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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외롭고 두렵고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비명처럼 외치는 세 마디의 말입니다.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 어쩌면 이 세 가지 말에 인생의 슬픔과 아픔, 절망이 다 들어있다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말이 한 번에 뭉치면 삶을 끊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아주 파괴적인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배신당했기에 이런 말을 할까요? 사람들의 비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런 지경에 이를까요? 열정을 쏟아 부었던 시험과 사업에 실패해서 이렇게 말할까요? 아니면 희귀병에 걸리고 암 투병을 하면서 이런 고통의 느낌을 가질까요? 여기에는 분명 자기의 꿈과 사명이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 마디의 말에 모든 인생의 탄식이 녹아져 있습니다. 외롭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외면하고 나 홀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대신 갈 수 없는 이 길을 고독하게 나 혼자 가야한다는 고독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한 두렵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힘들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치열해서 이 어려운 길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가 너무나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말은 우리의 생애 속에서 한두 번씩은 해본 말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우리가 외로워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 그리고 그것이 벅차고 고달파서 우리의 삶이 낙심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수고한 자들의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함께 가자. 겁내지 마라. 인생이 비록 치열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동행하지 않니? 그러니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 모험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렴.”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선물인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을 주시지만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최고의 선물인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자식이 달라고 하면 좋은 것을 주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믿음의 자녀들이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시는데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신앙이란 성령과 함께하는 신앙입니다. 성령을 빼고는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렀을 때 그들은 의기양양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대한 기대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직업으로부터의 벗어날 날을 고대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마음이 설렘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죽으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의 길을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제자들은 막막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꾸었던 모든 꿈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어쩌면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도마, 요한이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수님,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우리를 이렇게 두고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들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떠나가지만 영원한 동반자를 너희에게 보내줄 것이다.”
예수님은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예수님은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함께 있는 사람을 친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잘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허물없이 자기 속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 3~4명만 있으면 인생을 멋지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습니까? 그냥 스쳤다가 대화했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이야기와 고민, 아픔을 얘기해도 반갑게 맞아 들어주는 친구를 갖는 것을 얼마나 소중합니까?
친구의 종류도 다양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하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나기가 싫습니다. 만나서 얘기하면 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까지도 다 빼앗깁니다. 그래서 옛 현인인 공자가 친구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친구는 내게 유익을 주고 어떤 것은 내게 손해를 끼친다고 하면서 유익한 벗으로 우직(友直), 우량(友諒), 우다문(友多聞)의 세 종류의 친구를 말합니다. 강직한 친구, 성실한 친구, 견문이 넓은 친구를 가진 사람은 만날 때마다 좋고 만날 때마다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해로운 벗이 있습니다. 우편벽(友便辟), 우선유(友善柔), 우편녕(友便佞)입니다. 즉, 아첨을 잘하는 친구, 줏대가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친구, 말만 여기저기 떠벌리는 친구입니다. 이런 친구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친구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셨습니까? 지금도 만나면 기쁘고 내 속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는 친구들이 주위에 있습니까? 그러면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상실하여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최고의 친구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동시의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최고의 친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예수님은 어떤 친구입니까? 자기의 삶 전체를 친구를 위해 내어놓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까?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죄악, 슬픔, 탄식, 질병,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대신 지시기 위해 골고다의 언덕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친구로 맞이합니다. 예수님이 내 친구로 모신 것이 인생의 가장 멋진 결단인 것을 소리쳐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을 사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33살 나이에 팔레스틴 지역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길 간구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들의 보혜사가 되었지만 이제는 영원한 보혜사,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 오실 것이다.” 여기에 보혜사라고 하는 말은 ‘위로하는 자, 돕는 자, 변호하고 상담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comforter, helper, counselor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실 수 없었습니다.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24시간 같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 계셔서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보혜사는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교회입니다. 이 성령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우리들 속에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성령을 놓치지 마십시오. 어느 자리에 있어도 성령께 간구하십시오. 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간구하십시오.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까? 나보다 더 나은 벗을 만나면 성숙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에게 왜 위인전을 읽힙니까? 올바른 길, 더 멋진 길을 알려주고 더 품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힙니다. 인생은 더 큰 사람을 만나야 더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만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보여주시는 성령님의 역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라나고 싶습니까? 변화되고 싶습니까? 성숙하고 싶습니까? 하늘의 지혜를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지혜를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갖는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세상의 영과 다릅니다. 악령과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4:17)
하나님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도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도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에 그렇게 말합니다.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기에 성령의 역사를 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살 것을 요청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은 거룩한 영이면서 진리의 영입니다. 이 거룩한 영과 진리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한 영과 결별을 해야 됩니다. 거짓을 물리쳐야 됩니다.
성령과 악령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악령도 인격적입니다. 악령은 우리를 유혹하고 속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알고 우리를 조종하려하고 노예 삼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종처럼 부립니다. 악한 영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못된 것입니다. 내가 실수하고 부족한 것을 붙잡아서 자기 마음대로 쓰려고 합니다. 우리를 좌지우지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떨까요? 성령도 인격이십니다. 성령은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진실을 말씀합니다. 성령께서도 우리가 죄를 짓고 허덕이는 줄 아십니다. 그러나 그 죄 속에서 우리를 용서하고 해방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좌지우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로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억눌리지 않도록 우리에게 해방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악령을 내쫓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거짓 영을 내쫓을 수 있을까요? 이 진리의 영, 거룩하신 영을 내가 받아들이면 악령들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내게 들어오면 어둠이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수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속에 있던 찌꺼기 같은 것들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주인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 간직할 때 성령님께서 내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기에 2가지 영어 전치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with입니다(with you). 또 하나는 in입니다(in you). 성령님께서 너와 동행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어도 성령님께서 동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성령이 역사를 받은 그때부터 성령님께서 동행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내 영이 거룩해져서 성령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내게 임하셔서 내 영과 함께 교제할 때에 내 영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영원한 친구처럼 우리와 동행해주신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팔레스틴의 한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사건입니다. 성령님은 시간을 통과합니다.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어느 자리에서든 성령님을 요청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버스를 타다가도, 드라이브를 하다가도, 가정에 있다가도, 직장에 다니다가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육체로 된 성육신이라고 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의 영의 의해서 세상을 향해 나가는 성육신이자 작은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직업보다 우선입니다. 학생입니까? 학생보다 우선입니다. 교사입니까? 교사보다 우선입니다. 근로자입니까? 근로자보다 우선입니다. 기업가입니까? 기업가보다 우선입니다. 정치가입니까? 정치가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목사가 되는 것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정치가가 되는 것이고, 기업가가 되는 것이고, 직장인이 되는 것이고, 화가가 되는 것이고, 음악인이 되는 것이고,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특권이요 자랑입니다. 정말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가장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성령님을 내 친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하늘의 지혜, 숨겨진 지혜, 하늘의 계시, 하늘의 능력, 하늘의 영감, 하늘의 생명, 하늘의 치유를 얻게 됩니다. 성령님을 우리 가슴으로 받을 때 그 속에서 생명과 치유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매일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과 더불어 오늘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지혜가 모자라면 지혜를 요청하십시오.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요청하십시오. 성령의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14: 15 ~ 18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께서는 외롭고 두렵고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비명처럼 외치는 세 마디의 말입니다.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 어쩌면 이 세 가지 말에 인생의 슬픔과 아픔, 절망이 다 들어있다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말이 한 번에 뭉치면 삶을 끊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아주 파괴적인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배신당했기에 이런 말을 할까요? 사람들의 비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이런 지경에 이를까요? 열정을 쏟아 부었던 시험과 사업에 실패해서 이렇게 말할까요? 아니면 희귀병에 걸리고 암 투병을 하면서 이런 고통의 느낌을 가질까요? 여기에는 분명 자기의 꿈과 사명이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다가오는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 마디의 말에 모든 인생의 탄식이 녹아져 있습니다. 외롭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외면하고 나 홀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대신 갈 수 없는 이 길을 고독하게 나 혼자 가야한다는 고독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한 두렵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힘들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치열해서 이 어려운 길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가 너무나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말은 우리의 생애 속에서 한두 번씩은 해본 말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우리가 외로워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때, 그리고 그것이 벅차고 고달파서 우리의 삶이 낙심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수고한 자들의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함께 가자. 겁내지 마라. 인생이 비록 치열하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동행하지 않니? 그러니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 모험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렴.” 이렇게 우리를 초청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선물인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많은 것을 주시지만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최고의 선물인데, 그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13)
자식이 달라고 하면 좋은 것을 주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믿음의 자녀들이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시는데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신앙이란 성령과 함께하는 신앙입니다. 성령을 빼고는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렀을 때 그들은 의기양양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대한 기대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직업으로부터의 벗어날 날을 고대했습니다. 그들의 마음 가운데는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마음이 설렘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죽으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의 길을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제자들은 막막해졌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꾸었던 모든 꿈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어쩌면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도마, 요한이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수님,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우리를 이렇게 두고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들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떠나가지만 영원한 동반자를 너희에게 보내줄 것이다.”
예수님은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
예수님은 너희와 영원토록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함께 있는 사람을 친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 사람의 인생을 잘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허물없이 자기 속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친구 3~4명만 있으면 인생을 멋지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습니까? 그냥 스쳤다가 대화했다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이야기와 고민, 아픔을 얘기해도 반갑게 맞아 들어주는 친구를 갖는 것을 얼마나 소중합니까?
친구의 종류도 다양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면 반갑습니다. 어떤 사람과 대화하면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나기가 싫습니다. 만나서 얘기하면 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까지도 다 빼앗깁니다. 그래서 옛 현인인 공자가 친구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친구는 내게 유익을 주고 어떤 것은 내게 손해를 끼친다고 하면서 유익한 벗으로 우직(友直), 우량(友諒), 우다문(友多聞)의 세 종류의 친구를 말합니다. 강직한 친구, 성실한 친구, 견문이 넓은 친구를 가진 사람은 만날 때마다 좋고 만날 때마다 내게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해로운 벗이 있습니다. 우편벽(友便辟), 우선유(友善柔), 우편녕(友便佞)입니다. 즉, 아첨을 잘하는 친구, 줏대가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친구, 말만 여기저기 떠벌리는 친구입니다. 이런 친구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친구들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친구를 만나셨습니까? 지금도 만나면 기쁘고 내 속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는 친구들이 주위에 있습니까? 그러면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상실하여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최고의 친구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지만 동시의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최고의 친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예수님은 어떤 친구입니까? 자기의 삶 전체를 친구를 위해 내어놓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까?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죄악, 슬픔, 탄식, 질병,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대신 지시기 위해 골고다의 언덕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친구로 맞이합니다. 예수님이 내 친구로 모신 것이 인생의 가장 멋진 결단인 것을 소리쳐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을 사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공간의 제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33살 나이에 팔레스틴 지역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길 간구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들의 보혜사가 되었지만 이제는 영원한 보혜사,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 오실 것이다.” 여기에 보혜사라고 하는 말은 ‘위로하는 자, 돕는 자, 변호하고 상담하는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comforter, helper, counselor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실 수 없었습니다.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24시간 같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안 계셔서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보혜사는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성령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교회입니다. 이 성령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 우리들 속에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성령을 놓치지 마십시오. 어느 자리에 있어도 성령께 간구하십시오. 저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간구하십시오.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까? 나보다 더 나은 벗을 만나면 성숙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린 자녀들에게 왜 위인전을 읽힙니까? 올바른 길, 더 멋진 길을 알려주고 더 품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힙니다. 인생은 더 큰 사람을 만나야 더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만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보여주시는 성령님의 역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자라나고 싶습니까? 변화되고 싶습니까? 성숙하고 싶습니까? 하늘의 지혜를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지혜를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갖는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세상의 영과 다릅니다. 악령과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4:17)
하나님이 진리이십니다. 예수님도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도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둠속에서 빛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에 그렇게 말합니다.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보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기에 성령의 역사를 안다.” 그러면서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살 것을 요청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은 거룩한 영이면서 진리의 영입니다. 이 거룩한 영과 진리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려고 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한 영과 결별을 해야 됩니다. 거짓을 물리쳐야 됩니다.
성령과 악령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악령도 인격적입니다. 악령은 우리를 유혹하고 속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알고 우리를 조종하려하고 노예 삼으려고 합니다. 우리를 종처럼 부립니다. 악한 영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못된 것입니다. 내가 실수하고 부족한 것을 붙잡아서 자기 마음대로 쓰려고 합니다. 우리를 좌지우지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떨까요? 성령도 인격이십니다. 성령은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진실을 말씀합니다. 성령께서도 우리가 죄를 짓고 허덕이는 줄 아십니다. 그러나 그 죄 속에서 우리를 용서하고 해방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좌지우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로 귀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억눌리지 않도록 우리에게 해방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과 자유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악령을 내쫓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거짓 영을 내쫓을 수 있을까요? 이 진리의 영, 거룩하신 영을 내가 받아들이면 악령들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내게 들어오면 어둠이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수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속에 있던 찌꺼기 같은 것들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주인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 간직할 때 성령님께서 내안에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기에 2가지 영어 전치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with입니다(with you). 또 하나는 in입니다(in you). 성령님께서 너와 동행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어도 성령님께서 동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기도하면서 성령이 역사를 받은 그때부터 성령님께서 동행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읽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기 원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내 영이 거룩해져서 성령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 내게 임하셔서 내 영과 함께 교제할 때에 내 영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영원한 친구처럼 우리와 동행해주신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팔레스틴의 한 다락방에 성령님께서 임하셨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오늘의 사건입니다. 성령님은 시간을 통과합니다.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어느 자리에서든 성령님을 요청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버스를 타다가도, 드라이브를 하다가도, 가정에 있다가도, 직장에 다니다가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육체로 된 성육신이라고 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의 영의 의해서 세상을 향해 나가는 성육신이자 작은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직업보다 우선입니다. 학생입니까? 학생보다 우선입니다. 교사입니까? 교사보다 우선입니다. 근로자입니까? 근로자보다 우선입니다. 기업가입니까? 기업가보다 우선입니다. 정치가입니까? 정치가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목사가 되는 것보다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정치가가 되는 것이고, 기업가가 되는 것이고, 직장인이 되는 것이고, 화가가 되는 것이고, 음악인이 되는 것이고, 예술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은 특권이요 자랑입니다. 정말 성숙하기를 원하십니까? 가장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성령님을 내 친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때 하늘의 지혜, 숨겨진 지혜, 하늘의 계시, 하늘의 능력, 하늘의 영감, 하늘의 생명, 하늘의 치유를 얻게 됩니다. 성령님을 우리 가슴으로 받을 때 그 속에서 생명과 치유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매일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모시고 주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과 더불어 오늘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지혜가 모자라면 지혜를 요청하십시오. 능력이 모자라면 능력을 요청하십시오. 성령의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