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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지상에서 더 보내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기도에 힘씁니다. 그리고 50일이 되는 날, 즉 오순절에(‘오순’에서의 ‘순’은 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리에서 이제는 성령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이란,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날입니다. “너는 이제부터 성령의 사람이다”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장을 찍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서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축복의 사건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축복을 자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 국민일보가 서울시에서 조사한 ‘종교 응답자 특성표’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종교가 없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53.5%로 절반이 약간 넘었습니다. 종교인 중에는 천주교인이 9.4%, 불교인이 10.6%, 기독교인(개신교)이 26.3%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10대에서 60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으며,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25% 내외를 기록했습니다.
서울 시민 네 명 중 한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결과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높은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직장이나 사회에서 네 명 중 한 명이 그리스도인인 것으로 느끼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닌데요? 나 혼자만 예수님을 믿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론 조사에서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삶의 현장에서는 신앙을 감추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마 두 가지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째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면 직장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염려입니다. 최근에 각종 매체에서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희화화하는 모습을 우리가 자주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 모습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답게,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더 편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실용주의적인 사고입니다. 적당히 스트레스 받고 적당히 편안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감추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와 직결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르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삶의 감사와 기쁨이 됩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랑입니까? 아니면 부모님이나 아내 때문에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럽다는 자격지심이 나를 움츠러들게 합니까?
예수님의 첫 말씀은 ‘평강’이었습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잘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죄 용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다!” 소리치고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 수만 명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자랑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권력자들도 가담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허무한 것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살아도 되는 걸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니 두려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마치 세상에 자신들만 남은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 중에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하는, 아니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이들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에게 샬롬이 있느냐?”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마음에 평안이 없었으면 예수님의 첫 말씀이 평안에 대한 것이었을까요?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한복음 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는 말씀은 19절에도 나오고 21절에도 나타납니다. “평강이 있으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라. 더 이상 너희가 혼자라고 생각하며 외로워하지 말라.” 그렇게 평강을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명령을 주십니다.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22)
예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보이는 예수님을 뒤쫓았습니다. 예수님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몸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최고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이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주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하라.”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제 나는 떠나지만, 너희 자신보다 너희를 더 잘 아는 성령을 너희 안에 머물게 하겠다” 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보이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으로 가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시며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너희의 스승으로 삼고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라.”
직접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지만 대신 성령님이 임하시니 성령님의 도움을 받고 성령님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배우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함입니다.
신앙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가 무엇일까요? “너희가 그동안 단순하게 내 말을 순종했느냐? 그러면 이제부터는 생각해라. 이제부터는 분별해라. 이제부터는 깨달으면서 순종함으로 성숙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남에 의해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세우는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본 적 있으십니까? 자녀가 어렸을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부모가 하나하나 다 가르칩니다. “아침이다. 일어나라”,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다. 교회에 가서 예배 잘 드려라. 헌금도 잘 챙기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자녀들은 성장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자라면 부모는 그때까지의 가르침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널 깨우지 않을 거야. 알람 맞춰서 스스로 일어나는 연습을 하자. 배움에 대한 의지를 갖자. 인생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 도전하고 이겨 나가야 해.” 만약 자녀가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일일이 간섭하고 참견한다면, 그것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다름 아닌 인생의 가치관, 즉 인생관이었습니다. 신앙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믿는 자들이 어떤 공동체로 모여야 되는지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 먼저 가르쳐야 할 인생의 중요한 것도 가치관입니다. 인생관입니다. 무엇보다 어릴 때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후에 그들이 바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시기 전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자유롭게 하는 영이고, 분별하는 영이고, 생각하고 결단하는 영이고,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영이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네 인생을 살아가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보이는 예수님께서 앞서가시며 하나하나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른쪽으로 가자’ 하시면 제자들은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왼쪽으로 가자’ 하시면 제자들은 왼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는 네 인생의 해석학을 스스로 지녀야 된다. 네 자신이 인생의 문제들을 분별하고 결정하는 해석자가 되어라.”
과연 스스로 해석자가 되는 데에 성령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성령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물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시작해야 될 때인지 아니면 멈춰야 될 때인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도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옛 것과 새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을 가슴에 품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것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1)
예수님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자기됨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할 말이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존재임을 확인하시며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우리가 존재할 이유입니다. 그것이 내 속에 할 말이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행동할 때 용기를 갖게 되고 어려운 문제도 도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남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것에는 늘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남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기쁘게 합니까? 직장이나 사회에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 삶 전체를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내게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면 어깨춤을 추다가도, 어느 날 누군가의 비난을 들으면 코가 석자가 되어 추락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내 속에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허락해 주시면, 그것이 바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남에게 조정 당하며 살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과 대화하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에 붙잡혀 있는가에 따라서 그가 누구인지가 결정됩니다. 재물의 영, 돈의 영에 붙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주문처럼 ‘돈돈돈’ 합니다.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돈돈돈’ 하면서 재물만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권력의 영에 붙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탐합니다. 국민은 뒷전이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권력을 잡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치인들의 행태로 우리가 아프지 않습니까? 또 성적인 쾌락의 영에 붙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곳곳에 술 취함이 가득합니다. 성적인 문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과 어둠의 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힘을 받고 있는 영은 거룩한 영, 성령입니다. 우리를 억누르는 영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영이고, 우리에게 분별의 힘을 주는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입니다. 주님은 이 영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탄과 죄의 권세로부터 승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찾아보면 수십, 수백 가지가 됩니다. 그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6)
성령을 받으면 내 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과 더불어 생각하게 하시고 판단하게 하시고 분별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성령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지혜를 내 것으로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 쉬게 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이기는 용기와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세상은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이 생명과 부활의 능력을 이 땅에서 성령과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지혜와 분별력을 받아야 합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하늘의 지혜를 달라고, 불안하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허락해 달라고, 용기가 부족하면 담대함을 달라고, 믿음이 흔들리면 굳건한 믿음을 달라고 성령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합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기억하며 내가 성령의 사람이 되었음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시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성령과 더불어 새롭게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20: 21 ~ 22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40일을 지상에서 더 보내셨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기도에 힘씁니다. 그리고 50일이 되는 날, 즉 오순절에(‘오순’에서의 ‘순’은 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리에서 이제는 성령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이란,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날입니다. “너는 이제부터 성령의 사람이다”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장을 찍으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해서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우리를 초청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축복의 사건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축복을 자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 국민일보가 서울시에서 조사한 ‘종교 응답자 특성표’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종교가 없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53.5%로 절반이 약간 넘었습니다. 종교인 중에는 천주교인이 9.4%, 불교인이 10.6%, 기독교인(개신교)이 26.3%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10대에서 60대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으며,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25% 내외를 기록했습니다.
서울 시민 네 명 중 한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결과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높은 수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직장이나 사회에서 네 명 중 한 명이 그리스도인인 것으로 느끼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닌데요? 나 혼자만 예수님을 믿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론 조사에서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삶의 현장에서는 신앙을 감추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아마 두 가지 경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째는 ‘신앙인이라고 말하면 직장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닐까?’라는 염려입니다. 최근에 각종 매체에서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으로 희화화하는 모습을 우리가 자주 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 모습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답게,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더 편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실용주의적인 사고입니다. 적당히 스트레스 받고 적당히 편안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감추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와 직결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다르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삶의 감사와 기쁨이 됩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랑입니까? 아니면 부모님이나 아내 때문에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에는 부끄럽다는 자격지심이 나를 움츠러들게 합니까?
예수님의 첫 말씀은 ‘평강’이었습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잘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죄 용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다!” 소리치고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 수만 명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자랑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권력자들도 가담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제자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 허무한 것이구나.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살아도 되는 걸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니 두려워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마치 세상에 자신들만 남은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 중에 누구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하는, 아니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이들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희에게 샬롬이 있느냐?”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마음에 평안이 없었으면 예수님의 첫 말씀이 평안에 대한 것이었을까요?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요한복음 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는 말씀은 19절에도 나오고 21절에도 나타납니다. “평강이 있으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라. 더 이상 너희가 혼자라고 생각하며 외로워하지 말라.” 그렇게 평강을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명령을 주십니다. 바로 성령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한복음 20:22)
예수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보이는 예수님을 뒤쫓았습니다. 예수님을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몸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최고의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이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주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 성령 충만하라.”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제 나는 떠나지만, 너희 자신보다 너희를 더 잘 아는 성령을 너희 안에 머물게 하겠다” 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보이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으로 가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시며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너희의 스승으로 삼고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라.”
직접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더 이상 함께 있지 않지만 대신 성령님이 임하시니 성령님의 도움을 받고 성령님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배우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함입니다.
신앙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가 무엇일까요? “너희가 그동안 단순하게 내 말을 순종했느냐? 그러면 이제부터는 생각해라. 이제부터는 분별해라. 이제부터는 깨달으면서 순종함으로 성숙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남에 의해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세우는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본 적 있으십니까? 자녀가 어렸을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부모가 하나하나 다 가르칩니다. “아침이다. 일어나라”,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다. 교회에 가서 예배 잘 드려라. 헌금도 잘 챙기고.” 부모의 말에 순종하며 자녀들은 성장합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자라면 부모는 그때까지의 가르침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널 깨우지 않을 거야. 알람 맞춰서 스스로 일어나는 연습을 하자. 배움에 대한 의지를 갖자. 인생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 도전하고 이겨 나가야 해.” 만약 자녀가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일일이 간섭하고 참견한다면, 그것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주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다름 아닌 인생의 가치관, 즉 인생관이었습니다. 신앙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믿는 자들이 어떤 공동체로 모여야 되는지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 먼저 가르쳐야 할 인생의 중요한 것도 가치관입니다. 인생관입니다. 무엇보다 어릴 때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후에 그들이 바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시기 전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자유롭게 하는 영이고, 분별하는 영이고, 생각하고 결단하는 영이고,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영이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네 인생을 살아가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보이는 예수님께서 앞서가시며 하나하나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른쪽으로 가자’ 하시면 제자들은 오른쪽으로 갔습니다. ‘왼쪽으로 가자’ 하시면 제자들은 왼쪽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너희는 네 인생의 해석학을 스스로 지녀야 된다. 네 자신이 인생의 문제들을 분별하고 결정하는 해석자가 되어라.”
과연 스스로 해석자가 되는 데에 성령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성령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물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시작해야 될 때인지 아니면 멈춰야 될 때인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도 성령님의 도움을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옛 것과 새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성령님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을 가슴에 품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것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21)
예수님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자기됨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할 말이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내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존재임을 확인하시며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우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우리가 존재할 이유입니다. 그것이 내 속에 할 말이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행동할 때 용기를 갖게 되고 어려운 문제도 도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남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것에는 늘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남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기쁘게 합니까? 직장이나 사회에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내 삶 전체를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때로는 내게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면 어깨춤을 추다가도, 어느 날 누군가의 비난을 들으면 코가 석자가 되어 추락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내 속에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허락해 주시면, 그것이 바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남에게 조정 당하며 살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과 대화하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영에 붙잡혀 있는가에 따라서 그가 누구인지가 결정됩니다. 재물의 영, 돈의 영에 붙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주문처럼 ‘돈돈돈’ 합니다.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돈돈돈’ 하면서 재물만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권력의 영에 붙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탐합니다. 국민은 뒷전이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권력을 잡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정치인들의 행태로 우리가 아프지 않습니까? 또 성적인 쾌락의 영에 붙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곳곳에 술 취함이 가득합니다. 성적인 문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과 어둠의 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힘을 받고 있는 영은 거룩한 영, 성령입니다. 우리를 억누르는 영이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영이고, 우리에게 분별의 힘을 주는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입니다. 주님은 이 영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탄과 죄의 권세로부터 승리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찾아보면 수십, 수백 가지가 됩니다. 그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십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로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6)
성령을 받으면 내 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과 더불어 생각하게 하시고 판단하게 하시고 분별하게 하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성령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지혜를 내 것으로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 쉬게 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이기는 용기와 능력을 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세상은 힘들고 어렵다. 하지만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이 생명과 부활의 능력을 이 땅에서 성령과 함께 누리면서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대화해야 합니다. 성령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지혜와 분별력을 받아야 합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하늘의 지혜를 달라고, 불안하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허락해 달라고, 용기가 부족하면 담대함을 달라고, 믿음이 흔들리면 굳건한 믿음을 달라고 성령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이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 믿는 것을 자랑스러워합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을 기억하며 내가 성령의 사람이 되었음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시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성령과 더불어 새롭게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