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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 예수님의 마음으로

마태복음 20: 25 ~ 28

김지철 목사

2015.11.01

우리에게는 섬김에 대한 두 마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식탁에 앉아서 먹는 자가 큰 자냐 아니면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가 큰 자냐?” 물론 앉아서 먹는 자입니다. “너희는 둘 중 무엇을 원하느냐?” 제자들에게는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제자들과 다릅니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앉아서 먹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긴다’는 말이 좋은 말이어도, ‘그것은 약자나 낮은 자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기피하며 싫어하기까지 하는 표현이 ‘섬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섬김’이라는 말은 매우 소중한 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되려고 하면, “나라를 위해서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기업인들도 “고객들을 섬기겠다”고 말하고, 동사무소나 구청 등의 창구에도 곳곳에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왜 곳곳에서 이 말을 애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이면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심리를 거꾸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성에 따른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 말에 대해 나누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입니다.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이자 특성입니다.
첫 인간 아담에게서부터 이런 삶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 내가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세기 3:11)

아담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는 “제가 먹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첫 인간 아담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적이 되어 싸우고 다투는 이유는 바로 ‘나는 살고 너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이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삶의 방식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태도로 살아가는 죄인 된 인간에게 열 가지 계명,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를 보면 모두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래서 가정을 깨지 말라.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남을 속이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살면 너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핵심은 상생(相生), 즉 서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최고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네가 살기 위해 내가 죽겠다’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보여 주는 섬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인간은 그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어야 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마음을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낳게 되면 처녀 때 가졌던 꿈을 모두 내려놓고 자녀를 키우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바로 어머니들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섬김은 한 사람에게 제한되어 있고, 그 사랑과 헌신도 왜곡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어떻습니까? 온 인류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삶에 있어 방향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방향성은 무엇입니까? 곧 삶의 태도입니다.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넘어서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로 향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살기 위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 삶의 자리에는 항상 생명이 시작되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쉽지가 않음을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을 보면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친구나 이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각자는 늘 혼자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잘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큰 명예와 존경,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변화되었습니다.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이 시작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고 그들의 꿈이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묻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던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땅에 선한 영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복음서와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의 삶의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의 영적인 혁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오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교회에 가라고 하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혁명입니다. 보통의 용기와 결단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30대, 40대가 들면 우리의 인생을 한 번씩 흔드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반을 뒤흔들어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이 바로 첫 번째 혁명입니다.
두 번째 영적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깨닫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불교처럼 무아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지상에서도 ‘나’라는 자아가 있고, 천국에 가서도 ‘나’라는 자아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면, 주님의 일을 한다고 우쭐거리며 내 이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주님을 높이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더 큰지 네가 더 큰지 한번 해 보자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은,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쳐 줄 때 변화됩니다. 제자와 아들과 딸은 다릅니다. 아들과 딸에게는 자율성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헌신할 때에도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내 속에 충만한 기쁨을 넣어 줍니다. 그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이런 때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섬김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섬김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섬김의 길을 가로막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경쟁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승리주의입니다. 승리주의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승부이며, 승부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실천하는 자리에서도 승리주의에 붙들려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인생은 승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겨야 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배구나 탁구, 테니스 경기를 보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서브’입니다. 공격하는 쪽이 상대편 코트에 공을 쳐 넣어 상대방이 받아치게 하는 것입니다. 단어로만 보면 ‘서비스’, 곧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승리주의와 함께 묶이니 상대가 수월하게 공을 받기 힘들도록 서브를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서브를 보며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저 서브 참 멋있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못된 서비스인데 말입니다.
테니스 프로 선수들은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공을 칩니다. 서브를 할 때도 그러합니다. 이 공은 상대 선수가 라켓을 갖다 대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서브나 그렇게 하여 득점하는 일을 ‘서비스에이스’라고 부릅니다. 일등 서비스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치지도 못하게 하는 서브가 왜 일등 서비스입니까? 서브가 승리주의와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높아지고 이겨야 된다는 것이 정치·경제·사회의 경쟁원리 속에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국민들을 위해서 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자주 국민을 입에 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결국엔 자기 구미에 맞게 움직이고 따라오는 국민들만 그들의 국민입니다. 처음에는 섬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권력을 잡으면 섬기겠다던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을 파괴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천박한 자본주의입니다. 기업은 ‘고객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객을 섬긴다면서 기업들이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고객의 돈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섬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기업’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놓는 것도 고객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돈 버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서비스에는 요금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서비스 개념입니다. 때로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산업을 ‘서비스 산업’이라고 부르면서, 그 유혹의 서비스가 사람들의 영혼을 돈과 맞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섬기는 일과 돈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자녀들이 어렸을 때, 구두를 닦는 일이나 설거지를 부탁하면 아이들이 곧잘 합니다. 그런데 다 끝내고 나서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했으니 돈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조차 섬김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반대급부를 요구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섬김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온 것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파송의식이 명백히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파송하셨다. 나의 건강, 나의 직업, 나의 사회적 직분, 나의 돈, 나의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겠다. 내가 이것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에게서 진정한 섬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파송의식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3년의 공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었겠습니까?
성품이 좋아서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파송의식이 있어야,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전문가로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의식이 있어야 섬김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멈추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지도자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지도력은 섬길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이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다른 말로 ‘에너자이저’가 됩니다. 에너지를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일이 잘되고, 그 사람을 보면 밝은 미래가 그려질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낮은 자가 되라. 네가 크고자 하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섬김이 진정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직분을 주시면, 권력을 가지게 허락하시면 그때 잘 섬기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바르게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자리를 사모합시다.

우리 소망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서 또 교회 밖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섬김 그 자체의 기쁨으로 애써 왔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잠시 보겠습니다. – 영 상- (영상 글귀)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웃을 섬길 때 더욱 겸손하기 원합니다.
나의 섬김이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의 희생이 공로가 되지 않게 하소서.
힘 있는 자보다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게 하시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에 가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곳에 가게 하시고
내가 빛나는 자리가 아닌 주님을 빛나게 하는 자리에 있게 하소서.소망교회는 18개의 제직부서, 권사회, 남선교회, 여전도회, 24개의 공동체, 모든 교육부서가 한마음이 되어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낙심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줄 알고,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내놓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게 하시옵소서.

소망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선교와 봉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의료, 장학, 군/경찰, 문화 선교와 탈북자 자녀를 위한 미래소망스쿨, 서부노인요양센터와 베데스다, 그리고 재난지역 긴급구조 등을 통해 하나님이 맡기신 섬김과 나눔의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섬길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내 속에 보람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다면, 내 주위의 삶이 바뀌고 우리 사회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이 섬김의 모임에 참여해 주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슴에 품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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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 25 ~ 28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에게는 섬김에 대한 두 마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식탁에 앉아서 먹는 자가 큰 자냐 아니면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가 큰 자냐?” 물론 앉아서 먹는 자입니다. “너희는 둘 중 무엇을 원하느냐?” 제자들에게는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제자들과 다릅니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앉아서 먹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긴다’는 말이 좋은 말이어도, ‘그것은 약자나 낮은 자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기피하며 싫어하기까지 하는 표현이 ‘섬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섬김’이라는 말은 매우 소중한 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되려고 하면, “나라를 위해서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기업인들도 “고객들을 섬기겠다”고 말하고, 동사무소나 구청 등의 창구에도 곳곳에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왜 곳곳에서 이 말을 애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이면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심리를 거꾸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성에 따른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 말에 대해 나누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입니다.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이자 특성입니다.
첫 인간 아담에게서부터 이런 삶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 내가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세기 3:11)

아담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는 “제가 먹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첫 인간 아담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적이 되어 싸우고 다투는 이유는 바로 ‘나는 살고 너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이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삶의 방식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태도로 살아가는 죄인 된 인간에게 열 가지 계명,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를 보면 모두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래서 가정을 깨지 말라.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남을 속이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살면 너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핵심은 상생(相生), 즉 서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최고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네가 살기 위해 내가 죽겠다’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보여 주는 섬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인간은 그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어야 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마음을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낳게 되면 처녀 때 가졌던 꿈을 모두 내려놓고 자녀를 키우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바로 어머니들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섬김은 한 사람에게 제한되어 있고, 그 사랑과 헌신도 왜곡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어떻습니까? 온 인류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삶에 있어 방향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방향성은 무엇입니까? 곧 삶의 태도입니다.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넘어서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로 향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살기 위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 삶의 자리에는 항상 생명이 시작되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쉽지가 않음을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을 보면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친구나 이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각자는 늘 혼자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잘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큰 명예와 존경,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변화되었습니다.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이 시작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고 그들의 꿈이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묻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던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땅에 선한 영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복음서와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의 삶의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의 영적인 혁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오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교회에 가라고 하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혁명입니다. 보통의 용기와 결단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30대, 40대가 들면 우리의 인생을 한 번씩 흔드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반을 뒤흔들어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이 바로 첫 번째 혁명입니다.
두 번째 영적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깨닫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불교처럼 무아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지상에서도 ‘나’라는 자아가 있고, 천국에 가서도 ‘나’라는 자아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면, 주님의 일을 한다고 우쭐거리며 내 이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주님을 높이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더 큰지 네가 더 큰지 한번 해 보자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은,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쳐 줄 때 변화됩니다. 제자와 아들과 딸은 다릅니다. 아들과 딸에게는 자율성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헌신할 때에도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내 속에 충만한 기쁨을 넣어 줍니다. 그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이런 때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섬김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섬김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섬김의 길을 가로막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경쟁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승리주의입니다. 승리주의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승부이며, 승부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실천하는 자리에서도 승리주의에 붙들려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인생은 승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겨야 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배구나 탁구, 테니스 경기를 보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서브’입니다. 공격하는 쪽이 상대편 코트에 공을 쳐 넣어 상대방이 받아치게 하는 것입니다. 단어로만 보면 ‘서비스’, 곧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승리주의와 함께 묶이니 상대가 수월하게 공을 받기 힘들도록 서브를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서브를 보며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저 서브 참 멋있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못된 서비스인데 말입니다.
테니스 프로 선수들은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공을 칩니다. 서브를 할 때도 그러합니다. 이 공은 상대 선수가 라켓을 갖다 대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서브나 그렇게 하여 득점하는 일을 ‘서비스에이스’라고 부릅니다. 일등 서비스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치지도 못하게 하는 서브가 왜 일등 서비스입니까? 서브가 승리주의와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높아지고 이겨야 된다는 것이 정치·경제·사회의 경쟁원리 속에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국민들을 위해서 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자주 국민을 입에 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결국엔 자기 구미에 맞게 움직이고 따라오는 국민들만 그들의 국민입니다. 처음에는 섬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권력을 잡으면 섬기겠다던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을 파괴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천박한 자본주의입니다. 기업은 ‘고객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객을 섬긴다면서 기업들이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고객의 돈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섬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기업’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놓는 것도 고객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돈 버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서비스에는 요금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서비스 개념입니다. 때로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산업을 ‘서비스 산업’이라고 부르면서, 그 유혹의 서비스가 사람들의 영혼을 돈과 맞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섬기는 일과 돈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자녀들이 어렸을 때, 구두를 닦는 일이나 설거지를 부탁하면 아이들이 곧잘 합니다. 그런데 다 끝내고 나서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했으니 돈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조차 섬김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반대급부를 요구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섬김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온 것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파송의식이 명백히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파송하셨다. 나의 건강, 나의 직업, 나의 사회적 직분, 나의 돈, 나의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겠다. 내가 이것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에게서 진정한 섬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파송의식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3년의 공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었겠습니까?
성품이 좋아서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파송의식이 있어야,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전문가로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의식이 있어야 섬김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멈추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지도자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지도력은 섬길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이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다른 말로 ‘에너자이저’가 됩니다. 에너지를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일이 잘되고, 그 사람을 보면 밝은 미래가 그려질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낮은 자가 되라. 네가 크고자 하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섬김이 진정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직분을 주시면, 권력을 가지게 허락하시면 그때 잘 섬기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바르게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자리를 사모합시다.

우리 소망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서 또 교회 밖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섬김 그 자체의 기쁨으로 애써 왔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잠시 보겠습니다. – 영 상- (영상 글귀)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웃을 섬길 때 더욱 겸손하기 원합니다.
나의 섬김이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의 희생이 공로가 되지 않게 하소서.
힘 있는 자보다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게 하시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에 가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곳에 가게 하시고
내가 빛나는 자리가 아닌 주님을 빛나게 하는 자리에 있게 하소서.소망교회는 18개의 제직부서, 권사회, 남선교회, 여전도회, 24개의 공동체, 모든 교육부서가 한마음이 되어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낙심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줄 알고,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내놓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게 하시옵소서.

소망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선교와 봉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의료, 장학, 군/경찰, 문화 선교와 탈북자 자녀를 위한 미래소망스쿨, 서부노인요양센터와 베데스다, 그리고 재난지역 긴급구조 등을 통해 하나님이 맡기신 섬김과 나눔의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섬길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내 속에 보람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다면, 내 주위의 삶이 바뀌고 우리 사회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이 섬김의 모임에 참여해 주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슴에 품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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