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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둘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2007년부터 5월 21일이 부부의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에서 21일을 부부의 날로 제정한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핵심은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랑으로 세워진 가정들이 너무나 쉽게 깨어지면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특별히 젊은 부부들은 너무 쉽게 이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많은 어르신들은 ‘우리도 같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참고 기다려서 새롭게 시작했는데…’ 라고 하시며 걱정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귀한 자리도 바로 부부입니다. 부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부부를 ‘가위’와 같다고 정의합니다. 두 개의 날이 함께 움직여야 가위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부를 ‘한글의 자음과 모음’과 같다고 정의합니다. 각각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둘이 합치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불협화음도 내지만 그것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부부란 지겹게 싸우다가 서로 닮아가는 모습에 허탈해져서 웃게 되는 사이다.”
“부부란 느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를 가지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말줄임표(…)로 끝나는 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부를 아주 간단하게 정의하셨습니다.
“둘이 하나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0:6~9)
부부가 둘인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서로 하나가 된 것처럼 남편과 아내도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부부란 다르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몇 가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해는 부부가 되면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나 갓 결혼한 부부들은 동일한 커플링을 손에 끼고 자랑합니다. 때로는 똑같은 색이나 무늬의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곤 합니다. 그러나 부부가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사실 진정한 하나됨이 아닙니다. 부부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한다는 것은 누군가 한사람의 독재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너는 나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이지 공동체가 아닙니다. 집단은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다르면 악이요, 배신이요, 죽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부부란 다르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이면서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부의 통일성과 다양성이라고 말합니다. 디자인하는 사람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두 가지를 염두에 둡니다. 하나는 통일성이고, 또 하나는 다양성입니다.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광고를 자세히 보십시오. 통일성이 강조되면 보기가 쉽습니다. 그 이미지가 강렬하고 주제가 무엇인지 쉽게 다가옵니다. 하나의 콘셉트로 전체를 붙잡고 있습니다. 반대로 다양성이 강조되면 섬세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멋이 있고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함께 만나는 것을 조화라고 부릅니다.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랑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통일성과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때 상대방에게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가 같음을 인정할 때 우리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랑과 열정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부부의 관계를 역동성 있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두 사람이 똑같다면 변화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100% 속하는 것은 멋진 부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부가 30% 정도를 공유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즉 이상적인 부부상은 두 개의 원이 있는데 둘이 공유하는 부분이 30%이고, 나머지는 자기의 독특한 삶의 내용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 전문가들은 이럴 때 통일성과 다양성의 아름다운 조화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됨은 따뜻하게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있으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살면 한 가족일 수 있습니다. 한 방을 쓰면 부부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 침대를 쓴다면 분명 남편과 아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맞으면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많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기쁨과 감사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친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을까요? 대제사장적 기도가 시작되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서로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호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가까운 하나됨의 모습입니다.
저는 종종 자녀들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른 적도 있지만 때로는 “아들아! 딸아!” 라고 부르곤 합니다. 편지를 쓸 때에도 “내 아들아! 내 딸아!” 라고 쓸 때가 많습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라고 부를 때 더 가까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관계성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에게도 칭호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호칭으로 아내와 남편을 부르십니까? 자신의 아내를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여편네’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보’라는 말에는 친밀감과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편네’라는 말에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이 있습니다.
‘여보’라는 말은 ‘여보세요’의 줄임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같을 여(如)’자에 ‘보배 보(寶)’자를 사용하여 ‘여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내 아내가 보배와 같이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남편을 ‘당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당할 당(當)’자와 ‘몸 신(身)’자를 함께 써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내 몸과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쓰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서로를 ‘자기야!’ 라고 부릅니다. 국어학적으로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나 당신이나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애교스러운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은 서로를 호칭으로 불러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여보’라고 부르면 쑥스럽습니다. ‘당신’이라고 불러보려 해도 그 말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도 서로를 호칭으로 불러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한번 결심하시고 아내를 ‘여보’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당신’이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말로 하기가 어려우면 쪽지에라도 써서 건네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핸드폰의 문자로 적어서 보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됨의 시작입니다. 하나됨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향한 따뜻한 부름 하나가 하나됨의 시작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경쟁자를 두지 마십시오
하나됨의 중요한 태도가 무엇일까요?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젊을 때의 열정만으로는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년이 지나면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하면 귀한 사람이 될까? 상대방이 어떻게 하면 더 성숙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됨의 비결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경쟁자가 없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끼어들어오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자녀들이 끼어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부모들이 끼어들어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한 남편이 아내와 식사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내일 점심시간에 약속이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남편이 똑같이 약속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내의 존귀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남편이 밖에서 힘들게 직장생활하다가 들어왔는데 아내는 재미있는 드라마에 빠져있습니다. 남편이 초인종을 누릅니다. 그러자 아내는 “얘야, 네가 가서 열어라!”하며 자식을 내보냅니다. 여러분, 남편이 들어왔는데 드라마만 보고 있는 아내를 보면 그 아내가 사랑스러울까요? 아내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드라마를 보다가도 남편이 오면 벌떡 일어나 나가서 기쁨으로 맞아주십시오. 껴안아주시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십시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하루는 결혼한 제 아들과 제 딸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너의 엄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네 아내이고 네 남편이다. 네 아내와 네 남편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엄마와 아빠한테 잘하는 것이다.” 또 손녀를 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집에 들어왔을 때 아이가 먼저 달려온다고 아이부터 껴안지 마라. 네 아내부터 껴안아라. 그 후에 아이를 껴안아라. 엄마가 나보다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남편이 아내를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자식도 참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부모에게도 효도할 수가 있습니다. 저라고 제 아들이 저를 먼저 생각하고, 제 딸이 저를 먼저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경쟁자로 끼어듭니까? 아들과 딸, 부모, 친구, 취미, 내가 하고 있는 일 등 수없이 많은 것들이 부부관계를 훼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 꿇는 것이 우선입니다. 제자들을 키우는 것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그 안에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뜻을 확인하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귀히 여기고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이 시대에 가족의 위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생각납니다. 자기 민족이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눈물과 탄식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기도를 못했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봉사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혼인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너는 네 아내를 우습게 생각했고 네 남편을 우습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네 예배와 제물을 받지 않겠다!”
“그러면서 너희는 오히려,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하고 묻는다. 그 까닭은, 네가 젊은 날에 만나서 결혼한 너의 아내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며, 주께서 이 일에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너의 동반자이며, 네가 성실하게 살겠다고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인데도, 네가 아내를 배신하였다.” (말라기 2:14, 표준새번역)
아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다른 여자를 탐한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는 가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무슨 예배를 드리겠냐고 꾸짖고 계십니다.
남편 되신 분들이여,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놓은 것처럼 아내를 귀히 여기고 생명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십시오. 아내 되신 분들이여, 남편을 존귀하게 여기고 존경하고 남편의 말에 순종하십시오. 남편에게 수고하고 애썼다고 말씀하십시오. 결혼이란 평생에 걸쳐 만들어질 우리의 사랑의 작품입니다. 아내는 평생 남편의 사랑의 작품이 됩니다. 남편도 평생 아내의 사랑의 작품이 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소리를 버럭 지릅니까? 왜 미워하고 분노합니까? 왜 다른 곳에 나가서 사나워집니까? 그것은 가정에서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여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입니다. 우리 가정으로부터 생명의 역사와 신앙의 역사가 새롭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성도님들의 가정에서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7: 20 ~ 26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부부는 둘이 하나라는 뜻입니다
2007년부터 5월 21일이 부부의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에서 21일을 부부의 날로 제정한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핵심은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랑으로 세워진 가정들이 너무나 쉽게 깨어지면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특별히 젊은 부부들은 너무 쉽게 이혼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많은 어르신들은 ‘우리도 같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참고 기다려서 새롭게 시작했는데…’ 라고 하시며 걱정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귀한 자리도 바로 부부입니다. 부부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부부를 ‘가위’와 같다고 정의합니다. 두 개의 날이 함께 움직여야 가위질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부를 ‘한글의 자음과 모음’과 같다고 정의합니다. 각각 떨어져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둘이 합치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불협화음도 내지만 그것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정의합니다.
“부부란 지겹게 싸우다가 서로 닮아가는 모습에 허탈해져서 웃게 되는 사이다.”
“부부란 느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를 가지고 살다가 마지막에는 말줄임표(…)로 끝나는 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부를 아주 간단하게 정의하셨습니다.
“둘이 하나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0:6~9)
부부가 둘인데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서로 하나가 된 것처럼 남편과 아내도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부부란 다르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것에 대해 몇 가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해는 부부가 되면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이나 갓 결혼한 부부들은 동일한 커플링을 손에 끼고 자랑합니다. 때로는 똑같은 색이나 무늬의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곤 합니다. 그러나 부부가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사실 진정한 하나됨이 아닙니다. 부부가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한다는 것은 누군가 한사람의 독재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너는 나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이지 공동체가 아닙니다. 집단은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다르면 악이요, 배신이요, 죽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가하는 것입니다.
부부란 다르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이면서 서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부의 통일성과 다양성이라고 말합니다. 디자인하는 사람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두 가지를 염두에 둡니다. 하나는 통일성이고, 또 하나는 다양성입니다.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광고를 자세히 보십시오. 통일성이 강조되면 보기가 쉽습니다. 그 이미지가 강렬하고 주제가 무엇인지 쉽게 다가옵니다. 하나의 콘셉트로 전체를 붙잡고 있습니다. 반대로 다양성이 강조되면 섬세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멋이 있고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함께 만나는 것을 조화라고 부릅니다.
부부가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랑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도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통일성과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때 상대방에게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가 같음을 인정할 때 우리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사랑과 열정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부부의 관계를 역동성 있게 하고 새롭게 합니다. 두 사람이 똑같다면 변화도 없고 새로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100% 속하는 것은 멋진 부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부가 30% 정도를 공유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즉 이상적인 부부상은 두 개의 원이 있는데 둘이 공유하는 부분이 30%이고, 나머지는 자기의 독특한 삶의 내용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 전문가들은 이럴 때 통일성과 다양성의 아름다운 조화가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됨은 따뜻하게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오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있으면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살면 한 가족일 수 있습니다. 한 방을 쓰면 부부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 침대를 쓴다면 분명 남편과 아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맞으면서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많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기쁨과 감사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친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을까요? 대제사장적 기도가 시작되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1)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서로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서로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호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가까운 하나됨의 모습입니다.
저는 종종 자녀들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른 적도 있지만 때로는 “아들아! 딸아!” 라고 부르곤 합니다. 편지를 쓸 때에도 “내 아들아! 내 딸아!” 라고 쓸 때가 많습니다. “내 아들아, 내 딸아” 라고 부를 때 더 가까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관계성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에게도 칭호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호칭으로 아내와 남편을 부르십니까? 자신의 아내를 ‘여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여편네’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보’라는 말에는 친밀감과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편네’라는 말에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이 있습니다.
‘여보’라는 말은 ‘여보세요’의 줄임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같을 여(如)’자에 ‘보배 보(寶)’자를 사용하여 ‘여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내 아내가 보배와 같이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남편을 ‘당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당할 당(當)’자와 ‘몸 신(身)’자를 함께 써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내 몸과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쓰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서로를 ‘자기야!’ 라고 부릅니다. 국어학적으로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나 당신이나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애교스러운 호칭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은 서로를 호칭으로 불러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여보’라고 부르면 쑥스럽습니다. ‘당신’이라고 불러보려 해도 그 말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도 서로를 호칭으로 불러보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한번 결심하시고 아내를 ‘여보’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당신’이라고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말로 하기가 어려우면 쪽지에라도 써서 건네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핸드폰의 문자로 적어서 보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됨의 시작입니다. 하나됨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향한 따뜻한 부름 하나가 하나됨의 시작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경쟁자를 두지 마십시오
하나됨의 중요한 태도가 무엇일까요?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젊을 때의 열정만으로는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년이 지나면 열정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하면 귀한 사람이 될까? 상대방이 어떻게 하면 더 성숙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됨의 비결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높이기 위해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비결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경쟁자가 없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끼어들어오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자녀들이 끼어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부모들이 끼어들어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첫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한 남편이 아내와 식사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내일 점심시간에 약속이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남편이 똑같이 약속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내의 존귀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남편이 밖에서 힘들게 직장생활하다가 들어왔는데 아내는 재미있는 드라마에 빠져있습니다. 남편이 초인종을 누릅니다. 그러자 아내는 “얘야, 네가 가서 열어라!”하며 자식을 내보냅니다. 여러분, 남편이 들어왔는데 드라마만 보고 있는 아내를 보면 그 아내가 사랑스러울까요? 아내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요? 드라마를 보다가도 남편이 오면 벌떡 일어나 나가서 기쁨으로 맞아주십시오. 껴안아주시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십시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하루는 결혼한 제 아들과 제 딸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너의 엄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네 아내이고 네 남편이다. 네 아내와 네 남편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엄마와 아빠한테 잘하는 것이다.” 또 손녀를 본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집에 들어왔을 때 아이가 먼저 달려온다고 아이부터 껴안지 마라. 네 아내부터 껴안아라. 그 후에 아이를 껴안아라. 엄마가 나보다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남편이 아내를 우선적으로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자식도 참 사랑을 배울 수 있고 부모에게도 효도할 수가 있습니다. 저라고 제 아들이 저를 먼저 생각하고, 제 딸이 저를 먼저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경쟁자로 끼어듭니까? 아들과 딸, 부모, 친구, 취미, 내가 하고 있는 일 등 수없이 많은 것들이 부부관계를 훼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 꿇는 것이 우선입니다. 제자들을 키우는 것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보다 우선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그 안에 끼어들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뜻을 확인하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귀히 여기고 남편을 존경하십시오
이 시대에 가족의 위기를 보면 이스라엘이 생각납니다. 자기 민족이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 눈물과 탄식으로 제물을 바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응답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기도를 못했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봉사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혼인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너는 네 아내를 우습게 생각했고 네 남편을 우습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네 예배와 제물을 받지 않겠다!”
“그러면서 너희는 오히려,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하고 묻는다. 그 까닭은, 네가 젊은 날에 만나서 결혼한 너의 아내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며, 주께서 이 일에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너의 동반자이며, 네가 성실하게 살겠다고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인데도, 네가 아내를 배신하였다.” (말라기 2:14, 표준새번역)
아내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다른 여자를 탐한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는 가짜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무슨 예배를 드리겠냐고 꾸짖고 계십니다.
남편 되신 분들이여,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을 내어놓은 것처럼 아내를 귀히 여기고 생명을 다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십시오. 아내 되신 분들이여, 남편을 존귀하게 여기고 존경하고 남편의 말에 순종하십시오. 남편에게 수고하고 애썼다고 말씀하십시오. 결혼이란 평생에 걸쳐 만들어질 우리의 사랑의 작품입니다. 아내는 평생 남편의 사랑의 작품이 됩니다. 남편도 평생 아내의 사랑의 작품이 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소리를 버럭 지릅니까? 왜 미워하고 분노합니까? 왜 다른 곳에 나가서 사나워집니까? 그것은 가정에서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여 마음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입니다. 우리 가정으로부터 생명의 역사와 신앙의 역사가 새롭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성도님들의 가정에서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