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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원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두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는 ‘엄마’, ‘어머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개는 하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엄마’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고, 사랑이라는 말은 어머니를 통해서 경험하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사랑 때문에 살고, 또 사랑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이유를 살펴보면 사랑이 있어서이고, 탄식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랑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일 때가 참으로 많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 삶에 좋은 단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 진리, 기쁨, 감사, 평안… 그 수많은 좋은 말을 다 더해도 사랑은 그 말들보다 한 단계 더 위입니다. 아니 한 단계 더 앞서 갑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은 명사의 형태이지만, 우리는 늘 사랑을 동사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수많은 움직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요를 듣거나, 드라마를 봐도 내용은 거의 사랑 타령입니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말이 곳곳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은 모두 사랑을 그리워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진정한 사랑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계속 사랑, 사랑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좋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늘 ‘사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하며 근심합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입은 딱 닫아걸어 버립니다. 용기 있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때로는 아내나 남편에게조차 당연히 할 수 있을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식과 마주하면서도 그 말을 꺼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가 상처를 받을까봐, 또는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상처를 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사랑한다는 말 자체를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상처받기도 싫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인간에게 있는 지독한 자기보호 본능 때문입니다.
자기연민의 방어기재가 끊임없이 작동을 하면, 나를 지킨다고 하면서 나를 가둡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차단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랑한다’, ‘생명을 걸고 사랑한다’는 등의 말은 더더욱 쓰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언제 내 사랑이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걸고 사랑하다가 상대방이 떠나가면, 그 사랑이 비수가 되어 내 마음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사랑을 유보하고, 어떻게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틈새를 찾아 빠져나갑니다.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처럼 여겨져서 ‘내가 괜히 저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했지. 안 그랬으면 내 마음대로 살 텐데…’하며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랑이 부정적인 감정을 내쫓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외로움도 있습니다. 이것도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솟구치는 분노도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이것도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 두려움으로 가득 찰까요?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있으면 얼마나 용감해집니까? 우리 어머니들을 보십시오. 연약한 여성이지만 얼마나 용감합니까? 내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그 깊은 사랑을 알기에, 우리는 ‘어머니’라고 부르기만 해도 떨리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우리에게 사랑의 속성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요한일서 4:18)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사랑하면 용감하게 됩니다. 담대하게 됩니다. 즉 사랑은 두려움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이 두려움에 떠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외로움을 탑니까? 사랑을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보셨지 않습니까?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때로 내가 홀로 있을 때도 별로 외롭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내 영혼이 갈급하고 외로워집니다. 결국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왜 벌컥 화를 냅니까?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넉넉해집니까? 사랑을 하면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집니까? 무엇이든 포용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부정적인 감정인 두려움, 외로움, 분노심을 깨뜨리고 넘어서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막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황입니다. 살아있는 채로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옆구리는 창에 찔렸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그 주위의 모든 환경을 다시 확인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한복음 19:25)
예수님을 사랑했던 네 여인들이 십자가 곁에,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네 명의 로마 병정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두고 제비를 뽑으면서 키득거렸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슬픔으로 탄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뜨시고 아래를 내려다 보셨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의 눈에 띈 것처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명은 당신을 낳은 어머니셨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바로 눈 앞에서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며 슬피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옆에 있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의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 19:26∼27)
“요한아, 나를 사랑하지? 내 어머니를 모셔다오. 이제부터 네 어머니다. 내가 이렇게 먼저 가니 네가 내 어머니를 잘 돌보아 주어라.” 당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의 성경구절에는 기록이 안 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씀을 듣고서부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사랑으로 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형 야고보처럼 거칠고 과격했습니다. 저돌적이었습니다. 그러한 기질을 지니고 있음을 아셨지만, 동시에 또 다른 성정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순수하고 착한 성정, 온유한 성정,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성정. 열정이 과하여 분노로도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열정이 사랑으로 부딪히면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그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본래 우레의 아들,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이 어떻게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던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것은, 그들 속에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한은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열정이란 무엇입니까? 왜곡이 되면 이상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열정이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열정이란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열정을 가져본 적 있지 않습니까? 연애할 때, 일할 때, 인생의 목표를 세울 때, 자녀들을 키울 때 열정이 있지 않았습니까. 열정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사랑 없이 인생을 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그냥 낭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의 열정은 처음에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화를 내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은, 예수님 충성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뒤쫓으려는 열정이 가득했던 젊은 제자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걸음을 거절했을 때, 그는 형과 함께 화를 냈습니다. 이런 못된 백성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망시키자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충정 때문이었습니다. 적대자들에게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위한 사랑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를 야단치셨습니다. “네 열정이 좀 잘못되었다. 저런 사람을 다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의 방향을 바꿔라.”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귀신을 내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는 귀신이 내쫓아지는데 어떤 곳에서는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때 요한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무리가 아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화가 났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제자들의 브랜드 즉 특허인데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람을 찾아가 말합니다.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갖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그룹을 따르지 않으면서 왜 이것을 사용합니까?”
성경은 이 흥미로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 9:38)
사실 그 안에는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집단적 이기주의였던 것입니다. 그중에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아주 멋진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마가복음 9:39∼40)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생각해 봐라.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치유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건강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아니겠느냐. 왜 그것을 반대하고 못하게 하느냐. 우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냥 내버려둬라.”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사건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처럼 집단적 이기주의를 가지고 있던 제자 요한이 어떻게 바뀌게 된 것일까요? 사랑을 축적했기 때문일까요? 사랑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역시 사랑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변화의 이유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다니실 때 요한은 제일 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실 때도 그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절반쯤 눕는 듯한 자세로 식사를 했는데 예수님 바로 옆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하리라.”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 요청할 만큼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우레의 아들들이었던 형제 중 형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요한은 100세 가까운 나이까지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말씀을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늘 이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얘들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이 사도 요한이 쓴 것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이서, 삼서입니다. 또 90살이 넘어가면서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쓴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바로 이 요한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 거칠고 저돌적이고 과격하던 열정이 사랑의 열정으로 바뀌어 이같은 일들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의 뜻대로 내가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랑 아닙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예수님 안의 사랑을 인지한 사도 요한은 자기 이름을 대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몇 번 언급할 뿐 거의 늘 이름대신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썼습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는 사랑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에게 접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1절 말씀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이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일서 1:1)
자신이 직접 듣고, 직접 보고, 직접 만진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이렇게 사랑을 증거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다섯 살인 어린 딸에게 예쁜 인형을 사다 주었습니다. 딸은 그 인형이 예뻐서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를 사랑해. 너 참 예쁘구나.”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인형을 잘 사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그 인형을 난로 속에 던져 넣은 것을 보게 됩니다. 놀란 아버지가 이유를 묻자 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빠, 제가 이 인형한테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예뻐해 라고 말하는데 아무 대답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단다.” 그 말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전심을 다해, 내 영혼의 기쁨으로 예수님을 향해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만약 내게 그 고백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며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외로움이 나를 얽어매고 있습니까? 다시 주님을 사랑하세요. 내 속에서 분노가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사랑이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낭비되는 것입니다.
집에 가셔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나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내 남편, 내 아내여서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요.”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이야기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모두가 요한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딸의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 25 ~ 27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원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두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하나는 ‘엄마’, ‘어머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개는 하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엄마’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고, 사랑이라는 말은 어머니를 통해서 경험하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사랑 때문에 살고, 또 사랑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이유를 살펴보면 사랑이 있어서이고, 탄식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사랑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일 때가 참으로 많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우리 삶에 좋은 단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 진리, 기쁨, 감사, 평안… 그 수많은 좋은 말을 다 더해도 사랑은 그 말들보다 한 단계 더 위입니다. 아니 한 단계 더 앞서 갑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은 명사의 형태이지만, 우리는 늘 사랑을 동사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수많은 움직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요를 듣거나, 드라마를 봐도 내용은 거의 사랑 타령입니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말이 곳곳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은 모두 사랑을 그리워한다는 것이고, 동시에 진정한 사랑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계속 사랑, 사랑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좋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늘 ‘사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하며 근심합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입은 딱 닫아걸어 버립니다. 용기 있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때로는 아내나 남편에게조차 당연히 할 수 있을 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자식과 마주하면서도 그 말을 꺼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이기적인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가 상처를 받을까봐, 또는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상처를 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사랑한다는 말 자체를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상처받기도 싫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인간에게 있는 지독한 자기보호 본능 때문입니다.
자기연민의 방어기재가 끊임없이 작동을 하면, 나를 지킨다고 하면서 나를 가둡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차단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랑한다’, ‘생명을 걸고 사랑한다’는 등의 말은 더더욱 쓰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언제 내 사랑이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걸고 사랑하다가 상대방이 떠나가면, 그 사랑이 비수가 되어 내 마음에 상처를 주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사랑을 유보하고, 어떻게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틈새를 찾아 빠져나갑니다. 때로는 사랑한다는 말이 우리를 얽어매는 것처럼 여겨져서 ‘내가 괜히 저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했지. 안 그랬으면 내 마음대로 살 텐데…’하며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랑이 부정적인 감정을 내쫓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외로움도 있습니다. 이것도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솟구치는 분노도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이것도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 두려움으로 가득 찰까요?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있으면 얼마나 용감해집니까? 우리 어머니들을 보십시오. 연약한 여성이지만 얼마나 용감합니까? 내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그 깊은 사랑을 알기에, 우리는 ‘어머니’라고 부르기만 해도 떨리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일서 4장 18절에서 우리에게 사랑의 속성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요한일서 4:18)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사랑하면 용감하게 됩니다. 담대하게 됩니다. 즉 사랑은 두려움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이 두려움에 떠는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외로움을 탑니까? 사랑을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보셨지 않습니까?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때로 내가 홀로 있을 때도 별로 외롭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으면, 옆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내 영혼이 갈급하고 외로워집니다. 결국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왜 벌컥 화를 냅니까?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넉넉해집니까? 사랑을 하면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집니까? 무엇이든 포용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부정적인 감정인 두려움, 외로움, 분노심을 깨뜨리고 넘어서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막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황입니다. 살아있는 채로 십자가 위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옆구리는 창에 찔렸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그 주위의 모든 환경을 다시 확인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요한복음 19:25)
예수님을 사랑했던 네 여인들이 십자가 곁에,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네 명의 로마 병정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두고 제비를 뽑으면서 키득거렸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슬픔으로 탄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뜨시고 아래를 내려다 보셨습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의 눈에 띈 것처럼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명은 당신을 낳은 어머니셨습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바로 눈 앞에서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며 슬피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옆에 있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특별한 부탁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의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한복음 19:26∼27)
“요한아, 나를 사랑하지? 내 어머니를 모셔다오. 이제부터 네 어머니다. 내가 이렇게 먼저 가니 네가 내 어머니를 잘 돌보아 주어라.” 당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의 성경구절에는 기록이 안 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말씀을 듣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말씀을 듣고서부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고 사랑으로 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형 야고보처럼 거칠고 과격했습니다. 저돌적이었습니다. 그러한 기질을 지니고 있음을 아셨지만, 동시에 또 다른 성정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순수하고 착한 성정, 온유한 성정,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성정. 열정이 과하여 분노로도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열정이 사랑으로 부딪히면 진정한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그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본래 우레의 아들,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이 어떻게 사랑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던 열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던 것은, 그들 속에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한은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열정이란 무엇입니까? 왜곡이 되면 이상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열정이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열정이란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열정을 가져본 적 있지 않습니까? 연애할 때, 일할 때, 인생의 목표를 세울 때, 자녀들을 키울 때 열정이 있지 않았습니까. 열정 없이 인생을 사는 것은 사랑 없이 인생을 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그냥 낭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의 열정은 처음에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예수님을 위해서 화를 내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은, 예수님 충성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뒤쫓으려는 열정이 가득했던 젊은 제자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걸음을 거절했을 때, 그는 형과 함께 화를 냈습니다. 이런 못된 백성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망시키자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충정 때문이었습니다. 적대자들에게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위한 사랑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를 야단치셨습니다. “네 열정이 좀 잘못되었다. 저런 사람을 다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의 방향을 바꿔라.”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귀신을 내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곳에서는 귀신이 내쫓아지는데 어떤 곳에서는 귀신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때 요한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무리가 아닌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화가 났습니다. 요새 말로 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제자들의 브랜드 즉 특허인데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람을 찾아가 말합니다.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만 갖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그룹을 따르지 않으면서 왜 이것을 사용합니까?”
성경은 이 흥미로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 9:38)
사실 그 안에는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집단적 이기주의였던 것입니다. 그중에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아주 멋진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마가복음 9:39∼40)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생각해 봐라. 한 사람의 생명이 살아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치유되지 않았느냐.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건강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아니겠느냐. 왜 그것을 반대하고 못하게 하느냐. 우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그냥 내버려둬라.”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사건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처럼 집단적 이기주의를 가지고 있던 제자 요한이 어떻게 바뀌게 된 것일까요? 사랑을 축적했기 때문일까요? 사랑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역시 사랑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변화의 이유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다니실 때 요한은 제일 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실 때도 그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절반쯤 눕는 듯한 자세로 식사를 했는데 예수님 바로 옆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하리라.”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 요청할 만큼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면서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우레의 아들들이었던 형제 중 형 야고보는 제일 먼저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요한은 100세 가까운 나이까지 살게 됩니다. 그래서 그를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말씀을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늘 이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얘들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이 사도 요한이 쓴 것이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이서, 삼서입니다. 또 90살이 넘어가면서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쓴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바로 이 요한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 거칠고 저돌적이고 과격하던 열정이 사랑의 열정으로 바뀌어 이같은 일들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의 속성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의 뜻대로 내가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랑 아닙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예수님 안의 사랑을 인지한 사도 요한은 자기 이름을 대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몇 번 언급할 뿐 거의 늘 이름대신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썼습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는 사랑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님에게 접촉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1절 말씀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이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일서 1:1)
자신이 직접 듣고, 직접 보고, 직접 만진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이렇게 사랑을 증거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다섯 살인 어린 딸에게 예쁜 인형을 사다 주었습니다. 딸은 그 인형이 예뻐서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를 사랑해. 너 참 예쁘구나.”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인형을 잘 사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그 인형을 난로 속에 던져 넣은 것을 보게 됩니다. 놀란 아버지가 이유를 묻자 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빠, 제가 이 인형한테 나는 너를 사랑해, 너를 예뻐해 라고 말하는데 아무 대답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단다.” 그 말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요? 전심을 다해, 내 영혼의 기쁨으로 예수님을 향해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만약 내게 그 고백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며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랑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외로움이 나를 얽어매고 있습니까? 다시 주님을 사랑하세요. 내 속에서 분노가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사랑이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낭비되는 것입니다.
집에 가셔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나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내 남편, 내 아내여서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해요.”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이야기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맡겨진 일들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모두가 요한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딸의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