜 얼굴을 들지 못하겠냐’ 하시며 죄가 너의 문에 엎드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죄가 살아 있는 인격체처럼 나타납니다. 사람 앞에 엎드려 웅크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나운 맹수가 기회를 타 기습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죄가 우리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신약성경에도 나타납니다. 죄가 인격화 된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고 넘어뜨리려 한다고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입니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8 중)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넘어뜨리려 합니다. 이처럼 죄가 가인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죄가 인간을 억압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죄가 너를 미혹하고 다스리려 할 때, 죄가 유혹과 욕망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 결국 그 죄를 넘어서야 할 사람은 너다. 네가 죄를 물리쳐야 한다. 네가 죄를 다스려야 한다. 내가 너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것은 네게 모든 책임을 허락했다는 뜻이다. 네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옳고 그른 것인지 분별하고 행하라. 이미 죄를 다스릴 용기와 지혜를 너에게 주었다.”
죄를 다스릴 자가 바로 인간, 나 자신이란 사실을 하나님이 명확히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회개할 기회마저 놓쳤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사랑해야 할 동생에게까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행합니다. 이처럼 죄에 붙잡히면 내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죄가 나를 붙잡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고집이 생기며 교만해지고 강퍅함까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는 가인이 행한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결국 어떻게 했을까요? 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세기 4:8 중)
얼마나 비극적인 사건입니까? 가인은 형이며 아벨은 동생입니다. 별다른 이유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는 우발적인 사건도 아닙니다. 의도적인 살인입니다. 즉 가인은 마음속에 분노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범죄를 계획하며 실행하려 했습니다. 그는 점차 죄의 노예가 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 한 것도 우발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는 준비했고, 계획을 짰습니다. 예수님을 적대하는 제사장들, 종교 지도자들과 야합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우발적이었습니다. 그의 배신은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위기가 닥쳐오자 두려웠습니다.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고, 이후 후회하며 통곡했습니다.
분노를 마음에 쌓아놓으면 어느 날엔 크게 터져 버립니다. 물론 분노를 피하거나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분노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미움 한 번 갖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마음속에 쌓아두는 건 다릅니다. 내 속에 부정적인 마음들을 쌓아두다 보면 의도성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죄악성이 나를 붙들게 되고, 거기에 내가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을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9절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세기 4:9 중)
가인은 이제 거짓말까지 합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노예가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상대를 더는 사랑할 수 없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완전히 파산시켜 버린 것입니다. 가인의 삶이 미움으로 가득 찬 삶으로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만약 가인이었다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했을까요?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면, 내가 드린 봉사와 헌금을 열납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마 가인은 속으로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드려서 피의 제사를 드렸고, 나는 땅의 곡식으로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 이렇습니다. 동물의 피로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셨고, 동물의 피가 아닌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고, 그래서 가인의 제물이 잘못된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적절한 해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속죄제를 드리는 구약 레위기 전통에서도 때로는 곡식을 드려도 괜찮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죄는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이지 제물의 종류에 따라 속죄 여부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입니까?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세기 4:4 중)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벨이 먼저 나오고 그의 제물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쓰여 있는 게 아니라 ‘아벨’이란 사람도 받으시고 그가 드리는 ‘제물’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5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창세기 4:5 중)
여기서도 가인이 먼저 등장하고 그의 제물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즉 하나님이 아벨을 기쁘게 받으셨고, 가인은 거절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아벨의 모습을 보셨고, 그의 마음을 살펴보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제물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게 아니라 가인이란 사람의 태도와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태도와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이었지만, 가인의 태도와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열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도 다음과 같이 둘의 예배를 평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4)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드렸지만, 가인은 믿음 없이 예배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형식뿐인 예배, 진심이 없는 예배, 제물만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서 있습니까?
가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가인의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3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오랫동안 반복된 삶의 역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예배도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위해 제물을 드리는 게 아니라 네 만족을 위해 드리고 있구나. 네가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경배하는 모습만 갖고 있구나. 너는 너 자신이 더 중요하고, 나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가인 속에 담긴 자기중심적인 교만을 보시고, 그의 제사를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입니다.
가인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가 거부당했을 때 자기를 돌아보며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역정 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마음에 가득 찬 분노를 발산하며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가 분노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동안 그는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 또한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형식화 되었습니다. 습관화 되고 화석화 되었습니다. 처음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마음, 곧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5년, 10년, 30년, 50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신앙생활하며 신앙이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축적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오늘,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왔는지, 그분 앞에 어떤 존재로 나왔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두렵고 떨림이 살아 있는지, 하나님만을 나의 하나님만으로 고백하며 예배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신 경고가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 땅만 밟는구나. 너희들이 주는 제물의 향내도 이제는 지겹구나. 너희들의 속은 어떤 마음이냐? 예배자로 서 있느냐? 너희들이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없이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드리는 예배가 진짜냐? 네가 드리는 교회의 섬김과 이웃 사랑이 진정한 것이냐? 네 직분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냐? 네가 드리는 헌금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냐?”
또한 우리가 드린 것을 받지 않겠다고 하실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이후 하나님이 가인에게 한 번 더 물으셨습니다. “네가 왜 화가 났느냐?” 그때 가인은 대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왜 안 받으셨습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차라리 이렇게 묻고 정확히 원인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되찾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내 중심적으로 예배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고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지 기억하며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완전한 출구입니다.
우리 마음에 불평과 분노가 생길 때, 제일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터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터뜨리지 말고, 아내나 남편에게 터뜨리지 말고, 자식에게 터뜨리지 말고, 하나님께 토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 가르쳐 주십시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예물을 원하는 게 아니라 너를 원한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너 자신이다.” 그때 우리의 불평이 변해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제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할까요? 어떻게 내 인생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영혼의 감사가 가득 찰 수 있을까요?”
저는 시편을 좋아하는데, 시편의 내용이 대부분 이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불평으로 시작되는 시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불평을 하나님께 터뜨리자 그것이 기도가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깊은 대화도 이루어집니다. 마음속 깊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결국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감사 찬양을 드리게 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큰 고통과 아픔 가운데서 분노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분노하지 않으셨고,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토해 내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하며, 하나님께 도전하고 항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시며,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분노가 있습니다. 미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쌓아두면 안됩니다. 쌓아두었다가 터지면 내가 망하고 이웃이 망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터뜨려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쏟아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때 말씀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내 영혼에 기쁨이 다시 솟아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분노가 있습니까? 그것이 나를 얽어매고 있습니까? 깨뜨려야 합니다.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과 평안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2018년 4월 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분노: 사랑의 파산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28장, 25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4:1~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올해 들어 창세기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창조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① 창조는 사랑의 시작 ②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③ 타락은 사랑의 배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분노: 사랑의 파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설교의 요약
성경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질문을 많이 받은 사람은 가인입니다. 2가지 질문인데,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질문인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냐?(6절)”, 다른 하나는 인간의 외면 세계에 관한 질문으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입니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났을까? 가인이 제물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이 드린 제물만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시했다는 분노에 가인은 사랑하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①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인가? ②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제물 때문인가? 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질문(6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경고를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7절)고 말씀하십니다. 죄는 가인/인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가인은 죄악에서 벗어날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사랑해야 할 동생에게 못된 짓을 행하였습니다. 죄에 붙잡힌 자의 모습입니다.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의도적인 살해 행위였습니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만약 가인이었다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야 했을까? 내가 드리는 예배, 섬김과 봉사, 헌금을 ‘별 볼일 없는 거다’고 무가치하게 버리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본문 4절 : 제물을 받기 전에 먼저 사람 이름이 나옵니다. 아벨을 받았고, 가인을 거절하셨습니다. 제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제물보다 아벨을 먼저 받으셨고, 가인을 거절하셨습니다. 제물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지만,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습니다(히11:4절).
그렇다면 가인의 문제는 무엇인가? 해결책이 없는가? 3절 : 「세월이 지난 후에…」 오랜 동안의 반복적인 삶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오랜 동안의 반복적인 삶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으로 멈추었습니다. 가인은 실제로 아담처럼 자기중심적인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며,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물이 거부당했을 때, 분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심정과 태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처럼 가슴에 분노를 쌓아두면 안 됩니다. 화난 심정을 하나님 앞에서 쏟아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분노가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분노 때문에 나도 미워지고, 남에게도 미움이 생깁니다. 분노의 마음을 기도의 마음으로 바꿔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분노를 가슴에 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속마음을 아시는 성령님께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내 안의 분노를 해결하십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헌신, 섬김과 봉사는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세요.
3. 우리의 분노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내 분노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분노의 마음이 기도의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분노와 미움의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제는 내 안에 가득한 분노의 마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터뜨리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총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