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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말씀

마태복음 4: 1 ~ 4

김지철 목사

2012.06.03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지난 6월 1일 연세대학교에서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 철학을 강의하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특별 강연이 있었습니다. 강연 이름은 그의 책 제목과 동일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강연을 듣기 위해 약 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입장권은 무료였지만,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이 강의를 듣기 위해 무료입장권을 돈을 들여 사기도 했다고 언론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돈을 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돈과 재물이 최고의 우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상품은 물론, 육체적인 쾌락도 살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까지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시장경제의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흐름 속에서 비인간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샌델 교수도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장경제가 도덕과 가치를 상실하면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시장사회로 변질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사고파는 시대. 사랑도, 우정도, 교육이나 의료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들마저 상품으로 바뀌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자긍심과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샌델 교수는 사고 팔 수 있는 것과 사고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따뜻하고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강의를 듣기 위해서 만 오천 명의 젊은이들이 모였다는 것은 분명히 이 사회의 긍정적인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돈과 재물에 붙잡혀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 결혼 정보회사가 미혼 여성들에게 ‘결혼 조건’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34세 미만의 여성들은 첫 번째로 남자의 경제력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격, 세 번째는 외모였습니다. ‘결혼은 현실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만으로 결혼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젊은 여성들의 결혼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필수요건이 돈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4살 이상의 여성들에게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에게 배우자의 첫 번째 조건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경제력, 세 번째가 외모였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스스로 경제력을 갖게 되니, ‘경제력만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 결혼생활’이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현실적인 삶에서 정신적인 안정으로 우선순위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있어 정신적인 위로와 사랑이 더 중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분명히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어렵습니다. 가난하여 먹고 마실 것이 없으면,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많은 부분 손상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먹고 마실 것만 있으면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워지는가?”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인간다워질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물질세계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유혹받는 장면입니다. 마치 예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모습을 한 예수님을 두고 성령과 악령인 사탄의 대결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내 몬 것은 성령이고, 그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접근한 것은 악령인 마귀였습니다. 그런데 말씀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입니다.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내몰리셨고, 악령인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 수동태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령과 악령이 맞닥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과연 누가 예수님을 차지할 것인가? 성령과 악령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붙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승리하는 자가 예수님의 미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 몬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하신 일은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배고픔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건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함이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 6)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인생의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이 멍에를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습들을 보십시오. 이 땅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죄와 잘못된 이데올로기, 미움과 분노, 가난과 배고픔에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거짓과 술수에 온갖 위협을 받고 있으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 인생의 멍에가 꺾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금식이 가진 사명입니다. 인간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만드는 것. 그러므로 금식하는 자는 자기 배고픔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고통 받는 자, 외로운 자, 힘든 자, 아픈 자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금식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고, 해방의 복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받은 사명은 바로 이 해방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세상의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받으면 이러한 모든 고통과 억압들로부터 놓여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명 속에 사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묻습니다. “너, 배고프지? 배고픔을 해결해야 그 문제가 풀리는 거야”라며 유혹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마태복음 4:3)

혹시 금식해 보셨습니까? 금식하며 기도하면 무엇이 생각날까요? 하나님이 생각날까요? 금식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하루를 금식하고 나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음식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립니다.
저는 1년에 한 번, 수난주간이 되면 성도님들께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끼씩은 금식하시라고 권면을 합니다.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끼가 힘들면,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해서 세 끼를 금식하라고 말씀드립니다. 금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끼만 안 먹어도 힘듭니다. 하루 세 끼를 모두 안 먹으면 육체가 먹는 것에 관해서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도 먹고 마실 것이 있는데 하루를 금식하는 건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정말 비참한 것은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루를 굶는 입니다. 그것은 재앙과도 같습니다.
사탄은 금식으로 굶주려있는 예수님의 곤고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배고프지? 배고픈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지? 그러니 너의 첫 번째 사명은 이 시대의 배고픔, 물질의 궁핍함을 해결하는 거야. 눈에 보이는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할 일이 아닐까?” 사탄은 교묘하게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사탄의 의도는 빵으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바꾼다면, ‘돈을 만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저 들판에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을 금과 은동전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과 재물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돈을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최고의 가치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인 사회, 돈으로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는 요청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갖기를 원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욕망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탐욕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자기 손아귀에서 놀아나기 때문입니다. 첫 인간에게 유혹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보암직한 것, 먹음직한 것을 네 마음대로 갖고 즐기라!” 첫 인간은 그 유혹에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4)

사탄은 예수님이 빵에 대해 관심 갖기를 원했습니다. 육체의 문제를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하고 해결해야만 인생의 다른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부추겼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달랐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말씀에 관심 갖기를 원했습니다. 육체의 배부름이 소중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빵은 세상 것이고 말씀은 하나님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빵도 하나님의 것이고, 말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도 만드셨고 우리의 영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복과 더불어 세상의 복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빵이 모자랄 때는 빵을 구해야 됩니다. 직장에서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기업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언제 투자하고 언제 멈춰야 할지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과 땅 모든 것에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빵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적인 필요를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빵과 말씀, 이 두 가지는 인간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핵심요소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에게 떡과 빵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 중이신 예수님도 배고프셨습니다. 빵이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빵만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가난해도, 누추한 바닥 인생을 살아갈 때에도 인간은 짐승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복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라고, 장애우라고 세상에서 조롱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남보다 조금 모자라게 살아간다고 해서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삶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우리는 떡이 필요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오직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되면 허무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있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매뉴얼을 읽지 못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매뉴얼인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겪고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를 지칭하는 2050 그룹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섰고 인구 강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몇 십 년 전만해도 얼마나 먹고 마실 것이 없었습니까? 지금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선배들의 열심과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순국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자살하는 사람들과 못 살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살벌해진 마음으로 나의 실패는 모두 남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과거에는 먹고 마실 것이 없어도 가슴은 따뜻했습니다. 하루의 삶에 감사하고, 이웃들과 함께함을 기뻐했습니다. 가난할 때 더 감사하고 기뻐했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잘 살게 되었지만 가슴이 더 냉랭해진 것은 우리가 부(富)에 모든 것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지 않으면 우리의 생은 몰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놓치면 우리의 생은 결국 허무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을 다니시는 분이라면 모두 봉급 받는 날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할부로 산 것들, 대출 받은 것들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오직 돈 때문에만 직장에서 일한다면 얼마나 처량하겠습니까? 돈 만 아는 노동자, 단순히 돈 버는 기계. 이보다 더 슬프고 힘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돈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비인격화된 인간상을 갖게 됩니다. 모든 인간을 돈으로 측정하고 차별합니다. 결국 돈이 개인의 이마에 붙은 계급장이 됩니다. 이런 계급화 사회에서 따뜻한 인간관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조바심과 경쟁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돈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야 됩니다. 빵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이 가져도 겸손하고 없어도 당당하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사고 팔 수 있는 세상은 결코 축복받은 사회가 아닙니다. 지금 전 세계가 돈 문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 도덕과 윤리를 이야기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올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웃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가진 빵과 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매뉴얼인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이렇게 이끌어 주시고 많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감사하면서 살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가슴으로 안으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내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됩니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기업가는 기업가로서, 교육자는 교육자로서, 과학자는 과학자로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직장인으로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리 숙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가 감사하며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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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4: 1 ~ 4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지난 6월 1일 연세대학교에서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 철학을 강의하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특별 강연이 있었습니다. 강연 이름은 그의 책 제목과 동일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강연을 듣기 위해 약 만 오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입장권은 무료였지만,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이 강의를 듣기 위해 무료입장권을 돈을 들여 사기도 했다고 언론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돈을 내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는 돈과 재물이 최고의 우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상품은 물론, 육체적인 쾌락도 살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까지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시장경제의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흐름 속에서 비인간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샌델 교수도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장경제가 도덕과 가치를 상실하면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시장사회로 변질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사고파는 시대. 사랑도, 우정도, 교육이나 의료와 같은 인간의 기본권들마저 상품으로 바뀌어버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자긍심과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샌델 교수는 사고 팔 수 있는 것과 사고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을 분명히 구별해야 따뜻하고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강의를 듣기 위해서 만 오천 명의 젊은이들이 모였다는 것은 분명히 이 사회의 긍정적인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돈과 재물에 붙잡혀 살고 있는 시대 속에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 결혼 정보회사가 미혼 여성들에게 ‘결혼 조건’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34세 미만의 여성들은 첫 번째로 남자의 경제력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격, 세 번째는 외모였습니다. ‘결혼은 현실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만으로 결혼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젊은 여성들의 결혼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필수요건이 돈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4살 이상의 여성들에게는 조금 다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에게 배우자의 첫 번째 조건은 성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경제력, 세 번째가 외모였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스스로 경제력을 갖게 되니, ‘경제력만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 결혼생활’이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현실적인 삶에서 정신적인 안정으로 우선순위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있어 정신적인 위로와 사랑이 더 중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분명히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어렵습니다. 가난하여 먹고 마실 것이 없으면,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많은 부분 손상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먹고 마실 것만 있으면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워지는가?”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먹고 마시는 것,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인간다워질 수는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물질세계에 집중하도록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유혹받는 장면입니다. 마치 예수님과 사탄이 대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의 모습을 한 예수님을 두고 성령과 악령인 사탄의 대결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내 몬 것은 성령이고, 그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접근한 것은 악령인 마귀였습니다. 그런데 말씀들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모습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입니다.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내몰리셨고, 악령인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 수동태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령과 악령이 맞닥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승리할 것인가? 과연 누가 예수님을 차지할 것인가? 성령과 악령 모두가 예수님의 마음을 먼저 붙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승리하는 자가 예수님의 미래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 몬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하신 일은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배고픔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그들을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건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려함이었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야 58: 6)

이사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인생의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이 멍에를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습들을 보십시오. 이 땅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죄와 잘못된 이데올로기, 미움과 분노, 가난과 배고픔에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거짓과 술수에 온갖 위협을 받고 있으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 인생의 멍에가 꺾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금식이 가진 사명입니다. 인간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만드는 것. 그러므로 금식하는 자는 자기 배고픔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고통 받는 자, 외로운 자, 힘든 자, 아픈 자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바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예수님은 금식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고, 해방의 복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받은 사명은 바로 이 해방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세상의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받으면 이러한 모든 고통과 억압들로부터 놓여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명 속에 사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묻습니다. “너, 배고프지? 배고픔을 해결해야 그 문제가 풀리는 거야”라며 유혹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마태복음 4:3)

혹시 금식해 보셨습니까? 금식하며 기도하면 무엇이 생각날까요? 하나님이 생각날까요? 금식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하루를 금식하고 나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음식이 눈앞에 아른아른 거립니다.
저는 1년에 한 번, 수난주간이 되면 성도님들께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끼씩은 금식하시라고 권면을 합니다.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끼가 힘들면,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해서 세 끼를 금식하라고 말씀드립니다. 금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끼만 안 먹어도 힘듭니다. 하루 세 끼를 모두 안 먹으면 육체가 먹는 것에 관해서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도 먹고 마실 것이 있는데 하루를 금식하는 건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정말 비참한 것은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루를 굶는 입니다. 그것은 재앙과도 같습니다.
사탄은 금식으로 굶주려있는 예수님의 곤고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배고프지? 배고픈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지? 그러니 너의 첫 번째 사명은 이 시대의 배고픔, 물질의 궁핍함을 해결하는 거야. 눈에 보이는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할 일이 아닐까?” 사탄은 교묘하게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사탄의 의도는 빵으로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로 바꾼다면, ‘돈을 만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저 들판에 있는 크고 작은 돌들을 금과 은동전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과 재물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돈을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최고의 가치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인 사회, 돈으로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는 요청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갖기를 원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욕망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탐욕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자기 손아귀에서 놀아나기 때문입니다. 첫 인간에게 유혹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보암직한 것, 먹음직한 것을 네 마음대로 갖고 즐기라!” 첫 인간은 그 유혹에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4)

사탄은 예수님이 빵에 대해 관심 갖기를 원했습니다. 육체의 문제를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하고 해결해야만 인생의 다른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부추겼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달랐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말씀에 관심 갖기를 원했습니다. 육체의 배부름이 소중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빵은 세상 것이고 말씀은 하나님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빵도 하나님의 것이고, 말씀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도 만드셨고 우리의 영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복과 더불어 세상의 복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빵이 모자랄 때는 빵을 구해야 됩니다. 직장에서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그 기업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언제 투자하고 언제 멈춰야 할지 알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과 땅 모든 것에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빵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적인 필요를 무시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빵과 말씀, 이 두 가지는 인간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핵심요소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에게 떡과 빵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 중이신 예수님도 배고프셨습니다. 빵이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빵만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무리 비천하고 아무리 가난해도, 누추한 바닥 인생을 살아갈 때에도 인간은 짐승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복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라고, 장애우라고 세상에서 조롱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남보다 조금 모자라게 살아간다고 해서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삶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우리는 떡이 필요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오직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되면 허무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있습니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매뉴얼을 읽지 못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매뉴얼인 성경을 알지 못함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겪고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2만 불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나라를 지칭하는 2050 그룹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섰고 인구 강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몇 십 년 전만해도 얼마나 먹고 마실 것이 없었습니까? 지금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선배들의 열심과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순국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자살하는 사람들과 못 살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살벌해진 마음으로 나의 실패는 모두 남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과거에는 먹고 마실 것이 없어도 가슴은 따뜻했습니다. 하루의 삶에 감사하고, 이웃들과 함께함을 기뻐했습니다. 가난할 때 더 감사하고 기뻐했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잘 살게 되었지만 가슴이 더 냉랭해진 것은 우리가 부(富)에 모든 것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지 않으면 우리의 생은 몰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이신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놓치면 우리의 생은 결국 허무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을 다니시는 분이라면 모두 봉급 받는 날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할부로 산 것들, 대출 받은 것들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돈으로 한 달을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오직 돈 때문에만 직장에서 일한다면 얼마나 처량하겠습니까? 돈 만 아는 노동자, 단순히 돈 버는 기계. 이보다 더 슬프고 힘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돈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비인격화된 인간상을 갖게 됩니다. 모든 인간을 돈으로 측정하고 차별합니다. 결국 돈이 개인의 이마에 붙은 계급장이 됩니다. 이런 계급화 사회에서 따뜻한 인간관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조바심과 경쟁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돈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야 됩니다. 빵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이 가져도 겸손하고 없어도 당당하고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사고 팔 수 있는 세상은 결코 축복받은 사회가 아닙니다. 지금 전 세계가 돈 문제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돈이면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금 도덕과 윤리를 이야기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올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웃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가진 빵과 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매뉴얼인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이렇게 이끌어 주시고 많은 것들을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감사하면서 살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가슴으로 안으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하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내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됩니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 기업가는 기업가로서, 교육자는 교육자로서, 과학자는 과학자로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직장인으로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리 숙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가 감사하며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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