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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좋아하십니까? 왜 예수님께 예배를 드립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 되십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만큼 수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분의 생을 바라보며 자기 삶을 결단한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 이렇게 멋진 분이 계시다니! 저런 매력이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얻는 데 주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나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승으로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신 예수님께 집중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그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의 정점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몸은 별 볼 일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흙으로 창조된 몸입니다. 먼지일 뿐입니다. 그러니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빛나는 존재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인간이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들을 만나시며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고, 영혼의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이들을 돌보아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를 만나 제자로 불러주셨던 장소도 갈릴리 해변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거기서 만나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세금 계산하던 레위를 보시곤 “나를 따르라.” 하시며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즉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사람을 만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서나, 삶의 현장 어디서나, 그리고 어느 때나 그들을 찾아가셨고, 만나셨고, 인도하셨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존재적 인간’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죽기 얼마 전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소유적 인간에서 존재적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소유적 인간’이란 어떤 인간을 가리킬까요? 내 정체성이 가진 것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갖고 있는 것이 곧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소비하는 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연봉 순위, 사회적 지위 순위에 따라 나의 가치를 매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유적 인간의 삶의 태도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반면 ‘존재적 인간’은 인간 됨 자체에 가치를 둡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로 자존감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존재적 인간입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벌써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일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밤새도록 물고기를 낚고 있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지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물고기를 낚고 있느냐?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또한 마귀의 시험 앞에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설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라고 대응하셨습니다.
소유적 인간의 모습으로 침몰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인간 존재 자체가 얼마나 귀하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인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5:10 중)
더 많은 물고기를 낚아야 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해야 가정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거기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소유물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고, 이미 복된 존재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 사실을 혼자만 알지 말고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초청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세워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서셨고, 또 사람을 초청하셨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에게 다가가셨으며, 당신의 삶의 자리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을 초청합니까? 힘 있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내 곁에 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가진 게 없고 힘이 없는 사람이 내 곁에 오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되고 연약한 자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런 이들 곁으로 다가가셨고 초청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8~29)
우리는 잘 나가는 사람, 괜찮은 사람, 모든 게 여유로운 사람을 가까이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힘든 자, 괴로운 자, 힘겹게 살아가는 자를 부르시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우리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알게 모르게 사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거절당할까 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쉽게 사귀고 친화적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성품적으로 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버려진 사람들을 품으셨습니다. 그들을 수용하셨고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당신은 소중한 존재야.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실 때 처음엔 2인칭으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다 대화가 진척되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와 ‘우리’는 굉장히 다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당대 민중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당신의 동생들도 당신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 내 어머니인가? 또 누가 내 동생들인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다.” 마가복음 3장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4)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바로 우리의 형제, 자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친밀함을 공유하시며, ‘우리’라는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태복음 6:9 중)
주기도문 앞에 있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고, 믿음의 친구요, 동역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자부심과 자존감을 허락해 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나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받은 자입니다. 하나님, 나는 세상에 버려진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면, 그것이 우리 삶의 축복입니다. 예수님 안에 지혜와 생명, 평안, 우리 인생의 모든 대답과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자랑스러워야 믿는 나도 자랑스러워질 수 있고, 내가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바로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끊임없이 가르쳐 주신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너는 특별한 존재란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들이야.”라는 그 음성을 주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베다니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서 슬픔을 토로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3,3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3,35)
오라비의 죽음에 슬퍼하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아픔에 동참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두렵게 하며 불안에 떨게 하는 죽음의 고통에 주님은 동참하셨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 계시지 않고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 “죽음아, 네가 어찌하여 생명을 위협하는가? 물러가라!” 그렇게 나사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 이로써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신 사건 중 다음과 같은 사건도 있습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런데 18년 동안 귀신 들려 온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에 긍휼이 찾아듭니다. 결국 주님은 안식일임에도 그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회당장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당신, 오늘이 안식일인지 모릅니까? 왜 안식일에 이 여인을 고치십니까? 당신은 안식일 법을 위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3장 16절입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누가복음 13:16)
“이 여인이 얼마나 힘들었겠냐?”라는 말씀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라 1년, 2년도 아니라, 무려 18년 동안 탄식의 눈물을 흘려야 했을 여인의 마음을 예수님이 공감하십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세월 동안 슬픔을 넘어 분노도 느꼈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에도 희망을 둘 수 없어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아브라함의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조상,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 여인도 그 약속을 이어받을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권의 존엄성조차 얻지 못했던 여성을 향해 이미 구원 받은 자매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삶을 포기한 자들에게, 스스로 실패했다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내 탄식과 슬픔을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 것을 주님께서 다시 확인시켜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고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뚜렷합니다. 인간을 얽어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도, 귀신의 세력도, 세상의 그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적 세력도 인간을 억압하거나 착취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 이후 선포된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마가복음 2:27)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안식일 법도 그 목적은 ‘인간’을 위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평안, 자존감, 기쁨을 위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쉼과 평안을 방해하는 법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안식일이란 쉼을 허락하고, 치유하며, 살리는 날입니다. 또한 법이란 게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자연법에 의해 사람을 존중히 여길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참된 평안과 쉼을 주는 길을 택하라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휴머니즘을 지향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교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을 잘못 만나면, 그게 화가 되고 불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시고 축복과 자비도 베푸셨지만, 때로는 사람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셨고, 결국 사람 때문에 십자가 죽음까지 짊어지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휴머니즘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없는 휴머니즘과 하나님을 믿는 휴머니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없는 휴머니즘은 어느 순간 교만의 길로 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는 휴머니즘은 겸손을 잃지 않습니다.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휴머니즘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은 주체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주체자는 건방지게 변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인간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알게 되고, 잘못된 것도 회개하게 됩니다. 변화를 갈망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게 되고,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며,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복된 존재로 성숙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는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세태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을 못 미더워하고, 젊은이들은 나이 드신 분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요사이 ‘여혐’, ‘남혐’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는데,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혐오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또 요즘엔 난민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포착됩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의 새로운 삶의 자리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 또한 어르신들의 지난 삶을 존경하고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은 남성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얼굴 색, 지역 차이, 문화 차이를 넘어 어떤 사람이든 소중하게 여기고 귀히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난민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하며 대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을 했습니다. 그중 21명의 선수들이 이민자 출신이란 보고가 있습니다. 프랑스가 글로벌한 정책으로 사람들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얼마 가지 않아 단일민족이란 사고를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인권도 소중하고, 북한의 인권도 소중하며, 다른 나라의 인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CEO입니까? 직원입니까? 한 가정의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면 엄청난 에너지가 생깁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존중하리라.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을 리스펙트(respect) 하리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리라.’라고 결단하며 상대방을 대하게 되면, 우리의 삶도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이런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내 옆의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면,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리더십을 배우고 따라가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2: 27 ~ 28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으로 직접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좋아하십니까? 왜 예수님께 예배를 드립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이 되십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만큼 수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분의 생을 바라보며 자기 삶을 결단한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 이렇게 멋진 분이 계시다니! 저런 매력이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얻는 데 주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나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승으로서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신 예수님께 집중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그리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의 정점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몸은 별 볼 일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흙으로 창조된 몸입니다. 먼지일 뿐입니다. 그러니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빛나는 존재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인간이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망가진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들을 만나시며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고, 영혼의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이들을 돌보아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를 만나 제자로 불러주셨던 장소도 갈릴리 해변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거기서 만나셨습니다. 세관에 앉아 세금 계산하던 레위를 보시곤 “나를 따르라.” 하시며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즉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사람을 만난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서나, 삶의 현장 어디서나, 그리고 어느 때나 그들을 찾아가셨고, 만나셨고, 인도하셨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존재적 인간’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은 죽기 얼마 전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소유적 인간에서 존재적 인간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소유적 인간’이란 어떤 인간을 가리킬까요? 내 정체성이 가진 것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갖고 있는 것이 곧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소비하는 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연봉 순위, 사회적 지위 순위에 따라 나의 가치를 매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유적 인간의 삶의 태도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반면 ‘존재적 인간’은 인간 됨 자체에 가치를 둡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로 자존감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존재적 인간입니다.
사실 이러한 내용은 벌써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일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밤새도록 물고기를 낚고 있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지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물고기를 낚고 있느냐?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또한 마귀의 시험 앞에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설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라고 대응하셨습니다.
소유적 인간의 모습으로 침몰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인간 존재 자체가 얼마나 귀하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인가를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누가복음 5:10 중)
더 많은 물고기를 낚아야 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해야 가정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거기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소유물에 의해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고, 이미 복된 존재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 사실을 혼자만 알지 말고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라고 촉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초청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세워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서셨고, 또 사람을 초청하셨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에게 다가가셨으며, 당신의 삶의 자리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을 초청합니까? 힘 있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이 내 곁에 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반대로 가진 게 없고 힘이 없는 사람이 내 곁에 오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되고 연약한 자를 먼저 찾으셨습니다. 그런 이들 곁으로 다가가셨고 초청하시며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29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8~29)
우리는 잘 나가는 사람, 괜찮은 사람, 모든 게 여유로운 사람을 가까이하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힘든 자, 괴로운 자, 힘겹게 살아가는 자를 부르시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 우리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알게 모르게 사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거절당할까 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쉽게 사귀고 친화적으로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성품적으로 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 연약한 사람, 버려진 사람들을 품으셨습니다. 그들을 수용하셨고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당신은 소중한 존재야.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실 때 처음엔 2인칭으로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다 대화가 진척되면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와 ‘우리’는 굉장히 다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당대 민중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당신의 동생들도 당신을 만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 내 어머니인가? 또 누가 내 동생들인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다.” 마가복음 3장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가복음 3:34)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바로 우리의 형제, 자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감성적인 친밀함을 공유하시며, ‘우리’라는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태복음 6:9 중)
주기도문 앞에 있는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이는 너희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고, 믿음의 친구요, 동역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엄청난 자부심과 자존감을 허락해 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나의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용서받은 자입니다. 하나님, 나는 세상에 버려진 존재,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면, 그것이 우리 삶의 축복입니다. 예수님 안에 지혜와 생명, 평안, 우리 인생의 모든 대답과 해답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자랑스러워야 믿는 나도 자랑스러워질 수 있고, 내가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당당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바로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끊임없이 가르쳐 주신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너는 특별한 존재란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존재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들이야.”라는 그 음성을 주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려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베다니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때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 앞에서 슬픔을 토로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3,3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한복음 11:33,35)
오라비의 죽음에 슬퍼하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아픔에 동참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두렵게 하며 불안에 떨게 하는 죽음의 고통에 주님은 동참하셨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 계시지 않고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 “죽음아, 네가 어찌하여 생명을 위협하는가? 물러가라!” 그렇게 나사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 이로써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신 사건 중 다음과 같은 사건도 있습니다. 안식일 날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런데 18년 동안 귀신 들려 온몸이 꼬부라져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에 긍휼이 찾아듭니다. 결국 주님은 안식일임에도 그녀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회당장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당신, 오늘이 안식일인지 모릅니까? 왜 안식일에 이 여인을 고치십니까? 당신은 안식일 법을 위반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회당장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3장 16절입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누가복음 13:16)
“이 여인이 얼마나 힘들었겠냐?”라는 말씀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라 1년, 2년도 아니라, 무려 18년 동안 탄식의 눈물을 흘려야 했을 여인의 마음을 예수님이 공감하십니다. 아마도 그녀는 그 세월 동안 슬픔을 넘어 분노도 느꼈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어디에도 희망을 둘 수 없어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아브라함의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조상,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 여인도 그 약속을 이어받을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권의 존엄성조차 얻지 못했던 여성을 향해 이미 구원 받은 자매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삶을 포기한 자들에게, 스스로 실패했다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옵니다. 내 탄식과 슬픔을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인 것을 주님께서 다시 확인시켜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고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뚜렷합니다. 인간을 얽어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질병도, 귀신의 세력도, 세상의 그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적 세력도 인간을 억압하거나 착취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이 거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 이후 선포된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마가복음 2:27)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안식일 법도 그 목적은 ‘인간’을 위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평안, 자존감, 기쁨을 위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쉼과 평안을 방해하는 법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안식일이란 쉼을 허락하고, 치유하며, 살리는 날입니다. 또한 법이란 게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자연법에 의해 사람을 존중히 여길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참된 평안과 쉼을 주는 길을 택하라고 지속적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휴머니즘을 지향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과 교제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을 잘못 만나면, 그게 화가 되고 불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시고 축복과 자비도 베푸셨지만, 때로는 사람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셨고, 결국 사람 때문에 십자가 죽음까지 짊어지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휴머니즘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없는 휴머니즘과 하나님을 믿는 휴머니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없는 휴머니즘은 어느 순간 교만의 길로 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는 휴머니즘은 겸손을 잃지 않습니다.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휴머니즘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은 주체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주체자는 건방지게 변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인간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알게 되고, 잘못된 것도 회개하게 됩니다. 변화를 갈망하게 되고, 다시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게 되고,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며, 가진 것을 함께 나누는 복된 존재로 성숙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는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세태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을 못 미더워하고, 젊은이들은 나이 드신 분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요사이 ‘여혐’, ‘남혐’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는데,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혐오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또 요즘엔 난민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포착됩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의 새로운 삶의 자리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젊은이들 또한 어르신들의 지난 삶을 존경하고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은 남성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얼굴 색, 지역 차이, 문화 차이를 넘어 어떤 사람이든 소중하게 여기고 귀히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난민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하며 대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러시아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을 했습니다. 그중 21명의 선수들이 이민자 출신이란 보고가 있습니다. 프랑스가 글로벌한 정책으로 사람들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얼마 가지 않아 단일민족이란 사고를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인권도 소중하고, 북한의 인권도 소중하며, 다른 나라의 인권도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CEO입니까? 직원입니까? 한 가정의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꾸면 엄청난 에너지가 생깁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존중하리라.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을 리스펙트(respect) 하리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존재가 바로 인간임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리라.’라고 결단하며 상대방을 대하게 되면, 우리의 삶도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이런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내 옆의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되면, 내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세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리더십을 배우고 따라가며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