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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로서의 간절한 바램

로마서 1: 8 ~ 15

김지철 목사

2015.06.07

빚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가계 빚이 1000조 원 시대에 돌입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액수가 무려 1천8십9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액수입니다. 이 1000조 원이 넘는 빚을 젖먹이까지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로 나누면 한 사람당 약 2천1백50만 원입니다. 즉 국민 한 사람당 2천만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은행은 가계 부채의 증가 속도가 너무 빨라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가계 빚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개인적으로 많은 빚을 진 분들 중에서는 ‘2천만 원 정도만 빚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빚쟁이’라는 말은 조롱이 섞인 하대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상황에 따라 돈을 빌려 준 채권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돈을 갚아야 할 채무자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고 할 때 여기서 빚쟁이는 채권자입니다. 반대로, “나는 사업에 실패해서 하루아침에 빚쟁이가 되었다”고 할 때는 채무자를 뜻합니다.
어느 쪽이든 빚쟁이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피곤한 일입니다. 누가 빚쟁이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빚쟁이가 된다면 우리는 대개 채무자보다는 채권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빚을 졌다는 것은 경제적인 삶이 실패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의 부채를 훌훌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빚을 졌다는 것은 곧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는 빚을 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아주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14)

그 범주가 아주 넓습니다. ‘헬라인’은 당시 헬라 말을 할 줄 알고 철학을 아는 문명인을 뜻했고 ‘야만인’이란 헬라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지혜 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바울은 인류 전체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빚입니까? 정신적, 영적인 빚입니다.
물질적인 빚을 지면 얼마나 억눌립니까? 정신적인 빚도 우리를 압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빚을 졌다는 것은 누구에게인가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빚을 졌다는 것은 반대급부로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사명의식을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채무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명의식도 없습니다. 물질적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영적이고 정신적인 빚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사명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영적인 빚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게 정신적인 채무의식을 갖고 있는 자녀는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라는 생각으로 채무의식을 갖지 않는 자녀는 부모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직원이 회사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다면 충성스러운 사원이 될 수 있습니다. 노사갈등이 일어나도 쉽게 해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민이 나라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다면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애국자가 될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을 때 자발적인 기쁨과 감사로 섬김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채무의식을 자녀나 직원보다 더 가져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자녀보다는 부모가 더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게 됩니다. 그런 부모가 있는 가정이 복 받은 가정일 것입니다. 회사의 임원과 지도자가 먼저 직장과 직원에 대한 채무의식을 가져야 그 회사는 복 받은 회사가 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복 받은 직원이 될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지도자들이 국민에 대한 채무의식을 가져야 그 나라가 복 받은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국민에 대한 채무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정당이나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채무의식으로 멈춰서면 어떨까요? 국민을 힘들게 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저 북녘의 지도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지도자 자신을 향해 집중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직분자들이 교회와 성도에 대한 영적 채무의식을 갖는다면 그 교회는 얼마나 복 받은 교회일까요? ‘하나님이 내게 이 교회를 맡겨 주셨구나. 하나님이 내게 이 직분을 주셨구나. 잘 섬기고 사랑해야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드려야지.’ 이러한 마음으로 섬길 때, 교회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영적인 부채의식, 채무의식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명감을 주십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 기초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증거자들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영적인 부채의식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빚을 졌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에게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채무의식으로 인해 그들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고 섬기면서 충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채무의식을 가진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불꽃처럼 퍼져나간 것이 한국 교회의 축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부채의식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공동체가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은 감사를 알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최초의 공식적인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복음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본래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유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한 자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어떻게 메시아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고 불경죄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그전까지 예수님이 예수님의 죄 때문에 죽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것이 바울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인간을 위해서 아들까지도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의 인생이 변하게 됩니다. ‘나 같은 못된 놈에게도 다가오신 예수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에 대한 영적인 부채, 영적인 채무의식을 느끼게 되자 새로운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채무의식을 지니고 있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꿈과 비전을 허락해 주는 것이 영적인 채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심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멈추게 되고 남을 향한 원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하나님의 은혜구나. 내가 이만큼 된 것이 부모님의 사랑 때문이구나. 내가 이만큼 알게 된 것이 선생님들의 가르침 때문이구나.’ 밥상을 마주할 때도 감사가 생깁니다. ‘농부와 어부들이 얼마나 애썼을까? 이것이 내 밥상에 오를 때까지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이어서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생명을 내어놓은 고등어님께 감사합니다. 고등어님의 소중한 생명을 귀히 받아먹습니다. 당신의 희생 위에 유지되는 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보람되게 살겠습니다.” 약간 우스운 기도 아닙니까? 삼겹살을 먹게 될 때는 고등어님이 돼지님으로 바뀔 테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밥상을 앞에 두고 이런 감사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밥 한 톨아, 고맙다. 채소야, 내가 먹을 수 있으니 고맙구나. 돼지야, 소야, 내가 먹을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
밟은 땅을 보면서 땅에게 고마워하고, 공기를 마시면서 공기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귀와 움직일 수 있는 손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채무의식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마음으로부터 따뜻한 감사가 우러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감사에서 남을 향한 감사로 점차 확대됩니다. 그것이 채무의식의 특징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은 공동체를 품게 합니다.

또 다른 변화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서1:8)

영적인 부채의식은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하게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하게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했습니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에, 자신이 전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세계 곳곳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로마에 교회가 생겼대!” 그것이 바울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잘 자라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성도들이 축복받은 것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바울에게 기쁨과 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부채의식입니다. 개인주의의 편협한 자리를 벗어나게 하고, 공동체 속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함몰하려는 정신적 세계, 탐욕을 거절하고 저항하게 하는 힘이 바로 영적인 부채의식입니다.
본래 바울은 열정적인 유대 바리새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율법 하나로 사람을 평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가슴에 분노가 가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채무의식을 깨닫게 되자 남이 동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이 생겼습니다. 이렇듯 영적인 채무의식은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조그마한 나라도 영남사람, 호남사람으로 갈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중부사람, 이북사람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 고향을 자랑하며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단지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정죄하고 차별하는 생각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을 가졌다면서 교파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순복음교인으로 나누어 자기가 속한 교파만을 최고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남을 정죄하는 데 이용되면 곧 파당이 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장로교인입니다”라며 서겠습니까? 만약 그러한다면,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제 주님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나’ 구별 없이 모두를 끌어안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영적인 부채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부채의식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을 로마까지, 스페인까지 전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11절 전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 (로마서 1:11)

자신의 신앙을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채무의식입니다.

나에게는 소원이 없습니까? 소원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소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채의식, 채무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내가 가정을 세워야지. 부모님이 힘들어 하시니 내가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사람이 가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이 힘들 때 열심히 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직장을 살리고, 교회가 어려울 때 내가 기도하며 헌신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교회를 살립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부흥하고 생명의 역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채의식, 채무의식과 반대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감동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에도 별 느낌 없이 ‘그냥 세월 흘러가는 대로 살지 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차지한다는 권리의식, 즉 보상심리입니다. 물론 권리의식이 필요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보상심리만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이 많아지게 됩니다. 늘 받아야 할 것에 비해 덜 받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보상심리가 가득하게 되면 사람들이 볼 때만 열심히 일하게 되기 쉽습니다. 대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이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시다가 마지막에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바로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처음에 있던 부채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첫사랑을 기억하십니까? “너를 만난 것 자체가 내게 축복이야.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어. 나는 네게 주면 줄수록 기뻐.” 이것이 처음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처음 사랑의 부채의식이 보상심리로 바뀌게 됩니다. 주는 것이 아까워지고, 내가 이만큼 하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니 내가 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런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과 에너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의 주님인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입니다” 하다가 어느 날 “주님, 내가 이렇게 열심히 헌신하는데 왜 이 모양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헌금도 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리는데 도대체 내 삶은 왜 이렇습니까?” 라며 보상심리를 하나님 앞에 적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보상은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채의식과 채무의식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갑시다.

우리는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이만큼의 신앙을 가진 것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자리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아닙니다. 어제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구나. 내 심장이 뛰고 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손이 움직이고 내 발이 움직이고 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식욕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시고 소화하고 배설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채무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슴에 새기고 늘 기억해야 할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하다’입니다. 나에게 주신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다’입니다. 나에게 삶을 주신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랑하다’입니다. 내게 생명이고 구원이신 예수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 된 것을 자랑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살고, 사랑하면서 살고, 예수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는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자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이 놀라운 역사를 사모하며 영적으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시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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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 8 ~ 15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빚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가계 빚이 1000조 원 시대에 돌입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액수가 무려 1천8십9조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액수입니다. 이 1000조 원이 넘는 빚을 젖먹이까지 포함한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로 나누면 한 사람당 약 2천1백50만 원입니다. 즉 국민 한 사람당 2천만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은행은 가계 부채의 증가 속도가 너무 빨라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가계 빚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개인적으로 많은 빚을 진 분들 중에서는 ‘2천만 원 정도만 빚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빚쟁이’라는 말은 조롱이 섞인 하대어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상황에 따라 돈을 빌려 준 채권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돈을 갚아야 할 채무자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고 할 때 여기서 빚쟁이는 채권자입니다. 반대로, “나는 사업에 실패해서 하루아침에 빚쟁이가 되었다”고 할 때는 채무자를 뜻합니다.
어느 쪽이든 빚쟁이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피곤한 일입니다. 누가 빚쟁이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빚쟁이가 된다면 우리는 대개 채무자보다는 채권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빚을 졌다는 것은 경제적인 삶이 실패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의 부채를 훌훌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빚을 졌다는 것은 곧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는 빚을 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아주 어마어마한 빚을 졌다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14)

그 범주가 아주 넓습니다. ‘헬라인’은 당시 헬라 말을 할 줄 알고 철학을 아는 문명인을 뜻했고 ‘야만인’이란 헬라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지혜 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나타냅니다. 즉 바울은 인류 전체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빚입니까? 정신적, 영적인 빚입니다.
물질적인 빚을 지면 얼마나 억눌립니까? 정신적인 빚도 우리를 압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빚을 졌다는 것은 누구에게인가 그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빚을 졌다는 것은 반대급부로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사명의식을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채무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명의식도 없습니다. 물질적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영적이고 정신적인 빚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사명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영적인 빚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자신을 낳아 준 부모에게 정신적인 채무의식을 갖고 있는 자녀는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라는 생각으로 채무의식을 갖지 않는 자녀는 부모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직원이 회사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다면 충성스러운 사원이 될 수 있습니다. 노사갈등이 일어나도 쉽게 해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민이 나라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다면 나라를 사랑하고 아끼는 애국자가 될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에 대한 채무의식이 있을 때 자발적인 기쁨과 감사로 섬김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채무의식을 자녀나 직원보다 더 가져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자녀보다는 부모가 더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게 됩니다. 그런 부모가 있는 가정이 복 받은 가정일 것입니다. 회사의 임원과 지도자가 먼저 직장과 직원에 대한 채무의식을 가져야 그 회사는 복 받은 회사가 되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복 받은 직원이 될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지도자들이 국민에 대한 채무의식을 가져야 그 나라가 복 받은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국민에 대한 채무의식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정당이나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채무의식으로 멈춰서면 어떨까요? 국민을 힘들게 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저 북녘의 지도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지도자 자신을 향해 집중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직분자들이 교회와 성도에 대한 영적 채무의식을 갖는다면 그 교회는 얼마나 복 받은 교회일까요? ‘하나님이 내게 이 교회를 맡겨 주셨구나. 하나님이 내게 이 직분을 주셨구나. 잘 섬기고 사랑해야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내 삶을 드려야지.’ 이러한 마음으로 섬길 때, 교회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영적인 부채의식, 채무의식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사명감을 주십니다.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 기초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증거자들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영적인 부채의식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빚을 졌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에게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채무의식으로 인해 그들이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고 섬기면서 충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채무의식을 가진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불꽃처럼 퍼져나간 것이 한국 교회의 축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부채의식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공동체가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은 감사를 알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최초의 공식적인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복음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본래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유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거절한 자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어떻게 메시아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고 불경죄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그전까지 예수님이 예수님의 죄 때문에 죽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것이 바울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인간을 위해서 아들까지도 내어놓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의 인생이 변하게 됩니다. ‘나 같은 못된 놈에게도 다가오신 예수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다가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에 대한 영적인 부채, 영적인 채무의식을 느끼게 되자 새로운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채무의식을 지니고 있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꿈과 비전을 허락해 주는 것이 영적인 채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심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불평과 불만이 멈추게 되고 남을 향한 원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하나님의 은혜구나. 내가 이만큼 된 것이 부모님의 사랑 때문이구나. 내가 이만큼 알게 된 것이 선생님들의 가르침 때문이구나.’ 밥상을 마주할 때도 감사가 생깁니다. ‘농부와 어부들이 얼마나 애썼을까? 이것이 내 밥상에 오를 때까지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후에 이어서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생명을 내어놓은 고등어님께 감사합니다. 고등어님의 소중한 생명을 귀히 받아먹습니다. 당신의 희생 위에 유지되는 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보람되게 살겠습니다.” 약간 우스운 기도 아닙니까? 삼겹살을 먹게 될 때는 고등어님이 돼지님으로 바뀔 테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밥상을 앞에 두고 이런 감사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밥 한 톨아, 고맙다. 채소야, 내가 먹을 수 있으니 고맙구나. 돼지야, 소야, 내가 먹을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
밟은 땅을 보면서 땅에게 고마워하고, 공기를 마시면서 공기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귀와 움직일 수 있는 손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채무의식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마음으로부터 따뜻한 감사가 우러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감사에서 남을 향한 감사로 점차 확대됩니다. 그것이 채무의식의 특징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은 공동체를 품게 합니다.

또 다른 변화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서1:8)

영적인 부채의식은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하게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하게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쓸 당시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감사했습니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에, 자신이 전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세계 곳곳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로마에 교회가 생겼대!” 그것이 바울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잘 자라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성도들이 축복받은 것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바울에게 기쁨과 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부채의식입니다. 개인주의의 편협한 자리를 벗어나게 하고, 공동체 속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함몰하려는 정신적 세계, 탐욕을 거절하고 저항하게 하는 힘이 바로 영적인 부채의식입니다.
본래 바울은 열정적인 유대 바리새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율법 하나로 사람을 평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가슴에 분노가 가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채무의식을 깨닫게 되자 남이 동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이 생겼습니다. 이렇듯 영적인 채무의식은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 조그마한 나라도 영남사람, 호남사람으로 갈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소개할 때 중부사람, 이북사람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 고향을 자랑하며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단지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정죄하고 차별하는 생각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을 가졌다면서 교파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순복음교인으로 나누어 자기가 속한 교파만을 최고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남을 정죄하는 데 이용되면 곧 파당이 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장로교인입니다”라며 서겠습니까? 만약 그러한다면,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고백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제 주님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지혜 없는 자나’ 구별 없이 모두를 끌어안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 영적인 부채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영적인 부채의식 때문에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을 로마까지, 스페인까지 전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는 11절 전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 (로마서 1:11)

자신의 신앙을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열매가 맺어지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소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인 채무의식입니다.

나에게는 소원이 없습니까? 소원이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소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채의식, 채무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채무의식이 생기기 시작하면 ‘내가 가정을 세워야지. 부모님이 힘들어 하시니 내가 열심히 일해야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사람이 가정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직장이 힘들 때 열심히 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직장을 살리고, 교회가 어려울 때 내가 기도하며 헌신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들이 교회를 살립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부흥하고 생명의 역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채의식, 채무의식과 반대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감동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에도 별 느낌 없이 ‘그냥 세월 흘러가는 대로 살지 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차지한다는 권리의식, 즉 보상심리입니다. 물론 권리의식이 필요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보상심리만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이 많아지게 됩니다. 늘 받아야 할 것에 비해 덜 받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보상심리가 가득하게 되면 사람들이 볼 때만 열심히 일하게 되기 쉽습니다. 대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이 에베소교회를 칭찬하시다가 마지막에 한 가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바로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처음에 있던 부채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첫사랑을 기억하십니까? “너를 만난 것 자체가 내게 축복이야. 너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어. 나는 네게 주면 줄수록 기뻐.” 이것이 처음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처음 사랑의 부채의식이 보상심리로 바뀌게 됩니다. 주는 것이 아까워지고, 내가 이만큼 하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니 내가 한 것보다 더 큰 것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그런 사랑은 우리에게 생명과 에너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아 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의 주님인 것만으로도 내게 기쁨입니다” 하다가 어느 날 “주님, 내가 이렇게 열심히 헌신하는데 왜 이 모양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이만큼 헌금도 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드리는데 도대체 내 삶은 왜 이렇습니까?” 라며 보상심리를 하나님 앞에 적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보상은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부채의식과 채무의식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갑시다.

우리는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이만큼의 신앙을 가진 것을 감사할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자리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아닙니다. 어제로 인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구나. 내 심장이 뛰고 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 손이 움직이고 내 발이 움직이고 있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식욕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시고 소화하고 배설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채무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가슴에 새기고 늘 기억해야 할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사하다’입니다. 나에게 주신 삶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다’입니다. 나에게 삶을 주신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랑하다’입니다. 내게 생명이고 구원이신 예수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 된 것을 자랑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면서 살고, 사랑하면서 살고, 예수님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는 우리가 있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자리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이 놀라운 역사를 사모하며 영적으로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가시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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