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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의 영, 하나됨의 영? – 성령과 악령 3 –

에베소서 4: 1 ~ 4

김지철 목사

2017.06.18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단어는 ‘살다’라는 동사와 ‘앎’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아는 존재가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라는 단어도 사용합니다. 한자어 ‘인간(人間)’에서 ‘사람 인(人)’자는 둘이 기대 있는 모양입니다. 즉 서로 기대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인간 공동체요, 인간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홀로 있는 모습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드셔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가정을 꾸리게 하셨고, 자녀를 낳아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세우셨으며, 형제‧자매간의 우애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가정을 만드셨고, 국가를 세우셨으며, 교회를 만드시고 공동체의 소중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도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에너지를 빼앗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긴장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먼저 상대방을 귀히 여기고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공동체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부름 받은 자에게는 ‘저항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에 거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영성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중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에베소서 4:1)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전반부 구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현재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자신을 표현합니다. 아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세력에 부딪힌 것입니다. 만약 로마 권력에 동화되었다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진리인 복음을 들고 현실 세력에 저항하며 부딪쳐 나갔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겐 ‘저항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영성입니다. 저항의 영성이 없으면 우리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위기만 와도 넘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분을 저항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공의에 저항한다면 그것은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저항하면 그것은 거짓 저항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저항의 영성이란 불의, 거짓,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저항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때 저항의 영성은 생명을 살리는 영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저항의 영성을 위해서는 분별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잘못된 저항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발견됩니다. 그들은 분열되었습니다. 진리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께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피조물이 거역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에게는 분열 증세가 나타납니다. 부부가 서로를 탓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인이 아벨의 제사를 보고 반성한 게 아니라 도리어 시기와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은 이를 죄의 양상이며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력을 공동체와 백성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어떻게 무너뜨릴까’ 하는 데에 모든 권력을 이용했습니다. 그렇게 권력을 오용하다 그는 자기 삶을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저항하는 게 올바른 저항의 영성일까요? 대표적 인물로 모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 거대 세력이었던 애굽의 정치 세력을 향해 저항 운동을 펼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저항 운동도 아니었고, 민족 저항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속에 통분함을 허락하셨습니다. “내 민족이 노예로 사는 것이 마땅하냐? 내가 저들의 소리를 듣고 있다. 저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이 백성에게 그대로 성취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갈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분하시는 마음을 자기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고, 용기를 갖고 출애굽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변화는 악에 대한 저항, 불의에 대한 저항, 사탄에 대한 저항,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됩니다. 그때 진리와 생명의 길에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 민족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해 결혼하게 되면, 그 안에는 엄청난 저항의 결단이 생깁니다. 내가 내 아내만을, 남편만을 사랑하겠다는, 그리고 내게 부딪히는 수많은 유혹과 미혹에 저항하겠다는 저항의식이 생깁니다.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결혼 서약이기도 합니다. 결혼 후에도 이 남자, 저 여자를 만나고 싶다면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 순간 결혼생활이 지옥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성숙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항의 영성을 갖는다는 건 인간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분별력’도 필요합니다. 또 잘못된 것에 저항하고 옳은 것을 용납하기 위한 ‘용기’도 필요합니다. 불의에 “아니오!”라고 하지 못해 우리 삶이 뒤죽박죽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항의 영성을 갖기 위해서는 분별력과 용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희망의 영성’이 있어야 저항의 영성도 가능합니다.

두 번째 영성은 ‘희망의 영성’입니다. 이 영성이 있을 때 저항의 영성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4:4)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출애굽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기 위해 출애굽 했습니다.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자가 되기 위해 애굽을 탈출한 것입니다. 억압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참된 예배자로 거듭나기 위해 출애굽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현실보다 더 큰 비전과 꿈이 있어야 즉, 희망과 소망의 영성이 있어야 저항의 영성도 가능해집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는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의 위기와 위험을 목격하는 현실주의자면서 동시에 그것보다 더 큰 비전을 품는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도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에는 궁극적인 낙관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현실의 비참성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어느 종교보다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늘 고난을 뛰어넘는 희망과 소망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고난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게 교회입니다. 어둠을 뚫는 힘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교회야말로 희망의 공동체요, 저항의 영성을 지닌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 됨의 영성’을 추구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영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됨의 영성’, 즉 일치와 통합의 영성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위대하심에 초청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에베소서 4장 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6)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시면서 만물 속에 거하시고, 또 만물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이 땅의 새로운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생명 공동체이기에, 그 안에는 아무런 차별과 구별도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병든 자든 건강한 자든, 어린이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함께 만나며 소통하는 자리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사랑의 공동체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기 때문에 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하나 됨의 공동체로 우리가 초청되었습니다. 이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받으면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 통합과 하나 됨의 영성을 누리게 됩니다. 동시에 이는 저항과 희망의 영성을 품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북한과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기도하는 달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을 우리 교회는 북한선교주간으로 삼았습니다. 내일부터는 교회에서 통일한국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특별히 북한과 그 땅의 백성을 기억하며 기도하길 원합니다.
최근 수키 김이라는 한인 2세 미국인 작가의 『평양의 영어 선생님』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2011년에 평양 과학기술대학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지내면서 체험한 이야기를 책에 담았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가슴 먹먹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당시 교사 생활을 시작하기 전 받았던 주의사항들이라고 합니다. 그중 몇 가지만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누구에게도 접근해서 대화를 시작하지 말라. 해야만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 감시원과 운전사가 항상 당신과 동행할 것이다.
• 촬영한 사진이나 동영상은 감시원이 검토할 것이다.
• 외부 사진을 찍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 식사할 때 기도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모으거나 눈을 감지 말라.
• 눈을 뜨고 기도하라.
• 종교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서로를 부를 때 종교적인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
• 학생이 다가와 성경을 요청하면 매우 공손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라. 이런 요청들은 당신을 떠보기 위한 가능성이 항상 있다. 지난 학기 한 교사가 감시원의 속임수에 넘어가 출국하도록 요구 받았던 사례도 있다.

그밖에도 그녀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나눠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지독한 무지함에 나는 놀랐다. 한 번은 한 학생이 나에게 세계 모든 사람이 조선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선말이 너무 우월해서 영국, 중국 그리고 미국에서도 조선말을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락앤롤(rock and roll) 부르기를 좋아한다고 무심결에 말했다가 얼굴이 빨개져 누가 듣지는 않았는지 재빨리 확인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잽싸게 주위를 살펴보는 누군가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늘 서로를 의심하였다. 경계선 주위로 끊임없이 돌면서 이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보니 진이 빠졌다. 위대한 수령에 관해 배워온 것들이 모두 가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그들을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그 순간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유용한 사치품이었다.”

그녀는 학생들과 대화하길 원했지만 다 말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슴 아픈 마음을 글로 써 내려갔습니다. 우리도 분단 된 조국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한반도의 통일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금강산도 가 보고 싶습니다.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가는 게 아니라 북한을 통해 그 땅을 밟고 싶습니다. 원산 해수욕장에서 수영도 해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자유와 민주, 평화로 이루어지는 정치 체제의 통일도 경험하고 싶습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진정한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그저 낙관할 수만도 없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또 주체사상에서 수령론으로 나가게 되면서는 체제 비판적인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령에 대한 찬양 외에는 어떤 문제 제기나 비판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입장을 표한다면 반역자로 낙인찍힙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시편을 읽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수없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없습니까? 인간을 하나님 위에 앉혀 놓고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저 북녘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분하는 마음이 들어 눈물도 납니다. 최근 들어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마저도 못 부르게 한다고 합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북한 체제도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세계를 위협합니다. 그러니 세계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독재자가 밉다고 어찌 저 북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정치체제가 싫다고 어떻게 북한을 위한 기도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통일까지 더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매달립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 후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지금 우리의 분단은 벌써 72년째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 중 2~3절 말씀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2~3)

현재 우리나라에 탈북민이 3만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우리 국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해야 할 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 사는 것을 축복으로 느끼도록 우리가 도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저 북녘 땅에 가서 선교의 선봉장으로 나설 것이라는 기대 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그들을 환대하며 사랑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 통일을 기다리면서도 먼저 사람의 통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땅에 온 탈북민을 따뜻하게 대접하면서, 북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한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귀한 일들에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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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 1 ~ 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란 단어는 ‘살다’라는 동사와 ‘앎’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어떻게 살아갈지를 아는 존재가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이라는 단어도 사용합니다. 한자어 ‘인간(人間)’에서 ‘사람 인(人)’자는 둘이 기대 있는 모양입니다. 즉 서로 기대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인간 공동체요, 인간 세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고 홀로 있는 모습이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드셔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가정을 꾸리게 하셨고, 자녀를 낳아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세우셨으며, 형제‧자매간의 우애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가정을 만드셨고, 국가를 세우셨으며, 교회를 만드시고 공동체의 소중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도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솟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에너지를 빼앗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긴장되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먼저 상대방을 귀히 여기고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공동체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부름 받은 자에게는 ‘저항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에 거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영성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중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에베소서 4:1)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데, 그 부르심에 합당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전반부 구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현재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 안에서 갇힌 내가’라고 자신을 표현합니다. 아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다 로마 제국의 정치적 세력에 부딪힌 것입니다. 만약 로마 권력에 동화되었다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진리인 복음을 들고 현실 세력에 저항하며 부딪쳐 나갔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겐 ‘저항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첫 번째 영성입니다. 저항의 영성이 없으면 우리는 금방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위기만 와도 넘어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분을 저항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공의에 저항한다면 그것은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저항하면 그것은 거짓 저항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저항의 영성이란 불의, 거짓,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저항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때 저항의 영성은 생명을 살리는 영성이 될 수 있습니다.

올바른 저항의 영성을 위해서는 분별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잘못된 저항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발견됩니다. 그들은 분열되었습니다. 진리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께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피조물이 거역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에게는 분열 증세가 나타납니다. 부부가 서로를 탓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가인이 아벨의 제사를 보고 반성한 게 아니라 도리어 시기와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은 이를 죄의 양상이며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권력을 공동체와 백성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어떻게 무너뜨릴까’ 하는 데에 모든 권력을 이용했습니다. 그렇게 권력을 오용하다 그는 자기 삶을 마치게 됩니다.
여러분, 어떻게 저항하는 게 올바른 저항의 영성일까요? 대표적 인물로 모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 거대 세력이었던 애굽의 정치 세력을 향해 저항 운동을 펼칩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저항 운동도 아니었고, 민족 저항 운동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속에 통분함을 허락하셨습니다. “내 민족이 노예로 사는 것이 마땅하냐? 내가 저들의 소리를 듣고 있다. 저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이 백성에게 그대로 성취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갈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분하시는 마음을 자기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되었고, 용기를 갖고 출애굽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변화는 악에 대한 저항, 불의에 대한 저항, 사탄에 대한 저항,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됩니다. 그때 진리와 생명의 길에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 민족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가 사랑해 결혼하게 되면, 그 안에는 엄청난 저항의 결단이 생깁니다. 내가 내 아내만을, 남편만을 사랑하겠다는, 그리고 내게 부딪히는 수많은 유혹과 미혹에 저항하겠다는 저항의식이 생깁니다.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결혼 서약이기도 합니다. 결혼 후에도 이 남자, 저 여자를 만나고 싶다면 결혼하면 안 됩니다. 그 순간 결혼생활이 지옥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성숙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항의 영성을 갖는다는 건 인간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분별력’도 필요합니다. 또 잘못된 것에 저항하고 옳은 것을 용납하기 위한 ‘용기’도 필요합니다. 불의에 “아니오!”라고 하지 못해 우리 삶이 뒤죽박죽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항의 영성을 갖기 위해서는 분별력과 용기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희망의 영성’이 있어야 저항의 영성도 가능합니다.

두 번째 영성은 ‘희망의 영성’입니다. 이 영성이 있을 때 저항의 영성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4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4:4)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려면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고 출애굽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기 위해 출애굽 했습니다.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자가 되기 위해 애굽을 탈출한 것입니다. 억압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참된 예배자로 거듭나기 위해 출애굽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현실보다 더 큰 비전과 꿈이 있어야 즉, 희망과 소망의 영성이 있어야 저항의 영성도 가능해집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건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는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는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의 위기와 위험을 목격하는 현실주의자면서 동시에 그것보다 더 큰 비전을 품는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도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앙에는 궁극적인 낙관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현실의 비참성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어느 종교보다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늘 고난을 뛰어넘는 희망과 소망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고난 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믿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게 교회입니다. 어둠을 뚫는 힘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교회야말로 희망의 공동체요, 저항의 영성을 지닌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 됨의 영성’을 추구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영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됨의 영성’, 즉 일치와 통합의 영성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위대하심에 초청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에베소서 4장 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6)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시면서 만물 속에 거하시고, 또 만물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이 땅의 새로운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생명 공동체이기에, 그 안에는 아무런 차별과 구별도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병든 자든 건강한 자든, 어린이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함께 만나며 소통하는 자리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사랑의 공동체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기 때문에 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이 하나 됨의 공동체로 우리가 초청되었습니다. 이 안에서 성령의 역사를 받으면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 통합과 하나 됨의 영성을 누리게 됩니다. 동시에 이는 저항과 희망의 영성을 품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북한과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기도하는 달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을 우리 교회는 북한선교주간으로 삼았습니다. 내일부터는 교회에서 통일한국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특별히 북한과 그 땅의 백성을 기억하며 기도하길 원합니다.
최근 수키 김이라는 한인 2세 미국인 작가의 『평양의 영어 선생님』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2011년에 평양 과학기술대학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지내면서 체험한 이야기를 책에 담았습니다.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가슴 먹먹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당시 교사 생활을 시작하기 전 받았던 주의사항들이라고 합니다. 그중 몇 가지만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 누구에게도 접근해서 대화를 시작하지 말라. 해야만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 감시원과 운전사가 항상 당신과 동행할 것이다.
• 촬영한 사진이나 동영상은 감시원이 검토할 것이다.
• 외부 사진을 찍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 식사할 때 기도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모으거나 눈을 감지 말라.
• 눈을 뜨고 기도하라.
• 종교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서로를 부를 때 종교적인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
• 학생이 다가와 성경을 요청하면 매우 공손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라. 이런 요청들은 당신을 떠보기 위한 가능성이 항상 있다. 지난 학기 한 교사가 감시원의 속임수에 넘어가 출국하도록 요구 받았던 사례도 있다.

그밖에도 그녀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나눠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지독한 무지함에 나는 놀랐다. 한 번은 한 학생이 나에게 세계 모든 사람이 조선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선말이 너무 우월해서 영국, 중국 그리고 미국에서도 조선말을 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락앤롤(rock and roll) 부르기를 좋아한다고 무심결에 말했다가 얼굴이 빨개져 누가 듣지는 않았는지 재빨리 확인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잽싸게 주위를 살펴보는 누군가를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늘 서로를 의심하였다. 경계선 주위로 끊임없이 돌면서 이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보니 진이 빠졌다. 위대한 수령에 관해 배워온 것들이 모두 가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그들을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인가? 그 순간 이후 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자유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나 유용한 사치품이었다.”

그녀는 학생들과 대화하길 원했지만 다 말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슴 아픈 마음을 글로 써 내려갔습니다. 우리도 분단 된 조국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한반도의 통일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금강산도 가 보고 싶습니다.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가는 게 아니라 북한을 통해 그 땅을 밟고 싶습니다. 원산 해수욕장에서 수영도 해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자유와 민주, 평화로 이루어지는 정치 체제의 통일도 경험하고 싶습니다.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진정한 새로운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그저 낙관할 수만도 없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또 주체사상에서 수령론으로 나가게 되면서는 체제 비판적인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수령에 대한 찬양 외에는 어떤 문제 제기나 비판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만약 부정적인 입장을 표한다면 반역자로 낙인찍힙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지 않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시편을 읽어 보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수없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없습니까? 인간을 하나님 위에 앉혀 놓고 아무 말도 못하게 하는 저 북녘의 현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분하는 마음이 들어 눈물도 납니다. 최근 들어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마저도 못 부르게 한다고 합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북한 체제도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세계를 위협합니다. 그러니 세계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독재자가 밉다고 어찌 저 북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정치체제가 싫다고 어떻게 북한을 위한 기도를 멈출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통일까지 더 많은 시간과 수고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매달립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 후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지금 우리의 분단은 벌써 72년째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 중 2~3절 말씀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2~3)

현재 우리나라에 탈북민이 3만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우리 국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며 함께해야 할 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 사는 것을 축복으로 느끼도록 우리가 도아야 합니다. 그들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저 북녘 땅에 가서 선교의 선봉장으로 나설 것이라는 기대 말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그들을 환대하며 사랑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 통일을 기다리면서도 먼저 사람의 통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 땅에 온 탈북민을 따뜻하게 대접하면서, 북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온전한 평화 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귀한 일들에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6월 1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분열의 영, 하나됨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95, 183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엡 4:2-4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사람’이란 말은 ‘살다’와 ‘암’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살아갈 줄 아는 존재를 뜻합니다. 한자어 ‘인간’은 사람 둘이 서로 기댄 사이(간),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시며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홀로 단독자이지만 동시에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공동체적입니다.

 

설교의 요약

진정한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어떤 영적자세가 필요한가요? 세 가지 영성이 필요합니다.

첫째, 저항의 영성입니다(1절).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분열의 영성을 지녔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탓합니다. 가인은 시기심과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울은 왕의 권력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다윗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다 세월을 낭비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분열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저항은 하나됨의 시작이었습니다. 애굽이라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탈출하는 용기를 발휘하고, 거대한 정치세력을 향해 저항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과 미혹에 저항하는 영성을 지녀야 가정이 유지됩니다. 음란하고 불순한 세력들이 가정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해야 합니다. 내 가정을 보호하는 것은 ‘거절’하는데 있습니다.

둘째, 꿈을 가진 소망의 영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주의자이자 동시에 이상주의자입니다. 현실의 위기와 위험을 목격하지만, 그보다 더 큰 비전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상주의자여야 합니다(4절). 그렇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강조하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더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통합의 영성입니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입니다(6절). 여기에는 인종의 차별도, 남녀의 차별도, 나이의 차별도 없습니다. 병든 자들도 건강한 자들도 바리새인과 세리들도 함께 모였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함께합니다. 오직 한 가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북한선교의 달입니다. 남과 북이 분단 된지 벌써 72년째입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주체사상으로, 다시 수령론으로 타락하면서 썩은 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수령에 대해선 찬양 외에는 어떤 말로 문제를 제기해도 반역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가끔은 투정하듯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데, 인간을 하나님 위에 앉히려고 한 북한과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가가 우리 통일의 장애물입니다. 최근에 들어서, 저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부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북한 체제가 온전할 수 없습니다. 북한 핵 미사일 위협을 통해서 세계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 북한의 정치체제가 싫다고 북한을 위해서 기도를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됨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정성을 다하고, 오래 참고, 사랑가운데 노력하고 애써야 합니다(3절). 이 땅에는 3만 명 이상의 탈북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국민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기대합니다.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북한 선교의 선봉장으로 이 길을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나누기

1. 저항의 영성, 소망의 영성, 통합의 영성, 지금 내 삶에 가장 필요한 영성은 어떤 영성인가요? 그 이유와 다짐을 나눠 봅시다.

2. 젊은 세대의 상당수가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해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나요? 통일을 염원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3.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조국을 주시고, 주님 주신 믿음을 이 땅에 허락하셨습니다.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때에 이 땅에 자유, 민주, 평화 통일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면서 사랑하면서 준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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