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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읽기와 하나님의 뜻 찾기

요한복음 14: 25 ~ 27

김지철 목사

2017.02.12

‘그들의’ 성경이 아니라 ‘나의’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말씀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세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성경 안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3,000년 전의 모세, 다윗, 엘리야, 2,000년 전의 바울, 베드로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성경 속에 있는데,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통해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해야 합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성경은 읽고 또 읽어야 할 소중한 책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늘의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섭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는 마음과 영혼의 근육을 키울 수 있습니다. 마음과 영혼의 근육이 튼튼해야 매일 겪는 스트레스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해 넘어뜨리려 할 때도 쉽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넘어졌다고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먼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맞선 예수님도 말씀에 의지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3인칭의 성경 읽기에서 2인칭의 성경 읽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과도 대화하면서 성경을 읽어 가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접촉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성경이 나의 책이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성경에서 나 자신의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관심에서 신뢰로, 신뢰에서 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연인들이 사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만날 땐 객관적인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저 사람 이름이 뭐지? 어디에 살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이렇게 내가 사귀고자 하는 상대방에 대한 기초 정보를 알아야 데이트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과의 데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그분의 탁월성은 무엇인지 알아야 그분과의 교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정보를 성경에서 배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신뢰’의 단계입니다. 인격적인 교제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이 신뢰입니다. 신뢰가 바탕이 될 때 깊은 관계도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는 때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싶은데 믿을 수 없어서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신뢰가 함께 가야 합니다. 결혼하면 더 신뢰해야 하고, 이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도 더 깊어지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믿음과 신뢰를 강조해 왔습니다. 영어 ‘believe in’에서 전치사 in은 into의 뜻을 가집니다. 새로운 삶의 자리로 뛰어드는 도전과 용기가 있어야 신뢰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신뢰할 때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역시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 이 믿음은 한 번의 믿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적인 신뢰와 믿음을 요청합니다. 그렇기에 믿음에는 반드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단계를 거치면 세 번째 단계, 즉 ‘앎’의 단계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 연인이 사귀다가 프러포즈를 합니다. 결혼해서 한 가정을 꾸미자고 합니다. 더불어 경험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는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남자와 여자가 살을 맞대고 하나의 몸이 된 것을 히브리어로 ‘야다’, 즉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 관계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은 이를 ‘동침했다’, ‘부부관계를 가졌다’로 번역합니다. 창세기 4장 1절에 나타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바로 이것이 ‘안다’라는 뜻입니다. ‘함께 모든 삶을 나누는 것’이 ‘앎’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앎이 예수님을 알아갈 때도 필요한 것입니다.
지식적인 정보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신뢰하며 친밀성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는 것,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해 보는 것,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화해 보는 것, 이 단계에 들어서면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는 앎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부부가 함께 살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 뭘까요? ‘저 사람이 원하는 게 뭘까? 그가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것이 사랑의 핵심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경을 읽으면서 그 뜻을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인생의 목적을 기억하며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 나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읽어 나갑니다.
둘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떤 꿈과 비전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라고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뭘까요?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시고 구획을 정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공간도 구획하셨습니다. 물과 뭍을 구획하셨고, 생물을 만드시고 동물과 인간을 분류하셨습니다. 그렇게 피조계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자주 표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기 좋구나!”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빚으시고 “보기에 너무 좋구나.” 하고 찬탄하셨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나 흡족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나 자신을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나를 볼 때 마음이 좋습니까? 내 자녀들을 볼 때 기분이 좋습니까? 남편과 아내를 보면 좋습니까? 하늘과 땅,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볼 때 너무 좋고 감사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의 뜻을 품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 좋다고 하는 것들이 때때로 깨지곤 합니다. 가정이 깨질 때가 있고, 이웃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하며, 자연 환경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기 좋다고 하신 피조계가 망가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과 양심에 기초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우리에게 두 가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보기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첫 번째 선물은 건강한 지성에서 비롯되는 ‘상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보기 좋다’란 표현은, 세계가 질서와 조화 가운데 아름다움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가 안식일, 즉 쉼과 평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질서와 조화, 아름다움, 쉼과 평안을 위해 주신 첫 번째 선물이 건강한 지성을 지닌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쉽게 말해, 창조의 법칙에 근거한 선물입니다. 창조의 법칙이란 무엇일까요?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콩을 심고서 팥을 원한다면, 창조 법칙에 위배 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의 법칙이 함부로 훼손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이 법칙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땀 흘려 일하길 원하십니다. 수고하고 땀 흘려야 먹고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중)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노동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든, 직장에 나가 수고하고 땀 흘리든, 가정주부로 가사 일을 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든,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건강한 지성으로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수고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은 비상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으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지성을 바탕으로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를 사용해 보기 좋은 이 땅, 보기 좋은 우리 삶을 가꿔 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 선물은 ‘양심’입니다. 상식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면, 양심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 상대방을 신뢰하고 존중하게 하는 것이 양심의 역할입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고, 선을 추구하되 악은 거절하게 하는 것이 양심의 일입니다.
그런데 첫 인간부터 양심 불량에 빠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을 뿐만 아니라 부부 관계에서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가인과 아벨, 형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 시기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양심 불량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깨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까요? 인간 갈등이 발생됩니다. 때론 단순한 다툼으로 시작하지만, 과열 되면 폭력과 전쟁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 양심 불량에 의한 인간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다치는 사람이 생깁니다. 소외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버려진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 생깁니다.

성경 속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에는 버려지고 주변부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가엾은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고아와 과부입니다. 질병에 걸려서인지 폭력과 전쟁 때문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부모들이 먼저 떠나 고아로 버려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한 채 성장하고 사회에서도 냉대를 받습니다. 또, 삶의 복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랑의 복을 상실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당신의 뜻을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무엇일까요? 신명기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명기 10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명기 10:18)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란, 연약하고 버려진 자들에게 ‘너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가장 힘없는 자들,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연민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관심을 가진 대상도 인간 존엄성을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긍휼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시고 세워 주셨습니다. 너도 인갑답게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하려 한다면,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을 닮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 읽기는 우리를 ‘예수 충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찾을까’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그 주제를 전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 충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두 가지 내용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살펴보며 예수 충만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아신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셨는지’를 통해 예수 충만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또 끊임없이 그 뜻을 확인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한적한 산과 황량한 들판으로 나가셔서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도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올라 그분을 좇는 무리가 많아졌을 때도 그들과의 만남을 차단하시며 기도에 매진하셨습니다.
기도란 세상과 단절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의 걱정, 근심, 이 모든 것들을 단절하겠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렇게 아뢰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다시 그 뜻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장면은 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때 나사로의 누이들은 슬피 울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요한복음 11:41~42 중)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신 후,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선포하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셨고, 하나님나라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그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죄악에 얽매인 우리 모습이 가련하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 용서를 선언하셨고, 사탄의 세력을 쫓아내셨으며, 우리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란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절망에 빠진 자에게 소망을 주셨으며, 낙담한 자를 일으켜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기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억압되고 소외 받는 땅, 절망이 가득한 땅, 오염으로 가득한 땅을 다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또한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망 되시며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수 믿는 게 왜 좋을까요? 그분을 믿는 게 왜 자랑스러울까요? 그리고 왜 이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그분이 참 소망이자 생명이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과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과도 대화를 하십시오. 그렇게 주님의 뜻을 찾고 기쁨으로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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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 25 ~ 27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들의’ 성경이 아니라 ‘나의’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말씀의 공동체’라는 주제로 세 번째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성경 안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3,000년 전의 모세, 다윗, 엘리야, 2,000년 전의 바울, 베드로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성경 속에 있는데,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을 통해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해야 합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성경은 읽고 또 읽어야 할 소중한 책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늘의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섭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을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 삶의 의미와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는 마음과 영혼의 근육을 키울 수 있습니다. 마음과 영혼의 근육이 튼튼해야 매일 겪는 스트레스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해 넘어뜨리려 할 때도 쉽게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넘어졌다고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먼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맞선 예수님도 말씀에 의지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3인칭의 성경 읽기에서 2인칭의 성경 읽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누군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의 인물들과도 대화하면서 성경을 읽어 가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접촉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성경이 나의 책이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성경에서 나 자신의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관심에서 신뢰로, 신뢰에서 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연인들이 사귈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만날 땐 객관적인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저 사람 이름이 뭐지? 어디에 살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이지?’ 이렇게 내가 사귀고자 하는 상대방에 대한 기초 정보를 알아야 데이트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과의 데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그분의 탁월성은 무엇인지 알아야 그분과의 교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정보를 성경에서 배웁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신뢰’의 단계입니다. 인격적인 교제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이 신뢰입니다. 신뢰가 바탕이 될 때 깊은 관계도 형성됩니다. 그런데 이는 때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싶은데 믿을 수 없어서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신뢰가 함께 가야 합니다. 결혼하면 더 신뢰해야 하고, 이 신뢰를 바탕으로 사랑도 더 깊어지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본래 믿음과 신뢰를 강조해 왔습니다. 영어 ‘believe in’에서 전치사 in은 into의 뜻을 가집니다. 새로운 삶의 자리로 뛰어드는 도전과 용기가 있어야 신뢰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신뢰할 때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역시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 이 믿음은 한 번의 믿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계속적인 신뢰와 믿음을 요청합니다. 그렇기에 믿음에는 반드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모든 단계를 거치면 세 번째 단계, 즉 ‘앎’의 단계가 시작됩니다. 어느 날 연인이 사귀다가 프러포즈를 합니다. 결혼해서 한 가정을 꾸미자고 합니다. 더불어 경험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랑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이는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남자와 여자가 살을 맞대고 하나의 몸이 된 것을 히브리어로 ‘야다’, 즉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육체적 관계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하와를 알았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리말 성경은 이를 ‘동침했다’, ‘부부관계를 가졌다’로 번역합니다. 창세기 4장 1절에 나타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바로 이것이 ‘안다’라는 뜻입니다. ‘함께 모든 삶을 나누는 것’이 ‘앎’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앎이 예수님을 알아갈 때도 필요한 것입니다.
지식적인 정보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을 신뢰하며 친밀성도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삼는 것,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해 보는 것,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화해 보는 것, 이 단계에 들어서면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는 앎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부부가 함께 살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 뭘까요? ‘저 사람이 원하는 게 뭘까? 그가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어떻게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이것이 사랑의 핵심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경을 읽으면서 그 뜻을 구체적으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인생의 목적을 기억하며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항상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 나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하면서 성경을 읽어 나갑니다.
둘째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떤 꿈과 비전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라고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뭘까요?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시고 구획을 정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공간도 구획하셨습니다. 물과 뭍을 구획하셨고, 생물을 만드시고 동물과 인간을 분류하셨습니다. 그렇게 피조계를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자주 표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기 좋구나!”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빚으시고 “보기에 너무 좋구나.” 하고 찬탄하셨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나 흡족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나 자신을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나를 볼 때 마음이 좋습니까? 내 자녀들을 볼 때 기분이 좋습니까? 남편과 아내를 보면 좋습니까? 하늘과 땅,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볼 때 너무 좋고 감사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의 뜻을 품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 좋다고 하는 것들이 때때로 깨지곤 합니다. 가정이 깨질 때가 있고, 이웃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하며, 자연 환경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기 좋다고 하신 피조계가 망가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과 양심에 기초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우리에게 두 가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보기 좋은 세상을 만들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첫 번째 선물은 건강한 지성에서 비롯되는 ‘상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보기 좋다’란 표현은, 세계가 질서와 조화 가운데 아름다움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가 안식일, 즉 쉼과 평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질서와 조화, 아름다움, 쉼과 평안을 위해 주신 첫 번째 선물이 건강한 지성을 지닌 상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쉽게 말해, 창조의 법칙에 근거한 선물입니다. 창조의 법칙이란 무엇일까요?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콩을 심고서 팥을 원한다면, 창조 법칙에 위배 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의 법칙이 함부로 훼손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이 법칙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땀 흘려 일하길 원하십니다. 수고하고 땀 흘려야 먹고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중)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노동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든, 직장에 나가 수고하고 땀 흘리든, 가정주부로 가사 일을 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든,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건강한 지성으로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수고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은 비상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원치 않으시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지성을 바탕으로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를 사용해 보기 좋은 이 땅, 보기 좋은 우리 삶을 가꿔 나가야 합니다.
두 번째 선물은 ‘양심’입니다. 상식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라면, 양심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과 상대방을 신뢰하고 존중하게 하는 것이 양심의 역할입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고, 선을 추구하되 악은 거절하게 하는 것이 양심의 일입니다.
그런데 첫 인간부터 양심 불량에 빠졌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을 뿐만 아니라 부부 관계에서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가인과 아벨, 형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해야 할 형제들이 시기하고 다투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양심 불량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깨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까요? 인간 갈등이 발생됩니다. 때론 단순한 다툼으로 시작하지만, 과열 되면 폭력과 전쟁으로까지 확대되는 것이 양심 불량에 의한 인간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자리까지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다치는 사람이 생깁니다. 소외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버려진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 생깁니다.

성경 속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에는 버려지고 주변부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가엾은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고아와 과부입니다. 질병에 걸려서인지 폭력과 전쟁 때문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부모들이 먼저 떠나 고아로 버려진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한 채 성장하고 사회에서도 냉대를 받습니다. 또, 삶의 복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랑의 복을 상실한 사람들, 버려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당신의 뜻을 선언하셨습니다. “나는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무엇일까요? 신명기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명기 10장 1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명기 10:18)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란, 연약하고 버려진 자들에게 ‘너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가장 힘없는 자들,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관심과 연민이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관심을 가진 대상도 인간 존엄성을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깊은 긍휼과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주시고 세워 주셨습니다. 너도 인갑답게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행하려 한다면,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님을 닮아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경 읽기는 우리를 ‘예수 충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찾을까’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그 주제를 전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 충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두 가지 내용만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살펴보며 예수 충만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아신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셨는지’를 통해 예수 충만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또 끊임없이 그 뜻을 확인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한적한 산과 황량한 들판으로 나가셔서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도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올라 그분을 좇는 무리가 많아졌을 때도 그들과의 만남을 차단하시며 기도에 매진하셨습니다.
기도란 세상과 단절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세상의 걱정, 근심, 이 모든 것들을 단절하겠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렇게 아뢰는 것이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다시 그 뜻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장면은 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때 나사로의 누이들은 슬피 울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요한복음 11:41~42 중)

예수님은 이 기도를 하신 후,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선포하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셨고, 하나님나라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그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죄악에 얽매인 우리 모습이 가련하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우리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 용서를 선언하셨고, 사탄의 세력을 쫓아내셨으며, 우리가 더 이상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란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절망에 빠진 자에게 소망을 주셨으며, 낙담한 자를 일으켜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기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억압되고 소외 받는 땅, 절망이 가득한 땅, 오염으로 가득한 땅을 다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땅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의 사명입니다. 또한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망 되시며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수 믿는 게 왜 좋을까요? 그분을 믿는 게 왜 자랑스러울까요? 그리고 왜 이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될까요? 그분이 참 소망이자 생명이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과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과도 대화를 하십시오. 그렇게 주님의 뜻을 찾고 기쁨으로 순종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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