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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잉태한 사람들의 복 – 성경주제 16 : 생명 –

누가복음 1: 39 ~ 45

김지철 목사

2013.12.22

생명의 잉태는 축복입니다.

결혼식의 주례를 서게 될 때 반드시 요구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결혼하게 되면 자녀를 둘 이상 낳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주례를 안 해 주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되는 자랑스러움,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경험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이들에게서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실제 통계를 봐도 결혼 후에 자녀를 가지려고 해도 갖지 못하는 부부가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쌍 중에 한 쌍이 그런 어려움을 경험한다고 알려집니다. 특별히 여성들에게 불임이란, 정신적인 고통이 되고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불임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물어보면 40% 이상이 매우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50% 이상이 약간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무려 90% 이상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룻밤 불장난으로 잉태된 아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파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생명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이를 잉태한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입니다. 엘리사벳은 남편도 자신도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찾아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엘리사벳은 노래를 부릅니다.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누가복음 1:25)

아마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질책과 조롱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야, 너는 아이도 못 낳는 여자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수치를 벗겨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를 통해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명명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는 그 반대입니다. 아직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는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성령으로 아들을 낳겠다고 하니 마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생소한 이야기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마리아는 천사에게 항의하듯 물었습니다. 그때 천사는 이야기합니다. “너보다 먼저 임신한 여인이 있다. 네 친족, 엘리사벳이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6∼37)

마리아는 두렵고 떨리고,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와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하지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받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누가복음 1:38)

창세기에 나오는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길 때,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남편 요셉을 통해서 ‘예수’라는 아들의 이름을 받게 됩니다. 이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였습니다.

생명은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생명이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여러분은 첫 아기를 가졌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하십니까?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었습니다.
저는 원래 형제가 많지 않아서 결혼 후에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는 것이 매우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결혼해서 처음 아내에게 했던 말은, 아이를 다섯은 낳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셋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지만 말이지요.
아내와 함께 자녀를 위한 기도를 드리면서, 자녀들의 이름에 대한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올바를 ‘의’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예수님을 뒤따랐던 세례 요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희가 정의 내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높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가장 낮춘 자’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드러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아이를 낳게 되면 이름에 ‘의’를 넣고, 의의 사람 세례 요한을 닮게 키우자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하나는 빛날 ‘혁’을 넣고, 또 하나는 어질 ‘현’을 넣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딸을 낳으면 이 의를 비치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경’을 넣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대로 첫아이는 ‘혁’자를 집어넣고, 둘째아이는 ‘경’자를 집어넣었습니다.
처음 합의한 대로 셋째도 낳자 했더니,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둘은 내가 낳고 셋째는 당신 낳은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가 물었더니, 힘들게 공부하며 학위를 받았을 때의 논문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느냐고 되묻습니다. 논문의 제목은 ‘예수님, 곧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지혜가 바로 ‘현’ 아니냐며, “그러니까 세 번째 아이는 당신이 낳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참으로 모든 것이 감사했습니다. ‘내 아들도, 내 딸도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내가 공부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어떻게 하면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의를 빛나게 하는 존재로 자녀들을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 어떻게 하지. 어떻게 낳지. 어떻게 키우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이야기하지…’ 그런 마음 가운데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떠올랐습니다.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그녀도 임신을 했다니까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마리아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누가복음 1:39∼40)

‘빨리’라는 부사가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엘리사벳은 누구입니까? 생명을 잉태하지 못해서 근심과 염려로 살았던 인물입니다.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생명을 잉태해서 부끄럽고 두려워 어찌할 줄 몰랐던 사람입니다. 둘 다 임신했는데 한 사람은 기다렸던 임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임신이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두 어머니의 임신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어머니,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가진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축하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깨달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깨달았습니다.
젊은 나이, 열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 닥친 임신이라는 사건은 그녀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오지?’ 하고 남의 탓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 나를 이런 곤궁에 빠뜨리셨는가!’ 하며 항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믿음의 친구, 생명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시작된 생명이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임을 알려줄 친구가 필요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기에 축복의 말까지 더합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42)

이 말은 충격이고 동시에 위로였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임신한 것을 복이라며 축하할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처음으로 인사를 건넬 때도 그랬습니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어떻게 처녀가 임신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리아에게 힘든 이야기면서도, 생명의 잉태라는 기쁨의 소식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다. 예수의 생명을 가진 것이 축복이다. 예수의 생명이 곧 하나님의 은혜다.” 생명은 생명을 알아보고, 생명은 생명을 위로하고,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깊이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살림의 역사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이 내게 생명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내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아이를 갖는 잉태의 기쁨, 생명의 기쁨은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생명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를 바라보면, 참으로 많은 걱정이 생깁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함부로 조롱하는 사람은 곧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 생명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생명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을 스스로 못 견뎌합니다. 무엇인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야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며,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면, 생명을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불행한 사람들과 동일화하고 자기의 비극을 계속 유지하면서, 누군가의 탓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남의 약점과 문제점을 들추어내려고 합니다. 인생을 어둡게 보고 인생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내가 만난 위기, 당한 어려움과 불행이 부모 탓이라고 말합니다. 친구 탓이라고 말합니다. 선생 탓이라고 말합니다. 사회 탓, 국가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예언자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깊이 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오해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국가에도 문제가 있고,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 여야 정치인과 기업가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기업들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지적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을 그곳에 매몰시켜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위대한 생명을 다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의 각본을 네가 한 번 만들어 보거라. 내가 네게 준 생명의 주체자는 바로 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사님, 내 생명도 부지하게 힘든데 무슨 남의 생명까지…’, ‘목사님, 사는 게 힘듭니다.’ 맞습니다. 하루하루 생명을 보존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치열하고 살벌한 삶을 전쟁터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생명이 내 안에 잉태되는 것입니다. 여인이 자기 아들과 딸을 뱃속에 잉태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생명을 가슴에 잉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임의 역사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게 하고, 증오와 갈등을 만들어 죽이게 하는 역사, 즉 가인의 역사가 한편에 있습니다. 이 죽임의 역사는 사탄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편의 역사가 있습니다. 살림의 역사입니다. 연약한 자의 팔을 굳게 세워주는 역사입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부어주는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가장 비천한 자리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구유에 오셨을까요? “비천한 자들아, 나보다 더 비천한 자가 있느냐? 용기를 내라. 하나님의 아들인 나도 가장 비천한 곳에서 시작했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좌절하고 남의 탓만 하면서 무너져가느냐. 다시 일어서라. 다시 생명을 가져라. 내 생명을 너희에게 전해주겠다.”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네게 주니 너는 멋지게 살아라.”
러시아의 문호였던 톨스토이는 이렇게 자문하듯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살아라. 죽지 말고 사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요, 비결이다.” 행복하고 싶으면 주어진 삶에 헌신해 보라는 것입니다.
고대 교부였던 어거스틴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춤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천사들이 너와 함께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 활기차게 춤을 추어야만 하나님도 도와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푹 주저앉아서 모든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도 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사였던 그륀은, 늘 뭔가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아침마다 자명종이 울리면 살기로 결심해라. 오늘을 살기로 결심해라. 살아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오늘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오늘을 살기로 결심하면 너를 울게 하는 많은 일들이 닥친다 해도 너는 활력과 기쁨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슴에 잉태하고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는 것, 살아있다는 것, 내가 생명을 가졌다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예찬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생명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입니다. 희망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탄절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생명의 사건을 가슴에 품고,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과 공동체가 살고 이 사회가 다시 생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생명의 사건을 가슴으로 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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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 39 ~ 45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생명의 잉태는 축복입니다.

결혼식의 주례를 서게 될 때 반드시 요구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결혼하게 되면 자녀를 둘 이상 낳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 조항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주례를 안 해 주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되는 자랑스러움,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경험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결혼한 이들에게서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실제 통계를 봐도 결혼 후에 자녀를 가지려고 해도 갖지 못하는 부부가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쌍 중에 한 쌍이 그런 어려움을 경험한다고 알려집니다. 특별히 여성들에게 불임이란, 정신적인 고통이 되고 우울증에 빠지게 하는 스트레스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불임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물어보면 40% 이상이 매우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50% 이상이 약간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무려 90% 이상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룻밤 불장난으로 잉태된 아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아파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생명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이를 잉태한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입니다. 엘리사벳은 남편도 자신도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찾아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엘리사벳은 노래를 부릅니다.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누가복음 1:25)

아마 그녀는 그동안 수많은 질책과 조롱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야, 너는 아이도 못 낳는 여자야.”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수치를 벗겨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를 통해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명명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마리아는 그 반대입니다. 아직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는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성령으로 아들을 낳겠다고 하니 마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생소한 이야기가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마리아는 천사에게 항의하듯 물었습니다. 그때 천사는 이야기합니다. “너보다 먼저 임신한 여인이 있다. 네 친족, 엘리사벳이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1:36∼37)

마리아는 두렵고 떨리고, 도대체 어떻게 이 일을 감당해야 할지 알지 못했지만, 엘리사벳이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와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하지 못함이 없다는 말씀을 받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누가복음 1:38)

창세기에 나오는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마리아는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길 때,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남편 요셉을 통해서 ‘예수’라는 아들의 이름을 받게 됩니다. 이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였습니다.

생명은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생명이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여러분은 첫 아기를 가졌을 때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하십니까?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지…’ 하는 마음과 또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생겼었습니다.
저는 원래 형제가 많지 않아서 결혼 후에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는 것이 매우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결혼해서 처음 아내에게 했던 말은, 아이를 다섯은 낳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셋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지만 말이지요.
아내와 함께 자녀를 위한 기도를 드리면서, 자녀들의 이름에 대한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올바를 ‘의’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예수님을 뒤따랐던 세례 요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희가 정의 내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높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가장 낮춘 자’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드러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아이를 낳게 되면 이름에 ‘의’를 넣고, 의의 사람 세례 요한을 닮게 키우자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하나는 빛날 ‘혁’을 넣고, 또 하나는 어질 ‘현’을 넣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딸을 낳으면 이 의를 비치는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경’을 넣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대로 첫아이는 ‘혁’자를 집어넣고, 둘째아이는 ‘경’자를 집어넣었습니다.
처음 합의한 대로 셋째도 낳자 했더니,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둘은 내가 낳고 셋째는 당신 낳은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인가 물었더니, 힘들게 공부하며 학위를 받았을 때의 논문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느냐고 되묻습니다. 논문의 제목은 ‘예수님, 곧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지혜가 바로 ‘현’ 아니냐며, “그러니까 세 번째 아이는 당신이 낳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참으로 모든 것이 감사했습니다. ‘내 아들도, 내 딸도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내가 공부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구나.’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어떻게 하면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의를 빛나게 하는 존재로 자녀들을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 어떻게 하지. 어떻게 낳지. 어떻게 키우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이야기하지…’ 그런 마음 가운데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떠올랐습니다.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그녀도 임신을 했다니까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마리아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누가복음 1:39∼40)

‘빨리’라는 부사가 들어 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엘리사벳은 누구입니까? 생명을 잉태하지 못해서 근심과 염려로 살았던 인물입니다.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생명을 잉태해서 부끄럽고 두려워 어찌할 줄 몰랐던 사람입니다. 둘 다 임신했는데 한 사람은 기다렸던 임신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임신이었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두 어머니의 임신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어머니,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가진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생명을 축하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무엇으로부터 깨달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깨달았습니다.
젊은 나이, 열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 닥친 임신이라는 사건은 그녀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오지?’ 하고 남의 탓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비판하고 비난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 나를 이런 곤궁에 빠뜨리셨는가!’ 하며 항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믿음의 친구, 생명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시작된 생명이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임을 알려줄 친구가 필요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기에 축복의 말까지 더합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42)

이 말은 충격이고 동시에 위로였습니다. 어떻게 처녀가 임신한 것을 복이라며 축하할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처음으로 인사를 건넬 때도 그랬습니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어떻게 처녀가 임신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마리아에게 힘든 이야기면서도, 생명의 잉태라는 기쁨의 소식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다. 예수의 생명을 가진 것이 축복이다. 예수의 생명이 곧 하나님의 은혜다.” 생명은 생명을 알아보고, 생명은 생명을 위로하고,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깊이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살림의 역사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이 내게 생명으로 전달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내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아이를 갖는 잉태의 기쁨, 생명의 기쁨은 여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미 생명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를 바라보면, 참으로 많은 걱정이 생깁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을 함부로 조롱하는 사람은 곧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이 생명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생명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을 스스로 못 견뎌합니다. 무엇인가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야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며,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면, 생명을 살고 있으면서도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불행한 사람들과 동일화하고 자기의 비극을 계속 유지하면서, 누군가의 탓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남의 약점과 문제점을 들추어내려고 합니다. 인생을 어둡게 보고 인생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내가 만난 위기, 당한 어려움과 불행이 부모 탓이라고 말합니다. 친구 탓이라고 말합니다. 선생 탓이라고 말합니다. 사회 탓, 국가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는 예언자처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깊이 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오해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국가에도 문제가 있고,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 여야 정치인과 기업가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기업들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해서 지적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을 그곳에 매몰시켜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위대한 생명을 다 놓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의 각본을 네가 한 번 만들어 보거라. 내가 네게 준 생명의 주체자는 바로 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사님, 내 생명도 부지하게 힘든데 무슨 남의 생명까지…’, ‘목사님, 사는 게 힘듭니다.’ 맞습니다. 하루하루 생명을 보존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치열하고 살벌한 삶을 전쟁터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생명이 내 안에 잉태되는 것입니다. 여인이 자기 아들과 딸을 뱃속에 잉태한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생명을 가슴에 잉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라고 우리를 초청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죽임의 역사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게 하고, 증오와 갈등을 만들어 죽이게 하는 역사, 즉 가인의 역사가 한편에 있습니다. 이 죽임의 역사는 사탄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편의 역사가 있습니다. 살림의 역사입니다. 연약한 자의 팔을 굳게 세워주는 역사입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부어주는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가장 비천한 자리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구유에 오셨을까요? “비천한 자들아, 나보다 더 비천한 자가 있느냐? 용기를 내라. 하나님의 아들인 나도 가장 비천한 곳에서 시작했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좌절하고 남의 탓만 하면서 무너져가느냐. 다시 일어서라. 다시 생명을 가져라. 내 생명을 너희에게 전해주겠다.”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 시간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생명을 네게 주니 너는 멋지게 살아라.”
러시아의 문호였던 톨스토이는 이렇게 자문하듯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살아라. 죽지 말고 사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요, 비결이다.” 행복하고 싶으면 주어진 삶에 헌신해 보라는 것입니다.
고대 교부였던 어거스틴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춤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천사들이 너와 함께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스스로 활기차게 춤을 추어야만 하나님도 도와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푹 주저앉아서 모든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도 도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사였던 그륀은, 늘 뭔가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아침마다 자명종이 울리면 살기로 결심해라. 오늘을 살기로 결심해라. 살아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오늘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오늘을 살기로 결심하면 너를 울게 하는 많은 일들이 닥친다 해도 너는 활력과 기쁨을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슴에 잉태하고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는 것, 살아있다는 것, 내가 생명을 가졌다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예찬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생명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입니다. 희망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탄절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생명의 사건을 가슴에 품고, 내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과 공동체가 살고 이 사회가 다시 생명의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의 생명의 사건을 가슴으로 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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