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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배움은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배움입니다.
우리 교회학교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과 교역자들이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몇 가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그 내용을 영상으로 시청하며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시청>
다음세대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어린 자녀들이 성경 공부를 하는 데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변화를 준 것입니다. 대화하며 토론하는 이 교육은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 앞에서는 강론과 설교 등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상상력을 촉구하셨고,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하는 질문에 흔쾌히 대답도 해 주시며 쌍방적인 대화법을 이어가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자신을 적대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논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도록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가르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배움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드리는 두 번째 말씀입니다. 혹시 우리가 ‘사랑 없는 지식’ 혹은 ‘지식 없는 사랑’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며 반성하고자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는 것과 세상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배움에는 사랑이 더해집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면서 지식을 키워 나가고 지식을 배워 나가면서 사랑하는 것이 교회와 기독교의 배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욕은 본능입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 지식욕은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돼 있습니다. 배움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의 욕망 근저에는 사실 두 가지 바탕이 있습니다. 하나는 ‘호기심’이요, 다른 하나는 ‘권력욕’입니다.
먼저 호기심이란 뭘까요? 더 알고 싶은 마음,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싶고 답이 나올 때까지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한 겸손한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움의 지식이 점점 커지면서 어느 날 또 하나의 욕망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지배욕 곧 ‘권력욕’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입니다.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계속해서 지식욕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은 정보량을 갖고 있지? 나는 너보다 더 좋은 기술력을 습득했지? 나는 너보다 더 전략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라고 우쭐대면서 그 지식을 남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식욕이 우리 마음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의 지식욕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등장합니다. ‘도대체 선악과는 무엇이지? 하나님께서 왜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 진짜 이걸 먹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질문이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지하신 명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이들을 찾아와 두 욕망을 부추깁니다. “야, 네 호기심을 한번 확인해 봐! 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고? 그렇지 않을걸? 죽지 않아. 하나님이 너한테 겁주려고 그런 거야.” 이렇게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리곤 두 번째 욕망인 권력욕도 자극합니다. “네가 이걸 먹으면 너는 이제 인간이 아니야. 너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하나님이 가진 능력을 너도 가지게 될 거야. 그래서 네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될 거야.” 아주 매혹적인 동시에 마력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내용을 창세기 3장 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뱀으로 분장한 사탄의 꼬드김입니다.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가 이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만큼의 분별력을 얻어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선용해야 합니다.
이 선악과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어려운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만드신 것일까? 굳이 만드시고는 왜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병 주고 약 주시는 건가? 그러면서도 인간을 징계하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지식의 시작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물음, 회의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저항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이 또한 인간을 자유자로 세워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질문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고 하나님 말씀에 거부할 수 있는 자유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 금지 명령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도 하나님께 저항하며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갈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네게 모든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자유를 함부로 사용하면 망한다고…. 그 자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인간이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께 저항하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도 먹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더 읽다 보면, 이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이 취하신 행동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제 생명나무를 금하십니다. 왜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것까지 먹으면 정말 하나님처럼 될까 봐 염려하셨기 때문일까요? 이에 대한 말씀을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4)
하나님은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단순한 호기심과 권력욕으로 선악과를 먹었는데, 이제 생명나무 열매마저 먹으면 통제 불가능하게 될 거란 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지능적으로 악한 자가 될지, 얼마나 철면피가 될지, 그래서 다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영원한 멸망의 길에까지 들어설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하나님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 아픔을 하나님이 차마 보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나무 열매까지는 먹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거절하고 막으셨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러 오실 때까지 막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지배욕과 권력욕으로 가득 찬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위험합니다.
이 지배욕과 권력욕으로 가득 찬 생각은 특성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라는 특성입니다. 이기적입니다. 자기 야망을 취하는 데 모든 지식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불나방처럼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 지식을 선하고 좋은 권력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면, 분명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권력을 이어가는 데 지식을 사용한다면, 그것만큼 악한 권력자와 지식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망하면 지식인들도 함께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절대 반지를 손에 끼는 순간 절대 권력이 주어집니다. 그런 뒤엔 어떻게 될까요? 오만해지고 교만해집니다.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릅니다. 지식을 권력욕에 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지 않으니, 그것을 소유한 이들만 높아지려 하는 못된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북한의 지도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과 권력이 한 사람에게 독점되어 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오만하고 잔인한 권력자가 나타납니다. 그 때문에 공동체가 고통과 아픔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혹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석사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은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게 있는 이 지식이 나의 자랑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지식, 그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지식이 다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지식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배우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의 세계를 알아갑니다. 인간의 세계, 시간과 역사의 의미를 깨달으며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도 얻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쌓아온 과학, 의학, 인문학, 사회학, 경제학, 법학, 이 모든 것이 지식에 근거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이 지식들을 자기중심적인 교만으로 치닫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지식들은 하나님 없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우리를 꾀하려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려 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그렇게 강한 존재입니까? 조그만 돌부리에 부딪혀도 넘어지고, 넘어지면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사랑 없는 지식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것을 뛰어넘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지식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지식을 쌓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은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그리스도와 관련된 지식이자 배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다 담겨져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식과 사랑이 결부된 참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 안에서 생명의 삶을 경험합니다. 그럼, 어떻게 그 삶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빌립보서 1장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서 1:9)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건, 기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처럼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면 사랑과 지식이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지식, 바로 거기에 지식과 사랑이 동반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력히 호소합니다. 이 말씀도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13:2)
내게 많은 능력과 모든 사물들을 꿰뚫을 수 있는 비밀과 지식이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강력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I am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별 볼 일 없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지식은 사랑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또 사랑은 지식에 생명과 치유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은 서로를 격려하면서도 서로를 통제합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나만을 위했던 지식이 이웃과 세계를 향한 지식으로 승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습니까? 다 똑같은 사랑입니까? 사랑이 인식론과 직결돼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탁월한 전문가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자기 분야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문학자들은 한글을 사랑하고, 영문학자들은 영어를, 법학자들은 법률을, 의학자들은 의학을 사랑합니다. 기업가는 자기 기업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과학자 역시 자기 영역의 분과를 사랑하며 연구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더 새롭고 깊이 있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사랑조차 거짓 사랑과 진실 된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 사랑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사실, 에로스라는 사랑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로스는 인간 야망을 향한 사랑입니다. 한마디로 에로스적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며,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향해 열려진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 에로스적인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이기적인 지식만큼이나 위험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물과 사람을 소유하고 사유하려는 욕망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자녀를 사랑할 때 잘못된 사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얘야, 너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야 한다. 내가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고만 하는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생각할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자녀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결여됩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부모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자녀를 신뢰하지 못해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자녀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으면 잘못 될까 봐 불안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지식과 결부되면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가 지식을 쌓아라. 그러나 사랑을 갖고 쌓아라. 너의 지식을 지배욕과 권력욕을 쌓기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그 지식을 사용해야 생명의 역사,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때문에 이 지식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사랑으로 지식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사랑의 열정으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빌립보서 1장 8절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8)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한다고 전하며, 그들을 성심껏 가르치고자 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사랑 안에서 지식을 쌓는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네 생각은 어떠니?”라고 묻고 부모의 생각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말씀 공부 시간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교회 구역 모임에서 구역 식구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지식과 사랑이 하나 되길 원한다면, 그 역시 참된 배움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지식을 쌓아 가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최고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시며 사랑이시고 생명이시라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최고의 비밀, 최고의 자랑, 최고의 기쁨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며 하나님께 감사 고백도 올려드립니다. 내게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에 사랑을 더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1: 8 ~ 11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기독교의 배움은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배움입니다.
우리 교회학교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과 교역자들이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몇 가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그 내용을 영상으로 시청하며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 시청>
다음세대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어린 자녀들이 성경 공부를 하는 데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변화를 준 것입니다. 대화하며 토론하는 이 교육은 예수님의 교육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 앞에서는 강론과 설교 등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상상력을 촉구하셨고,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하는 질문에 흔쾌히 대답도 해 주시며 쌍방적인 대화법을 이어가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자신을 적대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논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도록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가르치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배움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드리는 두 번째 말씀입니다. 혹시 우리가 ‘사랑 없는 지식’ 혹은 ‘지식 없는 사랑’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며 반성하고자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는 것과 세상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배움에는 사랑이 더해집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면서 지식을 키워 나가고 지식을 배워 나가면서 사랑하는 것이 교회와 기독교의 배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욕은 본능입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 지식욕은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돼 있습니다. 배움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식의 욕망 근저에는 사실 두 가지 바탕이 있습니다. 하나는 ‘호기심’이요, 다른 하나는 ‘권력욕’입니다.
먼저 호기심이란 뭘까요? 더 알고 싶은 마음,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싶고 답이 나올 때까지 더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한 겸손한 접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배움의 지식이 점점 커지면서 어느 날 또 하나의 욕망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지배욕 곧 ‘권력욕’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입니다.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계속해서 지식욕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은 정보량을 갖고 있지? 나는 너보다 더 좋은 기술력을 습득했지? 나는 너보다 더 전략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라고 우쭐대면서 그 지식을 남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식욕이 우리 마음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의 지식욕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등장합니다. ‘도대체 선악과는 무엇이지? 하나님께서 왜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지? 진짜 이걸 먹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질문이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지하신 명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이들을 찾아와 두 욕망을 부추깁니다. “야, 네 호기심을 한번 확인해 봐! 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고? 그렇지 않을걸? 죽지 않아. 하나님이 너한테 겁주려고 그런 거야.” 이렇게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그리곤 두 번째 욕망인 권력욕도 자극합니다. “네가 이걸 먹으면 너는 이제 인간이 아니야. 너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하나님이 가진 능력을 너도 가지게 될 거야. 그래서 네가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될 거야.” 아주 매혹적인 동시에 마력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내용을 창세기 3장 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5)
뱀으로 분장한 사탄의 꼬드김입니다. 피조물인 아담과 하와가 이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만큼의 분별력을 얻어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선용해야 합니다.
이 선악과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어려운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만드신 것일까? 굳이 만드시고는 왜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병 주고 약 주시는 건가? 그러면서도 인간을 징계하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지식의 시작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물음, 회의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저항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에게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이 또한 인간을 자유자로 세워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질문도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고 하나님 말씀에 거부할 수 있는 자유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 금지 명령은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도 하나님께 저항하며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갈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네게 모든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자유를 함부로 사용하면 망한다고…. 그 자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인간이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께 저항하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도 먹어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더 읽다 보면, 이 선악과 사건 이후 하나님이 취하신 행동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제 생명나무를 금하십니다. 왜 그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이것까지 먹으면 정말 하나님처럼 될까 봐 염려하셨기 때문일까요? 이에 대한 말씀을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24)
하나님은 인간의 심리와 본성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단순한 호기심과 권력욕으로 선악과를 먹었는데, 이제 생명나무 열매마저 먹으면 통제 불가능하게 될 거란 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지능적으로 악한 자가 될지, 얼마나 철면피가 될지, 그래서 다시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영원한 멸망의 길에까지 들어설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 하나님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 아픔을 하나님이 차마 보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명나무 열매까지는 먹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그럼 언제까지 거절하고 막으셨을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시러 오실 때까지 막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지배욕과 권력욕으로 가득 찬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위험합니다.
이 지배욕과 권력욕으로 가득 찬 생각은 특성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라는 특성입니다. 이기적입니다. 자기 야망을 취하는 데 모든 지식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권력이 있는 곳에 불나방처럼 지식인들이 모여드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 지식을 선하고 좋은 권력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면, 분명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권력을 이어가는 데 지식을 사용한다면, 그것만큼 악한 권력자와 지식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권력자가 망하면 지식인들도 함께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절대 반지를 손에 끼는 순간 절대 권력이 주어집니다. 그런 뒤엔 어떻게 될까요? 오만해지고 교만해집니다.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릅니다. 지식을 권력욕에 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지 않으니, 그것을 소유한 이들만 높아지려 하는 못된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북한의 지도자를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식과 권력이 한 사람에게 독점되어 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오만하고 잔인한 권력자가 나타납니다. 그 때문에 공동체가 고통과 아픔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1)
혹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석사나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혹은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게 있는 이 지식이 나의 자랑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지식, 그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지식이 다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지식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을 배우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의 세계를 알아갑니다. 인간의 세계, 시간과 역사의 의미를 깨달으며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도 얻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쌓아온 과학, 의학, 인문학, 사회학, 경제학, 법학, 이 모든 것이 지식에 근거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이 지식들을 자기중심적인 교만으로 치닫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지식들은 하나님 없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우리를 꾀하려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려 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그렇게 강한 존재입니까? 조그만 돌부리에 부딪혀도 넘어지고, 넘어지면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사랑 없는 지식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것을 뛰어넘어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지식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지식을 쌓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기독교 신앙과 지식은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그리스도와 관련된 지식이자 배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보물이 다 담겨져 있지 않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식과 사랑이 결부된 참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 안에서 생명의 삶을 경험합니다. 그럼, 어떻게 그 삶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빌립보서 1장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서 1:9)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건, 기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처럼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면 사랑과 지식이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얻는 지식, 바로 거기에 지식과 사랑이 동반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력히 호소합니다. 이 말씀도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13:2)
내게 많은 능력과 모든 사물들을 꿰뚫을 수 있는 비밀과 지식이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강력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I am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별 볼 일 없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지식은 사랑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또 사랑은 지식에 생명과 치유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지식과 사랑은 서로를 격려하면서도 서로를 통제합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나만을 위했던 지식이 이웃과 세계를 향한 지식으로 승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습니까? 다 똑같은 사랑입니까? 사랑이 인식론과 직결돼 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탁월한 전문가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자기 분야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국문학자들은 한글을 사랑하고, 영문학자들은 영어를, 법학자들은 법률을, 의학자들은 의학을 사랑합니다. 기업가는 자기 기업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과학자 역시 자기 영역의 분과를 사랑하며 연구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더 새롭고 깊이 있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사랑조차 거짓 사랑과 진실 된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 사랑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에로스의 사랑과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사실, 에로스라는 사랑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에로스는 인간 야망을 향한 사랑입니다. 한마디로 에로스적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며,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향해 열려진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 에로스적인 이기적인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은 이기적인 지식만큼이나 위험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물과 사람을 소유하고 사유하려는 욕망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엄마가 자녀를 사랑할 때 잘못된 사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얘야, 너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야 한다. 내가 가르친 대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자녀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고만 하는 부모는 자녀가 스스로 생각할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자녀의 자발성과 자율성이 결여됩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부모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자녀를 신뢰하지 못해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자녀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으면 잘못 될까 봐 불안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지식과 결부되면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네가 지식을 쌓아라. 그러나 사랑을 갖고 쌓아라. 너의 지식을 지배욕과 권력욕을 쌓기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그 지식을 사용해야 생명의 역사, 회복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때문에 이 지식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사랑으로 지식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사랑의 열정으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전합니다. 빌립보서 1장 8절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립보서 1:8)
자신이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한다고 전하며, 그들을 성심껏 가르치고자 합니다. 바로 이 모습이 사랑 안에서 지식을 쌓는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네 생각은 어떠니?”라고 묻고 부모의 생각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그 말씀 공부 시간이 빛이 나는 것입니다. 교회 구역 모임에서 구역 식구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지식과 사랑이 하나 되길 원한다면, 그 역시 참된 배움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지식을 쌓아 가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최고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시며 사랑이시고 생명이시라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최고의 비밀, 최고의 자랑, 최고의 기쁨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예배드리며 하나님께 감사 고백도 올려드립니다. 내게 주신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에 사랑을 더하면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4월 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교회, 배움의 공동체2”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28, 30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빌 1:9-11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2017년 소망교회학교의 성경공부는 유대인들의 하브루타 교육과 거꾸로 교실의 특성을 도입한 “더불어 교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일방적 가르침이 아닌 아이들 스스로 능동적으로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갑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교육방식이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은 끊임없이 질문하시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세상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과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배움이란 인간의 본성적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욕망의 밑바닥에는 두 가지 원천이 있습니다. 호기심과 권력욕이 그것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 그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고 싶은 마음 자체로서 호기심입니다. 또한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 남보다 더 위에 서려고 하는 마음,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수단삼아 타인을 지배하려는 권력욕입니다. 첫 인간 아담은 이러한 유혹 앞에 섰었습니다. ‘네 호기심을 확인해 보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그 권력을 얻을 수 있다.’ 호기심과 유혹 앞에 무릎 꿇었던 아담입니다.(창3:5)
권력욕으로 가득 찬 지식은 자기중심적으로만 사용됩니다. 그것에 생명나무를 허락하신다면, 인간이 얼마나 지능적인 악인이 될까요? 얼마나 철면피가 될까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생명나무를 감추신 것입니다.(창3:24)
그렇다면 지식은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은 소중한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권력욕으로만 얼룩졌을 때 지식은 잔인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지닌 지식은 권력욕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해야 하는 이유입니다.(빌1:9) 지식과 사랑은 서로 통제합니다. 더불어 서로를 격려합니다.
사랑이라고 다 같은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처럼 보이는 이기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열성 많은 엄마의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아직 어린 네가 뭘 아냐?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따라만 와라.’ 자녀를 사랑한다 말하면서 실상은 자녀를 믿지 못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 즉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세상으로 나갑니다. 신뢰하고 기다릴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과 사랑의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습니다.(빌1:8)
나누기
1. 나의 에로스적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었던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봅시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2. 최근에 경험한 아가페적 사랑의 은혜를 나눠 보고, 아가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나의 결단을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지식과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한 열정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고, 그렇게 얻은 우리의 모든 지식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어지게 하셔서, 세상의 빛과 소금되어 또 한 주간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