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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음침한 구덩이 경험 : 요셉 – 기다림의 사람들 2 –

창세기 37: 18 ~ 24

김지철 목사

2015.12.06

기다림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오셨는데 무엇을 또 기다린다는 것입니까?” 대림절은 이 땅에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광 속에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기억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두 종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기다림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꿈을 가진 요셉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형들에게는 기다림이 없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형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내가 네 명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라헬로, 그녀가 첫 번째로 낳은 아들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열두 아들 중에서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들은 그런 요셉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그가 가끔 꿈 이야기를 할 때면 형들은 화가 났습니다. 사실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요셉의 형이라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다’ 싶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세기 37:6)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인 꿈이었습니다. 권력의 향방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제대로 다 알지 못하고 이야기를 했겠지만, 형들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장차 요셉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자신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형들은 내게 절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형들은 내 부하가 될 것입니다.” 형들에게 그 꿈 이야기는 이런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비슷한 꿈을 꾸고 또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창세기 37:9)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들도 다 내게 나아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할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와 형들의 태도는 아주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괘씸하다’였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녀석은 뭔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또 다른 애정이 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창세기 37:11)

그런데 형들은 어땠습니까?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힘의 존재입니다. 누가 더 많은 힘을 가졌나? 누가 더 큰 권력을 가졌나? 누가 더 높은가? 이것이 남자들의 첫 번째 관심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꿈을 금방 정치적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세기 37:8)

꿈이 없는 형들은 꿈꾸는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남자들은 서로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가?’ ‘나보다 더 많이 가졌는가?’ ‘나보다 높은가’ 하는 것을 먼저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앞으로의 관계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가 싫었습니다. “내가 형인데,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우리가 네게 절을 한다고? 네가 우리의 왕이 된다고? 네가 우리를 다스린다고?” 요셉을 더욱더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동생의 이야기를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텐데, 그들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형들에게는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그들이기에 꿈꾸는 동생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특별히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삶이 변화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인생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변화될 가능성과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내면의 세계가 뒤틀리고 독기를 품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자기 연민 속에서 우울해합니다. 인생이 단조로워지고, 지루해집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냉소적인 독설가가 됩니다. 아주 공격적이 됩니다. 소망 없는 불행, 기다림을 상실한 불행을 스스로 쌓아가는 것이 기다림과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이 지루합니까? 우울합니까? 그래서 권태롭습니까?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있습니까? 그것은 내면세계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내게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변화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게 꿈과 기다림이 있어도 현실 세계가 그것들과는 너무 다르다는 아픔 때문에 어찌할 줄 몰라 생기는 반응입니다.
그럴 때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루함과 권태, 그리고 자조적인 모습입니다. 이 지루함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인 조병화가 쓴 ‘지루함’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 거다. /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 또한 지루할 거다. / 그 기다림이 오지 않는 인생은 / 더욱 더 지루할 것이다. /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려면 / 항상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 새로운 그 무엇을 스스로 찾고 있어야 한다. /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 산다는 걸 잠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모습을 / 항상 보고 있어야 한다. /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 지루합니까? 권태를 느낍니까? 그래서 때때로 알지 못하는 화가 치밀고 있습니까? 괜히 남을 조롱하고 싶습니까? 그것은 내 내면의 세계가 허전하다는 뜻입니다. 내게 꿈과 기다림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방해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은 큰 꿈을 꾸었고 또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꿈을 이루게 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어머니, 형들도 다 자신 앞에 엎드릴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어린 나이에 요셉은 스스로가 아주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가 기대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어릴 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어릴 때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자 주인공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실수를 해서 혹 넘어져도 나를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 내가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하며 나를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어.’ 이것이 어릴 때 갖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인생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어른이 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은 오직 내 아버지, 내 어머니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외에는 나에게 고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 내가 잘나갈 때면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에 다 떨어져 나간다는 것, 때로는 형제나 친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나 이외의 세계, 내 밖의 세계가 거대한 세력을 갖고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잘 몰랐지만, 형들은 그를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킵니다. “요셉아,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음식을 좀 갖다 주고 와라.”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형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들고 오는 동생의 모습이 형들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세기 37:19~20)

그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진짜 그 꿈대로 될까? 우리가 그 꿈을 망가뜨리자! 우리가 못 꾸는 꿈, 그도 꾸지 못하게 만들자!’ 그들은 결국 동생 요셉을 없애기로 작정했습니다.
시기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는 미움을 낳습니다. 미워하기 시작하면 분노가 쌓입니다. 분노가 쌓이면 오늘 본문처럼 동생마저 죽이는 살인의 자리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 본문을 읽으니 가인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는 첫 아들 가인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자신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저 녀석 때문이야!’ 그는 결국 동생을 죽여 인류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이런 모습이 요셉의 형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요셉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어떻게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에게는 늘 돕는 자가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위기에 놓였으니 요셉은 인복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형들도 요셉을 싫어하고 미워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봐도 인복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셉에게는 인복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를 살려 주려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그를 세워 주려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맏형 르우벤이 이처럼 말합니다.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창세기 37:21)

요셉을 미워하고 싫어하기는 하지만, 살려는 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깊은 구덩이에 쳐 넣었지만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요셉을 살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이 그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요셉을 장사꾼에게 팔기로 결정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면 언제 우리한테 올 수나 있겠어? 노예인데. 그를 팔면 우리는 돈도 벌지!’ 그들은 요셉을 장사꾼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장사꾼이 그때 그 길로 지나가지 않았다면, 아마 요셉은 구덩이에서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요셉이 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나를 해하려고 한 사람도 있지만, 나를 축복으로 몰아간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누군가 나를 위해 애써 주어서 내 인생에 꽃이 피었던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요셉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애굽으로 팔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의 친위대장이던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요셉을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지내면서 요셉이 갖고 있었던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갔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 구덩이를 기억했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었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는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이 그를 신임하여 그를 가정총무로, 사무장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변명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간수장이 그런 그를 보고 그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바로 그때 그가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누명을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왕을 옆에서 돕는 정치 지도자인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이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보디발은 아내의 고발로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기는 했지만 요셉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에게 그 관원들을 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그들을 섬겼고, 그들에게 신임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요셉은 정치적인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와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밑바닥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배우며 충성했기에, 마지막에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것들을 미리 배울 수 있도록 예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2∼3)

요셉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구나’라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있었을 때도 그랬고, 감옥에 있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요셉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요셉에게는 한 가지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구덩이 속에 내려갔던 경험입니다. 열일곱 살에 애굽에 종으로 붙잡혀 와서 서른 살이 넘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때까지 요셉은 모든 수모와 조롱, 억울함과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의 경험, 곧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던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구덩이에 넣었을 때 외쳤을 것입니다. “형들, 나 좀 살려줘. 내가 그동안 잘못했어. 다시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게. 형들을 형으로 대할게. 그러니 이 구덩이에서 나 좀 건져내줘!” 그런데 형들은 요셉이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어둠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별을 경험했습니다. 부모와 떨어지고 형제들과 이별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채색옷을 입었던 아들이 종의 경험을 했습니다. 몹쓸 인간이라고 고발을 당해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억울함이 한이 되면서도 아무 변명을 할 수 없는 암담함을 경험했습니다. ‘나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구나. 나는 홀로 있구나. 내가 죽을 수도 있구나. 모든 것이 나를 외면하고 있구나.’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덩이에도 내려갔으니 어디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불평을 멈추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시기와 분노를 멈췄습니다. 그리고 종의 역할을 할 때도,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맡겨진 일에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구덩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아직까지 내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할 수 있다는 요셉의 깨달음은 그의 삶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깨달아야 할 우리 삶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고통과 애통함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다는 약속된 기다림을 갖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삶,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구덩이와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 있었던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기뻐하면서 살겠습니다. 충성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을 갖고 사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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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 18 ~ 24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기다림의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오셨는데 무엇을 또 기다린다는 것입니까?” 대림절은 이 땅에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영광의 주님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광 속에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사람은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기억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두 종류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기다림이 없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기다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꿈을 가진 요셉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형들에게는 기다림이 없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형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아내가 네 명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는 라헬로, 그녀가 첫 번째로 낳은 아들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열두 아들 중에서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들은 그런 요셉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그가 가끔 꿈 이야기를 할 때면 형들은 화가 났습니다. 사실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내가 요셉의 형이라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겠다’ 싶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요?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세기 37:6)

이것은 명백히 정치적인 꿈이었습니다. 권력의 향방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제대로 다 알지 못하고 이야기를 했겠지만, 형들은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장차 요셉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자신들을 다스리겠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형들은 내게 절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형들은 내 부하가 될 것입니다.” 형들에게 그 꿈 이야기는 이런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비슷한 꿈을 꾸고 또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창세기 37:9)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들도 다 내게 나아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할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와 형들의 태도는 아주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괘씸하다’였습니다. 그래서 야곱도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 녀석은 뭔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또 다른 애정이 생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창세기 37:11)

그런데 형들은 어땠습니까?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힘의 존재입니다. 누가 더 많은 힘을 가졌나? 누가 더 큰 권력을 가졌나? 누가 더 높은가? 이것이 남자들의 첫 번째 관심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꿈을 금방 정치적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창세기 37:8)

꿈이 없는 형들은 꿈꾸는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남자들은 서로 만났을 때, ‘이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가?’ ‘나보다 더 많이 가졌는가?’ ‘나보다 높은가’ 하는 것을 먼저 파악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 앞으로의 관계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가 싫었습니다. “내가 형인데,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우리가 네게 절을 한다고? 네가 우리의 왕이 된다고? 네가 우리를 다스린다고?” 요셉을 더욱더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동생의 이야기를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텐데, 그들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요? 형들에게는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그들이기에 꿈꾸는 동생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특별히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삶이 변화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인생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변화될 가능성과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내면의 세계가 뒤틀리고 독기를 품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자기 연민 속에서 우울해합니다. 인생이 단조로워지고, 지루해집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냉소적인 독설가가 됩니다. 아주 공격적이 됩니다. 소망 없는 불행, 기다림을 상실한 불행을 스스로 쌓아가는 것이 기다림과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이 지루합니까? 우울합니까? 그래서 권태롭습니까?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있습니까? 그것은 내면세계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내게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변화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게 꿈과 기다림이 있어도 현실 세계가 그것들과는 너무 다르다는 아픔 때문에 어찌할 줄 몰라 생기는 반응입니다.
그럴 때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루함과 권태, 그리고 자조적인 모습입니다. 이 지루함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인 조병화가 쓴 ‘지루함’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인생은 지루할 거다. / 그 기다림이 너무나 먼 인생은 / 또한 지루할 거다. / 그 기다림이 오지 않는 인생은 / 더욱 더 지루할 것이다. / 지루함을 이겨내는 인생을 살려면 / 항상 생생히 살아 있어야 한다. /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 새로운 그 무엇을 스스로 찾고 있어야 한다. /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 산다는 걸 잠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 /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모습을 / 항상 보고 있어야 한다. /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우리의 삶이 어떻습니까? 지루합니까? 권태를 느낍니까? 그래서 때때로 알지 못하는 화가 치밀고 있습니까? 괜히 남을 조롱하고 싶습니까? 그것은 내 내면의 세계가 허전하다는 뜻입니다. 내게 꿈과 기다림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을 방해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은 큰 꿈을 꾸었고 또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꿈을 이루게 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어머니, 형들도 다 자신 앞에 엎드릴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어린 나이에 요셉은 스스로가 아주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가 기대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어릴 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어릴 때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자 주인공처럼 생각합니다. ‘내가 실수를 해서 혹 넘어져도 나를 일으켜 줄 사람이 있어. 내가 실수를 해도 괜찮다고 하며 나를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어.’ 이것이 어릴 때 갖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현실을 보게 됩니다. 인생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어른이 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은 오직 내 아버지, 내 어머니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외에는 나에게 고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 내가 잘나갈 때면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에 다 떨어져 나간다는 것, 때로는 형제나 친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나 이외의 세계, 내 밖의 세계가 거대한 세력을 갖고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잘 몰랐지만, 형들은 그를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킵니다. “요셉아,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음식을 좀 갖다 주고 와라.” 요셉은 아버지의 말씀에 형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들고 오는 동생의 모습이 형들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창세기 37:19~20)

그들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진짜 그 꿈대로 될까? 우리가 그 꿈을 망가뜨리자! 우리가 못 꾸는 꿈, 그도 꾸지 못하게 만들자!’ 그들은 결국 동생 요셉을 없애기로 작정했습니다.
시기란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시기는 미움을 낳습니다. 미워하기 시작하면 분노가 쌓입니다. 분노가 쌓이면 오늘 본문처럼 동생마저 죽이는 살인의 자리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 본문을 읽으니 가인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인류의 첫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는 첫 아들 가인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받아들여지고, 자신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화가 났습니다. ‘저 녀석 때문이야!’ 그는 결국 동생을 죽여 인류 첫 번째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이런 모습이 요셉의 형들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요셉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어떻게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에게는 늘 돕는 자가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위기에 놓였으니 요셉은 인복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인 형들도 요셉을 싫어하고 미워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서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여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봐도 인복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셉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셉에게는 인복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를 살려 주려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그를 세워 주려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맏형 르우벤이 이처럼 말합니다.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창세기 37:21)

요셉을 미워하고 싫어하기는 하지만, 살려는 두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깊은 구덩이에 쳐 넣었지만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요셉을 살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이 그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요셉을 장사꾼에게 팔기로 결정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면 언제 우리한테 올 수나 있겠어? 노예인데. 그를 팔면 우리는 돈도 벌지!’ 그들은 요셉을 장사꾼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장사꾼이 그때 그 길로 지나가지 않았다면, 아마 요셉은 구덩이에서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요셉이 살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나를 해하려고 한 사람도 있지만, 나를 축복으로 몰아간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누군가 나를 위해 애써 주어서 내 인생에 꽃이 피었던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요셉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애굽으로 팔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의 친위대장이던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요셉을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가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지내면서 요셉이 갖고 있었던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갔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 구덩이를 기억했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었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는 불평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이 그를 신임하여 그를 가정총무로, 사무장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변명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간수장이 그런 그를 보고 그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바로 그때 그가 만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누명을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왕을 옆에서 돕는 정치 지도자인 술 맡은 관원과 떡 굽는 관원이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보디발은 아내의 고발로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기는 했지만 요셉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에게 그 관원들을 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은 그들을 섬겼고, 그들에게 신임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과정에서 요셉은 정치적인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와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밑바닥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배우며 충성했기에, 마지막에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것들을 미리 배울 수 있도록 예비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셔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2∼3)

요셉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구나’라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있었을 때도 그랬고, 감옥에 있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요셉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요셉에게는 한 가지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은 구덩이 속에 내려갔던 경험입니다. 열일곱 살에 애굽에 종으로 붙잡혀 와서 서른 살이 넘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때까지 요셉은 모든 수모와 조롱, 억울함과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의 경험, 곧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던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구덩이에 넣었을 때 외쳤을 것입니다. “형들, 나 좀 살려줘. 내가 그동안 잘못했어. 다시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게. 형들을 형으로 대할게. 그러니 이 구덩이에서 나 좀 건져내줘!” 그런데 형들은 요셉이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며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어둠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별을 경험했습니다. 부모와 떨어지고 형제들과 이별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채색옷을 입었던 아들이 종의 경험을 했습니다. 몹쓸 인간이라고 고발을 당해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억울함이 한이 되면서도 아무 변명을 할 수 없는 암담함을 경험했습니다. ‘나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구나. 나는 홀로 있구나. 내가 죽을 수도 있구나. 모든 것이 나를 외면하고 있구나.’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구덩이에도 내려갔으니 어디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불평을 멈추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시기와 분노를 멈췄습니다. 그리고 종의 역할을 할 때도,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맡겨진 일에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구덩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아직까지 내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할 수 있다는 요셉의 깨달음은 그의 삶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깨달아야 할 우리 삶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기다리며 살아갑시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고통과 애통함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다는 약속된 기다림을 갖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삶,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구덩이와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에 있었던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겠습니다. 기뻐하면서 살겠습니다. 충성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을 갖고 사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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