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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성령님께 맡겨라

로마서 8: 5 ~ 9

김지철 목사

2008.03.09

생각은 인간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라고 정의한 말들 중에서 우리가 많이 들어온 문구가 있습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이 「팡세」라는 책에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도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로 인간을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존재이지만 강력한 힘인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은 참으로 소중하고 삶의 전체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은 인간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생각은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육체를 격렬하게 사용하는 운동경기에 있어서도 생각하는 정신세계는 아주 소중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이기기 위해서 체력훈련과 기술훈련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들어가는 항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훈련입니다. 경쟁이 동반되는 운동경기에서 선수들은 누구나 긴장하고 때로는 불안해합니다. 부정적인 생각, 산만한 생각이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때로는 집중력을 분산시키기도 합니다. 잃은 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운동 감독과 코치들은 애를 씁니다.
미국의 한 운동 코치가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의 강조점을 비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육체의 대조는 무려 3:7로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아무리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훈련을 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프로야구 감독은 경기의 절반은 90%가 정신에 의해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신앙인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생각, 정신의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인격이 달라집니다. 목사이면서 리더십 강사인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생각한 결과이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가 오늘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은 생각의 종류와 생각의 크기에 따라서 평가됩니다. 꿈과 비전을 이루고 싶다면 좋은 생각, 바른 생각의 씨앗을 마음 밭에 심어야 합니다. 손금을 잘 본다는 점쟁이를 찾아간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손금을 내보이면서 자기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손금을 봤더니 아주 많은 것이 여기에 보이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보입니까?”
점쟁이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당신은 45살이 될 때까지 가난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함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제가 45살이 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점쟁이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때가 되면 가난하고 불행한 생활에 많이 익숙해질 것입니다.”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 생각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기 삶을 새롭게 도전하고 기대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포기한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총선 때가 되면 점쟁이를 찾아가는 정치인들이 수없이 많다는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비꼬듯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나치 정권의 히틀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부하를 둔 통치자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생각하지 않는 부하는 모든 독재자들이 원하는 부하입니다. 백성을 우롱하며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독재자들은 생각하는 부하가 곁에 있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생각을 멈춘 사람들,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꿈적도 하지 않는 사람들, 쌓아온 업적에 집착하는 사람들, 도우려하지 않는 사람들, 옛것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이란 과거 지향적이 아닌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며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 속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드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 창조의 영과 함께 창조를 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결정하고 결단해야 할 생각의 책임자입니다.

생각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결정에 따라서 때로는 고뇌도 해야 합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적인 습성이 있습니다. 꿈을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내, 남편, 부모님, 자식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자신을 설득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에 붙들려서 아무 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생각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열쇠를 가진 사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당신은 수문장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는 것은
사랑 그리고 미움.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줄서 있는 것은 부드러운 평화와 격렬한 전쟁
당신은 누가 그 문을 통과하고 통과할 수 없는지 선택해야 하리
관용이 부족한 마음은 두려움이나 오만이라고 하는 날개를 달고
몰래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소유의 욕망 뒤에 숨어
안으로 살짝 들어가려고 한다.
오! 조심해! 당신은 누가 들어가고 누가 남을지 결정하는 수문장
당신은 마음의 열쇠를 가진 사람

생각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의 열쇠를 열어 놓고 거짓과 미움과 분노가 들어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분노하며 다른 사람을 탓하고 거짓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때로는 스스로 마음의 문에 열쇠를 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정하고 결단해야 합니다.“너는 안돼. 미움, 분노 너는 가. 사랑, 생명, 행복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야.”
인생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걸림돌은 환경이나 여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신은 안 바꿔지면서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고,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 성령님께 생각을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믿음은 사고방식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나만 생각하는 것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인생의 지평이 열려 삶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맛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위대한 존재가 되게 하셨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 5:19-21)

우리 마음의 열쇠에 무엇을 넣겠습니까? 육체의 것들을 넣겠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일, 성령의 생각을 넣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을 성령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동안 육체의 욕망으로 생겨진 주관과 판단과 가치관을 깨뜨려 버리겠다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생각에 얽매어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각이 저절로 바뀌고 스스로 알아서 변화될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부지런함보다는 게으름을 선호합니다. 새로운 꿈을 모험하기 보다는 기존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빛의 세계보다는 어둠의 세계인 쾌락을 더 즐겨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정신을 드려 성령의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악과 거짓에 저항하는 영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저항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악과 불의를 향해서 저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과 어둠의 세계를 향해서 저항의 영을 허락해주십니다. 이제는 육체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때로는 공허함이나 불만족, 배고픔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거룩한 공허감, 거룩한 불만족, 거룩한 배고픔을 받게 하는 것은 못되고 불의한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진리로 나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구약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편 42:1)

영혼의 거룩한 배고픔, 거룩한 목마름, 거룩한 불만족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급한 목마름이 있다면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을 갖고 하나님을 사모한다면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무한을 향한, 영원한 삶과 사랑과 기쁨을 향한 배고픔이다.”
성령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지금까지의 기록을 갱신하게 하십니다. 운동선수가 기록을 갱신하면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수영선수가 수영기록을 단축시키고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 기록을 단축시키면 우리는 영웅으로 높이 세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기록을 갱신하면서 삶의 지경을 넓혀가야 합니다. 삶의 사고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더 멋진 삶, 더 풍요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과거에 얽매인 것에서 벗어나 영적인 사고를 하십시오. 나 자신의 제한점을 넘어서 나보다 더 큰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경을 확대해 나가십시오. 성령님께 맡기는 사고란 성령님께서 이끄는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넘어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란 열광하는 사람이거나 비정상적인 황홀경에 빠진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것에 무관심하고 모든 것을 체념한 포기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과 진리와 화평의 말씀에 가슴을 열어 놓으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더불어 사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꾸려나가라는 말씀입니다. 혼자 결정하던 것을 예수님과 함께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 생명과 사랑의 눈을 가지고 운명을 새롭게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겠다는 선언을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의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성령님과 더불어 생각하며 성령님과 더불어 인생을 넓혀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놓쳤던 것들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십시오.
인생을 혼자 곤고하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을 새벽기도에 초청합니다.
마음으로 결단하고 결심하십시오.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생각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삶의 지경을 확대해 나가십시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의 기록을 갱신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주시면 우리는 감당하기가 쉽습니다. 육체의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성령의 일,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란 진리의 영, 생명의 영, 지혜의 영, 평화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성령님과 더불어 생각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결정하고 결단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의 지평을 열어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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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 5 ~ 9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은 인간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라고 정의한 말들 중에서 우리가 많이 들어온 문구가 있습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이 「팡세」라는 책에서 “인간은 자연 속에서도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말로 인간을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연약하고 변하기 쉬운 존재이지만 강력한 힘인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어떤 피조물보다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각은 참으로 소중하고 삶의 전체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은 인간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생각은 인간을 만들어냅니다. 육체를 격렬하게 사용하는 운동경기에 있어서도 생각하는 정신세계는 아주 소중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이기기 위해서 체력훈련과 기술훈련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들어가는 항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훈련입니다. 경쟁이 동반되는 운동경기에서 선수들은 누구나 긴장하고 때로는 불안해합니다. 부정적인 생각, 산만한 생각이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때로는 집중력을 분산시키기도 합니다. 잃은 것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운동 감독과 코치들은 애를 씁니다.
미국의 한 운동 코치가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의 강조점을 비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육체의 대조는 무려 3:7로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아무리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훈련을 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프로야구 감독은 경기의 절반은 90%가 정신에 의해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신앙인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생각, 정신의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인격이 달라집니다. 목사이면서 리더십 강사인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생각한 결과이다. 우리의 내일은 우리가 오늘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은 생각의 종류와 생각의 크기에 따라서 평가됩니다. 꿈과 비전을 이루고 싶다면 좋은 생각, 바른 생각의 씨앗을 마음 밭에 심어야 합니다. 손금을 잘 본다는 점쟁이를 찾아간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손금을 내보이면서 자기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손금을 봤더니 아주 많은 것이 여기에 보이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보입니까?”
점쟁이가 이렇게 예언합니다. “당신은 45살이 될 때까지 가난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함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제가 45살이 지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점쟁이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때가 되면 가난하고 불행한 생활에 많이 익숙해질 것입니다.”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 생각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기 삶을 새롭게 도전하고 기대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포기한 사람들이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총선 때가 되면 점쟁이를 찾아가는 정치인들이 수없이 많다는 말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비꼬듯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나치 정권의 히틀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부하를 둔 통치자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생각하지 않는 부하는 모든 독재자들이 원하는 부하입니다. 백성을 우롱하며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던 독재자들은 생각하는 부하가 곁에 있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생각을 멈춘 사람들,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꿈적도 하지 않는 사람들, 쌓아온 업적에 집착하는 사람들, 도우려하지 않는 사람들, 옛것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이란 과거 지향적이 아닌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며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의 세계 속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드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 창조의 영과 함께 창조를 해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결정하고 결단해야 할 생각의 책임자입니다.

생각이란 소중한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결정에 따라서 때로는 고뇌도 해야 합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는 공동적인 습성이 있습니다. 꿈을 갖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내, 남편, 부모님, 자식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자신을 설득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에 붙들려서 아무 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생각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열쇠를 가진 사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당신은 수문장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줄서서 기다리는 것은
사랑 그리고 미움.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줄서 있는 것은 부드러운 평화와 격렬한 전쟁
당신은 누가 그 문을 통과하고 통과할 수 없는지 선택해야 하리
관용이 부족한 마음은 두려움이나 오만이라고 하는 날개를 달고
몰래 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소유의 욕망 뒤에 숨어
안으로 살짝 들어가려고 한다.
오! 조심해! 당신은 누가 들어가고 누가 남을지 결정하는 수문장
당신은 마음의 열쇠를 가진 사람

생각의 주인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의 열쇠를 열어 놓고 거짓과 미움과 분노가 들어오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분노하며 다른 사람을 탓하고 거짓말하며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전가하고 때로는 스스로 마음의 문에 열쇠를 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정하고 결단해야 합니다.“너는 안돼. 미움, 분노 너는 가. 사랑, 생명, 행복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야.”
인생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걸림돌은 환경이나 여건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신은 안 바꿔지면서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이고,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 성령님께 생각을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생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믿음은 사고방식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나만 생각하는 것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인생의 지평이 열려 삶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를 맛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위대한 존재가 되게 하셨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라디아서 5:19-21)

우리 마음의 열쇠에 무엇을 넣겠습니까? 육체의 것들을 넣겠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일, 성령의 생각을 넣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을 성령님께 드린다는 것은 그동안 육체의 욕망으로 생겨진 주관과 판단과 가치관을 깨뜨려 버리겠다는 용기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생각에 얽매어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각이 저절로 바뀌고 스스로 알아서 변화될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부지런함보다는 게으름을 선호합니다. 새로운 꿈을 모험하기 보다는 기존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빛의 세계보다는 어둠의 세계인 쾌락을 더 즐겨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정신을 드려 성령의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악과 거짓에 저항하는 영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저항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악과 불의를 향해서 저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과 어둠의 세계를 향해서 저항의 영을 허락해주십니다. 이제는 육체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때로는 공허함이나 불만족, 배고픔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거룩한 공허감, 거룩한 불만족, 거룩한 배고픔을 받게 하는 것은 못되고 불의한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진리로 나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구약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편 42:1)

영혼의 거룩한 배고픔, 거룩한 목마름, 거룩한 불만족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급한 목마름이 있다면 성령의 사람인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을 갖고 하나님을 사모한다면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어떤 철학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무한을 향한, 영원한 삶과 사랑과 기쁨을 향한 배고픔이다.”
성령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지금까지의 기록을 갱신하게 하십니다. 운동선수가 기록을 갱신하면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수영선수가 수영기록을 단축시키고 마라톤 선수가 마라톤 기록을 단축시키면 우리는 영웅으로 높이 세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기록을 갱신하면서 삶의 지경을 넓혀가야 합니다. 삶의 사고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더 멋진 삶, 더 풍요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까지 과거에 얽매인 것에서 벗어나 영적인 사고를 하십시오. 나 자신의 제한점을 넘어서 나보다 더 큰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삶의 지경을 확대해 나가십시오. 성령님께 맡기는 사고란 성령님께서 이끄는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넘어야 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란 열광하는 사람이거나 비정상적인 황홀경에 빠진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것에 무관심하고 모든 것을 체념한 포기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과 진리와 화평의 말씀에 가슴을 열어 놓으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더불어 사는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꾸려나가라는 말씀입니다. 혼자 결정하던 것을 예수님과 함께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 생명과 사랑의 눈을 가지고 운명을 새롭게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겠다는 선언을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의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성령님과 더불어 생각하며 성령님과 더불어 인생을 넓혀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정신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놓쳤던 것들을 다시 회복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십시오.
인생을 혼자 곤고하게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을 새벽기도에 초청합니다.
마음으로 결단하고 결심하십시오.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생각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삶의 지경을 확대해 나가십시오.
지금까지 살았던 인생의 기록을 갱신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쳐주시면 우리는 감당하기가 쉽습니다. 육체의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성령의 일,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란 진리의 영, 생명의 영, 지혜의 영, 평화의 영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더불어, 성령님과 더불어 생각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결정하고 결단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의 지평을 열어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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