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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위한 ‘인복(人福)’ – 일과 신앙 6 –

사도행전 15: 36 ~ 41

김지철 목사

2016.09.25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큽니다.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에서 직장인의 스트레스에 관해 조사를 했습니다. ‘나는 스트레스를 안 받거나 거의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4.8%였고, 나머지 95%는 매우 높게 받거나(46%), 조금 높게 받는다(49%)고 대답했습니다. 조사에 응한 직장인의 95%가 매일 직장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의 요인은 무엇일까요? 제일 큰 요인은 상사나 동료와의 대인관계(53%)였고, 과도한 업무량과 낮은 연봉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조사로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갑고 좋습니까? 아니면 힘겹습니까? 아마 두 가지 다일 것입니다. 반갑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사람에게서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입고 용기가 꺾였다고 해서 사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늘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사람 때문에 힘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상처받은 적은 없으실까?’ 저는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곳곳에 사람 때문에 상처받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상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망하셨고, 사람 때문에 탄식하시며 걱정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창세기 6장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의 근심하시고 (창세기 6:5∼6)

하나님은 여섯 째날 인간을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시며 보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근심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일종의 독립선언을 한 것이 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피조물인 것을 망각한 무모와 무지로 인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는 사건으로 전복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애통함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애통함은,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서 인간의 회복을 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상처를 입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또 곳곳에서 하나님의 기쁨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혐오스러운 존재임에도 틀림없습니다. 왜 인간은 아침과 저녁이 다를까요? 아침에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저녁에는 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몰락할까요? 바로 마음에 들어 있는 것 때문입니다.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모습은 변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사랑과 선함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욕심과 방탕함이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인간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요사스러운지 예레미야 17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참된 지혜자, 곧 하나님이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2)

무엇보다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두 교회가 있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교회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교회인 안디옥교회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도였던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두 교회가 극심하게 충돌하게 됩니다.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생긴 갈등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교회가 하나의 지역 종교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전 세계로 뻗어나가 만민을 향해서 울려 퍼지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즉, 복음의 내용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하는 다툼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믿음도 중요하지만 할례와 같은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에 이르는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의 입장이었고, 예루살렘교회는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입장이었습니다. 이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갈등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두 기둥과도 같았던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도덕적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을 택하는 문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서로 달랐습니다.

사람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부모가 자녀를 결혼시킬 때, “그 여자는 너랑 잘 안 맞는 것 같다”, “그 남자는 너하고는 안 어울리는 것 같다” 등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때 자녀들은 뭐라고 합니까? “나 이 사람, 좋아해요. 사랑해요.” 결국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누구를 선교 동역자로 데리고 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때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선교 여정에 마가를 데리고 가기를 원하자 바울은 강경하게 반대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사도행전 15:37∼38)

도대체 그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기에 바울은 마가와 동행하는 것을 반대했을까요? 사도행전 13장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사도행전 13:13)

정확한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일하다가 중간에 도망가는 사람처럼 밉상이 없을 것입니다.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 남기고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조카였습니다. 몇 가지 추측을 한다면, 바나바와 바울 중에서는 바나바가 선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열심이 때로는 바나바를 넘어설 때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바울이 주도적으로 선교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마가가 이에 불만을 갖고 불평하며 떠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소아시아에서의 전도사역이 너무 위험하고 힘들어서 겁이 나 도망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나이가 어렸던 청년 마가가 여행 중에 집이 그리워 고향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 가지 가능성은 다 열려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바울은 마가가 사역 중간에 혼자 떠나간 것에 대해서 매우 섭섭했고, 한편으로는 괘씸했습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는 그에게 실망했습니다. ‘마가는 기본적으로 일관성이 결여된 사람이구나.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어려운 일 앞에서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예수는 믿을 수 있고 교인은 될 수 있지만, 나의 선교 동역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친구다!’라고 확정을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대로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바나바에게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자랑하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충돌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담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사도행전 15:39)

한 공동체가 한 사람의 동행 여부로 충돌을 하고, 결국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관계의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함께 일하다가 관계 때문에 틀어진 경험이 있습니까? ‘저 사람하고는 일할 수 없어. 저 사람 밑에는 못 있겠어. 다시는 저 사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까?
일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인간관계와 관련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굉장히 절실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고 껄끄럽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인격적인 대우 때문에 화가 나고, 동료 사이도 겉으로는 친한 것 같지만 경쟁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기업문화는 어떻습니까? 권위주의적인 상하문화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주 비인격적인 행태가 노골적입니다. 특별히 회식문화는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앗아가면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음주문화 안에서는 자율성이 배제됩니다. 친밀성을 제고한다고 하지만 가면적인 친밀성일 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서로 간의 거리는 멉니다.
최근에 SBS에서 ‘요즘 젊은 것들의 사표’라는 제목으로 기획현장 보고서를 방영했습니다. 회사를 다닌 지 1년도 안 되어서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 가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퇴사하는 사람을 위해서 남은 직원들이 퇴사축하파티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 나가지만 너는 참 잘나가는 거야” 하면서 사표를 낸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와 꿈을 찾아서 회사를 떠나는 이들을 향한 축하인 셈입니다.
부모 세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이놈들이 철이 없어서 그래. 이놈들이 우리 세대만큼 끈기가 없어”라며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런 회사에서는 숨 막혀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내적 아우성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삶의 정황들에 부딪쳐 본 경험들이 있습니다.

갈등과 단절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인간이 모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등을 겁내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만나면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도 갈등하고 부모와 자녀도 갈등하고, 친구와도 갈등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인간관계는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됩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때문에 얼마나 골치 아프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때로는 인간관계를 단절할 용기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피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단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소중한 관계라고 해도 그것이 삶의 궁극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폐기처분할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과 목표가 같지 않으면 관계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등 가운데 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나고, 바울은 실라라는 자신의 제자를 데리고 떠납니다. 하나님은 그런 둘을 모두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관계의 단절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몇 가지 변화의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나도 변하고 상대방도 변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와 용납의 마음을 열었을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더 큰 목적과 더 분명한 비전을 위해서 이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나는 변했는데 상대는 변하지 않았거나 반대로 상대는 변했는데 나는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기다리며 대화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도 변하기 싫고 상대도 변하기 싫어서 모두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는 함께 있는 것이 서로에게 괴로움을 줄 뿐입니다. 그때는 포기해야 합니다.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진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만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서로 남남으로 헤어지게 된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해 후에 바나바의 조카였던 마가 요한이 바울의 선교 사역에 아주 깊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울은 마가를 다시 용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제자로, 믿음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함께 선교 여행을 가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더 큰 비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라는 비전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 (골로새서 4:10)

바울과 마가는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함께 겪게 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 4:11)

마가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아주 유익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 (빌레몬서 1:24)

바울은 마가를 ‘동역자’라고 표현합니다.

사람관계보다 우선하는 것은 ‘큰 목표’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너무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등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마음으로 준비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비전과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물으며 그것을 비전과 목표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같으면 결국 서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라는 개인의 중심에서부터 ‘우리’라는 공동체의 중심으로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역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때로는 서로 헤어져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나 사역을 할 때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갈등 상황에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가 제시하는 방향과 상대가 제시하는 것이 맞지 않으면, 잠시 떨어지는 것을 결정하셔도 됩니다. 그 대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바울과 바나바조차 서로 충돌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충돌의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충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단지 더 큰 목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마음만 분명하면 단절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때로는 관계의 단절도 감행하면서 더 큰 목표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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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 36 ~ 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큽니다.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에서 직장인의 스트레스에 관해 조사를 했습니다. ‘나는 스트레스를 안 받거나 거의 받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4.8%였고, 나머지 95%는 매우 높게 받거나(46%), 조금 높게 받는다(49%)고 대답했습니다. 조사에 응한 직장인의 95%가 매일 직장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의 요인은 무엇일까요? 제일 큰 요인은 상사나 동료와의 대인관계(53%)였고, 과도한 업무량과 낮은 연봉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조사로 알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반갑고 좋습니까? 아니면 힘겹습니까? 아마 두 가지 다일 것입니다. 반갑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사람에게서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입고 용기가 꺾였다고 해서 사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늘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사람 때문에 힘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상처받은 적은 없으실까?’ 저는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곳곳에 사람 때문에 상처받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상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실망하셨고, 사람 때문에 탄식하시며 걱정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창세기 6장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의 근심하시고 (창세기 6:5∼6)

하나님은 여섯 째날 인간을 만드시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시며 보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근심이 시작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일종의 독립선언을 한 것이 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피조물인 것을 망각한 무모와 무지로 인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에게 파멸을 가져다주는 사건으로 전복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애통함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애통함은,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해서 인간의 회복을 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상처를 입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또 곳곳에서 하나님의 기쁨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혐오스러운 존재임에도 틀림없습니다. 왜 인간은 아침과 저녁이 다를까요? 아침에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저녁에는 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몰락할까요? 바로 마음에 들어 있는 것 때문입니다. 마음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에 따라 인간의 모습은 변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사랑과 선함이 들어 있는지, 아니면 욕심과 방탕함이 들어 있는지에 따라 인간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요사스러운지 예레미야 17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참된 지혜자, 곧 하나님이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2)

무엇보다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두 교회가 있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교회로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교회인 안디옥교회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도였던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두 교회가 극심하게 충돌하게 됩니다.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생긴 갈등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교회가 하나의 지역 종교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전 세계로 뻗어나가 만민을 향해서 울려 퍼지는 우주적인 종교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즉, 복음의 내용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늠하는 다툼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믿음도 중요하지만 할례와 같은 구약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에 이르는가?’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바울의 입장이었고, 예루살렘교회는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베드로와 야고보의 입장이었습니다. 이 치열한 논쟁 끝에 결국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갈등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게 된 것입니다. 교회의 두 기둥과도 같았던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신학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도덕적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요? 사람을 택하는 문제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서로 달랐습니다.

사람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부모가 자녀를 결혼시킬 때, “그 여자는 너랑 잘 안 맞는 것 같다”, “그 남자는 너하고는 안 어울리는 것 같다” 등의 이야기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때 자녀들은 뭐라고 합니까? “나 이 사람, 좋아해요. 사랑해요.” 결국 갈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누구를 선교 동역자로 데리고 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때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선교 여정에 마가를 데리고 가기를 원하자 바울은 강경하게 반대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사도행전 15:37∼38)

도대체 그 전에 무슨 사건이 있었기에 바울은 마가와 동행하는 것을 반대했을까요? 사도행전 13장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사도행전 13:13)

정확한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일하다가 중간에 도망가는 사람처럼 밉상이 없을 것입니다.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 남기고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조카였습니다. 몇 가지 추측을 한다면, 바나바와 바울 중에서는 바나바가 선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열심이 때로는 바나바를 넘어설 때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바울이 주도적으로 선교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마가가 이에 불만을 갖고 불평하며 떠났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소아시아에서의 전도사역이 너무 위험하고 힘들어서 겁이 나 도망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나이가 어렸던 청년 마가가 여행 중에 집이 그리워 고향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 가지 가능성은 다 열려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바울은 마가가 사역 중간에 혼자 떠나간 것에 대해서 매우 섭섭했고, 한편으로는 괘씸했습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는 그에게 실망했습니다. ‘마가는 기본적으로 일관성이 결여된 사람이구나.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이구나. 어려운 일 앞에서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예수는 믿을 수 있고 교인은 될 수 있지만, 나의 선교 동역자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친구다!’라고 확정을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절대로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바나바에게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가 자랑하는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소개했던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충돌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담백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사도행전 15:39)

한 공동체가 한 사람의 동행 여부로 충돌을 하고, 결국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누구나 관계의 어려움을 경험합니다.

함께 일하다가 관계 때문에 틀어진 경험이 있습니까? ‘저 사람하고는 일할 수 없어. 저 사람 밑에는 못 있겠어. 다시는 저 사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는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까?
일하면서 경험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인간관계와 관련된 것일 때가 많습니다.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굉장히 절실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고 껄끄럽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인격적인 대우 때문에 화가 나고, 동료 사이도 겉으로는 친한 것 같지만 경쟁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기업문화는 어떻습니까? 권위주의적인 상하문화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주 비인격적인 행태가 노골적입니다. 특별히 회식문화는 우리 삶의 많은 것들을 앗아가면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음주문화 안에서는 자율성이 배제됩니다. 친밀성을 제고한다고 하지만 가면적인 친밀성일 뿐, 그 안을 들여다보면 서로 간의 거리는 멉니다.
최근에 SBS에서 ‘요즘 젊은 것들의 사표’라는 제목으로 기획현장 보고서를 방영했습니다. 회사를 다닌 지 1년도 안 되어서 사직서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 가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퇴사하는 사람을 위해서 남은 직원들이 퇴사축하파티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 나가지만 너는 참 잘나가는 거야” 하면서 사표를 낸 사람에게 공감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와 꿈을 찾아서 회사를 떠나는 이들을 향한 축하인 셈입니다.
부모 세대는 그런 모습을 보며 “이놈들이 철이 없어서 그래. 이놈들이 우리 세대만큼 끈기가 없어”라며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런 회사에서는 숨 막혀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내적 아우성을 도무지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런 삶의 정황들에 부딪쳐 본 경험들이 있습니다.

갈등과 단절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첫째, 우리는 인간이 모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등을 겁내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만나면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도 갈등하고 부모와 자녀도 갈등하고, 친구와도 갈등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인간관계는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됩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 때문에 얼마나 골치 아프셨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때로는 인간관계를 단절할 용기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피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단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소중한 관계라고 해도 그것이 삶의 궁극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폐기처분할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과 목표가 같지 않으면 관계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등 가운데 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전도여행을 떠나고, 바울은 실라라는 자신의 제자를 데리고 떠납니다. 하나님은 그런 둘을 모두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관계의 단절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나타나는 몇 가지 변화의 경우가 있습니다. 먼저, 나도 변하고 상대방도 변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양보와 용납의 마음을 열었을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더 큰 목적과 더 분명한 비전을 위해서 이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나는 변했는데 상대는 변하지 않았거나 반대로 상대는 변했는데 나는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기다리며 대화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도 변하기 싫고 상대도 변하기 싫어서 모두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는 함께 있는 것이 서로에게 괴로움을 줄 뿐입니다. 그때는 포기해야 합니다. 잠시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진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만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서로 남남으로 헤어지게 된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해 후에 바나바의 조카였던 마가 요한이 바울의 선교 사역에 아주 깊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울은 마가를 다시 용납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제자로, 믿음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함께 선교 여행을 가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더 큰 비전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라는 비전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 둘은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 (골로새서 4:10)

바울과 마가는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함께 겪게 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 4:11)

마가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아주 유익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 (빌레몬서 1:24)

바울은 마가를 ‘동역자’라고 표현합니다.

사람관계보다 우선하는 것은 ‘큰 목표’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너무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등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마음으로 준비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비전과 목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물으며 그것을 비전과 목표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같으면 결국 서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라는 개인의 중심에서부터 ‘우리’라는 공동체의 중심으로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사역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때로는 서로 헤어져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나 사역을 할 때 우리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합니다. 갈등 상황에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내가 제시하는 방향과 상대가 제시하는 것이 맞지 않으면, 잠시 떨어지는 것을 결정하셔도 됩니다. 그 대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었던 바울과 바나바조차 서로 충돌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충돌의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충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단지 더 큰 목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마음만 분명하면 단절을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때로는 관계의 단절도 감행하면서 더 큰 목표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각하기
직장인들 대부분이 경험하는 가장 큰 스트레스가 상사와 직장 동료와의 대인관계에서 온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사람과 함께 있고,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때론 조금 피했으면 하는 마음도 듭니다. 사람 때문에 위로도 받고, 동시에 사람 때문에 상처도 입게 됩니다.

설교의 요약

하나님께서도 사람 때문에 실망했고, 탄식하며 걱정하셨습니다.(창 6:5) 그러나 또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습 3:17)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을 보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혐오스러운 존재입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에 무엇을 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지혜자는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라 말씀합니다.(잠 16:32)

초대교회 대표적인 두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와 안디옥 교회(바울과 바나바)가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행 15장)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관한 물음이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가, 아니면 그 믿음 위에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하는가의 논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지만 정결을 지키도록 부수적인 요청이 추가되었습니다. 갈등과 다툼이 해소되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기둥 같았던 바울과 바나바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도, 복음의 내용에 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선택하는 문제였습니다. 누구를 데리고 선교여행을 계속 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행 15:37-38) 마가는 바울과 선교 여행을 동행하다가 중간에 멈추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추측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이에 대해 아주 섭섭하고 괘씸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좋은 교인이 될 수 있겠지만 자신과 함께 하는 동역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으로 확정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화를 내면서 마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고 서로 헤어졌습니다.(행 15:39)

함께 동역하다가 인간관계 때문에 틀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적용해야 할 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은 인간관계에 갈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갈등 자체를 겁내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도 사람 때문에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애통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또 하나는 때로는 인간관계를 단절할 용기까지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관계라도 내 삶의 궁극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비전과 목적이 같지 않으면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 후에 바나바의 조카 마가 요한은 바울의 선교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바울의 좋은 제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골 4:10, 딤후 4:11, 몬 1:24) 둘은 서로 용납하고 이해했습니다. 비전과 목표가 일치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 속에 수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그 만남 속에 다른 사람과 서로 충돌할 수 있습니다. 충돌을 두려워하지 말고, 상처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더 큰 목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 마음 가지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때로는 단절시키면서 담대하게 걸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누기
1.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 힘들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시다.
2. 바울과 바나바처럼 교회사역하면서 갈등을 경험하고, 또 해결했던 간증이 있다면 서로 나눠봅시다.
3. 믿음 붙잡고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인간관계에서의 지혜가 무엇일지 생각해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람 때문에 기쁨도 얻지만, 사람 때문에 상처도 받습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은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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