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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함의 영, 담대함의 영? – 성령과 악령 20 –

스가랴 4: 1 ~ 6

김지철 목사

2017.11.05

우리는 비겁함과 담대함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비겁함의 영, 담대함의 영?’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비겁한 사람입니까, 담대한 사람입니까? 스스로를 돌아볼 때 자신이 비겁합니까, 아니면 담대합니까? 아침에는 용기가 있다가도 저녁이 되면 비겁한 사람으로 돌변합니까? 야누스의 얼굴처럼 앞뒤가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비겁한 사람에서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혹시 100% 용기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100% 비겁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사실 보통 사람은 50%의 용기와 50%의 비겁함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과 마음이 수시로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용기가 49%, 비겁함이 51%라면, 우리는 매일 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2%의 비겁함을 담대함으로 바꾸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2%의 비겁함을 용기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서움과 두려움, 겁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51%의 용기를 가지면 흔들리다가도 용기 있는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반복되면서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비겁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비겁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위기에 처했을 때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길 주저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험에 직면하기 보다는 도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3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한복음 12:43)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즐거워한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들 역시 비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위기가 닥쳐오자 스승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또 ‘도망쳤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까지 내놓겠다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누군가를 거절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의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약 70여 년이 흐른 후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루살렘에 귀향합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했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지. 이제 다시 그분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성전을 건축하자.’ 그렇게 힘을 내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항상 선한 일에는 방해 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도 성전 건축하는 데 동참하자. 우리에게도 기회를 달라!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면 너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라며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보다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타민족과 결혼하여 신앙적 정체성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 스룹바벨과 종교 지도자 예수아가 그들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 모습이 오늘 본문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에스라 4:3 중)

다른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요청에 진정성이 있는지, 혹시 흑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실제로 요청을 거절한 뒤 반응을 보면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청을 거절당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그래. 너희들이 잘 짓는지 지켜보겠다.”라고 순순히 반응하지 않습니다. 거절당하자마자 페르시아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계획을 가로 막으려 합니다. 5절에 보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시에 페르시아 왕에게 ‘이들이 성전을 지으면 다시 페르시아에 도전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고발장을 내기도 했습니다. 6절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주도권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다툼에도 정치적인 이유들이 많습니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권력 다툼인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잘 살피지 않으면, 어떤 것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인지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겐 참다운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성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한 뒤 정성 들여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 이야기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신앙에 있어서 늘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것인가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둘째, 어떻게 내 자존감을 바로 세우고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요청할 때 잘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러나 정중하고 예의 있게 거절했습니다. 물론 거절이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게 요청했는데 “그건 안 돼. 내가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말하려면 엄청난 분별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거절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아픕니다. 감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상대와의 인연이 끊어질 수 있겠다고 각오해야 될 지도 모릅니다. 공동체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절할 줄 알아야 참다운 용기도 생깁니다. 남에 의해 내 삶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때때로 거절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참된 분별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별력이 필요할까요? 자기 삶을 계획하고 주도하기 위해 필요한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삶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게 모든 것을 그만둔다는 건 아닙니다.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을 봐도 적극적이며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이끌어 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도 더욱 진취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도 그가 할 일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충실하게 채워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두 가지 큰 주제 아래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먼저 어떤 것이 옳고 거룩하며 우선인지를 살핍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와 화합을 중요시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이웃과의 관계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에 기초한 기준입니다. 화해와 평화는 이웃과의 관계성에 기초한 기준입니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중심에 두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물론 우리는 가능하면 이웃과 평화를 누리고 화해를 모색하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인 건 진리 곧 본질의 문제입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생수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생수에 구정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생수 양이 아무리 많아도 생수 전체가 더럽혀집니다. 생수로서는 불합격입니다. 하지만 이 물에 더러워진 내 손을 씻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손 씻을 물로는 합격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러한 문제로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어떤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또 어떤 것에 마음을 열고 수용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배제와 관용의 문제는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납니다. 직장에서의 관계, 사회에서의 관계, 가정에서의 관계 가운데서 나타나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In essentials, unity), 비본질에는 자유(관용)를(In non-essentials, liberty), 모든 일에는 자비(사랑)를!(In all things, charity!)” 먼저 본질 곧 진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절하고 부정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유롭게 허용하며 수용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 모든 일에 대해서는 자비 곧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갖고 대하라고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밥을 먹는 것도 결단이요, 친구를 만나는 것도 결단이요,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결단입니다. 우리 삶에서 선택과 결단이 없는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본질은 무엇인가? 거기에 내 생명을 걸 것이다. 비본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선 다른 사람을 배려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서는 사랑과 긍휼을 품고 대응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마다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본질을 분별하는 ‘지혜’와 그것을 실행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건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어떤 것이 본질이고 비본질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 자유, 생명, 이런 것들은 본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서로의 삶의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판단하는 방식과 삶의 환경이 다른 건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고 저항하며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마음과 자율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로설 수 있고 이웃들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과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떤 태도와 마음이 우리에게 요구될까요? 바로 담대함입니다. 용기입니다. 용기란 무엇입니까? 현실을 직면할 줄 아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도피하는 이유는 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는 것입니다. 용기란 비겁과 만용 사이에 놓여 있는 덕입니다. 용기에서 지혜와 분별력이 없어지면 허세가 생깁니다. 그러면 만용을 부립니다. 무엇이 적절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또 무엇이 가능한지를 살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용기에서 분별력은 있는데 선택할 시간과 시기를 놓친다면, 거기서 비겁함이 생깁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면서도 망설입니다. 결단하지 않고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굴함과 비겁함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너는 비겁해. 겁쟁이야. 비굴한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수치심이 몰려들 것입니다. 특히 남성분들은 이런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분노가 일고 모멸감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겁하지 않으면서도 만용스럽지 않은, 즉 진정한 용기 있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이 적절한 말씀을 해 줍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비본질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합니다. 물론 거절하면 위험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거절하면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 중에는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 때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즉 거절은 미움과 실패의 위험성을 초래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가 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미워할까 봐, 혹은 내 삶의 안전지대를 흔들까 봐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겁먹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겁을 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확정합니다. ‘아, 나는 실패할 거야.’ 하고 스스로를 제단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 걸음 나가기보다 제자리에 주저앉게 됩니다. 체념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절망합니다. 이처럼 비겁함과 겁은 마음속에서부터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에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한 걸음 나가지 않고 겁만 먹고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게 겁먹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 인생에 반대자와 대적자, 비판자가 있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들이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우리를 각성시킵니다.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전하게도 만듭니다.
심리학 개념 중에 ‘광장공포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만 머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좁은 공간에 처박아 두는 것입니다. 다른 세계를 차단시킵니다. 저 아름다운 세계, 밤하늘의 빛나는 별,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용기의 동력입니다.

용기와 비겁이라는 건 한순간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한 번 용기 있었다고 해서 평생 용기 있는 게 아닙니다. 한 번 비겁했다고 해서 평생 비겁한 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결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본래부터 비겁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처럼 거절할 줄 아는 용기를 갖고 본질을 붙잡으려 할 때,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어떻게 그렇게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예배할 공간 곧 성전을 세워 나가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마음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에는 또 다른 긍정적인 용기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사랑이란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건 실은 두려운 일입니다. 내 삶 전체를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던 남녀가 평생 함께 살기로 작정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해볼 만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비겁한 자에게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약자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축복을 누가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여호수아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여호수아도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었기에, 어떤 위기에 봉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사람에 의해서 너 자신을 규정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환경에 의해 너를 규정하면 겁날 수밖에 없다. 이제 나 여호와에 의해 너 자신을 규정하라. 그러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또한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시며 여호수아를 축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하나님의 딸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너답게 살아라. 다른 사람에 의해 규정되지 말고, 환경에 의해 규정되지 말고, 내가 너를 규정할 것이니 너는 나의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용기와 담대함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놀라운 담대함과 용기가 이미 허락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믿음과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열어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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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4: 1 ~ 6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우리는 비겁함과 담대함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비겁함의 영, 담대함의 영?’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비겁한 사람입니까, 담대한 사람입니까? 스스로를 돌아볼 때 자신이 비겁합니까, 아니면 담대합니까? 아침에는 용기가 있다가도 저녁이 되면 비겁한 사람으로 돌변합니까? 야누스의 얼굴처럼 앞뒤가 다른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비겁한 사람에서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혹시 100% 용기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100% 비겁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사실 보통 사람은 50%의 용기와 50%의 비겁함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과 마음이 수시로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용기가 49%, 비겁함이 51%라면, 우리는 매일 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2%의 비겁함을 담대함으로 바꾸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2%의 비겁함을 용기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서움과 두려움, 겁이 다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51%의 용기를 가지면 흔들리다가도 용기 있는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반복되면서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비겁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비겁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위기에 처했을 때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길 주저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험에 직면하기 보다는 도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분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요한복음 12장 43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한복음 12:43)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즐거워한 사람들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들 역시 비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위기가 닥쳐오자 스승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0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가복음 14:50)

‘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또 ‘도망쳤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까지 내놓겠다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누군가를 거절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의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붙잡혀 갔습니다. 그리고 약 70여 년이 흐른 후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루살렘에 귀향합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간절한 소원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했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지. 이제 다시 그분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성전을 건축하자.’ 그렇게 힘을 내 성전 건축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항상 선한 일에는 방해 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도 성전 건축하는 데 동참하자. 우리에게도 기회를 달라!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면 너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라며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보다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타민족과 결혼하여 신앙적 정체성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 스룹바벨과 종교 지도자 예수아가 그들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 모습이 오늘 본문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에스라 4:3 중)

다른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결정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요청에 진정성이 있는지, 혹시 흑심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실제로 요청을 거절한 뒤 반응을 보면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청을 거절당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그래. 너희들이 잘 짓는지 지켜보겠다.”라고 순순히 반응하지 않습니다. 거절당하자마자 페르시아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계획을 가로 막으려 합니다. 5절에 보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시에 페르시아 왕에게 ‘이들이 성전을 지으면 다시 페르시아에 도전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고발장을 내기도 했습니다. 6절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주도권을 이스라엘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다툼에도 정치적인 이유들이 많습니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권력 다툼인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잘 살피지 않으면, 어떤 것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인지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겐 참다운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성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한 뒤 정성 들여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 이야기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잘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신앙에 있어서 늘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것인가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둘째, 어떻게 내 자존감을 바로 세우고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요청할 때 잘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은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그러나 정중하고 예의 있게 거절했습니다. 물론 거절이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게 요청했는데 “그건 안 돼. 내가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말하려면 엄청난 분별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거절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아픕니다. 감정이 상하기도 합니다. 상대와의 인연이 끊어질 수 있겠다고 각오해야 될 지도 모릅니다. 공동체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절할 줄 알아야 참다운 용기도 생깁니다. 남에 의해 내 삶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때때로 거절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참된 분별력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별력이 필요할까요? 자기 삶을 계획하고 주도하기 위해 필요한 분별력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삶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게 모든 것을 그만둔다는 건 아닙니다. 성경 속 믿음의 사람들을 봐도 적극적이며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이끌어 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도 더욱 진취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도 그가 할 일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충실하게 채워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두 가지 큰 주제 아래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먼저 어떤 것이 옳고 거룩하며 우선인지를 살핍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평화와 화합을 중요시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과 ‘이웃과의 관계성’을 따지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에 기초한 기준입니다. 화해와 평화는 이웃과의 관계성에 기초한 기준입니다. 이 두 가지 기준을 중심에 두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물론 우리는 가능하면 이웃과 평화를 누리고 화해를 모색하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인 건 진리 곧 본질의 문제입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 생수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생수에 구정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생수 양이 아무리 많아도 생수 전체가 더럽혀집니다. 생수로서는 불합격입니다. 하지만 이 물에 더러워진 내 손을 씻는다면 어떻습니까? 그런 대로 괜찮습니다. 손 씻을 물로는 합격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러한 문제로 굉장히 고민했습니다. 어떤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또 어떤 것에 마음을 열고 수용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배제와 관용의 문제는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납니다. 직장에서의 관계, 사회에서의 관계, 가정에서의 관계 가운데서 나타나는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In essentials, unity), 비본질에는 자유(관용)를(In non-essentials, liberty), 모든 일에는 자비(사랑)를!(In all things, charity!)” 먼저 본질 곧 진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절하고 부정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유롭게 허용하며 수용하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 모든 일에 대해서는 자비 곧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갖고 대하라고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밥을 먹는 것도 결단이요, 친구를 만나는 것도 결단이요, 일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도 결단입니다. 우리 삶에서 선택과 결단이 없는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본질은 무엇인가? 거기에 내 생명을 걸 것이다. 비본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선 다른 사람을 배려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서는 사랑과 긍휼을 품고 대응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마다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본질을 분별하는 ‘지혜’와 그것을 실행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건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어떤 것이 본질이고 비본질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 자유, 생명, 이런 것들은 본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서로의 삶의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판단하는 방식과 삶의 환경이 다른 건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고 저항하며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마음과 자율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바로설 수 있고 이웃들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과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떤 태도와 마음이 우리에게 요구될까요? 바로 담대함입니다. 용기입니다. 용기란 무엇입니까? 현실을 직면할 줄 아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도피하는 이유는 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는 것입니다. 용기란 비겁과 만용 사이에 놓여 있는 덕입니다. 용기에서 지혜와 분별력이 없어지면 허세가 생깁니다. 그러면 만용을 부립니다. 무엇이 적절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또 무엇이 가능한지를 살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용기에서 분별력은 있는데 선택할 시간과 시기를 놓친다면, 거기서 비겁함이 생깁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면서도 망설입니다. 결단하지 않고 행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굴함과 비겁함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너는 비겁해. 겁쟁이야. 비굴한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수치심이 몰려들 것입니다. 특히 남성분들은 이런 말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분노가 일고 모멸감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비겁하지 않으면서도 만용스럽지 않은, 즉 진정한 용기 있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이 적절한 말씀을 해 줍니다. 다른 게 아닙니다. 비본질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합니다. 물론 거절하면 위험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거절하면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 중에는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미움 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면 때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즉 거절은 미움과 실패의 위험성을 초래합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가 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절하면 상대가 나를 미워할까 봐, 혹은 내 삶의 안전지대를 흔들까 봐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겁먹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겁을 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확정합니다. ‘아, 나는 실패할 거야.’ 하고 스스로를 제단합니다. 그렇게 되면 한 걸음 나가기보다 제자리에 주저앉게 됩니다. 체념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부터 절망합니다. 이처럼 비겁함과 겁은 마음속에서부터 생성되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에서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한 걸음 나가지 않고 겁만 먹고 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게 겁먹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 인생에 반대자와 대적자, 비판자가 있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들이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우리를 각성시킵니다.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전하게도 만듭니다.
심리학 개념 중에 ‘광장공포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만 머물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좁은 공간에 처박아 두는 것입니다. 다른 세계를 차단시킵니다. 저 아름다운 세계, 밤하늘의 빛나는 별, 푸른 하늘, 시원한 바람,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용기의 동력입니다.

용기와 비겁이라는 건 한순간에 결정되지 않습니다. 내가 한 번 용기 있었다고 해서 평생 용기 있는 게 아닙니다. 한 번 비겁했다고 해서 평생 비겁한 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결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래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본래부터 비겁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처럼 거절할 줄 아는 용기를 갖고 본질을 붙잡으려 할 때, 용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어떻게 그렇게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예배할 공간 곧 성전을 세워 나가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 마음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절할 수 있는 용기에는 또 다른 긍정적인 용기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사랑이란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건 실은 두려운 일입니다. 내 삶 전체를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던 남녀가 평생 함께 살기로 작정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해볼 만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비겁한 자에게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약자를 용감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축복을 누가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담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9)

여호수아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여호수아도 말입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었기에, 어떤 위기에 봉착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사람에 의해서 너 자신을 규정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환경에 의해 너를 규정하면 겁날 수밖에 없다. 이제 나 여호와에 의해 너 자신을 규정하라. 그러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다.” 또한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씀까지 덧붙이시며 여호수아를 축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하나님의 딸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너답게 살아라. 다른 사람에 의해 규정되지 말고, 환경에 의해 규정되지 말고, 내가 너를 규정할 것이니 너는 나의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용기와 담대함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놀라운 담대함과 용기가 이미 허락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믿음과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열어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11월 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비겁함의 영, 담대함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4, 43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스 4:1-6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나는 비겁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용기 있는 사람입니까? 사실 100% 용기 있는 사람, 또는 100% 비겁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는 50%의 용기와 50%의 비겁함이 함께 상존합니다. 다만, 용기가 49%이고, 비겁함이 51% 함께 상존한다면, 2%의 비겁함이 용기 쪽으로 붙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용기가 이겼다 해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의 포로생활 70년을 마감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시대적 배경을 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다시 건축할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적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종교적 지도자인 예수아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요청을 거절합니다(3절). 이후 사마리아 사람들의 흑심은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거절을 당하자마자 바사(페르시아)의 고관들을 뇌물로 매수하고(5절), 바사 왕에게도 고발장을 제출합니다(6절).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주도권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흑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남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기 위해서는 분별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참된 분별력을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요?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서로 맞부딪치고 있습니다. ‘옳은 것, 즉 거룩한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이웃과의 평화와 화합이 우선인가?’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가능하면 최대한 이웃과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 본질의 문제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반면, 비본질적인 일에는 여유를 두어야 합니다. 생수 한 그릇에 구정물 한 방울은 생수 전체를 더럽힙니다. 하지만 손을 씻어야 할 물그릇이라면, 기분은 조금 나쁘지만 그런대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관용)를, 모든 일에는 자비(사랑)를”

여기에 필요한 삶의 태도가 있다면 담대함. 즉 용기입니다. 이 용기에 지혜와 분별력이 없어지면 허세가 되고 만용이 됩니다. 또한 용기에 분별력이 있지만 선택하고 결단해야할 시기를 놓치면 그것은 곧 비겁이 됩니다. 또한 용기와 비겁은 한 번의 경험으로 저절로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결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용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본래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고, 본래부터 겁쟁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즉, 실패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한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에게 용기를 줍니다. 사랑을 하면 노예가 되지 않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것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다 이 길을 걸었습니다. 모세를 이어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바로 용기입니다(수1:9).

사람과 환경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규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를 규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겁먹지 말고 담대한 영을 갖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나는 용기 있는 사람입니까?” 용기 있는 결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은혜의 사건과 감사를 함께 나눕시다.

2. “나는 비겁한 사람입니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용기를 잃어버리고 좌절했던 경험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3.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조차 나의 고집으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던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분별의 은혜를 구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자녀들에게 생명의 용기, 사랑의 용기를 더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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