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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소망인 교회

베드로전서 2: 4 ~ 10

김지철 목사

2008.04.20

기독교인과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신문사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충격적인 대답이 나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애국적인가?”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양심적인가?”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더 많아지기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도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서 비호감을 넘어서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단순히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표정으로 손을 저어 내밀면서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라고 표방하면서 기독교의 약점과 문제점을 지적하다 못해 때로는 과장하고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인터넷과 신문 방송매체까지 등장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문제점을 가질 때에는 그 종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다가도 기독교인들 중에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이 지닌 교회의 직분까지 들먹이면서 교회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문제를 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도마 위에 놓고 이리저리 두드려 보고 흔들어 보려는 심정이 그대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긍정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교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를 스스로 반성해 보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강력하게 주문합니다. 이것은 아직도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경고의 표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이런 지적을 아파하면서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이런 지적에는 실제로 교회나 성도들이 사회에서 막강한 영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곳곳에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치계, 법조계, 경제계, 경제계, 교육계, 과학계, 문화계 등의 모든 방면에 기독교인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 봐야합니다. ‘교회는 정말 세상의 소망인가 아니면 교회는 세상의 절망인가? 교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 아닌가 아니면 꼭 필요한 곳인가?’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교회를 영어로 ‘church’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영어로 살펴보면  ‘ch’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마지막에 ‘ch’라는 단어로 끝납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글자는 UR입니다. 이것은 곧 “You are ‘the church’” 즉“당신이 바로 교회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당일 뿐입니다. 건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나 자신이 교회라고 한다면 내가 어떻게 세상의 소망이 될 것인가를 우리는 다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애국적인가?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양심적인가? 나는 교회가 더 많아지기를 가슴으로부터 원하고 있는가?’우리가 이 질문에 자랑스럽게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지 아니면 대답하지 못할 만큼 예수 믿는 내 자신이 위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다시 한 번 반성해 봐야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며 주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 들어가는 신비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참된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늘의 비밀을 목격하고 가슴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신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도약이며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계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신비를 찾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가 늘 다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영광이 가득한 것을 목격했던 것이 신앙입니다. 그 전에 그는 머리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거룩함을 목격하면서 그의 가슴과 인격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3)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무릎을 꿇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 6:5)

이사야는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부르짖는 거룩함을 경험하면서 기이한 하나님의 빛 속으로 들어갑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놀라움, 말씀의 생명의 사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죄 용서의 기쁨, 사죄의 기쁨, 생명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8)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인생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 6:8)

이것은 곧 이런 대답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나를 쓰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하여 가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는 순간 세상이 변화되는 축복이 이 사회와 역사 속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교회의 소망은 성도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회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게 참된 소망이 있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붙잡힘 받지 않으면 모이는 성도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다는 고백이 있어도 예수님의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살면서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척도보다 못할 때 비판을 받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가치관을 초월하고 세상이 보여주는 삶의 습관보다 탁월할 때 비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비판은 후자의 비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받는 비판은 전자의 비판이 더 많습니다. 성경말씀에 예수님이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받는 모습이 이렇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다” (베드로전서 2:4)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다” (베드로전서 2:7)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베드로전서 2:8)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풍조와 가치관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배척받은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죽음인데 예수님은 죽음을 거스르는 생명의 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데 예수님은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절망과 탄식 속에 있는데 예수님은 소망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에 부딪쳐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생명을 거스르는 죽음에 부딪쳐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고난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역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풍조,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소망이 있고 교회가 소망이 있다는 것은 현실에 도전하며 부딪치고,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탁월한 가치관과 도덕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안도현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집인 「연어」라는 글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 거슬러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뭇잎들은 왜 강 아래로 내려가지요?” 은빛연어가 신기해하면서 초록강에게 물어봅니다. 그때 초록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거슬러 오를 줄 모르기 때문이야.” 은빛연어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건 또 뭐죠?”라고 물었더니 초록강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 같은 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
아무런 능력과 생명이 없는 나뭇잎은 그냥 흘러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빛언어는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은 꿈과 희망이며 힘겹지만 생명의 약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자체가 진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무질서와 잘못된 거짓과 부딪쳐 보겠다는 용기를 갖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품과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잠깐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는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고 직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다시 옛 습관, 옛 가치관, 옛 삶의 형태에 그대로 지배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세상의 가치관을 자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평가합니다. 입은 옷의 브랜드로, 지식과 학벌로, 가진 돈과 재물로, 권력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명품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세상과 부딪치고 충돌할 생각은 하지 않고 편안히 안주할 것을 찾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열등감에 대한 표시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자체가 명품입니다. 명품은 찍어내는 것이니 우리는 명품 이상인 진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에 대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내가 좋은 옷을 입어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은 학벌을 가져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많은 돈을 가져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돈과 재물을 벌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 흘리지만 돈과 재물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권력을 추구하지만 권력이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다만 권력은 이웃과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명품을 사거나 입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차를 타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절대로 큰 집에서 살지 말고 작은 집에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를 규정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관행과 싸움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들과 부딪쳐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을 밝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9)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기이한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 하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 속에 참여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언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이 받은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를 위해서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덕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2:1)

첫째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쓰레기처럼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악덕, 기만, 외식,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모든 말을 버리고 깨끗함을 입으라는 의미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정한 젖을 사모하라” (베드로전서 2:2)

두 번째,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버리면 채우라는 것입니다. 버리기만 하면 안 됩니다. 채우지 않으면 더 나쁜 것들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령한 전으로 가슴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자존감과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왕 같은 제사장들이여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택함 받은 족속,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를 택하셨으니 이제는 세상의 최고의 진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당신은 거지같은 존재가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당신은 추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의 역사를 누리며 세상을 밝게 비추는 아름다운 덕을 선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소망을 세상 속에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듯이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잃어버린 탕자가 구원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며 찾아오십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찾으시고 사랑해 주셨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찾으시는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생각을 내어놓을 사람,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 자기 삶을 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열망하는 사람, 거룩하고 귀한 빛을 세상에 증거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소망이고 교회가 소망이라는 사실을 세상 속에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말씀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귀한 빛을 이 세상을 향해서 보여주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여 세상의 소망이 되어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 일뿐입니다.
오직 빛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야 우리 속에서 빛이 발생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세상의 소망인 동산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소망이 되어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기이한 빛 속에 초정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고 우리의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옵소서. 세상에 가치관과 거스를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고 때로는 부딪쳐 도전하며 모험하게 하시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의 한 사람, 한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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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 4 ~ 10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기독교인과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신문사가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서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충격적인 대답이 나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애국적인가?”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더 양심적인가?”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더 많아지기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도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서 비호감을 넘어서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단순히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표정으로 손을 저어 내밀면서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라고 표방하면서 기독교의 약점과 문제점을 지적하다 못해 때로는 과장하고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인터넷과 신문 방송매체까지 등장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문제점을 가질 때에는 그 종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다가도 기독교인들 중에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이 지닌 교회의 직분까지 들먹이면서 교회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문제를 삼기도 합니다. 기독교인들을 도마 위에 놓고 이리저리 두드려 보고 흔들어 보려는 심정이 그대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긍정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교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를 스스로 반성해 보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강력하게 주문합니다. 이것은 아직도 기독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기대하는 것이 있다는 경고의 표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이런 지적을 아파하면서 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이런 지적에는 실제로 교회나 성도들이 사회에서 막강한 영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곳곳에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치계, 법조계, 경제계, 경제계, 교육계, 과학계, 문화계 등의 모든 방면에 기독교인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 봐야합니다. ‘교회는 정말 세상의 소망인가 아니면 교회는 세상의 절망인가? 교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 아닌가 아니면 꼭 필요한 곳인가?’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교회를 영어로 ‘church’라고 합니다. 이 단어를 영어로 살펴보면  ‘ch’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마지막에 ‘ch’라는 단어로 끝납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는 글자는 UR입니다. 이것은 곧 “You are ‘the church’” 즉“당신이 바로 교회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당일 뿐입니다. 건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나 자신이 교회라고 한다면 내가 어떻게 세상의 소망이 될 것인가를 우리는 다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애국적인가?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양심적인가? 나는 교회가 더 많아지기를 가슴으로부터 원하고 있는가?’우리가 이 질문에 자랑스럽게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지 아니면 대답하지 못할 만큼 예수 믿는 내 자신이 위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다시 한 번 반성해 봐야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대답하기를 머뭇거리며 주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 들어가는 신비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참된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늘의 비밀을 목격하고 가슴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신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도약이며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계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의 신비를 찾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가 늘 다니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영광이 가득한 것을 목격했던 것이 신앙입니다. 그 전에 그는 머리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의 거룩함을 목격하면서 그의 가슴과 인격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3)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서 무릎을 꿇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 6:5)

이사야는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부르짖는 거룩함을 경험하면서 기이한 하나님의 빛 속으로 들어갑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놀라움, 말씀의 생명의 사건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죄 용서의 기쁨, 사죄의 기쁨, 생명의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 6:8)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 인생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인생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 6:8)

이것은 곧 이런 대답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나를 쓰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하여 가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는 순간 세상이 변화되는 축복이 이 사회와 역사 속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소망입니다.

교회의 소망은 성도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교회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에게 참된 소망이 있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붙잡힘 받지 않으면 모이는 성도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는다는 고백이 있어도 예수님의 삶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거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세상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살면서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상의 척도보다 못할 때 비판을 받습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가치관을 초월하고 세상이 보여주는 삶의 습관보다 탁월할 때 비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비판은 후자의 비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받는 비판은 전자의 비판이 더 많습니다. 성경말씀에 예수님이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받는 모습이 이렇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다” (베드로전서 2:4)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다” (베드로전서 2:7)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베드로전서 2:8)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풍조와 가치관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배척받은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죽음인데 예수님은 죽음을 거스르는 생명의 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데 예수님은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에 세상이 미워했던 것입니다. 세상은 절망과 탄식 속에 있는데 예수님은 소망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에 부딪쳐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생명을 거스르는 죽음에 부딪쳐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고난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역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풍조,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소망이 있고 교회가 소망이 있다는 것은 현실에 도전하며 부딪치고, 그것보다 한 단계 높은 탁월한 가치관과 도덕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안도현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집인 「연어」라는 글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 거슬러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뭇잎들은 왜 강 아래로 내려가지요?” 은빛연어가 신기해하면서 초록강에게 물어봅니다. 그때 초록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거슬러 오를 줄 모르기 때문이야.” 은빛연어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건 또 뭐죠?”라고 물었더니 초록강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 같은 거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란다.”
아무런 능력과 생명이 없는 나뭇잎은 그냥 흘러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빛언어는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은 꿈과 희망이며 힘겹지만 생명의 약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처럼 거슬러 올라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자체가 진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무질서와 잘못된 거짓과 부딪쳐 보겠다는 용기를 갖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품과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잠깐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는 변화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고 직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다시 옛 습관, 옛 가치관, 옛 삶의 형태에 그대로 지배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러면서 어느새 세상의 가치관을 자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평가합니다. 입은 옷의 브랜드로, 지식과 학벌로, 가진 돈과 재물로, 권력으로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명품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세상과 부딪치고 충돌할 생각은 하지 않고 편안히 안주할 것을 찾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열등감에 대한 표시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 자체가 명품입니다. 명품은 찍어내는 것이니 우리는 명품 이상인 진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에 대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 믿음을 지닌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내가 좋은 옷을 입어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은 학벌을 가져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많은 돈을 가져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돈과 재물을 벌기 위해서 수고하고 땀 흘리지만 돈과 재물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권력을 추구하지만 권력이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다만 권력은 이웃과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명품을 사거나 입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좋은 차를 타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절대로 큰 집에서 살지 말고 작은 집에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를 규정하게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관행과 싸움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들과 부딪쳐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세상을 밝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9)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기이한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 하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 속에 참여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언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이 받은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를 위해서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덕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2:1)

첫째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쓰레기처럼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악덕, 기만, 외식,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모든 말을 버리고 깨끗함을 입으라는 의미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정한 젖을 사모하라” (베드로전서 2:2)

두 번째,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버리면 채우라는 것입니다. 버리기만 하면 안 됩니다. 채우지 않으면 더 나쁜 것들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령한 전으로 가슴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자존감과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왕 같은 제사장들이여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택함 받은 족속,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를 택하셨으니 이제는 세상의 최고의 진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당신은 거지같은 존재가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당신은 추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의 역사를 누리며 세상을 밝게 비추는 아름다운 덕을 선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소망을 세상 속에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듯이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잃어버린 탕자가 구원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며 찾아오십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찾으시고 사랑해 주셨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찾으시는 또 한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생각을 내어놓을 사람, 하나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해서 자기 삶을 드리고 싶어 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열망하는 사람, 거룩하고 귀한 빛을 세상에 증거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소망이고 교회가 소망이라는 사실을 세상 속에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고 말씀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귀한 빛을 이 세상을 향해서 보여주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여 세상의 소망이 되어 세상을 향해 나가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 일뿐입니다.
오직 빛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야 우리 속에서 빛이 발생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세상의 소망인 동산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의 소망이 되어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기이한 빛 속에 초정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고 우리의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가게 하옵소서. 세상에 가치관과 거스를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고 때로는 부딪쳐 도전하며 모험하게 하시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의 한 사람, 한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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