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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보물찾기, 감사

데살로니가전서 5: 18

김지철 목사

2014.11.16

나눌수록 좋은 것이 감사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실시한 ‘우리 가족 감사의 고백’이라는 행사에 1,066가정이 참여하셨습니다. 한 가정을 네 명 정도로 보면 약 4,000명 이상이 참여한 것입니다. 아주 감사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교회학교 다니는 자녀가 없는데 참여하면 안 되냐”고 항의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내년에는 교회학교뿐만 아니라 성도님들 전체와 감사의 제목을 나눠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란,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여러 가정들이 낸 감사의 내용 중 20가지와 감사 좌우명 6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신앙에 대해서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노래를 잘 못하는데 초등부 찬양대를 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해요. 교회 나가는 것에 대해 아무도 제지 안 하고 오히려 나가라고 하는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년 온 가족 새벽예배에 다 참석하여 팔찌를 모두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등의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또 할아버지, 할머니나 부모님에 대해서는, ‘멋쟁이 할아버지와 예쁜 할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랑 그림책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요리를 잘하는 아빠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힘든 게 제가 아니라 엄마라는 걸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가 올해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귀한 감사지요?
가족에 대한 감사도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 맞이한 둘째 자녀, 태중에서 강건하게 지켜주시고 설렘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은 가족 중에 저만 교회에 나오지만 믿음의 가정을 꿈꾸며 예배하는 가정이 되길 기도하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됐지만 믿음이 굳건해져서 감사합니다.’ 성취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깊은 물에서도 수영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비교하는 감사가 아닌 절대적인 감사를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학업에 대한 감사도 있었습니다. ‘고3 시기를 잘 버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키가 작아도 감사하다’는 인상적인 감사도 있었습니다. 일상의 행복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초록 빛깔, 노랑 빛깔, 빨강 빛깔의 아름다운 나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준이의 엉덩이 댄스와 해준이의 옹알거림으로 함께 웃을 수 있는 저녁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름 방학 때 개구리 잡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탈북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감사 좌우명들입니다. ‘인생 속에 숨겨둔 감사라는 보물찾기’, ‘감사한 것을 세어 봅시다. 하나, 둘, 셋, 넷. 매일 감사를 세어보는 가정’, ‘그래서 감사. 그러나 감사. 먼저 감사’, ‘평생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be thankful always in whatever you do(네가 하는 무엇이든지 항상 감사하라)’, ‘예수님을 소유한 자, 이미 모든 것을 가졌으니 감사하라.’

감사는, 인생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이 제목들 중에서 아예 오늘의 설교 제목을 뽑았습니다. ‘삶의 보물찾기, 감사’입니다. 감사가 무엇일까요? 인생 곳곳에 숨어 있어서 찾아만 보면 무수하게 나오는 보물찾기와도 같은 것이 감사입니다. ‘보물찾기’라는 말에는 우리 모두의 관심을 끄는 두 가지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보물입니다. 지금도 누가 “보물이다!” 하면 다 그쪽을 쳐다봅니다. 보물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찾기’입니다. 즉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말이 바로 보물찾기입니다.
어렸을 때 보물찾기 했던 기억이 나십니까? 초등학교 때 기억에 의하면, 소풍의 마지막 시간에 보물찾기를 했습니다. 몹시 설레는 순간이면서, 또 동시에 실망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돌 밑, 나뭇가지 사이 등에 보물을 숨겨 놓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찾다가 무엇이라도 발견하면, “찾았다!” 하며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저는 보물을 찾은 기억은 별로 없고, ‘내게는 이런 행운이 없나…’ 했던 섭섭한 마음만 떠오릅니다.
보물찾기란 무엇일까요? 보물찾기란, 본래 보물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찾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골탕 먹이려고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는다면, 분명 좋은 선생님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보물을 찾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는 것, 그것이 보물찾기의 의미입니다.
보물찾기에는 일종의 교육적인 효과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역발상, 즉 생각을 거꾸로 하도록 하는 창의적인 교육이 보물찾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동안 익숙해진 곳만을 바라보지 말고 다른 곳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밝은 곳을 보았다면, 이제는 좀 어두운 곳도 보라는 것입니다. 늘 중심만 보고 있었다면, 이제는 주변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높은 곳만 보았다면, 낮은 곳에도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먼 곳만 보고 있었다면, 가까운 데에서부터 관심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물찾기의 교육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음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 옆에, 내 가까이에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엉뚱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고 헤매다가 인생을 낭비한 적은 없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늘 먼 곳, 엉뚱한 곳만 바라보느라 보물을 찾지 못하고는, ‘내 인생은 버려진 인생이야. 다른 사람에게만 행운이 있고 내게는 행복이 없는가봐’ 하며 그저 실망만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릴 때 했던 보물찾기는, 조금 확대해보면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보물찾기 시간이 아니었다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돌멩이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뒤집어 볼 수 있었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기가 좋구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드시고는 “보기에 심히 좋구나.” 하셨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것을 당신도 좋아하시며 찬탄하셨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며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값진 보물들을 삶의 자리 곳곳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보물들을 감춰 놓으셨을까요? “너 같은 피조물이 창조주인 나, 하나님과 생각이 비견할 수 있겠느냐? 너는 미련한 놈이 아니냐!” 그렇게 우리를 조롱하시려고 값진 보물들을 깊고 깊은 곳에 숨겨 놓으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보물들을 찾고, 그로 인해 기뻐하며 그것들을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하신 분이 아니실까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도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의 모든 것. 즉,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느끼는 것, 갖고 있는 것 등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도 범사에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감사의 제목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것을 감사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감사할 제목이 한두 가지 생각나다가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말해 색맹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들이 흑백으로만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이는 사람과 모든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요? 아니,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장애를 가졌던 헬렌 켈러는 눈과 귀, 모든 것이 멀쩡한 사람들이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런 그녀가 쓴 수필의 제목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입니다. 그 일부를 잠깐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날,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나서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 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이것이 그녀가 사흘 동안 보고 싶어 한 것들입니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원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들으며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우리는 잊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고 불평과 원망의 제목만 자꾸만 생각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그런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라.”

부정적인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보는 것마다 감사가 됩니까? 듣는 것, 만지는 것마다 감사가 됩니까? 주위에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데, 우리가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삶이 그저 흐느적거리며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왜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의용 교수는 『감사일기』라는 책에서 감사의 눈에 대해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감사의 색맹에게는 감사할 거리가 아예 안 보인다. 감사 약시는 감사를 보고 싶어도 잘 안 보인다. 감사 근시에게는 눈 앞의 감사만 보인다. 감사 원시에게는 남의 감사는 보이는데 자기 감사는 잘 안 보인다. 감사 난시는 감사를 보기는 보는데 흐릿하고 선명하지가 않다. 감사 짝시는 한편의 감사만 보인다. 감사 착시는 감사의 핵심을 잘 보지 못한다. 공통점은 감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감사의 눈을 잃어버리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감사할 거리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 안에는 감사하기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마구 움직입니다. 불평하는 이유, 감사할 수 없는 이유를 미리 마련해 놓고 살려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 안 될 것, 힘들어질 것을 미리 예측해서 그러한 일이 생겼을 때 변명할 메카니즘을 아예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인생의 징크스’가 있다고 여기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사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비겁한 생각이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가끔 경험하는 ‘이건 재수 없어’, ‘이건 불길한 현상이야’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스스로 채워 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징크스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요일별로 징크스가 있다, 숫자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 날씨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 색깔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몸에 대한 징크스를 말합니다. 어떤 날은 손톱을 안 깎고, 어떤 날은 머리를 안 자른다고 말입니다.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찾아서 이사하는 것도 징크스입니다. 뭔가 잘못되면 변명할 거리를 이미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징크스는 자신감이 없고 마음이 불안할 때, 그 사람을 붙잡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징크스 탓으로 돌리면서 일종의 자기방어의 심리기제를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불행해지겠습니까? 인생은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고 착각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는 내가 책임질 것이 없고, 이런저런 우연들이 묶여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인생을 멋지게 사는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오늘’은, 살아있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지 않습니까?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 가게 되면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구나 싶어 새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장례식장에 가게 되면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북한 백성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자유가 이렇게 소중한데, 내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17세기 시인이었던 조지 허버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나이다. 하지만 제게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많이 주셨는데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 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를 놓치면 우리 인생의 모든 축복들이 아무것도 아닌 허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내 속에 감사가 생기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만큼 건강 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것 감사합니다. 저녁에 잘 수 있는 것 감사합니다. 식욕을 주신 것도, 이만큼 소화될 수 있게 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맑은 하늘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시고 신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 어떤 것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게 됩니다. 왜입니까? 내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감사란, 내 인생에 하나님이 감추어둔 것처럼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 보물찾기가 바로 감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고백하는 것이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신앙고백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평생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옆에 이런 귀한 사람을 주신 것,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가족을 주신 것, 그리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이만큼의 온전한 정신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삶을 열어 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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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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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나눌수록 좋은 것이 감사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실시한 ‘우리 가족 감사의 고백’이라는 행사에 1,066가정이 참여하셨습니다. 한 가정을 네 명 정도로 보면 약 4,000명 이상이 참여한 것입니다. 아주 감사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교회학교 다니는 자녀가 없는데 참여하면 안 되냐”고 항의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내년에는 교회학교뿐만 아니라 성도님들 전체와 감사의 제목을 나눠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란,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여러 가정들이 낸 감사의 내용 중 20가지와 감사 좌우명 6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신앙에 대해서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노래를 잘 못하는데 초등부 찬양대를 할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해요. 교회 나가는 것에 대해 아무도 제지 안 하고 오히려 나가라고 하는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4년 온 가족 새벽예배에 다 참석하여 팔찌를 모두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등의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또 할아버지, 할머니나 부모님에 대해서는, ‘멋쟁이 할아버지와 예쁜 할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랑 그림책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요리를 잘하는 아빠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장 힘든 게 제가 아니라 엄마라는 걸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가 올해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귀한 감사지요?
가족에 대한 감사도 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 맞이한 둘째 자녀, 태중에서 강건하게 지켜주시고 설렘으로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은 가족 중에 저만 교회에 나오지만 믿음의 가정을 꿈꾸며 예배하는 가정이 되길 기도하게 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됐지만 믿음이 굳건해져서 감사합니다.’ 성취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깊은 물에서도 수영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비교하는 감사가 아닌 절대적인 감사를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학업에 대한 감사도 있었습니다. ‘고3 시기를 잘 버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키가 작아도 감사하다’는 인상적인 감사도 있었습니다. 일상의 행복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초록 빛깔, 노랑 빛깔, 빨강 빛깔의 아름다운 나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준이의 엉덩이 댄스와 해준이의 옹알거림으로 함께 웃을 수 있는 저녁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름 방학 때 개구리 잡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탈북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감사 좌우명들입니다. ‘인생 속에 숨겨둔 감사라는 보물찾기’, ‘감사한 것을 세어 봅시다. 하나, 둘, 셋, 넷. 매일 감사를 세어보는 가정’, ‘그래서 감사. 그러나 감사. 먼저 감사’, ‘평생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be thankful always in whatever you do(네가 하는 무엇이든지 항상 감사하라)’, ‘예수님을 소유한 자, 이미 모든 것을 가졌으니 감사하라.’

감사는, 인생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이 제목들 중에서 아예 오늘의 설교 제목을 뽑았습니다. ‘삶의 보물찾기, 감사’입니다. 감사가 무엇일까요? 인생 곳곳에 숨어 있어서 찾아만 보면 무수하게 나오는 보물찾기와도 같은 것이 감사입니다. ‘보물찾기’라는 말에는 우리 모두의 관심을 끄는 두 가지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보물입니다. 지금도 누가 “보물이다!” 하면 다 그쪽을 쳐다봅니다. 보물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찾기’입니다. 즉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말이 바로 보물찾기입니다.
어렸을 때 보물찾기 했던 기억이 나십니까? 초등학교 때 기억에 의하면, 소풍의 마지막 시간에 보물찾기를 했습니다. 몹시 설레는 순간이면서, 또 동시에 실망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돌 밑, 나뭇가지 사이 등에 보물을 숨겨 놓습니다. 아이들은 신나게 찾다가 무엇이라도 발견하면, “찾았다!” 하며 소리를 칩니다. 그런데 저는 보물을 찾은 기억은 별로 없고, ‘내게는 이런 행운이 없나…’ 했던 섭섭한 마음만 떠오릅니다.
보물찾기란 무엇일까요? 보물찾기란, 본래 보물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찾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골탕 먹이려고 결코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는다면, 분명 좋은 선생님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보물을 찾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는 것, 그것이 보물찾기의 의미입니다.
보물찾기에는 일종의 교육적인 효과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역발상, 즉 생각을 거꾸로 하도록 하는 창의적인 교육이 보물찾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동안 익숙해진 곳만을 바라보지 말고 다른 곳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밝은 곳을 보았다면, 이제는 좀 어두운 곳도 보라는 것입니다. 늘 중심만 보고 있었다면, 이제는 주변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높은 곳만 보았다면, 낮은 곳에도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먼 곳만 보고 있었다면, 가까운 데에서부터 관심을 쏟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물찾기의 교육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 있음에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내 옆에, 내 가까이에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엉뚱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고 헤매다가 인생을 낭비한 적은 없는지 다시 묻게 됩니다. 늘 먼 곳, 엉뚱한 곳만 바라보느라 보물을 찾지 못하고는, ‘내 인생은 버려진 인생이야. 다른 사람에게만 행운이 있고 내게는 행복이 없는가봐’ 하며 그저 실망만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릴 때 했던 보물찾기는, 조금 확대해보면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보물찾기 시간이 아니었다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돌멩이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뒤집어 볼 수 있었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생각해보곤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보기가 좋구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드시고는 “보기에 심히 좋구나.” 하셨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것을 당신도 좋아하시며 찬탄하셨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좋아하며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값진 보물들을 삶의 자리 곳곳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보물들을 감춰 놓으셨을까요? “너 같은 피조물이 창조주인 나, 하나님과 생각이 비견할 수 있겠느냐? 너는 미련한 놈이 아니냐!” 그렇게 우리를 조롱하시려고 값진 보물들을 깊고 깊은 곳에 숨겨 놓으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숨겨 놓으신 보물들을 찾고, 그로 인해 기뻐하며 그것들을 누리도록 우리를 초청하신 분이 아니실까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범사에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도처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의 모든 것. 즉,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느끼는 것, 갖고 있는 것 등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도 범사에 감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감사의 제목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것을 감사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감사할 제목이 한두 가지 생각나다가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감사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말해 색맹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들이 흑백으로만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이는 사람과 모든 색을 볼 수 있는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클까요? 아니,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장애를 가졌던 헬렌 켈러는 눈과 귀, 모든 것이 멀쩡한 사람들이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런 그녀가 쓴 수필의 제목이 ‘사흘만 볼 수 있다면’입니다. 그 일부를 잠깐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날,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나서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 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이것이 그녀가 사흘 동안 보고 싶어 한 것들입니다. 헬렌 켈러가 그토록 원했던 일들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들으며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우리는 잊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고 불평과 원망의 제목만 자꾸만 생각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그런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라.”

부정적인 믿음을 버려야 합니다.

보는 것마다 감사가 됩니까? 듣는 것, 만지는 것마다 감사가 됩니까? 주위에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데, 우리가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삶이 그저 흐느적거리며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왜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의용 교수는 『감사일기』라는 책에서 감사의 눈에 대해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감사의 색맹에게는 감사할 거리가 아예 안 보인다. 감사 약시는 감사를 보고 싶어도 잘 안 보인다. 감사 근시에게는 눈 앞의 감사만 보인다. 감사 원시에게는 남의 감사는 보이는데 자기 감사는 잘 안 보인다. 감사 난시는 감사를 보기는 보는데 흐릿하고 선명하지가 않다. 감사 짝시는 한편의 감사만 보인다. 감사 착시는 감사의 핵심을 잘 보지 못한다. 공통점은 감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감사의 눈을 잃어버리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라는 안경을 쓰고 보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감사할 거리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 안에는 감사하기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마구 움직입니다. 불평하는 이유, 감사할 수 없는 이유를 미리 마련해 놓고 살려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 안 될 것, 힘들어질 것을 미리 예측해서 그러한 일이 생겼을 때 변명할 메카니즘을 아예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인생의 징크스’가 있다고 여기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사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비겁한 생각이고, 도망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가끔 경험하는 ‘이건 재수 없어’, ‘이건 불길한 현상이야’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스스로 채워 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징크스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요일별로 징크스가 있다, 숫자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 날씨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 색깔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몸에 대한 징크스를 말합니다. 어떤 날은 손톱을 안 깎고, 어떤 날은 머리를 안 자른다고 말입니다.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찾아서 이사하는 것도 징크스입니다. 뭔가 잘못되면 변명할 거리를 이미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징크스는 자신감이 없고 마음이 불안할 때, 그 사람을 붙잡는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징크스 탓으로 돌리면서 일종의 자기방어의 심리기제를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불행해지겠습니까? 인생은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고 착각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는 내가 책임질 것이 없고, 이런저런 우연들이 묶여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인생을 멋지게 사는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오늘’은, 살아있다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지 않습니까?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원에 가게 되면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구나 싶어 새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장례식장에 가게 되면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북한 백성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자유가 이렇게 소중한데, 내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17세기 시인이었던 조지 허버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나이다. 하지만 제게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많이 주셨는데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 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를 놓치면 우리 인생의 모든 축복들이 아무것도 아닌 허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내 속에 감사가 생기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만큼 건강 주신 것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수 있는 것 감사합니다. 저녁에 잘 수 있는 것 감사합니다. 식욕을 주신 것도, 이만큼 소화될 수 있게 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맑은 하늘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시고 신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배드릴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 어떤 것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게 됩니다. 왜입니까? 내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8)

감사란, 내 인생에 하나님이 감추어둔 것처럼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 보물찾기가 바로 감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고백하는 것이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은 최고의 신앙고백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평생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옆에 이런 귀한 사람을 주신 것,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가족을 주신 것, 그리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이만큼의 온전한 정신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삶을 열어 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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