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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 22: 24 ~ 27

김지철 목사

2011.12.25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을 영어로는 “Merry Christmas”, “행복한 성탄절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왜 이 날이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둠속에서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빛의 역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었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 속에 억압당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 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이런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풍성한 성탄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공동체는 그 동안 참으로 많은 곳에서 예수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노력하였습니다. 지난 1년간의 많은 섬김과 헌신의 모습들을 뒤돌아보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기대가 얼마나 넘쳐나는 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는 섬김의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긴다고 하는 것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본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을 뒤 따랐던 제자들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주변에 있는 이웃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하고 3년 동안 함께 있었지만 결코 쉽게 바뀌지는 못했습니다. 너무 변하지 않아서 예수님이 정말 가슴이 막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누가복은 22장 24절)

이런 제자들의 싸움은 한번 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은 9장 46절에 보면 이와 같은 싸움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많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차지 하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제자들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따라다닐 때부터 이 싸움이 시작 되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 옆에 내가 더 큰 자리, 내가 더 많은 자리를 탐 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는 그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잘 안 변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 잘 변하던가요? 딱 한번 깨달으면 그 다음부터 사람이 변하던가요?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고 ‘아, 은혜 받았지.’하고 나가지만, 금방 잊어버립니다. 이렇듯 우리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없으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변하지 않는 제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누가복음 22장 25~26절>

예수님께서 예를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욕심을 내고 차지하려고 하는 것들은 이방의 왕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손아귀에 넣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 그들 스스로를 높이며 자신들이 은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인이라고 하는 말은 로마 정치 권력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백성들 앞에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에게 찬양을 강요하는 말 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다 먹여주는 아버지와도 같다고 하는 선전문구가 바로 이런 모습임을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꿰뚫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얘들아,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렇게 높아지고 그렇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남을 억누르며 다스리려고 하지만 너는 그렇게 가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세상의 통치와는 다릅니다.

몇 일전에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이 죽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백성들을 억압했고, 눈물을 쏟게 했고, 공포 속에서 굶주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죽음 앞에서 북한의 백성들이 슬픔을 강요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슬퍼하는 저들이 가엽게 여겨집니다.
우리들 또한 그 죽음의 소식을 들으면서 충격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대했을 겁니다. 북한의 사회가 어떻게 될까? 정치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저기에 또 피의 숙청이 있지는 않을까? 무력적인 도발이 생기지는 않을까? 남, 북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까에 대한 염려스러운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대가 있었습니다. 저들이 변화되어, 닫혀져있던 문이 열리고, 저 북녘까지 평화통일의 역사, 자유와 민주통일의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서 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속의 기대가 생긴 것입니다.
66년간의 김일성의 왕조가 김정일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 때에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기도할 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속에 70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주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심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저 북녘의 땅도 저 어둠과 억압의 세력이 70년의 세월을 넘기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백성이 복 받는 백성,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백성,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는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저 북녘의 땅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통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방입니다.

북한의 이런 독재의 모습은 기독교의 통치를 모양을 모방했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을 메시아로 등극을 시켰습니다. 북한 곳곳에 김일성 영생탑이 세워져 있고, 그것뿐만 아니라 곳곳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져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여러분 무엇인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하늘에 승천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장 20절>

이것을 그렇게 모방한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메시아가 되었습니다. 우상숭배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섬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제자란 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신이 되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숭배의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두 가지가 없어집니다. 하나는 자유가 없어집니다. 강제만이 남습니다. 총과 칼을 든 철군통치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 전 중동에서 일어났던 이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독재자들이 몰락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기적인 수렴청정하려고 하는 그런 독재자들을 통해서 온 백성들은 자유를 다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신뢰이고, 믿음입니다. 독재자들은 서로 감시하게 만듭니다. 남의 약점을 찾아서 자아비판을 유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서로 불신하게 합니다. 그 결과 인격적인 존중이 없어집니다. 이런 불신과 감시와 억압 속에서 독재자들은 가끔 은전(恩典)을 베풉니다.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에게 은전을 베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따뜻한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걸음만 뒤로 서면 잔인해집니다. 자기의 권력이 무너지는 조금의 틈이 생기면 가차 없이 숙청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통치이고 독제자의 통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섬김의 통치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누가복음 22장 27절>

“세상은 큰 자, 섬김을 받으려하는 자가 가득하지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겠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통치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치는 사랑의 대가를 치루는 겁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큰 자가 되려고 하느냐? 정말로 위대한 자가 되려고 하느냐? 그러면 세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대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많이 소유하고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계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위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많은 것을 가져야 사랑하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자꾸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믿음이 커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대가를 당신 스스로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억압 속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 되어 억눌린 자가 자유하게 되고,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고, 가슴에 멍이 든 자가 치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자유를 선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인 것입니다. 죄로 부터의 자유, 죽음의 공포로 부터의 자유, 사탄으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니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신뢰하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재구조, 공산주의의 구조와는 전혀 반대되는 하나님의 역사 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믿고, 존중해 주며 이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많은 노력이 있지만,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사랑,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일을 해야 할 겁니다. 내가 비록은 약하고, 내가 비록 자랑스럽지는 못해도,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통해서 내가 더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런 결단을 통해서 사랑과 섬김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며,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고 주님을 닮아가는 귀한 복된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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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 24 ~ 27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을 영어로는 “Merry Christmas”, “행복한 성탄절이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왜 이 날이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어떤 즐거움을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둠속에서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빛의 역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었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권세 속에 억압당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 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이런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풍성한 성탄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공동체는 그 동안 참으로 많은 곳에서 예수님의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노력하였습니다. 지난 1년간의 많은 섬김과 헌신의 모습들을 뒤돌아보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기대가 얼마나 넘쳐나는 지를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우리는 섬김의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긴다고 하는 것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본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을 뒤 따랐던 제자들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쉽게 주변에 있는 이웃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하고 3년 동안 함께 있었지만 결코 쉽게 바뀌지는 못했습니다. 너무 변하지 않아서 예수님이 정말 가슴이 막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누가복은 22장 24절)

이런 제자들의 싸움은 한번 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은 9장 46절에 보면 이와 같은 싸움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많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차지 하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제자들이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따라다닐 때부터 이 싸움이 시작 되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 옆에 내가 더 큰 자리, 내가 더 많은 자리를 탐 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는 그 순간까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잘 안 변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 잘 변하던가요? 딱 한번 깨달으면 그 다음부터 사람이 변하던가요? 주일날 와서 예배드리고 ‘아, 은혜 받았지.’하고 나가지만, 금방 잊어버립니다. 이렇듯 우리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없으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변하지 않는 제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누가복음 22장 25~26절>

예수님께서 예를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욕심을 내고 차지하려고 하는 것들은 이방의 왕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손아귀에 넣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 그들 스스로를 높이며 자신들이 은인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인이라고 하는 말은 로마 정치 권력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백성들 앞에서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에게 찬양을 강요하는 말 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다 먹여주는 아버지와도 같다고 하는 선전문구가 바로 이런 모습임을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꿰뚫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얘들아,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렇게 높아지고 그렇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고 남을 억누르며 다스리려고 하지만 너는 그렇게 가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세상의 통치와는 다릅니다.

몇 일전에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이 죽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백성들을 억압했고, 눈물을 쏟게 했고, 공포 속에서 굶주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죽음 앞에서 북한의 백성들이 슬픔을 강요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슬퍼하는 저들이 가엽게 여겨집니다.
우리들 또한 그 죽음의 소식을 들으면서 충격을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대했을 겁니다. 북한의 사회가 어떻게 될까? 정치가 어떻게 변하게 될까? 저기에 또 피의 숙청이 있지는 않을까? 무력적인 도발이 생기지는 않을까? 남, 북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까에 대한 염려스러운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대가 있었습니다. 저들이 변화되어, 닫혀져있던 문이 열리고, 저 북녘까지 평화통일의 역사, 자유와 민주통일의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서 통일의 역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속의 기대가 생긴 것입니다.
66년간의 김일성의 왕조가 김정일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 때에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기도할 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속에 70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주님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심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저 북녘의 땅도 저 어둠과 억압의 세력이 70년의 세월을 넘기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백성이 복 받는 백성,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백성,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이 넘쳐나는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저 북녘의 땅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통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방입니다.

북한의 이런 독재의 모습은 기독교의 통치를 모양을 모방했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을 메시아로 등극을 시켰습니다. 북한 곳곳에 김일성 영생탑이 세워져 있고, 그것뿐만 아니라 곳곳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져 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여러분 무엇인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하늘에 승천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장 20절>

이것을 그렇게 모방한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메시아가 되었습니다. 우상숭배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얼마나 가슴이 섬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독제자란 나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신이 되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숭배의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 두 가지가 없어집니다. 하나는 자유가 없어집니다. 강제만이 남습니다. 총과 칼을 든 철군통치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 전 중동에서 일어났던 이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독재자들이 몰락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기적인 수렴청정하려고 하는 그런 독재자들을 통해서 온 백성들은 자유를 다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신뢰이고, 믿음입니다. 독재자들은 서로 감시하게 만듭니다. 남의 약점을 찾아서 자아비판을 유도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서로 불신하게 합니다. 그 결과 인격적인 존중이 없어집니다. 이런 불신과 감시와 억압 속에서 독재자들은 가끔 은전(恩典)을 베풉니다.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에게 은전을 베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따뜻한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걸음만 뒤로 서면 잔인해집니다. 자기의 권력이 무너지는 조금의 틈이 생기면 가차 없이 숙청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통치이고 독제자의 통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섬김의 통치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누가복음 22장 27절>

“세상은 큰 자, 섬김을 받으려하는 자가 가득하지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겠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통치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통치는 사랑의 대가를 치루는 겁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큰 자가 되려고 하느냐? 정말로 위대한 자가 되려고 하느냐? 그러면 세속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위대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많이 소유하고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계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위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많은 것을 가져야 사랑하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자꾸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믿음이 커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대가를 당신 스스로 치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억압 속에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 되어 억눌린 자가 자유하게 되고,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고, 가슴에 멍이 든 자가 치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자유를 선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인 것입니다. 죄로 부터의 자유, 죽음의 공포로 부터의 자유, 사탄으로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으니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신뢰하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재구조, 공산주의의 구조와는 전혀 반대되는 하나님의 역사 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믿고, 존중해 주며 이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많은 노력이 있지만,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가진 사랑,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일을 해야 할 겁니다. 내가 비록은 약하고, 내가 비록 자랑스럽지는 못해도,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통해서 내가 더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런 결단을 통해서 사랑과 섬김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며,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고 주님을 닮아가는 귀한 복된 우리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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