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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은 모든 질문에 열려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북한의 김일성이 죽은 후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충격적인 내용의 문구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표현이 아닙니까? 이것은 그들이 자랑하는 영생탑 뿐만 아니라 곳곳에 쓰여 있었습니다. 북한 수령론의 우상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고 나가실 때 뒤에 쓰여 있는 글을 읽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이 임마누엘의 약속을 북한은 정치적으로 패러디를 한 것입니다. 독재를 위한 고도의 정치 전략적인 구호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이라는 한 개인을 종교 우상으로, 신적인 존재로 떠받치는 구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과 북한의 우상화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신앙은 항상 질문에 열려 있습니다. 비판에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신가?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임마누엘이란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셨는가? 이러한 인간의 질문과 비판에 열려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백성들에게는 김일성에 대한 질문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자아비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들에게만 강요되는 것입니다. 권력자인 수령에게는 어느 누구도 질문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정치적인 체제, 권력자들을 향해서 질문하면 당장 벌을 가하는 구조. 그것이 북한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만든 헛된 우상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축복은 비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고, 목사를 비판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또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은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된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져야 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과 같은 오직 한 사람, 즉 수령만을 높입니다. 수령만을 위한 정치, 사회 구조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를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될 뿐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무슨 차이점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길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영광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지도자들은 그 반대입니다. 자기는 영광의 길을 가고 백성들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도록 강요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소련의 공산주의 학정을 경험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행위는 바로 인도적인 일이 됩니다. 다시 말해 비인도적인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선(善)과 악(惡)의 관념을 망각시키려고 책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영혼의 저항입니다.”
왜 거짓 이데올로기, 악한 독재자를 거절하고 거부해야 될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인 인간을 파괴하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 왜 오십니까? 왜 인간을 찾아오십니까?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내셨습니까? 성령께서 왜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잃어버리고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애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또 때로는 이런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미련하게 하고 어리석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생각을 다 빼버리는 것이 아닌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술과 마약에 취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중독증 환자와 같이 자기의 모든 자율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비난이 사실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기득권에 얽매여 자기만을 보존하는 퇴보가 아니라 변화와 성숙, 남을 위한 배려의 인간으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노예처럼 우리를 마구 부려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종에서 자유자로 우리를 세우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생각하라고,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라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신앙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신앙은 결코 생각을 면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교회는 타락한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직 온전히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생각이었습니다. 분별력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여러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열광주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분파와 분쟁이 심했고, 도덕적 타락과 성적인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4장을 보면 고린도교회는 분파와 분쟁의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게바파요, 나는 아볼로파요, 나는 바울파요 하면서 서로를 적대시 하며 자기 자랑만을 늘어놓습니다. 5장에서 7장을 보면 교회 안에 거짓과 음란한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생각하지 않는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가 방종으로 빠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자기 자랑만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인데 자기 혼자 잘났다고 은사 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는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열광주의와 당시 헬라적 철학인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사고가 같이 묶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인 세계, 신비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이원론적인 사고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은 영혼으로 예배드리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육체가 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집으로 갈 때는 육체의 욕망으로 인해 창녀를 만나 성적인 쾌락을 즐겼습니다. 바른 판단으로 생각하기를 멈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성적인 결합은 독특한 인격적 관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음식에 대한 문제도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선하다고 말씀하셨기에 음식은 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 음식이 비록 우상에게 갖다 바치는 제물이라고 해도 믿음으로 먹으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음식은 비인격적인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적인 관계는 다릅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것입니다. 육체와 육체가 만나는 것입니다. 정신과 정신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녀와의 성적인 결합은 어떠합니까? 인격적인 만남이 동반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은 물론 이웃의 인격까지도 손상시키는 죄악이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바울은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6:15)
왜 그렇습니까? 내 영혼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몸이 곧 우리이고, 우리의 정신, 마음, 몸이 전체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에 바른 판단으로 우리의 삶을 열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나는 예수를 믿고 자유자가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한국 기독교 속에서도 한때 구원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너의 죄를 용서하시니, 용서를 빌었다면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너는 이미 용서받은 죄인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윤리적인 책임, 자기 삶의 책임을 저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바르게 판단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면서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바울도 그랬고, 고린도교회도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나 내가 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라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과 교회의 덕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 자유를 잠시 멈출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개인의 자유란, 죄를 짓기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이웃을 상처 나게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을 함부로 험담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비인격적인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술 취하는 것에 비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파괴해야 합니다. 술 취하면 어제 저녁에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성령에 충만한 것은 다릅니다. 술이 마취제라면, 성령 충만은 각성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천하만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꿰뚫어 아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놀라운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이성, 그리스도의 판단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몸 안에서 역사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계속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19)
내 마음에만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 내 인격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내 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곧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전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성령께서 제게 임하신다는 말씀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성령께서 나와 동행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조금 겁이 나고 불편했습니다. 성령이 항상 같이 계시면 어떠할까? 성령이 나를 도청하는가? 감시하는가? 나는 나대로 살고 싶은데 왜 성령이 나와 함께 있어 나를 제한하고 방해하는가? 겁나기도 하고, 자유를 잃은 것만 같고, 답답하고 귀찮은 것은 아닌가 싶어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바라면서도 ‘성령님, 잠깐!’ 하는 그런 마음에 하나님께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아, 물고기가 자유를 누리려면 물이 있어야 되듯이, 들판에서 뛰노는 짐승이 마음껏 놀려면 그 공간에 공기가 있어야 되듯이, 성령이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유롭게 뛰놀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주님, 내가 주님께 맡깁니다. 성령이시여, 나를 인도하시옵소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처럼 돼야 된다”는 것도 그래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린 아들과 딸을 키워보셨습니까? 아프면 앙하고 울어버립니다.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가 “얘야, 이제 목욕하자”하며 옷을 벗기면 창피하다며 도망가는 아들, 딸 보셨습니까?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내가 내 몸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몸 안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축복의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몸에 성령으로 임하시면서 함께하시기를 원하실까요? 구약에서부터 보면 하나님은 늘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인간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우리의 몸과 마음에 성령이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네가 바로 나에 대한 자다. 네가 바로 작은 그리스도다. 내가 너를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이 하나님의 사람을 봐라, 이 성령의 사람을 봐라, 나의 생각과 뜻을 아는 믿음의 사람을 보라고 세상에 표시하고 싶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소망하십시오.
우리가 보통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도 바울의 말씀을 보면 더 확대해야 됩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사랑하는 이원론적인 삶이 아니라, “생각을 몸으로 하라. 실존 전체를 걸고 생각하라. 기도도 몸으로 하라. 네 몸 전체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드려라. 네 몸으로 예배를 드려라. 사랑하는 것도 네 몸으로 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 그것이 예배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에 자랑하고 싶으셔서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서 우리가 밟는 땅이 복을 받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복을 받고, 우리 가정이 복을 받고, 이 사회와 세계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역사, 은혜의 역사, 사랑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이 예배당에 초청해서 예배드리게 하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내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나를 맡깁니다. 내 마음과 몸에 임재하시고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서 담대히 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새로운 결단으로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6: 12 ~ 20
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신앙은 모든 질문에 열려 있습니다.
여러 해 전, 북한의 김일성이 죽은 후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충격적인 내용의 문구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표현이 아닙니까? 이것은 그들이 자랑하는 영생탑 뿐만 아니라 곳곳에 쓰여 있었습니다. 북한 수령론의 우상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습니다. 저는 이 문구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고 나가실 때 뒤에 쓰여 있는 글을 읽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이 임마누엘의 약속을 북한은 정치적으로 패러디를 한 것입니다. 독재를 위한 고도의 정치 전략적인 구호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이라는 한 개인을 종교 우상으로, 신적인 존재로 떠받치는 구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과 북한의 우상화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신앙은 항상 질문에 열려 있습니다. 비판에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신가?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임마누엘이란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셨는가? 이러한 인간의 질문과 비판에 열려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백성들에게는 김일성에 대한 질문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자아비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백성들에게만 강요되는 것입니다. 권력자인 수령에게는 어느 누구도 질문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정치적인 체제, 권력자들을 향해서 질문하면 당장 벌을 가하는 구조. 그것이 북한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만든 헛된 우상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문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축복은 비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고, 목사를 비판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또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은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다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된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져야 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과 같은 오직 한 사람, 즉 수령만을 높입니다. 수령만을 위한 정치, 사회 구조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를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될 뿐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무슨 차이점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길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영광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지도자들은 그 반대입니다. 자기는 영광의 길을 가고 백성들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도록 강요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소련의 공산주의 학정을 경험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행위는 바로 인도적인 일이 됩니다. 다시 말해 비인도적인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선(善)과 악(惡)의 관념을 망각시키려고 책동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 영혼의 저항입니다.”
왜 거짓 이데올로기, 악한 독재자를 거절하고 거부해야 될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인 인간을 파괴하고 조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 왜 오십니까? 왜 인간을 찾아오십니까?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왜 보내셨습니까? 성령께서 왜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잃어버리고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애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질문을 받습니다. 또 때로는 이런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미련하게 하고 어리석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생각을 다 빼버리는 것이 아닌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술과 마약에 취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중독증 환자와 같이 자기의 모든 자율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비난이 사실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기득권에 얽매여 자기만을 보존하는 퇴보가 아니라 변화와 성숙, 남을 위한 배려의 인간으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노예처럼 우리를 마구 부려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종에서 자유자로 우리를 세우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생각하라고,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라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신앙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신앙은 결코 생각을 면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각을 활성화시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교회는 타락한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직 온전히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생각이었습니다. 분별력 없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여러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열광주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분파와 분쟁이 심했고, 도덕적 타락과 성적인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4장을 보면 고린도교회는 분파와 분쟁의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게바파요, 나는 아볼로파요, 나는 바울파요 하면서 서로를 적대시 하며 자기 자랑만을 늘어놓습니다. 5장에서 7장을 보면 교회 안에 거짓과 음란한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생각하지 않는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가 방종으로 빠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를 파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자기 자랑만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를 위한 것인데 자기 혼자 잘났다고 은사 없는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고는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열광주의와 당시 헬라적 철학인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적 사고가 같이 묶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인 세계, 신비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이원론적인 사고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은 영혼으로 예배드리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육체가 하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지만 집으로 갈 때는 육체의 욕망으로 인해 창녀를 만나 성적인 쾌락을 즐겼습니다. 바른 판단으로 생각하기를 멈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성적인 결합은 독특한 인격적 관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음식에 대한 문제도 함께 나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선하다고 말씀하셨기에 음식은 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 음식이 비록 우상에게 갖다 바치는 제물이라고 해도 믿음으로 먹으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음식은 비인격적인 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적인 관계는 다릅니다.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것입니다. 육체와 육체가 만나는 것입니다. 정신과 정신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녀와의 성적인 결합은 어떠합니까? 인격적인 만남이 동반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은 물론 이웃의 인격까지도 손상시키는 죄악이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바울은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6:15)
왜 그렇습니까? 내 영혼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몸이 곧 우리이고, 우리의 정신, 마음, 몸이 전체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에 바른 판단으로 우리의 삶을 열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나는 예수를 믿고 자유자가 되었으니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한국 기독교 속에서도 한때 구원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 죄에 대한 용서를 빌면 하나님이 너의 죄를 용서하시니, 용서를 빌었다면 이제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너는 이미 용서받은 죄인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윤리적인 책임, 자기 삶의 책임을 저버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에게 바르게 판단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씀하면서 고린도전서 6장 1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 바울도 그랬고, 고린도교회도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나 내가 자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달라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과 교회의 덕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유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 자유를 잠시 멈출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개인의 자유란, 죄를 짓기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이웃을 상처 나게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남의 생명을 빼앗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을 함부로 험담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비인격적인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믿는 것을 술 취하는 것에 비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파괴해야 합니다. 술 취하면 어제 저녁에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다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성령에 충만한 것은 다릅니다. 술이 마취제라면, 성령 충만은 각성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천하만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꿰뚫어 아는 지혜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놀라운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이성, 그리스도의 판단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몸 안에서 역사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말씀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계속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19)
내 마음에만 성령이 임하신 것이 아니라, 내 인격 전체를 대변하고 있는 내 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곧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전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성령께서 제게 임하신다는 말씀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성령께서 나와 동행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조금 겁이 나고 불편했습니다. 성령이 항상 같이 계시면 어떠할까? 성령이 나를 도청하는가? 감시하는가? 나는 나대로 살고 싶은데 왜 성령이 나와 함께 있어 나를 제한하고 방해하는가? 겁나기도 하고, 자유를 잃은 것만 같고, 답답하고 귀찮은 것은 아닌가 싶어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바라면서도 ‘성령님, 잠깐!’ 하는 그런 마음에 하나님께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아, 물고기가 자유를 누리려면 물이 있어야 되듯이, 들판에서 뛰노는 짐승이 마음껏 놀려면 그 공간에 공기가 있어야 되듯이, 성령이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유롭게 뛰놀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주님, 내가 주님께 맡깁니다. 성령이시여, 나를 인도하시옵소서.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 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 아이처럼 돼야 된다”는 것도 그래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린 아들과 딸을 키워보셨습니까? 아프면 앙하고 울어버립니다.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가 “얘야, 이제 목욕하자”하며 옷을 벗기면 창피하다며 도망가는 아들, 딸 보셨습니까?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내가 내 몸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몸 안에 성령께서 임하시는 축복의 내용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몸에 성령으로 임하시면서 함께하시기를 원하실까요? 구약에서부터 보면 하나님은 늘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인간과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우리의 몸과 마음에 성령이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네가 바로 나에 대한 자다. 네가 바로 작은 그리스도다. 내가 너를 세상에 자랑하고 싶다. 이 하나님의 사람을 봐라, 이 성령의 사람을 봐라, 나의 생각과 뜻을 아는 믿음의 사람을 보라고 세상에 표시하고 싶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소망하십시오.
우리가 보통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도 바울의 말씀을 보면 더 확대해야 됩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사랑하는 이원론적인 삶이 아니라, “생각을 몸으로 하라. 실존 전체를 걸고 생각하라. 기도도 몸으로 하라. 네 몸 전체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드려라. 네 몸으로 예배를 드려라. 사랑하는 것도 네 몸으로 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라. 그것이 예배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세우시기 위해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에 자랑하고 싶으셔서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서 우리가 밟는 땅이 복을 받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이 복을 받고, 우리 가정이 복을 받고, 이 사회와 세계에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역사, 은혜의 역사, 사랑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를 이 예배당에 초청해서 예배드리게 하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내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나를 맡깁니다. 내 마음과 몸에 임재하시고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향해서 담대히 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새로운 결단으로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