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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누가복음 20: 27 ~ 40

김지철 목사

2010.11.07

작별인사를 준비한다는 것

곁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합니다. 먼저 떠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떠나보내는 사람 역시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젖어듭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서로 감사함으로 떠나보낼 수가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떠나보내는 사람도 작별의 준비를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떠나가는 사람이 남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떠나가는 사람도 자유로워지고 떠나보낸 사람도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중병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질병에 걸렸을 때, 처음에는 자신이 인생의 패배자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임종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는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분노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옆에 살아계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에 결심을 하고 다음과 같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 이제는 그만 슬퍼하세요. 그런 슬픔을 제가 감당하려면 저는 저의 모든 꿈을 이루기위해서 몇 백 년은 더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제가 만약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느긋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전하는 일이 결코 없었을 테니까요. 지금의 시간이 마치 시커먼 구름을 뚫고 찬란하게 쏟아지는 은빛 햇살처럼 느껴집니다. 어머니, 내가 천국에 갔느냐고 누군가 어머니에게 묻거든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내 아들은 원래 그 곳 사람이었다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 드림.”
우리 삶에 시작이 있다면 언젠가는 끝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얼마나 인생을 값지고 충성스럽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참된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왔는지가 귀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아파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픔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상실감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로는 살아있다고 하나 실상은 의미 없는 삶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둘째는 반대로 죽어가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계속해서 적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흠집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공격했던 인물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당시 사회지도층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활과 미래에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시비를 걸면서 우리가 문제를 낼 테니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정답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이 낸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 여인이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보통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녀가 없이 남편이 일찍 죽게 되면 여인은 남편의 형제에게 시집을 가서 상속자를 낳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수혼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갔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동생에게까지 시집을 갔지만 그도 그만 일찍 죽었습니다.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질문합니다. “이 여인은 일곱 형제와 다 살았는데 그러면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이것은 가능할 법하지 않은 허구적인 이야기를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꾸민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놀랍고 지혜로웠습니다. 판단력에 탁월성이 있었습니다. 적대자들도 놀랐고 듣는 사람들도 함께 놀랐습니다. 서기관들마저도 그 다음 질문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막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주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20:37~38)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산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려고 하느냐? 실상은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너희들은 지금 모세가 죽었다고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옛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들은 실상 살아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삶을 사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것에는 한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집니다. 사람은 마지막 죽음 앞에 도달하는 순간 모두가 영점에 도달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지식과 학벌이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얼마나 큰 집에서 살았는가, 얼마나 큰 명예와 권력을 갖고 있었는가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묻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는가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묻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질문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바르게 사는 것, 즉 살아있으나 죽은 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으나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을 보면서 너희들은 살아있다고 하나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생각이 꼬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생각으로 가득 차있고 자기욕심대로 살려한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미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탐내는 것은 돈과 재물이었고 명예와 권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삶이 죽은 사람의 삶과도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떤 제자가 말합니다. “아니,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때 내가 장사를 지내고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22)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긴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사건이요 종말론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을 뒤로 미루셔서는 안 됩니다. 내안에 회의가 있고, 문제가 있고, 다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밤잠을 자지 못하더라도 그것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은 종말론적인 긴급성이 요구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요청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발견되어진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합니다. 내가 지식으로 분석하고, 내가 지혜로 깨닫고, 내가 마음속에 결심하고,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믿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먼저 나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당신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발견하셨기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내 실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 용서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인생의 목표, 꿈과 비전이 생겼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더러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 얼마나 더럽고 흉악한 것들이 많습니까? 인생에는 거짓과 음모와 배반이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와 불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 속에서 이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지저분하고 누추한 곳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회의와 불신에서 믿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저주 가운데 놓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가져다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접촉하는 삶

하나님과 접촉되지 않고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죽음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접촉되어 생명이신 그분과 더불어 인생을 새로 제조하는 것이 생명을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모세는 80세가 되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삶에 몰두하면서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파묻혀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무의미성에 대해 전율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이 보이기 시작했고 민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상의 그늘에 갇혀있었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과감히 뒤로 하고 떠났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 안에 참된 인생을 사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길이었고 외로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사건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갑자기 모든 일이 잘 되고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고통과 배반, 음모와 미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을 보게 됩니다. 마치 바다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구름과 폭풍이 멈추면서 북극성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아가야할 방향이 설정됩니다. 하나님에 내게 주신 은혜와 생명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접촉하시면 우리는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건짐을 받고, 하나님께서 희망과 비전을 비춰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접촉하시면 우리 속에 맺혀져있는 미움과 분노의 한이 풀려지고 용서 받는 기쁨과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접촉하시면 우리를 괴롭히던 회의와 불신이 변하여 믿음과 신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사회학적인 언어로 표현할 때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사회적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곧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생명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쳇바퀴 돌듯이 죽음을 반복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다시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둠에서 빛의 자리로, 낙심과 절망에서 소망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위에 인간을 죽이는 요인들을 제거해야합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정서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우리를 좌절시키고 죽음을 향해서 나가는 것들을 단절시키고 차단시켜야합니다. 우리는 이 땅위에 만연된 미움과 죽임의 역사에 대항해야 합니다. 우리를 좌절시키고 낙심하게 하고 패배의식을 갖게 하고 열등의식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비관적인 사고에 대항하고 부딪혀 이겨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고 생명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날을 예비하며 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습니까? 우리는 죽은 자에게 너무 오랫동안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를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죽은 시신을 안방에 오래둘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영적으로 오래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 때문에 오랫동안 붙잡혀있습니다. 그를 보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보내드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멋진 사람,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십시오. 또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게 하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 안에 자유가 돌아옵니다. 우리 안에 다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랑했어도 하나님께 떠나보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야할 날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부활과 생명의 자리에 들어갈 것을 지금 현재 연습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날에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것을 오늘도 기뻐하면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웃고 즐거워할 것을 이 땅위에서도 웃고 즐거워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을 이 땅에 살면서도 감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시겠습니까? 하나님과 접촉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접목되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생명이고, 그분만이 빛이고, 그분만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가슴을 펴십시오. 내속에 찌꺼기처럼 나를 얽매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분노를 일으키고 애착을 일으켰던 것이 있다면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래서 자유자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자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로 다시 들어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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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 27 ~ 40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작별인사를 준비한다는 것

곁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고합니다. 먼저 떠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습니까? 떠나보내는 사람 역시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젖어듭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 속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가 있을까요? 서로 감사함으로 떠나보낼 수가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떠나보내는 사람도 작별의 준비를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떠나가는 사람이 남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떠나가는 사람도 자유로워지고 떠나보낸 사람도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중병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질병에 걸렸을 때, 처음에는 자신이 인생의 패배자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임종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는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분노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옆에 살아계신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에 결심을 하고 다음과 같이 어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어머니, 이제는 그만 슬퍼하세요. 그런 슬픔을 제가 감당하려면 저는 저의 모든 꿈을 이루기위해서 몇 백 년은 더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동안 어머니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제가 만약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느긋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진심어린 고마움을 전하는 일이 결코 없었을 테니까요. 지금의 시간이 마치 시커먼 구름을 뚫고 찬란하게 쏟아지는 은빛 햇살처럼 느껴집니다. 어머니, 내가 천국에 갔느냐고 누군가 어머니에게 묻거든 이렇게 말씀해주세요. 내 아들은 원래 그 곳 사람이었다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 드림.”
우리 삶에 시작이 있다면 언젠가는 끝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얼마나 인생을 값지고 충성스럽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는지가 참된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살아왔는지가 귀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면 아파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픔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상실감이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로는 살아있다고 하나 실상은 의미 없는 삶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둘째는 반대로 죽어가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계속해서 적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흠집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공격했던 인물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당시 사회지도층인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부활과 미래에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시비를 걸면서 우리가 문제를 낼 테니 당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정답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이 낸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 여인이 일곱 형제가 있는 집안에 시집을 갔습니다. 보통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녀가 없이 남편이 일찍 죽게 되면 여인은 남편의 형제에게 시집을 가서 상속자를 낳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수혼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갔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일곱째 동생에게까지 시집을 갔지만 그도 그만 일찍 죽었습니다.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질문합니다. “이 여인은 일곱 형제와 다 살았는데 그러면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이것은 가능할 법하지 않은 허구적인 이야기를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꾸민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참으로 놀랍고 지혜로웠습니다. 판단력에 탁월성이 있었습니다. 적대자들도 놀랐고 듣는 사람들도 함께 놀랐습니다. 서기관들마저도 그 다음 질문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막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자세히 가르쳐주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20:37~38)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산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려고 하느냐? 실상은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다. 너희들은 지금 모세가 죽었다고 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옛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람들은 실상 살아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삶을 사십시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것에는 한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해집니다. 사람은 마지막 죽음 앞에 도달하는 순간 모두가 영점에 도달합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지식과 학벌이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묻지 않습니다. 얼마나 좋은 차를 타고 얼마나 큰 집에서 살았는가, 얼마나 큰 명예와 권력을 갖고 있었는가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묻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는가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묻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질문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바르게 사는 것, 즉 살아있으나 죽은 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으나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을 보면서 너희들은 살아있다고 하나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생각이 꼬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생각으로 가득 차있고 자기욕심대로 살려한다는 것입니다. 사두개인은 미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탐내는 것은 돈과 재물이었고 명예와 권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이기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삶이 죽은 사람의 삶과도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떤 제자가 말합니다. “아니,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때 내가 장사를 지내고 주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8:22)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긴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의 사건이요 종말론적인 결단을 요구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을 뒤로 미루셔서는 안 됩니다. 내안에 회의가 있고, 문제가 있고, 다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밤잠을 자지 못하더라도 그것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은 종말론적인 긴급성이 요구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내일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요청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발견되어진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말합니다. 내가 지식으로 분석하고, 내가 지혜로 깨닫고, 내가 마음속에 결심하고,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믿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주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먼저 나를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당신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발견하셨기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내 실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 용서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인생의 목표, 꿈과 비전이 생겼습니다.
염세주의 철학자였던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더러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에 얼마나 더럽고 흉악한 것들이 많습니까? 인생에는 거짓과 음모와 배반이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와 불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 속에서 이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지저분하고 누추한 곳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회의와 불신에서 믿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저주 가운데 놓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가져다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접촉하는 삶

하나님과 접촉되지 않고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죽음을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접촉되어 생명이신 그분과 더불어 인생을 새로 제조하는 것이 생명을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모세는 80세가 되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삶에 몰두하면서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파묻혀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무의미성에 대해 전율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웃이 보이기 시작했고 민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우상의 그늘에 갇혀있었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과감히 뒤로 하고 떠났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 안에 참된 인생을 사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길이었고 외로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생명의 사건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갑자기 모든 일이 잘 되고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고통과 배반, 음모와 미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을 보게 됩니다. 마치 바다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구름과 폭풍이 멈추면서 북극성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아가야할 방향이 설정됩니다. 하나님에 내게 주신 은혜와 생명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접촉하시면 우리는 좌절과 실망의 늪에서 건짐을 받고, 하나님께서 희망과 비전을 비춰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접촉하시면 우리 속에 맺혀져있는 미움과 분노의 한이 풀려지고 용서 받는 기쁨과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접촉하시면 우리를 괴롭히던 회의와 불신이 변하여 믿음과 신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사회학적인 언어로 표현할 때 인간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사회적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곧 영적인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생명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쳇바퀴 돌듯이 죽음을 반복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다시 생명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둠에서 빛의 자리로, 낙심과 절망에서 소망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위에 인간을 죽이는 요인들을 제거해야합니다.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정서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우리를 좌절시키고 죽음을 향해서 나가는 것들을 단절시키고 차단시켜야합니다. 우리는 이 땅위에 만연된 미움과 죽임의 역사에 대항해야 합니다. 우리를 좌절시키고 낙심하게 하고 패배의식을 갖게 하고 열등의식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비관적인 사고에 대항하고 부딪혀 이겨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고 생명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날을 예비하며 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습니까? 우리는 죽은 자에게 너무 오랫동안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를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죽은 시신을 안방에 오래둘 수 없는 것처럼,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영적으로 오래 종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 때문에 오랫동안 붙잡혀있습니다. 그를 보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보내드리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멋진 사람,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십시오. 또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게 하신 것을 감사하십시오. 그래야 우리 안에 자유가 돌아옵니다. 우리 안에 다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랑했어도 하나님께 떠나보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서야할 날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부활과 생명의 자리에 들어갈 것을 지금 현재 연습하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날에 하나님 앞에서 기뻐할 것을 오늘도 기뻐하면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웃고 즐거워할 것을 이 땅위에서도 웃고 즐거워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을 이 땅에 살면서도 감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시겠습니까? 하나님과 접촉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접목되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생명이고, 그분만이 빛이고, 그분만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가슴을 펴십시오. 내속에 찌꺼기처럼 나를 얽매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게 분노를 일으키고 애착을 일으켰던 것이 있다면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래서 자유자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자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하나님의 사랑의 자리로 다시 들어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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