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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실체는 교만과 닿아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나귀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죽은 사자의 탈을 줍게 됩니다. 이것을 뒤집어쓰자 그를 보는 동물마다 사자가 나타난 줄 알고 기겁하며 도망을 칩니다. 의기양양해진 당나귀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이힝” 하고 소리를 내고 맙니다. 그러자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여우가 “너 당나귀구나. 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나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거야.”라고 말하며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 이야기 속 당나귀의 모습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때로 두려움을 이겨보려고 허세를 부리고, 때로는 교만해 집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당했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조롱 받았는 줄 알아? 너도 한 번 당해볼래?’ 이런 당나귀의 심정으로 죽은 사자의 탈을 겹겹이 쌓으면서 폼을 내보려 할 때가 있습니다.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가 두려워서 도망간 동물들은 어떤 존재들입니까? 그들은 거짓된 두려움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당나귀가 사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우가 깨달은 것처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두려움 속에서 지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삶의 축복들을 놓치며 살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때 더 용기를 내볼 걸… 그때 두려워하지 말고 시도해볼 걸..’ 하며 탄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두려움은 교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만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분명 인간의 교만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피조물로 살기 싫다. 인간으로 사는 것이 두렵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타락의 내용이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매우 노력합니다. 외적으로 과시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지식일 수도 있고, 재물일 수도 있고, 명예와 권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교만의 뒷면에는 자신의 두려움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남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남을 공격합니다. 무시당하기 전에 먼저 남을 무시하고, 남이 나를 조롱하기 전에 먼저 남을 조롱합니다. 그래야 스스로가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교만이란 자신의 두려움을 사람들에게 숨기기 위한 자기변호와 자기 방어막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철저한 은혜전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만과 두려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전능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즉 자신에게 한계가 있고 자신의 삶이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두려움이 발생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수많은 독재자들이 왜 그렇게 방어막을 높이 올립니까? 북한의 독재자도 자신을 향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 남을 먼저 공격하는 것입니다. 숙청을 하는 이유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독재자들에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 두려움의 영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합니다. 하루를 살면서도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협하는 두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떠나가지는 않을까, 그래서 혼자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열심히 쌓아놓은 재물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 명예와 권력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언젠가는 건강을 잃어버리고 생명까지도 빼앗기는 날이 다가올 텐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하고 경쟁적이며 치열한가를 매일 느끼면서, 내가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의 적임자일까, 어쩌면 나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끝없는 질문 앞에서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또 매일 부딪히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절감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떤 시선으로 나를 평가할까,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들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깊어지고 반복이 되면 마치 질병처럼 우리를 억압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포증, 혹은 포비아라고 말합니다. 포비아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 뱀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고소공포증과 물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물공포증도 있습니다. 또 환경에 대한 상황공포증도 있습니다. 넓은 광장이나, 반대로 엘리베이터 같이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면 어쩔 줄 몰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 색깔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특정한 색깔을 보면 기분 나빠하고 불안합니다. 숫자에 대한 공포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숫자 4를 보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어떤 곳은 아예 4가 생략되어 있어서 1,2,3,5층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왜입니까? 숫자 4는 죽을 사(死)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음가가 똑같다는 이유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니 아예 없애버린 것입니다.
운동선수들과 연예인들은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합 전날에는 수염을 깎지 않고, 또 어떤 사람은 특정한 옷을 입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노모포비아(nomophobia)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no) 모바일(mobile) 포비아, 즉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12세에서 60세까지 스마트폰 이용자 4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봤더니, 77.4%가 벨이 울린 것도 아닌데 특별한 이유 없이 핸드폰을 꺼내서 한 번씩 열어 본다고 합니다.
의학자들은 이런 공포증에 대해서 ‘예방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너무 부담감을 갖고 일하지 마세요.”라며 휴식을 권합니다. 하지만 쉰다고 해도 다시 불안해집니다. 부담감을 갖지 말라는 말 때문에 더 부담감을 갖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불안과 두려움의 증상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평안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네 삶을 담대하게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거짓 평안에 속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세상 것과 다른 것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거짓 평안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과학시대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왜 점집들은 그렇게 융성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불안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왜 곤드레만드레 지경이 될 때까지 술을 먹는 것일까요? 젊은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서 “나 지난밤에 술 먹고 정신 나갔었어.”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방영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어디에 있습니까. 외국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로 병원에 끌려들어가야 할 사람들인데, 청소년들은 또 그것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잠시 잊기 위해서, 위안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잠시 행복해지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마약 성분의 주사를 맞으면서까지 얼마나 애를 씁니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얼마나 불안하면,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렇게 할까 싶습니다.
특별히 뭔가 가졌다고 여겨질 때, 인기나 권세가 생겼을 때 불안과 두려움은 더 커집니다. 그래서 이 불안을 해결해 보고자 잠깐의 즐거움과 위안을 누려보지만, 술 마신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겨우 일어나서는 ‘내 인생이 왜 모양인가…’ 하고 더 큰 자책감에 빠지는 것이 술중독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거짓 평안에 속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안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큰 두려움으로 작은 두려움을 내쫓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므로 허상의 거짓 두려움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말하자면, 절대자이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므로 세상의 헛된 두려움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이시기 때문에 그 잣대로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 것들을 상대화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이 생명이고, 하나님만이 은총이고, 하나님만이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동네 형들이 장난치고 위협하고 손찌검을 하면 어린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내 옆에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의 손을 딱 붙잡고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허울 좋은 당나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평안들입니다. 가짜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진짜 평안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성령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나를 규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두려움에 자주 빠지는 것일까요?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쉽게 다가옵니다. 착한 사람들, 남의 시선과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이 공포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신문이나 TV를 보다 보면, 안타까운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늘 1등만 했던 사람이 2등을 했다고 자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얼마나 1등 노이로제에 걸렸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겠습니까. “너는 1등을 하는 사람이야. 너는 착하고 착한 사람이야.” 그러한 말들이 스스로를 얽어맨 것입니다.
나 자신에 의해서 내가 규정이 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내가 규정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잘못된 규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은, 착한 사람 두려움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착한 사람들만큼 쉽게 떨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칭찬을 받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아내에게, 남편에게 인정을 받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자녀에게 존경을 받을까. 내가 얼마만큼 잘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귀하다고 여길까…’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규정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선에 의해서 내가 평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도 그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딸로서 어떻게 부모님을 섬기고 위할까.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내 배우자를 어떻게 사랑하고 도울까. 내 자식을 어떻게 하나님이 쓰실 만한 인물들로 잘 양육할까…’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받으며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면, 사람이 칭찬하는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도 사람들이 한 마디라도 꾸중을 하면 마음이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스스로를 형편없는 존재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규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 내가 주님의 말씀을 받은 약속의 사람인 것,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죄 가운데서 해방시켜 주신 자유자란 사실을 갖고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 세상에서 부딪히는 불안과 두려움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목표는 명백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토는 이것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즉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한 마디를 갖고 자신들의 모든 삶을 규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숨을 건 종교개혁자가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너무 많은 시선에 의해서 스스로를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내’가 없어집니다. 그리고는 내 속에 불안과, 좌절, 두려움만이 남아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거짓 두려움아, 물러가라! 나는 거짓 두려움에 속지 않는다!” 선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므로 세상을 이겨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믿음이며 하나님 자녀의 특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위로자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겁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구나.’ 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까? 내가 누구에 의해서 규정받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규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믿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31)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잊은 채 얼마나 많은 순간 두려움 때문에 아예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며 도망쳤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축복들을 놓쳤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십니다.
이번 한 해 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 나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성령님이여, 깨우쳐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주님과 더불어 담대하게 살아가시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4: 25 ~ 27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두려움의 실체는 교만과 닿아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나귀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죽은 사자의 탈을 줍게 됩니다. 이것을 뒤집어쓰자 그를 보는 동물마다 사자가 나타난 줄 알고 기겁하며 도망을 칩니다. 의기양양해진 당나귀는 기분이 좋은 나머지 “이힝” 하고 소리를 내고 맙니다. 그러자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여우가 “너 당나귀구나. 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나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거야.”라고 말하며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 이야기 속 당나귀의 모습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때로 두려움을 이겨보려고 허세를 부리고, 때로는 교만해 집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당했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조롱 받았는 줄 알아? 너도 한 번 당해볼래?’ 이런 당나귀의 심정으로 죽은 사자의 탈을 겹겹이 쌓으면서 폼을 내보려 할 때가 있습니다.
사자의 탈을 쓴 당나귀가 두려워서 도망간 동물들은 어떤 존재들입니까? 그들은 거짓된 두려움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당나귀가 사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우가 깨달은 것처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두려움 속에서 지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삶의 축복들을 놓치며 살다가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때 더 용기를 내볼 걸… 그때 두려워하지 말고 시도해볼 걸..’ 하며 탄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두려움은 교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교만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분명 인간의 교만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인간으로 사는 것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피조물로 살기 싫다. 인간으로 사는 것이 두렵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이 타락의 내용이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기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매우 노력합니다. 외적으로 과시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지식일 수도 있고, 재물일 수도 있고, 명예와 권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교만의 뒷면에는 자신의 두려움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남이 나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남을 공격합니다. 무시당하기 전에 먼저 남을 무시하고, 남이 나를 조롱하기 전에 먼저 남을 조롱합니다. 그래야 스스로가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교만이란 자신의 두려움을 사람들에게 숨기기 위한 자기변호와 자기 방어막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철저한 은혜전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만과 두려움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전능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즉 자신에게 한계가 있고 자신의 삶이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두려움이 발생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수많은 독재자들이 왜 그렇게 방어막을 높이 올립니까? 북한의 독재자도 자신을 향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 남을 먼저 공격하는 것입니다. 숙청을 하는 이유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독재자들에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 두려움의 영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합니다. 하루를 살면서도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협하는 두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떠나가지는 않을까, 그래서 혼자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열심히 쌓아놓은 재물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 명예와 권력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언젠가는 건강을 잃어버리고 생명까지도 빼앗기는 날이 다가올 텐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하고 경쟁적이며 치열한가를 매일 느끼면서, 내가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의 적임자일까, 어쩌면 나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끝없는 질문 앞에서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또 매일 부딪히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절감하면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어떤 시선으로 나를 평가할까,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들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깊어지고 반복이 되면 마치 질병처럼 우리를 억압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공포증, 혹은 포비아라고 말합니다. 포비아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 뱀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고소공포증과 물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물공포증도 있습니다. 또 환경에 대한 상황공포증도 있습니다. 넓은 광장이나, 반대로 엘리베이터 같이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면 어쩔 줄 몰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 색깔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특정한 색깔을 보면 기분 나빠하고 불안합니다. 숫자에 대한 공포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숫자 4를 보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어떤 곳은 아예 4가 생략되어 있어서 1,2,3,5층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왜입니까? 숫자 4는 죽을 사(死)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음가가 똑같다는 이유로 걱정하고 불안해하니 아예 없애버린 것입니다.
운동선수들과 연예인들은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합 전날에는 수염을 깎지 않고, 또 어떤 사람은 특정한 옷을 입어야 승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노모포비아(nomophobia)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no) 모바일(mobile) 포비아, 즉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12세에서 60세까지 스마트폰 이용자 4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봤더니, 77.4%가 벨이 울린 것도 아닌데 특별한 이유 없이 핸드폰을 꺼내서 한 번씩 열어 본다고 합니다.
의학자들은 이런 공포증에 대해서 ‘예방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너무 부담감을 갖고 일하지 마세요.”라며 휴식을 권합니다. 하지만 쉰다고 해도 다시 불안해집니다. 부담감을 갖지 말라는 말 때문에 더 부담감을 갖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불안과 두려움의 증상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평안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나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네 삶을 담대하게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거짓 평안에 속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세상 것과 다른 것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거짓 평안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21세기 과학시대에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왜 점집들은 그렇게 융성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불안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 특히 남성들은 왜 곤드레만드레 지경이 될 때까지 술을 먹는 것일까요? 젊은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서 “나 지난밤에 술 먹고 정신 나갔었어.”하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방영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어디에 있습니까. 외국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로 병원에 끌려들어가야 할 사람들인데, 청소년들은 또 그것을 따라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잠시 잊기 위해서, 위안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잠시 행복해지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마약 성분의 주사를 맞으면서까지 얼마나 애를 씁니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얼마나 불안하면,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렇게 할까 싶습니다.
특별히 뭔가 가졌다고 여겨질 때, 인기나 권세가 생겼을 때 불안과 두려움은 더 커집니다. 그래서 이 불안을 해결해 보고자 잠깐의 즐거움과 위안을 누려보지만, 술 마신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겨우 일어나서는 ‘내 인생이 왜 모양인가…’ 하고 더 큰 자책감에 빠지는 것이 술중독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거짓 평안에 속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안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큰 두려움으로 작은 두려움을 내쫓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므로 허상의 거짓 두려움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말하자면, 절대자이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므로 세상의 헛된 두려움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이시기 때문에 그 잣대로 모든 것들을 상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 것들을 상대화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이 생명이고, 하나님만이 은총이고, 하나님만이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고,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동네 형들이 장난치고 위협하고 손찌검을 하면 어린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내 옆에 아버지가 계시면, 아버지의 손을 딱 붙잡고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허울 좋은 당나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평안들입니다. 가짜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진짜 평안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입니다. 성령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나를 규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디에서부터 생기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이 두려움에 자주 빠지는 것일까요? 자의식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쉽게 다가옵니다. 착한 사람들, 남의 시선과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이 공포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신문이나 TV를 보다 보면, 안타까운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늘 1등만 했던 사람이 2등을 했다고 자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얼마나 1등 노이로제에 걸렸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겠습니까. “너는 1등을 하는 사람이야. 너는 착하고 착한 사람이야.” 그러한 말들이 스스로를 얽어맨 것입니다.
나 자신에 의해서 내가 규정이 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내가 규정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잘못된 규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은, 착한 사람 두려움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착한 사람들만큼 쉽게 떨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칭찬을 받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아내에게, 남편에게 인정을 받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내 자녀에게 존경을 받을까. 내가 얼마만큼 잘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귀하다고 여길까…’ 이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규정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선에 의해서 내가 평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섬기는 것도 그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들로서 딸로서 어떻게 부모님을 섬기고 위할까.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내 배우자를 어떻게 사랑하고 도울까. 내 자식을 어떻게 하나님이 쓰실 만한 인물들로 잘 양육할까…’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받으며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면, 사람이 칭찬하는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도 사람들이 한 마디라도 꾸중을 하면 마음이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스스로를 형편없는 존재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규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 내가 주님의 말씀을 받은 약속의 사람인 것,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죄 가운데서 해방시켜 주신 자유자란 사실을 갖고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 세상에서 부딪히는 불안과 두려움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의 목표는 명백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토는 이것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즉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한 마디를 갖고 자신들의 모든 삶을 규정했습니다. 그리고는 목숨을 건 종교개혁자가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너무 많은 시선에 의해서 스스로를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내’가 없어집니다. 그리고는 내 속에 불안과, 좌절, 두려움만이 남아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거짓 두려움아, 물러가라! 나는 거짓 두려움에 속지 않는다!” 선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므로 세상을 이겨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믿음이며 하나님 자녀의 특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위로자를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겁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구나.’ 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까? 내가 누구에 의해서 규정받고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규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믿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31)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잊은 채 얼마나 많은 순간 두려움 때문에 아예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며 도망쳤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축복들을 놓쳤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십니다.
이번 한 해 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 나를 가르쳐 주시옵소서. 성령님이여, 깨우쳐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주님과 더불어 담대하게 살아가시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