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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의 불안 장애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공황장애로 진료 받은 사람의 수가 2014년에 9만8천 명이었는데, 2년 후인 2016년에는 12만7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연령대별로는 30대가 18.4%, 40대가 25.4%, 50대가 21.7%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전체 공황장애 비율 가운데서도 65.5%를 차지합니다. 또한 가끔씩이라도 공황장애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까지 더하면, 50% 이상이 이러한 증상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됩니다.
공황장애란 무엇입니까? 뚜렷한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심리적인 압박감입니다. 갑자기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장애입니다. 이러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가슴이 뛰고 답답해지며 호흡곤란을 느낀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지럼증과 곧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고 호소합니다. 문제는 한두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증상이 지속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불안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불안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 불안을 느낀다는 것, 이건 건강하다는 뜻이구나. 내가 살아있다는 표증이구나. 내가 변화되고 성숙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불안감 때문에 삶을 준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이유도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이유도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줍니다. 이를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인류 문명의 탄생 또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이 동력이 되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불안과 두려움이 없다는 건 우리의 정신세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손으로 뜨거운 물체를 만지면 곧장 손을 떼야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손을 델 수밖에 없습니다. 신경체계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신세계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 불안과 두려움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면 괜찮지만, 쉴 새 없이 불안이 찾아와 압박감을 주면 문제가 됩니다. 아침에도 불안했는데 점심에도 저녁때도, 잠이 들 때도 불안하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소를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청결함에 집착하는 사람은 세균 박멸 약품을 자꾸 뿌리며 닦습니다. 밀폐된 공간이 두려운 사람들은 아예 그런 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 자체를 꺼립니다. 그럼 이렇게 피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불안을 넘어서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안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먼저 불안과 두려움 자체를 깨뜨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불안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평안이 내 안의 불안을 덮으면 불안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불안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중요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평강을 주기를 원하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샬롬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의 아론의 축복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축복이 선언됩니다. 민수기 6장 26절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수기 6:26)
이렇게 우리 자신을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선언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불안에 떨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평강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바로 이 선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9)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행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동행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선언입니다.
사탄의 전략이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평강의 하나님을 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불안을 심어줍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가득 차게 하려는 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물론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불안보다 더 큰 평강이 있으면 됩니다. 불안을 넘어서게 하는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불안이 차차 사라집니다. 문제보다 해답이 더 크면 문제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법입니다.
제게도 위로가 되는 구절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이 세상의 거대한 세력을 다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세력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하며, 승리의 개가를 부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죽음도, 어둠도, 그 어떤 거대한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과 두려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보다 더 큰 해답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함으로 어둠의 세력과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불안을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종종 근심하며 두려워합니까? 무엇보다 준비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한 대학생이 내일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험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집회도 참석했고, 철야도 했고, 새벽기도까지 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했지만 시험 준비를 하지 못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시험 당일이 되어 시험 문제를 보니 아는 문제가 없습니다. 고민하다 이렇게 답을 씁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 아십니다.” 이 답안지를 본 교수가 어떻게 채점을 할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써 줍니다. “자네는 0점, 하나님은 100점.” 여러분, 이처럼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법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 해도 공부하지 않으면, 아는 문제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30대의 한 청년이 세계 여행을 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 청년은 기도하고 말씀도 읽으며 여행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불안해집니다.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계속 기도를 하는데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다. “얘야, 네가 불안한 이유는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란다. 여행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얼른 책방에서 가서 여행할 곳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겠니?”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업할 때도, 투자를 할 때도, 새로운 선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려는 일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으면 불안한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거룩한 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맡겨진 일들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가정주부라면 열심히 살림하는 게 거룩한 땀을 흘리는 일입니다. 직장인이라면 회사에서 흘리는 땀이 거룩한 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과 발을 주셨습니다. 움직이며 일하라고 주신 손발입니다. 우리에게 머리와 이성도 주셨습니다. 생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비전과 꿈도 주셨습니다. 용기를 갖고 도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안감이 있다면, 그에 대해 준비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 해도 수고와 땀 흘림에 면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가는 시간 때문에 불안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 세월이 내 삶을 좀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점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어느 순간,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는 건 아닐까?’ 구약의 전도자가 바로 이런 불안과 허무감을 느꼈습니다. 전도서 2장 16절에 보면, 전도자가 삶의 허무성을 토로하며 고뇌 섞인 토로를 합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전도서 2:16 중)
세월이 흐르면 지혜자나 미련한 자, 부자나 가난한 자, 권력자나 일반인 모두가 똑같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한탄입니다. 누구도 기억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무엇입니까?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입니다. 나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질 것이란 사실이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불안의 용매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 양옆에 달렸던 강도가 있습니다. 그중 한 강도와 예수님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2~43)
이 강도가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저갱에 떨어져도 할 말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자기 믿음을 표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끝이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 이름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에 우리 자신을 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불안감도 있습니다. 현실에서 오는 무력감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바뀌지 않는 현실 때문에 불평하면서 불안해합니다. 현실을 거부할 뿐 수용하지 못합니다. ‘왜 내 키가 이것밖에 안 됩니까? 내 외모가 왜 이렇습니까? 내 체형은 왜 이렇습니까? 우리 부모는 왜 이렇습니까?’ 이렇게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부모 탓하고 환경 탓하면서 무력하게 살아갑니다. ‘왜 나는 흙 수저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까?’ 하고 탄식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너는 너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을 소중히 여기라고,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오셨습니다. 나의 기질, 성품, 인격 그대로를 소중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자존감을 갖고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구약의 요셉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10대 때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훈련을 합니다. 종살이 하면서 한 가정의 관리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누명을 쓰고 옥살이도 합니다. 그러나 불평과 실망, 낙담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을 팔아 넘겼던 형들과도 재회할 때,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을 남깁니다.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하나님이 당신들의 악한 행위를 선하게 바꾸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요셉의 기다림도 있었습니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의 거룩한 땀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셨을 뿐만 아니라 요셉을 통해 백성의 생명까지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평강의 특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 갈등과 분쟁이 생겼습니다. 우상숭배 때 사용되었던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의견이 갈린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예수님의 생각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입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도 거룩하게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배로 들어가 소화되어 뒤로 나가면 그뿐이다. 다만 사람 마음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거나 더럽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감사히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러므로 먹는 문제로 사람을 비방하거나 실망시키지 말라고, 그리고 이보다 더 큰 기준이 있는데 마음에 평강과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표지라고, 그 기준에 따라 행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 17~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로마서 14:17~18)
마음속에 의로움과 하나님의 샬롬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에게 칭찬 받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안에서 우리가 이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삶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정신과 영혼이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불안이 내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을 좀 먹고 망가뜨려서도 안 됩니다. 그럴 땐 불안을 과감히 거절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다. 내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권리요 축복입니다.
지도자가 되면 지도자답게 행해야 합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면 가장답게, 남편이면 남편답게, 아내면 아내답게,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어머니면 어머니답게 보여야 합니다. 직장에서 CEO라면 CEO답게 행동하고 말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직분자면 직분자답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 받고 존중 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며 권리입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음을 알지만, 그에 대항하고 이겨나가는 게 참 용기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이 주신 평강에 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의 두려움과 불안도 사라집니다.
여러분, 평강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네게 평강을 준다.” 이때 우리는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하시며, 우리를 세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평강의 삶을 만들어 나가길 바랍니다. 평강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샬롬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4: 15 ~ 18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현대인들의 불안 장애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공황장애로 진료 받은 사람의 수가 2014년에 9만8천 명이었는데, 2년 후인 2016년에는 12만7천 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연령대별로는 30대가 18.4%, 40대가 25.4%, 50대가 21.7%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전체 공황장애 비율 가운데서도 65.5%를 차지합니다. 또한 가끔씩이라도 공황장애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까지 더하면, 50% 이상이 이러한 증상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됩니다.
공황장애란 무엇입니까? 뚜렷한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심리적인 압박감입니다. 갑자기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장애입니다. 이러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은 가슴이 뛰고 답답해지며 호흡곤란을 느낀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지럼증과 곧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고 호소합니다. 문제는 한두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증상이 지속된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불안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불안과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 불안을 느낀다는 것, 이건 건강하다는 뜻이구나. 내가 살아있다는 표증이구나. 내가 변화되고 성숙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불안감 때문에 삶을 준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이유도 불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이유도 불안감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줍니다. 이를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인류 문명의 탄생 또한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이 동력이 되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불안과 두려움이 없다는 건 우리의 정신세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손으로 뜨거운 물체를 만지면 곧장 손을 떼야 합니다. 그대로 놔두면 손을 델 수밖에 없습니다. 신경체계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정신세계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 불안과 두려움이 잠시 왔다가 사라지면 괜찮지만, 쉴 새 없이 불안이 찾아와 압박감을 주면 문제가 됩니다. 아침에도 불안했는데 점심에도 저녁때도, 잠이 들 때도 불안하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요소를 없애려고 애를 씁니다. 청결함에 집착하는 사람은 세균 박멸 약품을 자꾸 뿌리며 닦습니다. 밀폐된 공간이 두려운 사람들은 아예 그런 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 자체를 꺼립니다. 그럼 이렇게 피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불안을 넘어서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불안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먼저 불안과 두려움 자체를 깨뜨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불안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평안이 내 안의 불안을 덮으면 불안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불안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중요한 선언을 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과 평강을 주기를 원하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샬롬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의 아론의 축복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축복이 선언됩니다. 민수기 6장 26절입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수기 6:26)
이렇게 우리 자신을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선언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불안에 떨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평강을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바로 이 선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9)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행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동행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선언입니다.
사탄의 전략이 무엇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평강의 하나님을 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불안을 심어줍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을 가득 차게 하려는 게 사탄의 전략입니다.
물론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불안보다 더 큰 평강이 있으면 됩니다. 불안을 넘어서게 하는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불안이 차차 사라집니다. 문제보다 해답이 더 크면 문제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법입니다.
제게도 위로가 되는 구절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이 세상의 거대한 세력을 다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세력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하며, 승리의 개가를 부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3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죽음도, 어둠도, 그 어떤 거대한 세력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과 두려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보다 더 큰 해답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함으로 어둠의 세력과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불안을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종종 근심하며 두려워합니까? 무엇보다 준비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한 대학생이 내일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험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집회도 참석했고, 철야도 했고, 새벽기도까지 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했지만 시험 준비를 하지 못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시험 당일이 되어 시험 문제를 보니 아는 문제가 없습니다. 고민하다 이렇게 답을 씁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 아십니다.” 이 답안지를 본 교수가 어떻게 채점을 할지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써 줍니다. “자네는 0점, 하나님은 100점.” 여러분, 이처럼 준비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법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 해도 공부하지 않으면, 아는 문제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30대의 한 청년이 세계 여행을 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 청년은 기도하고 말씀도 읽으며 여행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불안해집니다. 불안감이 가시지 않아 계속 기도를 하는데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다. “얘야, 네가 불안한 이유는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란다. 여행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얼른 책방에서 가서 여행할 곳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겠니?”
학교와 전공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할 때도 그렇습니다. 사업할 때도, 투자를 할 때도, 새로운 선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려는 일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으면 불안한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거룩한 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맡겨진 일들을 성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가정주부라면 열심히 살림하는 게 거룩한 땀을 흘리는 일입니다. 직장인이라면 회사에서 흘리는 땀이 거룩한 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과 발을 주셨습니다. 움직이며 일하라고 주신 손발입니다. 우리에게 머리와 이성도 주셨습니다. 생각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비전과 꿈도 주셨습니다. 용기를 갖고 도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안감이 있다면, 그에 대해 준비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라 해도 수고와 땀 흘림에 면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나가는 시간 때문에 불안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 세월이 내 삶을 좀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점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어느 순간,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도 없는 건 아닐까?’ 구약의 전도자가 바로 이런 불안과 허무감을 느꼈습니다. 전도서 2장 16절에 보면, 전도자가 삶의 허무성을 토로하며 고뇌 섞인 토로를 합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전도서 2:16 중)
세월이 흐르면 지혜자나 미련한 자, 부자나 가난한 자, 권력자나 일반인 모두가 똑같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한탄입니다. 누구도 기억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게 무엇입니까?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입니다. 나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질 것이란 사실이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불안의 용매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 양옆에 달렸던 강도가 있습니다. 그중 한 강도와 예수님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십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23:42~43)
이 강도가 예수님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저갱에 떨어져도 할 말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며 자기 믿음을 표출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끝이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 이름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움에 우리 자신을 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불안감도 있습니다. 현실에서 오는 무력감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바뀌지 않는 현실 때문에 불평하면서 불안해합니다. 현실을 거부할 뿐 수용하지 못합니다. ‘왜 내 키가 이것밖에 안 됩니까? 내 외모가 왜 이렇습니까? 내 체형은 왜 이렇습니까? 우리 부모는 왜 이렇습니까?’ 이렇게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부모 탓하고 환경 탓하면서 무력하게 살아갑니다. ‘왜 나는 흙 수저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까?’ 하고 탄식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너는 너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을 소중히 여기라고,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시며 찾아오셨습니다. 나의 기질, 성품, 인격 그대로를 소중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자존감을 갖고 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구약의 요셉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10대 때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에서 모든 것을 수용하는 훈련을 합니다. 종살이 하면서 한 가정의 관리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누명을 쓰고 옥살이도 합니다. 그러나 불평과 실망, 낙담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해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을 팔아 넘겼던 형들과도 재회할 때,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을 남깁니다. 창세기 50장 20절 말씀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세기 50:20)
하나님이 당신들의 악한 행위를 선하게 바꾸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요셉의 기다림도 있었습니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의 거룩한 땀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셨을 뿐만 아니라 요셉을 통해 백성의 생명까지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평강의 특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당시 초대교회에 갈등과 분쟁이 생겼습니다. 우상숭배 때 사용되었던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한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의견이 갈린 것입니다. 이때 바울은 예수님의 생각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입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도 거룩하게도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배로 들어가 소화되어 뒤로 나가면 그뿐이다. 다만 사람 마음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거나 더럽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감사히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러므로 먹는 문제로 사람을 비방하거나 실망시키지 말라고, 그리고 이보다 더 큰 기준이 있는데 마음에 평강과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표지라고, 그 기준에 따라 행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로마서 14장 17~1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로마서 14:17~18)
마음속에 의로움과 하나님의 샬롬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에게 칭찬 받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 안에서 우리가 이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삶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정신과 영혼이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불안이 내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을 좀 먹고 망가뜨려서도 안 됩니다. 그럴 땐 불안을 과감히 거절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나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다. 내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권리요 축복입니다.
지도자가 되면 지도자답게 행해야 합니다. 한 집안의 가장이면 가장답게, 남편이면 남편답게, 아내면 아내답게,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어머니면 어머니답게 보여야 합니다. 직장에서 CEO라면 CEO답게 행동하고 말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직분자면 직분자답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 받고 존중 받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이며 권리입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두려움이 있음을 알지만, 그에 대항하고 이겨나가는 게 참 용기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이 주신 평강에 거한다면, 그것이 바로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의 두려움과 불안도 사라집니다.
여러분, 평강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네게 평강을 준다.” 이때 우리는 “아멘.”이라고 화답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하시며, 우리를 세상으로 초대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평강의 삶을 만들어 나가길 바랍니다. 평강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샬롬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7월 1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불안의 영, 평안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28, 41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롬 14:15-18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공황장애란 뭘까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사람에게 찾아오는 심리적인 압박감입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의하면 공황장애로 진료 받은 사람의 숫자가 2014년에 9만8천명, 2년 후인 2016년에는 12만7천명으로 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그러나 이러한 불안함은 예수님 안에서 또한 살아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걸 좀 더 거창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인류문명을 만들어냈던 그 삶의 자리를 보면 인간의 불안감과 인간의 두려움이 그 동기부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안감이 쉴 새 없이 나에게 압박감을 줍니다. 만성적인 불안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란 뭘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불안의 위기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며(민6:26), 동행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빌4:9) 그렇기에 사탄의 전략은 평강의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안을 심어서 그것이 두려움이 되고 이것은 다시 불안으로 악순환 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승리의 노래로 우리를 격려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 문제 자체를 보지 맙시다. 항상 문제보다 더 큰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열망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어둠의 세력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준비 되지 않았을 때 불안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땀‘이라고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내 노력과 수고와 땀 흘림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해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체에게 우리의 이름을 적어놓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들. 그저 무저갱에 떨어져도 그뿐인 생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에게 자기의 믿음을 표시했습니다. ‘나를 좀 기억 좀 해달라고’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불안과 두려움 속에 나를 팽개치지 마세요.
또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즉,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불평하면서 불안해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다는 것은 뭘까요? 너는 너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나의 나됨을 소중히 여기도록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리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내 기질, 내 성품, 내가 갖고 있는 인격 그대로 소중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신 분이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자존감을 가지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의 질곡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요셉은 불안을 극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용기가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 두려움이 큰 것을 알지만 대항하고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로써 하나님이 주신 이 샬롬을 가슴에 품고 샬롬을 가진 자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쫒겨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덮치려고 했던 불안이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나누기
1. 두려움에 휘둘려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나눠 봅시다.
2. 내가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용기를 내어 극복한 신앙의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3. 주위에 공항장애 등, 불안을 이유로 힘들어 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함께합시다.
마무리 기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축복을 주셨사오니 이제는 자녀답게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셨사오니 평강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 딸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