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사랑하는 기쁨

전도서 9: 9

김지철 목사

2015.01.25

대한민국의 이혼률이 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혼률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신혼이혼도 황혼이혼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신혼이혼이란, 결혼한 지 4년 안에 이혼하는 것이고, 황혼이혼이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서 이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2013년 이혼 건수는 115,725건입니다. 그중 신혼이혼이 27,299건(23.7%), 황혼이혼이 32,433건(28.1%)으로 이 둘만 합해도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황혼이혼의 주된 이유는, 과반수 이상이 ‘성격차이’라고 합니다. 이 성격차이라는 말에는 아마 많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성격차이 다음으로는 경제 문제, 가족 간의 불화라는 대답들이 이어졌습니다.
작년에 한 연구소에서 50세 이상 98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은퇴 후 행복한 노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건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부터 대답이 달라집니다. 남자들은 두 번째가 배우자, 세 번째가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돈이 먼저고 배우자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순위로는 2,3위이지만, 배우자를 답하는 수치는 낮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은 아내에게 잘 해야 된다는 세상 속설을 그대로 반영하는 통계였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왜 슬프고 아픈 이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남자의 책임도 있고, 여자의 책임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결혼을 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내는 가정과 남편을 위해 최대한 헌신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아내에게 요구합니다. 연애시절처럼 잘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여자는 결혼 후에 이중, 삼중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해서 만났는데, 그 사랑이 지속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받는 상처가 사랑하면서 받는 감동보다 더 크기 때문에, ‘내가 이 사람과 살아야 되나’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남자는 결혼을 사랑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여자는 사랑의 출발역으로 생각합니다. 남자는 결혼을 하면,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이미 완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가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것은 남자들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여자에게는 행복한 결혼 생활이 목적인데 남편이 함께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식에게만 관심과 정성을 쏟게 되고, 자연스레 남편에 대한 사랑은 식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는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귀하다고 여기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돌아올 때에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내와 함께 산책하는 것도 남편의 일인 것입니다. 자녀와 대화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도 아버지의 일인 것입니다. 작은 일이 아니라, 아주 중대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그 가정이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과 딸만 자식이 아니라 남편도 큰 아들이라 생각하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남편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남편의 자존감을 세워줄 줄 아는 여자가 남편과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인해 만들어진 가정에 왜 다시 사랑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교육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는 가장 빛나는 기쁨, 인간 최고의 기쁨을 가정에서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은 가정의 웃음이다. 그 다음의 기쁨은 어린이를 보는 부모들의 즐거움이다. 이 두 가지의 기쁨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하기에 나누는 기쁨, 자식들을 키우면서 경험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에서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나가고 아무리 명예가 높아도, 가정에 기쁨이 없다면, 불만과 불평뿐인 가정이라면 그는 진정한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내 아내, 내 남편을 기뻐합니까? 내 자식들을 생각할 때 기쁨이 충만합니까? 이 기쁨을 상실했다면, 우리 인생은 반쪽짜리 인생으로 멈춰 설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요사이 결혼 연령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앞당길 수 있을까?’ 저는 기도하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결혼 주례를 하다보면, 20대 부부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전부 다 서른이 넘어갑니다. 서른만 넘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사십대가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의 연령과 상관없이 주례를 할 때마다 원칙 하나를 제시하고 부부에게 사인을 요구합니다. 자녀를 두 명이상 낳겠다는 다짐입니다. 그것에 사인하지 않으면 주례를 해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삼십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사실 사십 대에게는 사인하라고 해야 하는지 저도 조금 걱정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니 기도로 준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겠다는 마음으로 사인하고, 결혼식 때에도 그렇게 대답을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모두들 기쁨 마음으로 사인하고 그렇게 대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딩크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딩크족이 무엇일까요? Double Income, No Kids, 즉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자녀들은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들입니다. 둘이 함께 벌기에 소득은 많지만, ‘자녀는 갖지 말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 후 3,4년이 지나면 가정생활에 큰 재미가 없어집니다. 싫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자녀를 가져야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습니다.
늦게 자녀를 낳은 어머니 50명에게 자녀를 낳아보니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큰소리로 웃을 때, 아이가 태어난 순간,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웃을 때, 아이가 아빠와 놀고 있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양육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일하는 기쁨’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일함의 기쁨은, 대상이 인격이 아닙니다. 물질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은, 그 대상은 인격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인생의 무의미와 헛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전도서는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삶은 금방 무너질 것이고, 그러하기에 허무하고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9:9)

무상하게 흘러가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유의미하게 바꾸어 놓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남자들에게 성취욕과 업적욕은 아주 중요합니다. 잘나갈 때에는 괜찮지만 어느 날 그것이 별것 아님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 없이 그저 욕심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행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 그것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될까요? 결코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데에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내 가족입니다.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내 남편을 사랑하고, 내 부모님을 사랑하고,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인생을 멋지게 하고 보람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잘 안됩니다. 진실한 사랑, 진정한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사람들은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 저절로 되는 사랑이란, 청년 때 불일 듯 일어나는 사랑의 열정입니다. 하지만 그 뜨거움의 시기는 지나고,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려면 배워야 합니다. 남을 쉽게 미워하고, 남에게 빨리 분노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배운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사랑을 배운 사람들이 남에게도 넉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남을 사랑하는 법도 알고, 사랑에 실패해도 상처를 덜 받습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붓습니까? 동물의 세계를 봐도, 새끼를 키우는 짐승들을 보면, 참 놀랍다고 여겨집니다. 짐승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먹는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인 개도, 주인이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하다가 먹을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으르렁대면서 달려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짐승이, 새끼를 위해 자신이 먹는 것을 포기하고 새끼를 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사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최근에 잔잔한 감동을 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관람객 500만 명을 넘어선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입니다. 76년 이상 부부로 살아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해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의 방식이 무척 애틋하고 멋집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추억을 만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표증이 무엇일까요? “나는 아버지와 많은 추억이 있어.”,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사랑의 추억이 많아.”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매번 자녀와 공부하는 곳만 갔다 오면, 사랑의 추억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자녀들과 대화하고, 함께 여행도 하고, 봉사나 선교도 함께 가면서 부모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추억이 생깁니다. 사랑은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 할아버지, 할머니는 봄에는 꽃을 서로의 머리에 꽂아 주면서 좋아합니다. 여름에는 물장구를 치면서 행복해합니다. 가을에는 낙엽을 던지면서 어린아이처럼 놉니다.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면서 서로 찬 손을 호호 불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추억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소중함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젊은 날의 사랑은 뜨거운 용광로처럼,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시간이 흐르면 그런 사랑의 열정은 식게 마련입니다. 그 다음에는 친구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정을 쌓는 것입니다. 뜨겁지는 않아도 곁에 있으면 따뜻한 사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둘째, 나이가 들어도 자주 스킨십을 합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몸을 씻겨주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적이 언제입니까?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이야기한 적이 언제입니까? 남편의 등을 두드려 본 적이 언제입니까?
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신 참 잘 생겼네.” 하면서 서로를 쓰다듬습니다. 이것은 젊을 때의 스킨십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안에는 정이 있고, 따뜻한 우정이 들어 있습니다.
셋째, 서로가 서로를 지켜줍니다.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을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기침을 하면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존중’과 ‘함께 함’이 사랑입니다.

인생은 허망하게 사라질 것 아닙니까? 안개처럼 사라질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 노인들처럼 90세, 100세까지 살 수 있다는 명백한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 인생이 마감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허망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할아버지가 죽고 그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허망한 인생,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의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사랑이 희망이고 기쁨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살아갈 때 서로 해서는 안 될 것 한 가지와 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도, 부모와 자녀 사이도,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갈입니다. 서로에게 공갈을 치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공갈을 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당신 왜 그 따위야. 나 당신하고 이혼할 거야.”, “너 말 좀 잘 들어. 그렇지 않으면 고아원에 보낼 거야.” 이런 말을 함부로 합니다. 이것은 공갈이고 협박입니다.
이런 말들을 듣게 되면 미움이 생깁니다. 분노가 생깁니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쫒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아내와 남편을 서로 겁주는 부부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자녀가 부모를 무서워하게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방이 큰소리라도 칠까봐 숨을 죽이면서 생활한다면, 그곳이 무슨 천국입니까? 아버지나 어머니가 볼까봐 슬금슬금 숨는 자녀가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할 사람이 해야 할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내가 밥을 해주었습니까? 맛있게 먹고 나서 맛있게 먹었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아니 그것이 사랑, 그 자체입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아버지에게 얼마나 힘들었냐며 등을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삶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 대화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약속은, 아무리 바빠도 중요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내일 아내와 약속을 했는데, 저녁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내일 저녁에 약속 있어?” 한국 남자들 열 명 중 아홉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내와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나 약속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죄입니다. 약속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날, 다른 시각에 새로운 약속을 잡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축복을 나눌 수 없습니다.
자녀와 대화하는 것, 함께 놀아주는 것도 아버지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하는 것만 ‘일’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는 것도 사랑의 일입니다. 그래야 가정이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최고의 사랑 방식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서 하나님은 그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며 삽시다.

우리의 사랑은 늘 방전됩니다. 쉽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사랑으로 나의 방전된 사랑을 충전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당신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일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내가 다시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내 아내, 내 남편, 내 부모, 내 자식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이러한 사랑을 경험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 볼 때, 나는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까? 내 가정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남편들에게 권합니다. 남편들이 먼저 시작하세요. 아내는 남편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니 남편들이 먼저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과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도 칭찬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이 축복을, 사랑하는 기쁨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전도서 9: 9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대한민국의 이혼률이 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혼률이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신혼이혼도 황혼이혼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신혼이혼이란, 결혼한 지 4년 안에 이혼하는 것이고, 황혼이혼이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서 이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2013년 이혼 건수는 115,725건입니다. 그중 신혼이혼이 27,299건(23.7%), 황혼이혼이 32,433건(28.1%)으로 이 둘만 합해도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황혼이혼의 주된 이유는, 과반수 이상이 ‘성격차이’라고 합니다. 이 성격차이라는 말에는 아마 많은 의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성격차이 다음으로는 경제 문제, 가족 간의 불화라는 대답들이 이어졌습니다.
작년에 한 연구소에서 50세 이상 98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은퇴 후 행복한 노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건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부터 대답이 달라집니다. 남자들은 두 번째가 배우자, 세 번째가 돈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돈이 먼저고 배우자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순위로는 2,3위이지만, 배우자를 답하는 수치는 낮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은 아내에게 잘 해야 된다는 세상 속설을 그대로 반영하는 통계였습니다.
그렇게도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왜 슬프고 아픈 이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물론 여기에는 남자의 책임도 있고, 여자의 책임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결혼을 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내는 가정과 남편을 위해 최대한 헌신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아내에게 요구합니다. 연애시절처럼 잘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여자는 결혼 후에 이중, 삼중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해서 만났는데, 그 사랑이 지속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서 받는 상처가 사랑하면서 받는 감동보다 더 크기 때문에, ‘내가 이 사람과 살아야 되나’라는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남자는 결혼을 사랑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여자는 사랑의 출발역으로 생각합니다. 남자는 결혼을 하면,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이미 완성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가정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것은 남자들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여자에게는 행복한 결혼 생활이 목적인데 남편이 함께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식에게만 관심과 정성을 쏟게 되고, 자연스레 남편에 대한 사랑은 식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는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귀하다고 여기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가정으로 돌아올 때에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내와 함께 산책하는 것도 남편의 일인 것입니다. 자녀와 대화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도 아버지의 일인 것입니다. 작은 일이 아니라, 아주 중대한 일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그 가정이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과 딸만 자식이 아니라 남편도 큰 아들이라 생각하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남편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남편의 자존감을 세워줄 줄 아는 여자가 남편과의 사랑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인해 만들어진 가정에 왜 다시 사랑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교육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페스탈로치(Pestalozzi, Johann Heinrich)는 가장 빛나는 기쁨, 인간 최고의 기쁨을 가정에서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음은 그의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은 가정의 웃음이다. 그 다음의 기쁨은 어린이를 보는 부모들의 즐거움이다. 이 두 가지의 기쁨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하기에 나누는 기쁨, 자식들을 키우면서 경험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인생에서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 나가고 아무리 명예가 높아도, 가정에 기쁨이 없다면, 불만과 불평뿐인 가정이라면 그는 진정한 기쁨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내 아내, 내 남편을 기뻐합니까? 내 자식들을 생각할 때 기쁨이 충만합니까? 이 기쁨을 상실했다면, 우리 인생은 반쪽짜리 인생으로 멈춰 설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요사이 결혼 연령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앞당길 수 있을까?’ 저는 기도하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결혼 주례를 하다보면, 20대 부부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전부 다 서른이 넘어갑니다. 서른만 넘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사십대가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의 연령과 상관없이 주례를 할 때마다 원칙 하나를 제시하고 부부에게 사인을 요구합니다. 자녀를 두 명이상 낳겠다는 다짐입니다. 그것에 사인하지 않으면 주례를 해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삼십 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사실 사십 대에게는 사인하라고 해야 하는지 저도 조금 걱정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니 기도로 준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겠다는 마음으로 사인하고, 결혼식 때에도 그렇게 대답을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모두들 기쁨 마음으로 사인하고 그렇게 대답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 ‘딩크족’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딩크족이 무엇일까요? Double Income, No Kids, 즉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자녀들은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들입니다. 둘이 함께 벌기에 소득은 많지만, ‘자녀는 갖지 말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 후 3,4년이 지나면 가정생활에 큰 재미가 없어집니다. 싫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자녀를 가져야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습니다.
늦게 자녀를 낳은 어머니 50명에게 자녀를 낳아보니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큰소리로 웃을 때, 아이가 태어난 순간,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웃을 때, 아이가 아빠와 놀고 있는 것을 볼 때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양육하는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일하는 기쁨’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일함의 기쁨은, 대상이 인격이 아닙니다. 물질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은, 그 대상은 인격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인생의 무의미와 헛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전도서는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삶은 금방 무너질 것이고, 그러하기에 허무하고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9:9)

무상하게 흘러가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유의미하게 바꾸어 놓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내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남자들에게 성취욕과 업적욕은 아주 중요합니다. 잘나갈 때에는 괜찮지만 어느 날 그것이 별것 아님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 없이 그저 욕심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행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 그것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될까요? 결코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데에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내 가족입니다.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내 남편을 사랑하고, 내 부모님을 사랑하고,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인생을 멋지게 하고 보람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잘 안됩니다. 진실한 사랑, 진정한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사람들은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 저절로 되는 사랑이란, 청년 때 불일 듯 일어나는 사랑의 열정입니다. 하지만 그 뜨거움의 시기는 지나고, 한 사람을 지속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려면 배워야 합니다. 남을 쉽게 미워하고, 남에게 빨리 분노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배운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사랑을 배운 사람들이 남에게도 넉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남을 사랑하는 법도 알고, 사랑에 실패해도 상처를 덜 받습니다.
또한 진정한 사랑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의 에너지를 쏟아붓습니까? 동물의 세계를 봐도, 새끼를 키우는 짐승들을 보면, 참 놀랍다고 여겨집니다. 짐승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먹는 것입니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인 개도, 주인이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하다가 먹을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으르렁대면서 달려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짐승이, 새끼를 위해 자신이 먹는 것을 포기하고 새끼를 먹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사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최근에 잔잔한 감동을 준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관람객 500만 명을 넘어선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입니다. 76년 이상 부부로 살아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해온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의 방식이 무척 애틋하고 멋집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추억을 만듭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표증이 무엇일까요? “나는 아버지와 많은 추억이 있어.”,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사랑의 추억이 많아.”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매번 자녀와 공부하는 곳만 갔다 오면, 사랑의 추억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자녀들과 대화하고, 함께 여행도 하고, 봉사나 선교도 함께 가면서 부모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추억이 생깁니다. 사랑은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 할아버지, 할머니는 봄에는 꽃을 서로의 머리에 꽂아 주면서 좋아합니다. 여름에는 물장구를 치면서 행복해합니다. 가을에는 낙엽을 던지면서 어린아이처럼 놉니다.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면서 서로 찬 손을 호호 불기도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추억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소중함을 만끽하는 것입니다.
젊은 날의 사랑은 뜨거운 용광로처럼,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그러나 결혼해서 시간이 흐르면 그런 사랑의 열정은 식게 마련입니다. 그 다음에는 친구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정을 쌓는 것입니다. 뜨겁지는 않아도 곁에 있으면 따뜻한 사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둘째, 나이가 들어도 자주 스킨십을 합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몸을 씻겨주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적이 언제입니까?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맙다고 이야기한 적이 언제입니까? 남편의 등을 두드려 본 적이 언제입니까?
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신 참 잘 생겼네.” 하면서 서로를 쓰다듬습니다. 이것은 젊을 때의 스킨십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안에는 정이 있고, 따뜻한 우정이 들어 있습니다.
셋째, 서로가 서로를 지켜줍니다.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것을 힘들어 하는 것을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기침을 하면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를 씁니다.

‘존중’과 ‘함께 함’이 사랑입니다.

인생은 허망하게 사라질 것 아닙니까? 안개처럼 사라질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 노인들처럼 90세, 100세까지 살 수 있다는 명백한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 인생이 마감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허망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할아버지가 죽고 그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허망한 인생,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의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사랑이 희망이고 기쁨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살아갈 때 서로 해서는 안 될 것 한 가지와 해야 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도, 부모와 자녀 사이도,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갈입니다. 서로에게 공갈을 치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공갈을 치는 부모가 있습니다. “당신 왜 그 따위야. 나 당신하고 이혼할 거야.”, “너 말 좀 잘 들어. 그렇지 않으면 고아원에 보낼 거야.” 이런 말을 함부로 합니다. 이것은 공갈이고 협박입니다.
이런 말들을 듣게 되면 미움이 생깁니다. 분노가 생깁니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쫒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아내와 남편을 서로 겁주는 부부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또 자녀가 부모를 무서워하게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방이 큰소리라도 칠까봐 숨을 죽이면서 생활한다면, 그곳이 무슨 천국입니까? 아버지나 어머니가 볼까봐 슬금슬금 숨는 자녀가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할 사람이 해야 할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내가 밥을 해주었습니까? 맛있게 먹고 나서 맛있게 먹었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아니 그것이 사랑, 그 자체입니다.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아버지에게 얼마나 힘들었냐며 등을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하십시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삶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 대화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의 약속은, 아무리 바빠도 중요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내일 아내와 약속을 했는데, 저녁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내일 저녁에 약속 있어?” 한국 남자들 열 명 중 아홉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아내와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나 약속 없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죄입니다. 약속이 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날, 다른 시각에 새로운 약속을 잡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축복을 나눌 수 없습니다.
자녀와 대화하는 것, 함께 놀아주는 것도 아버지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하는 것만 ‘일’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는 것도 사랑의 일입니다. 그래야 가정이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최고의 사랑 방식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서 하나님은 그 축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며 삽시다.

우리의 사랑은 늘 방전됩니다. 쉽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면서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사랑으로 나의 방전된 사랑을 충전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당신 아들을 십자가 위에서 죽일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내가 다시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내 아내, 내 남편, 내 부모, 내 자식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이러한 사랑을 경험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 볼 때, 나는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까? 내 가정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남편들에게 권합니다. 남편들이 먼저 시작하세요. 아내는 남편의 눈치를 봅니다. 그러니 남편들이 먼저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가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가정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과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도 칭찬받고 귀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쓰임 받을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모두가 이 축복을, 사랑하는 기쁨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