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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민들은 흑인 대통령을 선택하여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11월 4일 미국 국민들은 44대 대통령으로 메케인이 아닌 오바마를 선택했습니다. 미국은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노예해방 이후 가장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흑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감격스러운 기쁨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오바마는 ‘변화(chang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미국이 더 높은 가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의 연설문에 담고 있는 사상은 미국이 지닌 자유와 정의에 대한 예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천국은 아닙니다. 마약과 도박, 강도와 살인의 비율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은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선배들이 가르친 자유와 정의, 민주와 평화라는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를 그들의 삶 중심 내용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의 연설문 내용입니다.
“진보를 위한 미국, 보수를 위한 미국 따위는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만의 미국, 백인만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동양인의 미국 따위도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제 아버지는 외국인 유학생이었습니다.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염소를 치며 자랐습니다. 지붕이 양철로 된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요리사였는데 영국인들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더 큰 꿈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열심히 참고 공부한 끝에 마법같은 나라에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이 땅에 왔던 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기회의 등불이었던 미국 말입니다…… 부모님은 제게 아프리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버락,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지고도 성공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분은 부자가 아니었지만 제가 가장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관용적인 나라 미국에선 부자가 아니라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비범함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45년 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엄청난 변화와 성숙의 모습이 미국사회에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 민주와 평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흑인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 행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문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자유와 평화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역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들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잡고 나란히 앉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킹 목사는 조지아주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들의 자손과 노예 주인들의 자손이 피부색에 상관없이 함께하는 모습을 꿈꾸며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흑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그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 수락 연설을 한 것 또한 2008년 8월 28일로 날짜가 똑같습니다. 45년 만에 흑인인 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나는 21세기의 위협, 테러와 핵 위협, 가난과 인종 학살, 기후 변화와 질병 등을 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간 연합체계를 만들겠습니다. 나는 또 우리의 도덕적 위상을 재부각하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한 번 더 자유를 찾는 모든 사람들, 평화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최고의 희망이 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변화를 외치면서 흑인으로서 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의 정신에는 기독교적인 가치가 들어있습니다. 자유와 정의, 민주와 평화를 외친 흑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인종차별이 갖고 있던 아픔에 대한 극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가 부시보다 더 뛰어난 대통령이 될 것인지는 앞으로 해 나가는 일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흑인 대통령을 뽑은 미국 국민들의 선택의 출발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에 의해서 변하고 성숙합니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서 변화되고 성장합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단순한 일상적인 선택에서부터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위대한 선택의 순간도 다가옵니다. 살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종류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상대적인 선택은 우리가 수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도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선택합니다. 중국집에 가서 중국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한식집에 가서 한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찻집에 가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녹차를 마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큰 선택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것에 우리는 큰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못 먹으면 내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일상적인 선택조차도 주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수동적으로 선택하려는 사람입니다. 방어적인 선택에 급급하여 살기 때문에 인생의 주도적인 특성이 사라지는 경우입니다. 일상적인 경험은 그대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중요한 선택이 있습니다. 누구나 어려운 선택, 힘든 선택의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고, 대학전공을 무엇으로 하며 어떤 직장에 들어가 인생의 꿈을 펼 것인가는 무엇보다 중요한 선택입니다. 일생에 어떤 반려자를 만나 한평생을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될 때는 단순히 결정할 수 없고 기도하면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 한번 기도하라. 전쟁에 나갈 때 두 번 기도하라. 결혼 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가는 것은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목숨이 걸린 문제이지만 결혼은 평생 살아야 할 삶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선택과 결단을 보류합니다.
우리 인생의 결정은 너무 중요하여 때로는 삶 전체를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잠시 되돌아보면 우리는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선택하지 않고 환경에 따르거나 다른 사람의 결정에 맡깁니다. 자기가 인생을 주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게으름 때문에 혹은 참여하기 싫어서 선택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책임지기 싫어서 도피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을까봐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선택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선택하지 않으면 방관자가 됩니다. 책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지 않을 수는 있지만 국외자가 됩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꿈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선택하지 않고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인생을 바르게 사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하려고 할 때 때로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또 다른 것의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한 직장에 들어가면 다른 수많은 직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한 대학에 들어가면 다른 대학을 포기해야 합니다. 한 여자, 한 남자와 결혼하려면 세상의 수많은 여자와 남자를 포기해야 합니다. 배우자 외에 세상의 많은 여자와 남자를 포기하는 것이 결혼의 결단입니다. 이런 포기를 결단하지 않고 결혼하는 사람을 바람둥이라고 합니다.
선택이란 변화입니다. 지금까지의 게으름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하겠다는 담대함을 갖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의 순간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선택의 자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고난의 오랜 여정을 종결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안주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을 되돌아 볼 때 거대한 제국 애굽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에 수고했습니다. 고난도 받았지만 그것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그리워하던 약속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땅도 지파별로 배분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이제 배가 불렀고 그냥 쉬어도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바로 지금이 변화하고 성숙하며 결단할 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이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면서 삶 전체를 주님 앞에 드릴 때라고 요청합니다. 이 요청은 그동안 이스라엘을 옭아매었던 수많은 우상들을 다 버리고 타락으로부터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옛 신들과 가나안 신들을 다 버리라고 말하는 여호수아의 담대함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신들을 마음속에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 24:14)
신앙은 중간지대가 아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중립지대란 없습니다. 신앙의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우리가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엉거주춤하게 양쪽을 다 붙잡으려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신곡」을 쓴 단테는 이런 말을 합니다.
“도덕적인 위기의 순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장소가 예약되어 있다.”
실존적 위기, 도덕적 위기에 도달했을 때 엉거주춤하게 양자를 다 붙잡으려고 한다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치명적인 타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중간한 중립지대의 신앙은 배격되어야 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야 합니다. 생명이 오면 죽음의 세력은 내쫓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회주의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세상 귀신의 축복도 받고 싶어 하는 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신문을 보다가 사주가 쓰여 있는 란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마세요. 그것으로 인생의 위로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장소가 축복의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복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복의 사람,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총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축복을 세상의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세상의 신을 공존시키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함을 훼손시키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은 왕따가 될 대가를 지불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선택하는 것이 왜 어려울까요? 왜냐하면 선택하고 결단하는 사람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의 결단을 할 때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은 엄청난 선택입니다. 신앙을 선택하면 왕따가 될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고독하고 외로울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는 것이면 삶 전체를 걸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신앙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유입니다. 협박과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믿는 것은 불행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진리입니까? 당신이 정말 생명입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신을 믿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내 것이 됩니까?’ 예수님과 씨름하면서 내가 가진 신앙의 결단으로 하나님을 고백해야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열정과 생명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다 내어놓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와 생명, 평화와 구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새 생명이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주의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있습니다. 주의 약속을 선택하는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우셔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던 고백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예수님만이 진리와 생명, 자유와 구원이심을 고백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평생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호수아 24: 14 ~ 18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미국 국민들은 흑인 대통령을 선택하여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11월 4일 미국 국민들은 44대 대통령으로 메케인이 아닌 오바마를 선택했습니다. 미국은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노예해방 이후 가장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흑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감격스러운 기쁨의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오바마는 ‘변화(change)’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미국이 더 높은 가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의 연설문에 담고 있는 사상은 미국이 지닌 자유와 정의에 대한 예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천국은 아닙니다. 마약과 도박, 강도와 살인의 비율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은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선배들이 가르친 자유와 정의, 민주와 평화라는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를 그들의 삶 중심 내용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의 연설문 내용입니다.
“진보를 위한 미국, 보수를 위한 미국 따위는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만의 미국, 백인만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동양인의 미국 따위도 없습니다. 오직 미합중국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제 아버지는 외국인 유학생이었습니다.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염소를 치며 자랐습니다. 지붕이 양철로 된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요리사였는데 영국인들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아들에게 더 큰 꿈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열심히 참고 공부한 끝에 마법같은 나라에게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미국입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이 땅에 왔던 많은 이들에게 자유와 기회의 등불이었던 미국 말입니다…… 부모님은 제게 아프리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버락,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런 이름을 가지고도 성공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분은 부자가 아니었지만 제가 가장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관용적인 나라 미국에선 부자가 아니라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비범함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45년 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엄청난 변화와 성숙의 모습이 미국사회에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은 자유와 정의, 민주와 평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흑인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 행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문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자유와 평화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역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들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들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잡고 나란히 앉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 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킹 목사는 조지아주 붉은 언덕에서 옛 노예들의 자손과 노예 주인들의 자손이 피부색에 상관없이 함께하는 모습을 꿈꾸며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흑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그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오바마가 민주당 대선 수락 연설을 한 것 또한 2008년 8월 28일로 날짜가 똑같습니다. 45년 만에 흑인인 그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습니다.
“나는 21세기의 위협, 테러와 핵 위협, 가난과 인종 학살, 기후 변화와 질병 등을 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간 연합체계를 만들겠습니다. 나는 또 우리의 도덕적 위상을 재부각하겠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한 번 더 자유를 찾는 모든 사람들, 평화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의 최후의 보루이자 최고의 희망이 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변화를 외치면서 흑인으로서 4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바마의 정신에는 기독교적인 가치가 들어있습니다. 자유와 정의, 민주와 평화를 외친 흑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인종차별이 갖고 있던 아픔에 대한 극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바마가 부시보다 더 뛰어난 대통령이 될 것인지는 앞으로 해 나가는 일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흑인 대통령을 뽑은 미국 국민들의 선택의 출발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에 의해서 변하고 성숙합니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서 변화되고 성장합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단순한 일상적인 선택에서부터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위대한 선택의 순간도 다가옵니다. 살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종류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상대적인 선택은 우리가 수없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식사를 할 때도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선택합니다. 중국집에 가서 중국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한식집에 가서 한식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찻집에 가서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녹차를 마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큰 선택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선택입니다. 이러한 것에 우리는 큰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못 먹으면 내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일상적인 선택조차도 주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수동적으로 선택하려는 사람입니다. 방어적인 선택에 급급하여 살기 때문에 인생의 주도적인 특성이 사라지는 경우입니다. 일상적인 경험은 그대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중요한 선택이 있습니다. 누구나 어려운 선택, 힘든 선택의 순간이 반드시 다가옵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고, 대학전공을 무엇으로 하며 어떤 직장에 들어가 인생의 꿈을 펼 것인가는 무엇보다 중요한 선택입니다. 일생에 어떤 반려자를 만나 한평생을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될 때는 단순히 결정할 수 없고 기도하면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 한번 기도하라. 전쟁에 나갈 때 두 번 기도하라. 결혼 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
바다에 나가는 것은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목숨이 걸린 문제이지만 결혼은 평생 살아야 할 삶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사람들은 선택과 결단을 보류합니다.
우리 인생의 결정은 너무 중요하여 때로는 삶 전체를 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잠시 되돌아보면 우리는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선택하지 않고 환경에 따르거나 다른 사람의 결정에 맡깁니다. 자기가 인생을 주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게으름 때문에 혹은 참여하기 싫어서 선택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책임지기 싫어서 도피하거나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을까봐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선택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선택하지 않으면 방관자가 됩니다. 책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난을 받지 않을 수는 있지만 국외자가 됩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꿈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선택하지 않고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인생을 바르게 사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하려고 할 때 때로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이란 또 다른 것의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한 직장에 들어가면 다른 수많은 직장을 포기해야 합니다. 한 대학에 들어가면 다른 대학을 포기해야 합니다. 한 여자, 한 남자와 결혼하려면 세상의 수많은 여자와 남자를 포기해야 합니다. 배우자 외에 세상의 많은 여자와 남자를 포기하는 것이 결혼의 결단입니다. 이런 포기를 결단하지 않고 결혼하는 사람을 바람둥이라고 합니다.
선택이란 변화입니다. 지금까지의 게으름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하겠다는 담대함을 갖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의 순간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선택의 자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고난의 오랜 여정을 종결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안주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을 되돌아 볼 때 거대한 제국 애굽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에 수고했습니다. 고난도 받았지만 그것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그리워하던 약속의 땅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땅도 지파별로 배분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이제 배가 불렀고 그냥 쉬어도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바로 지금이 변화하고 성숙하며 결단할 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이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면서 삶 전체를 주님 앞에 드릴 때라고 요청합니다. 이 요청은 그동안 이스라엘을 옭아매었던 수많은 우상들을 다 버리고 타락으로부터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옛 신들과 가나안 신들을 다 버리라고 말하는 여호수아의 담대함을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신들을 마음속에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 24:14)
신앙은 중간지대가 아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중립지대란 없습니다. 신앙의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우리가 참된 신이신 하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엉거주춤하게 양쪽을 다 붙잡으려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신곡」을 쓴 단테는 이런 말을 합니다.
“도덕적인 위기의 순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장소가 예약되어 있다.”
실존적 위기, 도덕적 위기에 도달했을 때 엉거주춤하게 양자를 다 붙잡으려고 한다면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치명적인 타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중간한 중립지대의 신앙은 배격되어야 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야 합니다. 생명이 오면 죽음의 세력은 내쫓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회주의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세상 귀신의 축복도 받고 싶어 하는 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신문을 보다가 사주가 쓰여 있는 란은 아예 들여다보지도 마세요. 그것으로 인생의 위로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장소가 축복의 장소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복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복의 사람,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총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축복을 세상의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여호수아는 하나님과 세상의 신을 공존시키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함을 훼손시키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은 왕따가 될 대가를 지불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선택하는 것이 왜 어려울까요? 왜냐하면 선택하고 결단하는 사람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의 결단을 할 때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를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은 엄청난 선택입니다. 신앙을 선택하면 왕따가 될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고독하고 외로울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는 것이면 삶 전체를 걸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용기와 담대함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신앙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유입니다. 협박과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믿는 것은 불행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신이 진리입니까? 당신이 정말 생명입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신을 믿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내 것이 됩니까?’ 예수님과 씨름하면서 내가 가진 신앙의 결단으로 하나님을 고백해야 신앙이 살아 움직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열정과 생명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다 내어놓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와 생명, 평화와 구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새 생명이 있음을 고백하는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주의 말씀을 선택하는 사람에게 변화가 있습니다. 주의 약속을 선택하는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우셔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했던 고백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예수님만이 진리와 생명, 자유와 구원이심을 고백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평생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선택하고 결단함으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