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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소년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장군을 물리쳤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조그마한 돌, 물맷돌 하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물매’라고 하는 것은 가죽이나 천으로 엮은 것으로 중간 부분은 편평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맷줄의 한쪽은 손목에 고정시킨 채 물매 가운데에 돌멩이를 넣어 돌리다가 한쪽을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서 돌이 힘을 얻고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당대의 목동들과 군인들은 이 물맷돌을 전투용으로, 때로는 방어용으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 즉 원 운동의 힘을 이용한 것입니다. 구심력은 중심을 향해 수렴하는 힘이고, 원심력은 밖을 향하는 힘입니다. 어릴 때 훌라우프를 돌려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처음에는 한두 바퀴 돌다가 금방 떨어집니다. 그런데 몸을 중심으로 구심력과 원심력의 법칙을 사용하게 되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까지 돌릴 수 있습니다.
이 구심력과 원심력은 물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관계에도 필요한 역학입니다. 청년들이 연애할 때 많은 사람들이 충고를 합니다. 그중 반드시 가르치는 한 가지가 바로 ‘밀당’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밀어낼 줄도 알고, 때로는 끌어당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곧 구심력과 원심력을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관계에 긴장이 이어지고, 호기심이 생기고, 다이내믹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개인의 실존, 즉 몸과 마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뭔가 도전해 보려는 마음이 원심력이라면, 그 도전 과제들 중에서 이것은 된다, 안 된다 하며 조절하고 끌어당기는 마음이 구심력입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을 우리는 건강한 사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거대한 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평은 분주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것을 잘 보여주는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마르다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입니다. 마르다는 원심력을 대표합니다. 그녀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부지런합니다. 무엇이든지 열심과 열정으로 발 벗고 나서는 여인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내면적입니다. 조용하고, 수동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언가에 집중하는 열심을 가졌고, 기다림을 이겨낼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두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삶에 목표가 생기고 사랑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자매는 별도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두 가지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무언가 하고 싶고, 부딪혀 보고 싶은 원심력적인 마르다의 성향이 있는가 하면, ‘이건 안 돼. 여기서 멈춰야 해.’ 하며 다시 붙들어 매는 구심력적인 마리아의 성향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있습니다. 때로 마리아의 성향이 더 강하거나, 반대로 마르다의 성향이 더 강하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오늘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초대했습니다. 그랬더니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숫자가 스무 명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과 그 무리들을 잘 접대할 수 있을까?’ 마르다에게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인들이 돕고는 있어도 일손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 착한 일을 할 때도 일이 쌓이기 시작하면 분주해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 나타나는 마음 상태가 있습니다. ‘피곤’입니다. 갑자기 고단함이 엄습해오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지금 마음처럼 말입니다. 피곤한 마음으로 옆을 보니, 동생 마리아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도움이라도 받고자 그녀를 찾다가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피곤하다’입니다. 참 자주 쓰는 말이지만, 가장 절제해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두 번, 세 번 쓰기 시작하면 그때 누가 다가옵니까? 사탄이 다가옵니다. “야 너 피곤하지? 그렇지? 계속 피곤해.”하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아주 치명적으로 위험해지는 순간입니다.
피곤함과 고단함을 느낄 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이길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쉴 때인가 보다, 지금은 잠을 잘 때인가 보다, 지금은 운동할 때인가 보다 하고 피곤을 이기기 위한 방법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피곤하다 피곤하다고만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피곤하다는 반복적인 생각은, ‘왜 내가 이렇게 피곤하지?’ 묻게 되고, 곧 남을 탓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분노가 솟아나기 시작하면서 불평하게 됩니다. 바로 마르다가 그랬습니다.
자신은 이렇게 바쁘고 분주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 바쁜 상황에서 그런 마리아를 그저 가만히 두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불평과 불만이 마르다의 입에서 쏟아졌습니다.
선한 일로도 고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경험하는 이 분노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사실 선한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반가워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자원하여 초청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어쩌면 동생의 허락은 받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시작은 기쁨이었고 감사였습니다. 순전히 자원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피곤이 몰려옵니다. 기쁨이 사라집니다. ‘내가 왜 이걸 자원했지?’하는 마음과 함께 분노가 치솟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런 마음을 가져 보았을 것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분들도 늘 조심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즐겁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피곤이 밀려옵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인정하고 칭찬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혼자 애써야 하지? 왜 나만 이렇게 수고해야 되지? 내게는 왜 보상이 없는 거지?’ 생각하면서 착하고 선한 일로부터 비롯되었던 기쁨이 하나씩 하나씩 떠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경험했던 분노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뭔가 불공정한 것 같아.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거야? 왜 나 혼자만 이렇게 땀 흘려야 해? 이제는 내가 누릴 차례인데 왜 다른 사람이 내가 가져야 할 권리를 빼앗아 가고 있는 거지?’
마르다의 이러한 마음은 사탄이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입니다. 매우 분주합니다. 주위가 산만해지고, 마음이 흐트러졌습니다. 혼란스러워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 40절 전반부에는 마르다의 마음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 (누가복음 10:40)
‘준비하는 일’이라고 기록된 것의 헬라어 단어는 요새도 많이 사용하는 ‘디아코니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이야기하시며,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하셨을 때도 이 디아코니아의 동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역, 봉사, 남을 위한 섬김에 있어서 분주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정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귀찮아졌고, 지쳤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많은 일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일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 사역, 봉사 등을 멋지게 열심히 하는 분들이 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분주한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분주해지는 순간, 일중독에 빠집니다. 그것은 곧 내가 일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지루함과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근심이 다가오고 염려도 몰려옵니다. 그러면서 실망하게 됩니다. ‘왜 나 혼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지?’ 자기 연민이 스스로를 붙잡기 시작합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이 도대체 뭘까?’
마르다도 그랬습니다. 힘든 마음으로 바라 본 동생 마리아의 모습은 전혀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마리아는 둘째 치고 예수님마저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건가? 나를 이렇게 방치해 두시는 건가?’ 답답함이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마르다는 어떻게 했을까요? 마르다의 반응은 그녀가 참 건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제가 볼 때 그녀는 몸도 건강했지만 생각이 건강했습니다.
…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누가복음 10:40)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아마 예수님께 실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해내면, 답이 보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도 이렇게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일에 충성을 할 때도 이렇게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혼자 꾹꾹 속에 새겨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힘들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교회에 와서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엔가 토로할 친구가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많은 좋은 친구가 있지만, 제일 좋은 친구 중 하나는 내가 화를 낼 때 받아 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세상에서는 친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런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면 사랑하는 사람도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떠나는 것이 두려워 화를 혼자 쌓아둘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병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토해내야 할까요?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께, 하나님께 토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 괜찮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너무 점잖게 합니다. ‘하나님께 불평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그 화를 나에게 쏟으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셔도 됩니다. 시편을 읽어 보세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을 갖고 하나님 앞에 불평하는 순간,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하면서 내 속마음을 아뢰는 순간, 그것이 간구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이 열심히 보는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입니다. 미생(未生)은 바둑 용어 중의 하나로, 아직 미未, 살 생生, 즉 아직 못 살았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두다가 프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한 젊은이가 회사에 입사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와의 관계, 동료와의 경쟁관계, 일과 업적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 등 직장인의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공감하는 것은,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다를까요? 우리도 똑같이 그런 힘든 삶의 자리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술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또는 육체적인 쾌락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것들로 잠깐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곧 다음날이 되면 그 평안은 허상임을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아픔과 분주함, 화남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토해냈습니다. “왜 이렇게 내가 혼자 분주해야 해요? 왜 내가 이런 불공정한 상황에 처해야 해요?” 하고 예수님께 항의를 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픔을 예수님께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 큰 축복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근심과 걱정이 얼마나 우리를 아프게 하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언 12:25)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27)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염려와 불평과 답답함을 토해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고 묻지 않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답하실 길이 없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예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좋은 것, 한 가지만, 선택하라.”
마르다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너무 분주하게 사는구나. 스스로 고생을 쌓고 있구나.” 그리고는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이 해결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을 깨우쳐 줍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0:42)
여기에는 중요한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한 가지만’, ‘좋은 편’, ‘택했다’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저것 말고, 좋은 것 한 가지만 말입니다.
인생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수많은 선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결단하며 선택했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도 내 선택이었습니다. 그 선택들이 이어져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키웁니까? “네가 선택해라. 어떤 학교를 가서 무엇을 공부할지, 어떤 기업에 갈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인생을 꾸밀지 선택해라.” 왜입니까? ‘너의 선택이 너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주하게 이것저것 바라보지 말고,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다음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조금, 요것도 조금’ 그러지 말고, ‘한 가지만이라도 만족한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음에 말씀드렸던 구심력과 원심력의 역학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전거 혹은 자동차 바퀴가 있습니다. 아무리 새것이라 해도 바퀴의 축이 약하면 굴러가지 않습니다. 무너집니다. 축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축, 가장 중요한 이것을 붙잡아야 그 다음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심축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축입니다. 왜 이분이 중심축이 되어야 할까요?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 안에 진리가 있고, 그분 안에 자유롭게 하는 능력과 평안과 영원한 세계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중심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다른 모든 것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인생을 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축으로 삼으십시오.
삶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직장생활, 가정생활, 인간관계, 삶의 모든 자리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놓여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축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중심에 있을 때, 그분이 우리 인생의 축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 일에서부터 인생의 모든 일을 출발하셨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기뻤고 여러 가지 분주한 상황 중에도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우리 삶의 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선택하고 있습니까? 집중하고 있습니까? 집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축이고, 우리 집중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도 예배를 드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어야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문제가 생길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예수님께 질문하십시오. “주님 어떻게 할까요? 뭐가 문제일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네가 선한 것, 가장 좋은 것을 택했느냐?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냥 가거라.”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삶의 리듬을 타며 인생을 열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3: 38 ~ 42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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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소년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장군을 물리쳤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조그마한 돌, 물맷돌 하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물매’라고 하는 것은 가죽이나 천으로 엮은 것으로 중간 부분은 편평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맷줄의 한쪽은 손목에 고정시킨 채 물매 가운데에 돌멩이를 넣어 돌리다가 한쪽을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해서 돌이 힘을 얻고 앞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당대의 목동들과 군인들은 이 물맷돌을 전투용으로, 때로는 방어용으로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 즉 원 운동의 힘을 이용한 것입니다. 구심력은 중심을 향해 수렴하는 힘이고, 원심력은 밖을 향하는 힘입니다. 어릴 때 훌라우프를 돌려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처음에는 한두 바퀴 돌다가 금방 떨어집니다. 그런데 몸을 중심으로 구심력과 원심력의 법칙을 사용하게 되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까지 돌릴 수 있습니다.
이 구심력과 원심력은 물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관계에도 필요한 역학입니다. 청년들이 연애할 때 많은 사람들이 충고를 합니다. 그중 반드시 가르치는 한 가지가 바로 ‘밀당’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밀어낼 줄도 알고, 때로는 끌어당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곧 구심력과 원심력을 잘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관계에 긴장이 이어지고, 호기심이 생기고, 다이내믹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개인의 실존, 즉 몸과 마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뭔가 도전해 보려는 마음이 원심력이라면, 그 도전 과제들 중에서 이것은 된다, 안 된다 하며 조절하고 끌어당기는 마음이 구심력입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을 우리는 건강한 사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거대한 원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평은 분주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것을 잘 보여주는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는 마르다이고, 다른 하나는 마리아입니다. 마르다는 원심력을 대표합니다. 그녀는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부지런합니다. 무엇이든지 열심과 열정으로 발 벗고 나서는 여인이었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내면적입니다. 조용하고, 수동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언가에 집중하는 열심을 가졌고, 기다림을 이겨낼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두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삶에 목표가 생기고 사랑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자매는 별도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두 가지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무언가 하고 싶고, 부딪혀 보고 싶은 원심력적인 마르다의 성향이 있는가 하면, ‘이건 안 돼. 여기서 멈춰야 해.’ 하며 다시 붙들어 매는 구심력적인 마리아의 성향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있습니다. 때로 마리아의 성향이 더 강하거나, 반대로 마르다의 성향이 더 강하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오늘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초대했습니다. 그랬더니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숫자가 스무 명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과 그 무리들을 잘 접대할 수 있을까?’ 마르다에게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인들이 돕고는 있어도 일손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 착한 일을 할 때도 일이 쌓이기 시작하면 분주해집니다. 그러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러한 때 나타나는 마음 상태가 있습니다. ‘피곤’입니다. 갑자기 고단함이 엄습해오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지금 마음처럼 말입니다. 피곤한 마음으로 옆을 보니, 동생 마리아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도움이라도 받고자 그녀를 찾다가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마르다는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피곤하다’입니다. 참 자주 쓰는 말이지만, 가장 절제해야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두 번, 세 번 쓰기 시작하면 그때 누가 다가옵니까? 사탄이 다가옵니다. “야 너 피곤하지? 그렇지? 계속 피곤해.”하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아주 치명적으로 위험해지는 순간입니다.
피곤함과 고단함을 느낄 때, ‘내가 이것을 어떻게 이길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쉴 때인가 보다, 지금은 잠을 잘 때인가 보다, 지금은 운동할 때인가 보다 하고 피곤을 이기기 위한 방법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피곤하다 피곤하다고만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피곤하다는 반복적인 생각은, ‘왜 내가 이렇게 피곤하지?’ 묻게 되고, 곧 남을 탓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분노가 솟아나기 시작하면서 불평하게 됩니다. 바로 마르다가 그랬습니다.
자신은 이렇게 바쁘고 분주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 바쁜 상황에서 그런 마리아를 그저 가만히 두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불평과 불만이 마르다의 입에서 쏟아졌습니다.
선한 일로도 고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르다가 경험하는 이 분노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사실 선한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반가워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자원하여 초청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어쩌면 동생의 허락은 받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시작은 기쁨이었고 감사였습니다. 순전히 자원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피곤이 몰려옵니다. 기쁨이 사라집니다. ‘내가 왜 이걸 자원했지?’하는 마음과 함께 분노가 치솟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런 마음을 가져 보았을 것입니다.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분들도 늘 조심해야 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즐겁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피곤이 밀려옵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를 인정하고 칭찬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이렇게 혼자 애써야 하지? 왜 나만 이렇게 수고해야 되지? 내게는 왜 보상이 없는 거지?’ 생각하면서 착하고 선한 일로부터 비롯되었던 기쁨이 하나씩 하나씩 떠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경험했던 분노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뭔가 불공정한 것 같아.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거야? 왜 나 혼자만 이렇게 땀 흘려야 해? 이제는 내가 누릴 차례인데 왜 다른 사람이 내가 가져야 할 권리를 빼앗아 가고 있는 거지?’
마르다의 이러한 마음은 사탄이 공격하기에 가장 좋은 상태입니다. 매우 분주합니다. 주위가 산만해지고, 마음이 흐트러졌습니다. 혼란스러워진 것입니다. 오늘 말씀 40절 전반부에는 마르다의 마음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 (누가복음 10:40)
‘준비하는 일’이라고 기록된 것의 헬라어 단어는 요새도 많이 사용하는 ‘디아코니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이야기하시며,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하셨을 때도 이 디아코니아의 동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역, 봉사, 남을 위한 섬김에 있어서 분주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정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귀찮아졌고, 지쳤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많은 일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일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 사역, 봉사 등을 멋지게 열심히 하는 분들이 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분주한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분주해지는 순간, 일중독에 빠집니다. 그것은 곧 내가 일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지루함과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근심이 다가오고 염려도 몰려옵니다. 그러면서 실망하게 됩니다. ‘왜 나 혼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지?’ 자기 연민이 스스로를 붙잡기 시작합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이 도대체 뭘까?’
마르다도 그랬습니다. 힘든 마음으로 바라 본 동생 마리아의 모습은 전혀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마리아는 둘째 치고 예수님마저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건가? 나를 이렇게 방치해 두시는 건가?’ 답답함이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때 마르다는 어떻게 했을까요? 마르다의 반응은 그녀가 참 건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제가 볼 때 그녀는 몸도 건강했지만 생각이 건강했습니다.
…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누가복음 10:40)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은 아마 예수님께 실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해내면, 답이 보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도 이렇게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일에 충성을 할 때도 이렇게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혼자 꾹꾹 속에 새겨두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힘들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교회에 와서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엔가 토로할 친구가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많은 좋은 친구가 있지만, 제일 좋은 친구 중 하나는 내가 화를 낼 때 받아 줄 수 있는 친구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세상에서는 친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런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면 사랑하는 사람도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떠나는 것이 두려워 화를 혼자 쌓아둘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병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토해내야 할까요?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께, 하나님께 토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 괜찮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를 너무 점잖게 합니다. ‘하나님께 불평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그 화를 나에게 쏟으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셔도 됩니다. 시편을 읽어 보세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신앙을 갖고 하나님 앞에 불평하는 순간, 그것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하면서 내 속마음을 아뢰는 순간, 그것이 간구가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이 열심히 보는 드라마가 하나 있습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입니다. 미생(未生)은 바둑 용어 중의 하나로, 아직 미未, 살 생生, 즉 아직 못 살았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두다가 프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한 젊은이가 회사에 입사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사와의 관계, 동료와의 경쟁관계, 일과 업적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 등 직장인의 애환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공감하는 것은,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다를까요? 우리도 똑같이 그런 힘든 삶의 자리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술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또는 육체적인 쾌락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것들로 잠깐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곧 다음날이 되면 그 평안은 허상임을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자신의 아픔과 분주함, 화남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토해냈습니다. “왜 이렇게 내가 혼자 분주해야 해요? 왜 내가 이런 불공정한 상황에 처해야 해요?” 하고 예수님께 항의를 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픔을 예수님께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 큰 축복입니다. 혼자서는 결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근심과 걱정이 얼마나 우리를 아프게 하는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언 12:25)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27)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염려와 불평과 답답함을 토해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고 묻지 않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대답하실 길이 없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예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좋은 것, 한 가지만, 선택하라.”
마르다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너무 분주하게 사는구나. 스스로 고생을 쌓고 있구나.” 그리고는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이 해결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을 깨우쳐 줍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0:42)
여기에는 중요한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한 가지만’, ‘좋은 편’, ‘택했다’입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저것 말고, 좋은 것 한 가지만 말입니다.
인생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수많은 선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결단하며 선택했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도 내 선택이었습니다. 그 선택들이 이어져서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키웁니까? “네가 선택해라. 어떤 학교를 가서 무엇을 공부할지, 어떤 기업에 갈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인생을 꾸밀지 선택해라.” 왜입니까? ‘너의 선택이 너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주하게 이것저것 바라보지 말고, 선택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덧붙이십니다. 한 가지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다음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조금, 요것도 조금’ 그러지 말고, ‘한 가지만이라도 만족한다’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처음에 말씀드렸던 구심력과 원심력의 역학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전거 혹은 자동차 바퀴가 있습니다. 아무리 새것이라 해도 바퀴의 축이 약하면 굴러가지 않습니다. 무너집니다. 축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축, 가장 중요한 이것을 붙잡아야 그 다음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심축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축입니다. 왜 이분이 중심축이 되어야 할까요? 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분 안에 진리가 있고, 그분 안에 자유롭게 하는 능력과 평안과 영원한 세계와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중심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다른 모든 것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인생을 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축으로 삼으십시오.
삶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직장생활, 가정생활, 인간관계, 삶의 모든 자리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놓여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축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중심에 있을 때, 그분이 우리 인생의 축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늘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 일에서부터 인생의 모든 일을 출발하셨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기뻤고 여러 가지 분주한 상황 중에도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우리 삶의 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선택하고 있습니까? 집중하고 있습니까? 집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축이고, 우리 집중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도 예배를 드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어야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문제가 생길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예수님께 질문하십시오. “주님 어떻게 할까요? 뭐가 문제일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네가 선한 것, 가장 좋은 것을 택했느냐? 만약 이 질문에 그렇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냥 가거라.”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삶의 리듬을 타며 인생을 열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