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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 요나에게 묻다

요나 1: 4 ~ 10

김지철 목사

2016.06.05

다시스로의 길이 요나에게는 좋은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여행을 위한 세 가지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여행이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 먹기 싫은 음식 등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해야 하기도 하고, 불친절하고 사나운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앞서면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마음가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호기심을 갖는 것입니다. 삶은 늘 알지 못하는 세계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호기심은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입니다. 즉, 새로운 세계를 관심을 가지고 마주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둘째, 존중입니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사람을 귀중히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와는 다른 것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누림입니다. 새로운 배움과 경험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자체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행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기본적인 팁이기도 합니다. 윤택한 삶을 살려면 인생을 기대하는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날 때마다 존중해야 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배우고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경우, 이 세 가지를 품은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없었습니다. 새로움을 존중하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림의 마음이 아니라 도망자의 신세로 배에 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당시 요나의 심리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 1:5)

폭풍우가 일어나서 배에 탔던 사람들이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있는 이 위기의 순간에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갔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곳, 누구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 들어올 수 없는 폐쇄된 공간으로 그는 도피했습니다. 그리고 ‘누워 잠이 들었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요나가 얼마나 곤고함을 겪었을까요?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도망가려고 하니 근심도 되고, ‘내가 이래도 될까’ 싶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배에 타고 나서야 쉬고 싶다는 생각에 배의 밑층에 내려가서 누운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추적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을까요? 왜 하나님과 담판을 짓지 않았을까요? 남이 무언가를 요청할 때 우리 속에 나타나는 몇 가지 심리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나는 누구에게도 강요받는 것이 싫다. 나는 누구의 요청이든 거절하겠다. 나는 자유인이므로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용도 방식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요나에게도 부분적으로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나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는 그 뜻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간 것입니다. 요나가 볼 때 하나님은 너무 쉽게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 아닌 다른 백성에게도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그 큰마음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징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며 요나를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징계라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설득하고 다시 한 번 부탁하기 위해서 쫓아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요나밖에 없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길가에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왜 뽑으실 수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지목하며 따라오셨습니다. “나를 좀 도와줄 수 없겠니?” 요나를 설득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이런 심정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할 한 사람을 정하셨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야, 네가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 그런데 모세는 그 하나님의 부름에 저항했습니다. 자신은 능력이 없기에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 모세에게 간청하셨습니다. “네가 할 수 있다. 나를 위해서 해 주면 안 되겠니? 네가 안 하면 누가 이 일을 맡아서 할 수 있겠느냐?”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과 모세의 긴 대화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추적은 끝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추적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며 추적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추적하시는 방식은 강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실 때, 강제적으로 억압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자유를 주면서 다가오십니다. “환경은 내가 마련하겠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결단해라. 네가 스스로 깨닫고 네가 어떤 일을 해야 될는지 네가 결정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청하실 때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반항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도 할 수 있지만, ‘아니요’도 할 수 있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실 때 어린아이가 아닌 성년이 된 인격체로 대하셨습니다. 성숙한 존재이니 스스로 판단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기억해라. 내가 너를 만들었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창조했고 내가 너를 지키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란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압하지 않으십니다. 분위기와 여건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결정은 우리가 스스로 내리도록 하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러셨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그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거절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스승이신 예수님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선언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순식간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저항했던 반항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열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한번 가 봐라. 그런데 마지막을 미리 깨달으면 좋겠다. 나 없이 가면 마지막은 날개 없는 생물처럼 추락하고 만다. 인생의 쓴맛을 보고 나서야 네가 올 것이냐?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의 마지막을 보고 미리 올 수는 없느냐? 네가 젊은 때에 나를 사랑할 수 없느냐? 네가 기력이 있을 때에 나에게 사랑을 보여 줄 수 없느냐? 시궁창에 빠지고 나서야 나를 찾지 말고, 네 젊은 사랑을 내게 보여 줬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실 때, 하나님은 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은 숨바꼭질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서 숨더라도 내가 너를 찾을 것이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추적은 끝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 1:4)

배가 망가지게 될 정도로 큰 바람이 불면서 폭풍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이 큰 바람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요나를 추적하시면서 “네가 도대체 어디가 있느냐” 물으시며 요나를 깨우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요나를 깨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까지 갔느냐? 네가 나 없이 가는 자리가 어디인지 아느냐? 폭풍우가 이는 자리다. 배가 깨져서 죽는 자리다. 인생의 마지막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있지 말로 어서 내게로 오거라.”
철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것들을 다 경험하고 나서야 예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남이 경험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만 진정한 생명과 사랑이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요나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요나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요나는 배 위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게 됩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네가 무슨 일을 했기에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냐? 네가 누구이기에 우리마저 이 위험에 빠져들게 하는 거냐?”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 (요나 1:6)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 (요나 1:8)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 1:10)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자신의 존재 목적을 망각했습니다. 요나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신앙이 좋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요나 1:9)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본래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명제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움직여야 된다는 내 생각, 내 주장, 내 야망이 앞서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사고의 전환, 180도의 인생 전환(paradigm shift)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믿기는 믿습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생각하기보다 내가 기뻐하는 뜻만을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는 내면의 투쟁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 자신의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순응해야 하는 현실이 있고, 반면에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순응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극복해야 하는 나의 고정관념이 우리 안에서 부딪힙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면 현실의 문제도 이겨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극복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거꾸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순종하는 법을 배우면 현실의 문제도 이겨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배웠던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것을 실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이루려면, 밖에서 전투하기 전에 먼저 내면의 세계에서 전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내 욕심을 먼저 채울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전투입니다. 이 내면의 전투에서 실패하면 바깥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혹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지 않았든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내면의 투쟁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분인 줄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믿음도 있었지만 내면의 전투를 벌이기가 겁났습니다. 그래서 도망쳤던 것입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 (요나 1:10)

셋째,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되고, 나의 슬픔이 다른 사람의 아픔이 됩니다. 이것이 더불어 사는 인생의 네트워킹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웃의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신앙인, 영적인 지도자인 경우, 이웃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욱 큽니다. 아버지입니까? 내가 어떤 아버지인가가 가정의 분위기를 결정합니다. 좋은 아버지면 그 가정에 웃음이 있지만, 나쁜 아버지면 가정이 힘들어집니다. 직장의 CEO입니까? 어떤 CEO인가에 따라서 회사가 복을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망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가 복을 받을 수도 있고 몰락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 전체가 물속에 가라앉을 위험에 처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물음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만의 삶이 아닙니다. 요나는 미처 몰랐던 그 사실을 새롭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았구나. 내가 내면의 투쟁에 소홀했구나.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따라 공동체가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구나.’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이때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나는 이 믿음 때문에 내 실존을 걸고 투쟁해 왔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추적으로 주님 앞에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고백 속에서 우리를 통한 축복의 역사가 생깁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이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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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 4 ~ 10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다시스로의 길이 요나에게는 좋은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여행을 위한 세 가지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여행이란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 먹기 싫은 음식 등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편한 잠자리를 감수해야 하기도 하고, 불친절하고 사나운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앞서면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 가지 마음가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호기심을 갖는 것입니다. 삶은 늘 알지 못하는 세계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호기심은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입니다. 즉, 새로운 세계를 관심을 가지고 마주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둘째, 존중입니다. 새로운 환경과 낯선 사람을 귀중히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와는 다른 것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누림입니다. 새로운 배움과 경험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자체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행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기본적인 팁이기도 합니다. 윤택한 삶을 살려면 인생을 기대하는 호기심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날 때마다 존중해야 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배우고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요나의 경우, 이 세 가지를 품은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없었습니다. 새로움을 존중하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림의 마음이 아니라 도망자의 신세로 배에 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당시 요나의 심리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 1:5)

폭풍우가 일어나서 배에 탔던 사람들이 배를 가볍게 하려고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고 있는 이 위기의 순간에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갔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곳, 누구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 들어올 수 없는 폐쇄된 공간으로 그는 도피했습니다. 그리고 ‘누워 잠이 들었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요나가 얼마나 곤고함을 겪었을까요?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 도망가려고 하니 근심도 되고, ‘내가 이래도 될까’ 싶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배에 타고 나서야 쉬고 싶다는 생각에 배의 밑층에 내려가서 누운 것입니다. 그리고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추적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요나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했을까요? 왜 하나님과 담판을 짓지 않았을까요? 남이 무언가를 요청할 때 우리 속에 나타나는 몇 가지 심리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나는 누구에게도 강요받는 것이 싫다. 나는 누구의 요청이든 거절하겠다. 나는 자유인이므로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용도 방식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적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요나에게도 부분적으로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나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는 그 뜻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간 것입니다. 요나가 볼 때 하나님은 너무 쉽게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하나님이 싫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 아닌 다른 백성에게도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그 큰마음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징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읽으며 요나를 추적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징계라고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설득하고 다시 한 번 부탁하기 위해서 쫓아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이 요나밖에 없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길가에 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왜 뽑으실 수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지목하며 따라오셨습니다. “나를 좀 도와줄 수 없겠니?” 요나를 설득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이런 심정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할 한 사람을 정하셨습니다.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야, 네가 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 그런데 모세는 그 하나님의 부름에 저항했습니다. 자신은 능력이 없기에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하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 모세에게 간청하셨습니다. “네가 할 수 있다. 나를 위해서 해 주면 안 되겠니? 네가 안 하면 누가 이 일을 맡아서 할 수 있겠느냐?”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과 모세의 긴 대화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추적은 끝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추적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며 추적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추적하시는 방식은 강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실 때, 강제적으로 억압적으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자유를 주면서 다가오십니다. “환경은 내가 마련하겠다. 그러나 네가 스스로 결단해라. 네가 스스로 깨닫고 네가 어떤 일을 해야 될는지 네가 결정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청하실 때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반항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도 할 수 있지만, ‘아니요’도 할 수 있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실 때 어린아이가 아닌 성년이 된 인격체로 대하셨습니다. 성숙한 존재이니 스스로 판단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기억해라. 내가 너를 만들었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창조했고 내가 너를 지키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란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압하지 않으십니다. 분위기와 여건을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결정은 우리가 스스로 내리도록 하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첫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러셨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도 그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거절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스승이신 예수님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선언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도 순식간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저항했던 반항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열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한번 가 봐라. 그런데 마지막을 미리 깨달으면 좋겠다. 나 없이 가면 마지막은 날개 없는 생물처럼 추락하고 만다. 인생의 쓴맛을 보고 나서야 네가 올 것이냐? 수많은 신앙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다른 사람의 마지막을 보고 미리 올 수는 없느냐? 네가 젊은 때에 나를 사랑할 수 없느냐? 네가 기력이 있을 때에 나에게 사랑을 보여 줄 수 없느냐? 시궁창에 빠지고 나서야 나를 찾지 말고, 네 젊은 사랑을 내게 보여 줬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실 때, 하나님은 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은 숨바꼭질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서 숨더라도 내가 너를 찾을 것이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의 추적은 끝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요나 1:4)

배가 망가지게 될 정도로 큰 바람이 불면서 폭풍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의 주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이 큰 바람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요나를 추적하시면서 “네가 도대체 어디가 있느냐” 물으시며 요나를 깨우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요나를 깨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디까지 갔느냐? 네가 나 없이 가는 자리가 어디인지 아느냐? 폭풍우가 이는 자리다. 배가 깨져서 죽는 자리다. 인생의 마지막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있지 말로 어서 내게로 오거라.”
철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것들을 다 경험하고 나서야 예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들은 남이 경험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만 진정한 생명과 사랑이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요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요나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요나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요나는 배 위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게 됩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네가 무슨 일을 했기에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냐? 네가 누구이기에 우리마저 이 위험에 빠져들게 하는 거냐?”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 (요나 1:6)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 (요나 1:8)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 1:10)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세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자신의 존재 목적을 망각했습니다. 요나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신앙이 좋았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 하고 (요나 1:9)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자,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본래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명제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움직여야 된다는 내 생각, 내 주장, 내 야망이 앞서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사고의 전환, 180도의 인생 전환(paradigm shift)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믿기는 믿습니다. 주일에 예배에 참석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생각하기보다 내가 기뻐하는 뜻만을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는 내면의 투쟁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 자신의 일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순응해야 하는 현실이 있고, 반면에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순응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극복해야 하는 나의 고정관념이 우리 안에서 부딪힙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면 현실의 문제도 이겨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극복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거꾸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순종하는 법을 배우면 현실의 문제도 이겨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배웠던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것을 실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이루려면, 밖에서 전투하기 전에 먼저 내면의 세계에서 전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내 욕심을 먼저 채울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전투입니다. 이 내면의 전투에서 실패하면 바깥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혹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지 않았든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내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내면의 투쟁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분인 줄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믿음도 있었지만 내면의 전투를 벌이기가 겁났습니다. 그래서 도망쳤던 것입니다.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 (요나 1:10)

셋째, 그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되고, 나의 슬픔이 다른 사람의 아픔이 됩니다. 이것이 더불어 사는 인생의 네트워킹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웃의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신앙인, 영적인 지도자인 경우, 이웃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욱 큽니다. 아버지입니까? 내가 어떤 아버지인가가 가정의 분위기를 결정합니다. 좋은 아버지면 그 가정에 웃음이 있지만, 나쁜 아버지면 가정이 힘들어집니다. 직장의 CEO입니까? 어떤 CEO인가에 따라서 회사가 복을 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망할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가 복을 받을 수도 있고 몰락할 수도 있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 전체가 물속에 가라앉을 위험에 처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물음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만의 삶이 아닙니다. 요나는 미처 몰랐던 그 사실을 새롭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았구나. 내가 내면의 투쟁에 소홀했구나.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따라 공동체가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구나.’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당신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이때 우리가 대답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나는 이 믿음 때문에 내 실존을 걸고 투쟁해 왔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추적으로 주님 앞에 새롭게 변화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한 고백 속에서 우리를 통한 축복의 역사가 생깁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주님이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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