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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방식

사도행전 1: 21 ~ 26

김지철 목사

2016.04.10

하나님은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습니다. 나라의 행사입니다. 그리고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서 장로 열 사람을 택하는 투표가 있습니다. 교회의 일입니다.
선거는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고 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택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정치적인 인물을 뽑을 때는 헷갈릴 때가 더욱 많습니다. 선거 때가 다가오면 모든 후보자가 친절해지고, “나는 항상 국민 편에 서 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사람을 뽑을 때는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성경을 읽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지도자를 선택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필요하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 땅을 떠난 믿음의 사람, 자녀가 없었을 때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자녀가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 바로 아브라함이다. 이 같은 신앙의 사람을 보고 따르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필요하셨습니다.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다 내려놓고 오직 백성에게 헌신하는 이 정치가를 봐라.”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또 다윗이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순전한가. 백성을 사랑으로 섬기는 그의 모습을 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지도자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왜 지도자를 세우시는 걸까요? 지도자를 위해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첫 번째 목적은 백성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공동체를 살리고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지도자, 자신의 권력을 사유화하는 지도자를 ‘악한 지도자’, ‘못된 지도자’라고 하시며 심판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도자를 세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 땅을 지배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이 땅에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는가?’ 바로 이러한 물음에 긍정적인 답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가진 사람들,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권력이 없고 연약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알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이 지도자 중에 지도자, 권력자 중에 권력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분이 계시다. 그분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라고 내게 권력을 맡기셨다’는 인식이 있을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복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놓쳤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새로운 영적 지도자를 뽑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 (사도행전 1:25)

가룟 유다가 죽은 후 교회는 새로운 영적인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세우신 12명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문제 있는 인물이었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신임하셨습니다. 유다가 한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었습니다. 오늘말로 표현하면 재정 담당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재정을 담당해야 합니까? 지혜로운 사람,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돈을 맡겨도 될 만큼 괜찮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재정을 맡길 때,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망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가진 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가룟 유다는 제자들과 예수님께 신임을 받은 소중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무너졌을까요? 무엇 때문에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에 연연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에 연연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잊게 됩니다. 보이는 재물에 연연하게 되면 사람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물질적인 세계에 눈독을 들였던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시는 광경에 ‘나도 저런 능력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놓쳤습니다. 사람의 소중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마저 놓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많아서, 세상에서 잘나가서, 힘과 권력을 갖고 있어서 그 사람을 사귄다면, 그러한 관계는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돈이나 힘, 권력이 있으면 계속 그와 함께 갈 것이지만, 그것들이 없어지면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놓치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소중할수록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돈과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땅의 정치 권력자들의 행태는 자꾸만 다른 길로 갑니다. 권력만 추구합니다. 권력은 힘을 독점하기 때문에 본래 투쟁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거 때만 되면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고, 가진 권력을 나누지 않던 사람들이 돌변합니다. ‘내가 사람을 제일 소중히 여긴다’고 주장합니다. ‘국민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다’고도 말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조차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권력을 잡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국민이 목적이 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데 국민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사도행전 1:21)

예수님의 공생애부터 시작해서 부활의 현장까지 함께 있었던 인물을 말합니다. 즉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예수님과 함께 산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졌던 시간, 예수님을 체험했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양적 시간이 아니라 질적 시간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의 공유’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의 공유’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 (사도행전 1:22)

삶의 현장을 함께 나누었던 공간의 공유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 기도했던 경험, 산에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경험,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기쁨으로 동참했던 경험,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 사건에 참여한 경험 등 예수님과 함께한 사랑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했고, 예수님 때문에 감사했고, 예수님 때문에 감격했던 신앙의 이야기가 있어야 예수님에 대해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2절 후반부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행전 1:22)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 곧 예수님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고, 우리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가슴에 품은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증언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해서 할 말이 아무것도 없고,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건이 없는 영적인 빈곤 상태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사도행전 1:24~25)

이렇게 기도하고 뽑힌 인물이 바로 ‘맛디아’였습니다.

지도자를 세우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세울 때,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정치적인 지도자를 세울 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후보자가 기독교인이니 무조건 뽑겠다, 교회에서 항존직을 가지고 있으니 찍겠다 또는 나와 고향이 같거나 동창이니 선택하겠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올바른 선거 태도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정치 현장에 나가서 특정 정당을 선전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목사직을 내려놓고 아예 정치인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일 테지만, 목사의 이름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치적인 문제는 정치적인 것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보수든 진보든 모두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지지하든 중도적이든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관점이 기독교적인 가치관 위에서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통한 분별력으로 후보와 정당을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드러내고 있는가? 실현 가능한 공약을 내세우면서 백성을 사랑으로 섬기려고 준비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국회의원은 지역 사람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자리가 결코 아닙니다.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 정책과 방향을 만들어가는 곳이 국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만 진실이고 상대방은 모두 거짓’이라는 적대적인 태도로 불화와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이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누가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정치 집단이 양산하고 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까? 사유화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섬기고 사랑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나 권력을 갖게 되면 반드시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백성과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가 됩니다. 힘이 있으면 있을수록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참된 지도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전투구의 정치가 되지 않고, 화해와 용납이 가능한 정치가 됩니다. 서로 뜻은 다를 수 있지만 결국은 한배를 탄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대한민국이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또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에서 귀한 것 중 하나가 ‘통전적인’, ‘성실한’, ‘온전한’, ‘진실한’으로 번역될 수 있는 ‘integrative’입니다. 선거를 앞둔 때에만 국민을 섬긴다고 말하며 국민을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는 정치인을 배제시키는 능력이 국민에게 있어야 합니다.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인의 행동이 잠깐으로 끝나는지 아닌지 우리는 지켜봐야 합니다. 그들의 말투, 말의 내용, 행동이 일관성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나라와 국민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잠깐의 모습에 현혹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또 이 땅에 사는 연약한 사람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려는 마음이 있는지 봐야 합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 간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사회란, 내 아버지가 소위 말하는 ‘흙수저’지만,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면 내 세대에, 혹은 그 다음 세대에는 ‘금수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회입니다. 가난한 자에게도 기회가 있는 사회, 또 금수저라고 해도 교만하고 방탕하게 살면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나는 금수저니까 대대손손 금수저일 거야’, ‘나는 흙수저니까 대대손손 흙수저일 거야.’ 이러한 사고가 마치 진리처럼 작용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계급사회이고, 기회와 가능성이 막힌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동참합시다.

근대사회와 독재국가에서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피의 혁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혁명은 다른 형태로 일어납니다. 바로 선거 혁명이고, 투표 혁명입니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주권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특징이고 매력입니다. 따라서 투표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기독교적인 양심과 가치관에 따라 투표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 교회에서는 열 분의 장로를 세우는 일이 있습니다. 투표에 앞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이분들이 평소에도 예수님의 사랑과 인격이 드러나는 신앙생활을 했는가? 교회생활과 삶에 일관성이 있는가? 예수님처럼 희생과 섬김을 리더의 태도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저분을 보며 나도 예수 믿겠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인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 안의 연역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인가?’ 열 분의 장로를 세움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더욱 기뻐하시는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투표란 국가의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잔치입니다. 교회에서의 투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의 잔치면서 축제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표를 행사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사랑과 긍휼의 역사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을 믿으며 초대교회가 기도하며 사람을 세운 것처럼 기도하면서 투표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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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 21 ~ 26

21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23

그들이 두 사람을 내세우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세이요 하나는 맛디아라

24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26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하나님은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습니다. 나라의 행사입니다. 그리고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교회에서 장로 열 사람을 택하는 투표가 있습니다. 교회의 일입니다.
선거는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를 뽑고 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택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정치적인 인물을 뽑을 때는 헷갈릴 때가 더욱 많습니다. 선거 때가 다가오면 모든 후보자가 친절해지고, “나는 항상 국민 편에 서 있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사람을 뽑을 때는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성경을 읽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지도자를 선택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필요하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 땅을 떠난 믿음의 사람, 자녀가 없었을 때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자녀가 많아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 바로 아브라함이다. 이 같은 신앙의 사람을 보고 따르라.”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필요하셨습니다. “백성을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다 내려놓고 오직 백성에게 헌신하는 이 정치가를 봐라.”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또 다윗이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순전한가. 백성을 사랑으로 섬기는 그의 모습을 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지도자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왜 지도자를 세우시는 걸까요? 지도자를 위해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도자를 세우는 첫 번째 목적은 백성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공동체를 살리고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지도자, 자신의 권력을 사유화하는 지도자를 ‘악한 지도자’, ‘못된 지도자’라고 하시며 심판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도자를 세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 땅을 지배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이 땅에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는가?’ 바로 이러한 물음에 긍정적인 답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가진 사람들,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권력이 없고 연약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볼 줄 알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이 지도자 중에 지도자, 권력자 중에 권력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분이 계시다. 그분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라고 내게 권력을 맡기셨다’는 인식이 있을 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복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놓쳤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새로운 영적 지도자를 뽑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 (사도행전 1:25)

가룟 유다가 죽은 후 교회는 새로운 영적인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세우신 12명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문제 있는 인물이었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신임하셨습니다. 유다가 한 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었습니다. 오늘말로 표현하면 재정 담당자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재정을 담당해야 합니까? 지혜로운 사람,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돈을 맡겨도 될 만큼 괜찮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재정을 맡길 때,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망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가진 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가룟 유다는 제자들과 예수님께 신임을 받은 소중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무너졌을까요? 무엇 때문에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에 연연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에 연연하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을 잊게 됩니다. 보이는 재물에 연연하게 되면 사람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물질적인 세계에 눈독을 들였던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오병이어로 기적을 베푸시는 광경에 ‘나도 저런 능력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놓쳤습니다. 사람의 소중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마저 놓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사귀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많아서, 세상에서 잘나가서, 힘과 권력을 갖고 있어서 그 사람을 사귄다면, 그러한 관계는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돈이나 힘, 권력이 있으면 계속 그와 함께 갈 것이지만, 그것들이 없어지면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놓치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소중할수록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돈과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땅의 정치 권력자들의 행태는 자꾸만 다른 길로 갑니다. 권력만 추구합니다. 권력은 힘을 독점하기 때문에 본래 투쟁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거 때만 되면 권력을 잡기 위해 싸우고, 가진 권력을 나누지 않던 사람들이 돌변합니다. ‘내가 사람을 제일 소중히 여긴다’고 주장합니다. ‘국민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다’고도 말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조차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권력을 잡게 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국민이 목적이 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데 국민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사도행전 1:21)

예수님의 공생애부터 시작해서 부활의 현장까지 함께 있었던 인물을 말합니다. 즉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예수님과 함께 산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졌던 시간, 예수님을 체험했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양적 시간이 아니라 질적 시간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던 사랑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시간의 공유’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삶의 공유’입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 (사도행전 1:22)

삶의 현장을 함께 나누었던 공간의 공유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 기도했던 경험, 산에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경험,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기쁨으로 동참했던 경험,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 사건에 참여한 경험 등 예수님과 함께한 사랑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뻐했고, 예수님 때문에 감사했고, 예수님 때문에 감격했던 신앙의 이야기가 있어야 예수님에 대해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2절 후반부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사도행전 1:22)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 곧 예수님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고, 생명이시고, 우리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를 가슴에 품은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증언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해서 할 말이 아무것도 없고,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건이 없는 영적인 빈곤 상태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 (사도행전 1:24~25)

이렇게 기도하고 뽑힌 인물이 바로 ‘맛디아’였습니다.

지도자를 세우기 전에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세울 때,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정치적인 지도자를 세울 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후보자가 기독교인이니 무조건 뽑겠다, 교회에서 항존직을 가지고 있으니 찍겠다 또는 나와 고향이 같거나 동창이니 선택하겠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올바른 선거 태도가 아닙니다. 목회자가 정치 현장에 나가서 특정 정당을 선전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목사직을 내려놓고 아예 정치인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일 테지만, 목사의 이름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치적인 문제는 정치적인 것으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보수든 진보든 모두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지지하든 중도적이든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관점이 기독교적인 가치관 위에서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통한 분별력으로 후보와 정당을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드러내고 있는가? 실현 가능한 공약을 내세우면서 백성을 사랑으로 섬기려고 준비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국회의원은 지역 사람들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자리가 결코 아닙니다.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 정책과 방향을 만들어가는 곳이 국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만 진실이고 상대방은 모두 거짓’이라는 적대적인 태도로 불화와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이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누가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정치 집단이 양산하고 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까? 사유화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를 섬기고 사랑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이나 권력을 갖게 되면 반드시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백성과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진정한 지도자가 됩니다. 힘이 있으면 있을수록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참된 지도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이전투구의 정치가 되지 않고, 화해와 용납이 가능한 정치가 됩니다. 서로 뜻은 다를 수 있지만 결국은 한배를 탄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해야 대한민국이 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또 질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에서 귀한 것 중 하나가 ‘통전적인’, ‘성실한’, ‘온전한’, ‘진실한’으로 번역될 수 있는 ‘integrative’입니다. 선거를 앞둔 때에만 국민을 섬긴다고 말하며 국민을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는 정치인을 배제시키는 능력이 국민에게 있어야 합니다.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인의 행동이 잠깐으로 끝나는지 아닌지 우리는 지켜봐야 합니다. 그들의 말투, 말의 내용, 행동이 일관성이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나라와 국민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잠깐의 모습에 현혹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또 이 땅에 사는 연약한 사람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려는 마음이 있는지 봐야 합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 간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사회란, 내 아버지가 소위 말하는 ‘흙수저’지만,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면 내 세대에, 혹은 그 다음 세대에는 ‘금수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회입니다. 가난한 자에게도 기회가 있는 사회, 또 금수저라고 해도 교만하고 방탕하게 살면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나는 금수저니까 대대손손 금수저일 거야’, ‘나는 흙수저니까 대대손손 흙수저일 거야.’ 이러한 사고가 마치 진리처럼 작용하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계급사회이고, 기회와 가능성이 막힌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동참합시다.

근대사회와 독재국가에서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피의 혁명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혁명은 다른 형태로 일어납니다. 바로 선거 혁명이고, 투표 혁명입니다.
민주주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주권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특징이고 매력입니다. 따라서 투표를 하는 것은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기독교적인 양심과 가치관에 따라 투표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 교회에서는 열 분의 장로를 세우는 일이 있습니다. 투표에 앞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이분들이 평소에도 예수님의 사랑과 인격이 드러나는 신앙생활을 했는가? 교회생활과 삶에 일관성이 있는가? 예수님처럼 희생과 섬김을 리더의 태도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저분을 보며 나도 예수 믿겠다고 말할 수 있는 분인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 안의 연역한 사람, 소외된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인가?’ 열 분의 장로를 세움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더욱 기뻐하시는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투표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투표란 국가의 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잔치입니다. 교회에서의 투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의 잔치면서 축제입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표를 행사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사랑과 긍휼의 역사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을 믿으며 초대교회가 기도하며 사람을 세운 것처럼 기도하면서 투표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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