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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에베소서 4: 1 ~ 6

김지철 목사

2014.01.19

가정도 진정으로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대법원이 발간한 2013년 사법연강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에서 약 33만 쌍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1만5천 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그해 결혼한 사람이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한 해의 결혼과 이혼의 비율이 이제 3대1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혼 사유로는 성격차이가 47%, 경제 문제의 다툼이 13%, 배우자의 부정이 8%, 그리고 가족 간의 불화와 정신적, 육체적 학대가 뒤를 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20년 이상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황혼이혼이 25%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들 사이에서 부끄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살률 1위라는 것과 이혼률 1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그들의 인생의 의지가 꺾기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가정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의 표본은 가정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기초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이 하나 되는 가장 뚜렷한 현상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로 약속하고, 위로하고 위로 받기로 약속하는 것이 결혼이며 그 구성원은 부부, 즉 남편과 아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예수님 모두가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마가복음 10:6∼8)

부부란, 부모와 자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며 자신들의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한 몸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힘들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진정한 하나 됨은 다양성을 포용합니다.

한 공간에 함께 있다고 해서 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싸움하면 결코 하나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선배이자 지혜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5:17)

진수성찬을 매일 먹으며 미워하고 분쟁하는 것보다, 채소 조각 하나를 먹고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어도 그 공간에서 미움과 다툼이 지속되면 곧 지옥으로 변합니다.
부부싸움을 해 본 적 있으십니까? 화가 났을 때는 별생각이 다 들지 않습니까? 입으로 했는지 아니면 속으로 했는지 간에, ‘왜 내가 저런 인간과 함께 살지? 내 눈에서 저 인간 사라졌으면 좋겠네.’ 혹시 이런 탄식 해 본 적 없으십니까?
하나 됨이란 똑같이 됨과는 다른 것입니다. 붕어빵을 찍어 만들듯이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 됨이 아닙니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하나 됨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것은 획일화되는 것이고 다양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까? 그들은 마이크를 갖다 대면 앵무새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부부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얼굴 모습이 다르고, 삶의 습관이 다릅니다. 이 조그만 땅 덩어리에서도 지역에 따라 말의 엑센트가 다릅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갔을 때 말을 잘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직업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모습인데도 ‘같아요’라고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부란 무엇일까요? 두 혼이 포개져 있으면 이것은 하나 됨이 아닙니다. 그것은 획일성이지 다양성이 아닙니다. 그런 부부들은 한쪽은 의기양양해지고 또 다른 쪽은 의기소침해지기 쉽습니다. 한쪽은 지배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노예나 종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부를 건강한 부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부란 걸쳐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함께 나누면서 자기의 고유함을 간직하는 것이 건강한 부부입니다.
물질의 세계에는 ‘엔트로피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질서를 끊임없이 무질서로 만들어냅니다. 생명을 끊임없이 죽음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됨은 자동적으로 될 수 없습니다. 생명체처럼 그 안에 노력과 정성과 헌신이 들어가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하나 됨의 공동체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신약에서는 교회 공동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초공동체로 남편과 아내인 가정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한 방에 있기만 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make every effort’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든 정성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애쓰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의 ‘지키라’는 말에는 ‘보호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즉 하나된 것을 깨뜨리지 않도록,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 됨은 마치 생명체와도 같아서, 치열한 전투장에서 생명을 키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머니가 열 달 동안 배 속에서 자녀를 품고 있다가 출산의 고통을 거쳐 성숙한 사람으로 키우기까지 얼마나 힘이 듭니까? 하지만 그래야 부모와 자녀가 하나 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생명체와도 같아서 정성과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사랑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노력하라고,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현장은 어디에나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이 아침에 교회에 나오실 때도 내 안에 다툼이 있지 않았습니까? ‘오늘 교회를 가야 되나, 아니면 다른 곳에 놀러가야 되나…’ 이런 다툼과 갈등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선배들은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고 무섭고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내 안에서부터 갈등이 있는데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공동체에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만약 갈등이 없는 곳을 찾으려고 한다면, 공동묘지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떵떵거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삿대질하면서 싸움을 하기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저 침묵합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명이 있는 곳에는 갈등과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부부가 된 이들도 상이한 삶의 환경 속에서 수십년 동안 살다가 만난 것 아닙니까? 가치관이 다르고 인간관계가 다르고 습관이 다른 이들이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아내, 나와 다른 남편과 잘 사는 분들은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나 된 공동체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나는 공동체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셨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바르게 세워 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 되는 공동체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출애굽 공동체입니다. 즉 저항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요? 악과 불의에 대한 저항입니다.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 함께 있었지만 하나 된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하나가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루어 낼 용기도 전략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뚫고 나아갈지에 대한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선택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보게 하셨습니다. 먼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엑소더스’였습니다. 기존의 세력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성에 대해 저항하고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공동체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력에서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가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려고 하는데 옛 습관에 머물러 있습니다. 옛 게으름에 빠져 있고, 옛 가치관에 잡혀 있습니다. 물론 연애를 할 때는 잠시 상대방을 존중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해도 쉽게 양보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옛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결혼을 하면 그 가정은 백전백패입니다. 어떻게 그 가정이 하나 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결혼을 해 놓고도 각자 자신의 옛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진정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고 높여줘야 그 가정이 진정한 가정이 되는 것 아닐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생각도 바뀌지 않습니다. 가치관도 그대로입니다. 언어도 같고, 행동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백전필패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를 원한다면, 단절하고 탈출해야 됩니다. 애굽을 떠나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하나 되는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들여놓고 다른 한 발은 무언가 해 보겠다 하는 것은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40년 동안 헤매었을까요? 2,3주일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왜 그렇게 힘들게 가야 했을까요? 애굽에서의 노예근성과 거지근성을 간직한 채로 탈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공동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단절할 줄 아는 용기, 출애굽하는 엑소더스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는, 비전공동체입니다.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출애굽만 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끊임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너희들을 인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떤 꿈을 갖고 있습니까? 내 가정에는 어떤 비전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장 작은 현존이 가정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가정을 꾸미겠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신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속에 가정을 향한 이러한 믿음의 꿈이 있어야 하나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정공동체의 꿈입니다.
교회는 무엇일까요? 이 땅에 세워져 있지만 하늘의 약속을 받고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4:4)

부르심의 ‘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세상과 차별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꿈꾸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목표와 비전이 없는 공동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 번째는 말씀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네 전심으로 사랑하라. 네 목숨을 걸고 사랑해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듣고 자신들의 실존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이웃의 공동체를 위해서 살아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공동체는 약속공동체이고, 약속공동체는 곧 사명공동체입니다.
우리 가정은 어떤 공동체입니까? 하나님은 가정을 생명의 공동체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본래 모습입니다. 남편들에게 다시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내를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놓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이 풍성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남자들이 먼저 바뀌어야 됩니다. 아내를 내 목숨을 걸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들을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쏟아부으십시오. 그래야 아내가 남편을 소중히 여기고 우러러 봅니다. 아내를 손찌검하는 남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이제 아내들에게 부탁합니다. 남편을 높여주세요. 남편에게 순종하세요. 이 말은 모든 남자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내 남편을 높이고 내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아니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시며 거룩해지기를 원하시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약속이고, 목표입니다.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이 있어야 됩니다. 잘못된 것, 옛것을 잘라 버려야 됩니다. 탈출하고 단절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비전공동체가 되어야 우리가 가야할 길이 명백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와 행동의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로 인해 공동체가 하나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입니다. 그 영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2∼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겸손과 온유입니다. 때로는 오래 참는 것이고,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의 줄로 서로가 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공동체의 하나 됨은 획일성이 아닙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oneness입니다. 그것은 not sameness입니다. 하나 됨은 똑같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unity, 즉 통일성은 not uniformity, 획일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가 시작되고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내 시간, 내 정성, 내 열정을 가지고, 내가 있으므로 내 가정이 변화 되고 나로 인해 내 직장과 사회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한 지체인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신 영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와 땀과 눈물과 에너지가 그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힘써 지키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을 통해 성도님들의 삶의 자리가 놀라운 생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로 승화되고 변화되는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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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 1 ~ 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가정도 진정으로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대법원이 발간한 2013년 사법연강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에서 약 33만 쌍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1만5천 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그해 결혼한 사람이 이혼한 것은 아니지만, 한 해의 결혼과 이혼의 비율이 이제 3대1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혼 사유로는 성격차이가 47%, 경제 문제의 다툼이 13%, 배우자의 부정이 8%, 그리고 가족 간의 불화와 정신적, 육체적 학대가 뒤를 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20년 이상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황혼이혼이 25%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들 사이에서 부끄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살률 1위라는 것과 이혼률 1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가정이 붕괴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그들의 인생의 의지가 꺾기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가정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의 표본은 가정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결혼이란 기초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이 하나 되는 가장 뚜렷한 현상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기로 약속하고, 위로하고 위로 받기로 약속하는 것이 결혼이며 그 구성원은 부부, 즉 남편과 아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예수님 모두가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마가복음 10:6∼8)

부부란, 부모와 자녀의 관계보다도 더 가까운 관계이며 자신들의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한 몸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힘들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진정한 하나 됨은 다양성을 포용합니다.

한 공간에 함께 있다고 해서 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싸움하면 결코 하나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선배이자 지혜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5:17)

진수성찬을 매일 먹으며 미워하고 분쟁하는 것보다, 채소 조각 하나를 먹고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어도 그 공간에서 미움과 다툼이 지속되면 곧 지옥으로 변합니다.
부부싸움을 해 본 적 있으십니까? 화가 났을 때는 별생각이 다 들지 않습니까? 입으로 했는지 아니면 속으로 했는지 간에, ‘왜 내가 저런 인간과 함께 살지? 내 눈에서 저 인간 사라졌으면 좋겠네.’ 혹시 이런 탄식 해 본 적 없으십니까?
하나 됨이란 똑같이 됨과는 다른 것입니다. 붕어빵을 찍어 만들듯이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 됨이 아닙니다.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하나 됨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것은 획일화되는 것이고 다양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까? 그들은 마이크를 갖다 대면 앵무새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부부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얼굴 모습이 다르고, 삶의 습관이 다릅니다. 이 조그만 땅 덩어리에서도 지역에 따라 말의 엑센트가 다릅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갔을 때 말을 잘 알아듣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직업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모습인데도 ‘같아요’라고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부부란 무엇일까요? 두 혼이 포개져 있으면 이것은 하나 됨이 아닙니다. 그것은 획일성이지 다양성이 아닙니다. 그런 부부들은 한쪽은 의기양양해지고 또 다른 쪽은 의기소침해지기 쉽습니다. 한쪽은 지배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노예나 종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부를 건강한 부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부란 걸쳐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함께 나누면서 자기의 고유함을 간직하는 것이 건강한 부부입니다.
물질의 세계에는 ‘엔트로피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질서를 끊임없이 무질서로 만들어냅니다. 생명을 끊임없이 죽음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됨은 자동적으로 될 수 없습니다. 생명체처럼 그 안에 노력과 정성과 헌신이 들어가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하나 됨의 공동체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신약에서는 교회 공동체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초공동체로 남편과 아내인 가정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한 방에 있기만 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make every effort’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든 정성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애쓰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의 ‘지키라’는 말에는 ‘보호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즉 하나된 것을 깨뜨리지 않도록, 잘못된 것이 있으면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 됨은 마치 생명체와도 같아서, 치열한 전투장에서 생명을 키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머니가 열 달 동안 배 속에서 자녀를 품고 있다가 출산의 고통을 거쳐 성숙한 사람으로 키우기까지 얼마나 힘이 듭니까? 하지만 그래야 부모와 자녀가 하나 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생명체와도 같아서 정성과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사랑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노력하라고,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현장은 어디에나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이 아침에 교회에 나오실 때도 내 안에 다툼이 있지 않았습니까? ‘오늘 교회를 가야 되나, 아니면 다른 곳에 놀러가야 되나…’ 이런 다툼과 갈등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선배들은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고 무섭고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내 안에서부터 갈등이 있는데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공동체에 왜 갈등이 없겠습니까? 만약 갈등이 없는 곳을 찾으려고 한다면, 공동묘지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떵떵거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삿대질하면서 싸움을 하기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저 침묵합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명이 있는 곳에는 갈등과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부부가 된 이들도 상이한 삶의 환경 속에서 수십년 동안 살다가 만난 것 아닙니까? 가치관이 다르고 인간관계가 다르고 습관이 다른 이들이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아내, 나와 다른 남편과 잘 사는 분들은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나 된 공동체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나는 공동체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직접 선택하셨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바르게 세워 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 되는 공동체에는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 출애굽 공동체입니다. 즉 저항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에 대한 저항일까요? 악과 불의에 대한 저항입니다.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 함께 있었지만 하나 된 공동체는 아니었습니다. 하나가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이루어 낼 용기도 전략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뚫고 나아갈지에 대한 목표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선택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보게 하셨습니다. 먼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엑소더스’였습니다. 기존의 세력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성에 대해 저항하고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공동체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력에서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가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려고 하는데 옛 습관에 머물러 있습니다. 옛 게으름에 빠져 있고, 옛 가치관에 잡혀 있습니다. 물론 연애를 할 때는 잠시 상대방을 존중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해도 쉽게 양보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옛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결혼을 하면 그 가정은 백전백패입니다. 어떻게 그 가정이 하나 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결혼을 해 놓고도 각자 자신의 옛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진정한 가정이 되겠습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고 높여줘야 그 가정이 진정한 가정이 되는 것 아닐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생각도 바뀌지 않습니다. 가치관도 그대로입니다. 언어도 같고, 행동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신앙은 백전필패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를 원한다면, 단절하고 탈출해야 됩니다. 애굽을 떠나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하나 되는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들여놓고 다른 한 발은 무언가 해 보겠다 하는 것은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40년 동안 헤매었을까요? 2,3주일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왜 그렇게 힘들게 가야 했을까요? 애굽에서의 노예근성과 거지근성을 간직한 채로 탈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공동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동체는 단절할 줄 아는 용기, 출애굽하는 엑소더스의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는, 비전공동체입니다. 목표가 있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출애굽만 했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끊임없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너희들을 인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떤 꿈을 갖고 있습니까? 내 가정에는 어떤 비전이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가장 작은 현존이 가정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가정을 꾸미겠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신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속에 가정을 향한 이러한 믿음의 꿈이 있어야 하나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정공동체의 꿈입니다.
교회는 무엇일까요? 이 땅에 세워져 있지만 하늘의 약속을 받고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4:4)

부르심의 ‘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소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세상과 차별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꿈꾸면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목표와 비전이 없는 공동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 번째는 말씀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네 전심으로 사랑하라. 네 목숨을 걸고 사랑해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듣고 자신들의 실존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이웃의 공동체를 위해서 살아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공동체는 약속공동체이고, 약속공동체는 곧 사명공동체입니다.
우리 가정은 어떤 공동체입니까? 하나님은 가정을 생명의 공동체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본래 모습입니다. 남편들에게 다시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내를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자기 몸을 내놓으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이 풍성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남자들이 먼저 바뀌어야 됩니다. 아내를 내 목숨을 걸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들을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나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쏟아부으십시오. 그래야 아내가 남편을 소중히 여기고 우러러 봅니다. 아내를 손찌검하는 남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악입니다.
이제 아내들에게 부탁합니다. 남편을 높여주세요. 남편에게 순종하세요. 이 말은 모든 남자에게 순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내 남편을 높이고 내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아니십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원하시며 거룩해지기를 원하시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약속이고, 목표입니다.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이 있어야 됩니다. 잘못된 것, 옛것을 잘라 버려야 됩니다. 탈출하고 단절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비전공동체가 되어야 우리가 가야할 길이 명백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와 행동의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로 인해 공동체가 하나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입니다. 그 영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2∼3)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겸손과 온유입니다. 때로는 오래 참는 것이고,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의 줄로 서로가 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공동체의 하나 됨은 획일성이 아닙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oneness입니다. 그것은 not sameness입니다. 하나 됨은 똑같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unity, 즉 통일성은 not uniformity, 획일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해가 시작되고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내 시간, 내 정성, 내 열정을 가지고, 내가 있으므로 내 가정이 변화 되고 나로 인해 내 직장과 사회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한 지체인 것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신 영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와 땀과 눈물과 에너지가 그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힘써 지키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을 통해 성도님들의 삶의 자리가 놀라운 생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로 승화되고 변화되는 역사가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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