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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두 가지 삶의 원칙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의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의 원리입니다. 즉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려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친히 일하시니 인간아, 너도 일하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창조의 원리는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는 ‘더 있게’ 되어 있습니다. 즉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없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이 창조의 세계 속에서는 죄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름이 불의한 인간의 삶의 모습이라고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이 창조의 원리를 인간의 욕심대로 내버려두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있는 자는 더 많아지고, 없는 자는 더 없어집니다. 소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갈등과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두 번째 원리, 특별히 믿는 자에게 주시는 원리를 통해서 넘어서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의 원리입니다.
은혜의 원리는 인간이 쌓아놓은 것들을 하나님이 뒤바꾸시는 역전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선포할 때 이 은혜의 원리를 높여 외칩니다. 높은 산들은 깎일 것이고, 깊은 구렁텅이는 메워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누가복음 3:4~5)
낮은 자가 세움을 입고, 높은 자는 낮은 자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강한 자는 연약한 자를 돌아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강한 자가 자기 교만으로 남게 되면 하나님이 그를 낮추시고, 낮고 천한 자는 하나님이 높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능력이 많고 힘이 넘치는 동시에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도 세상이 만들어놓은 삶의 극단적인 틀을 뒤집어 놓으시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아무 때나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하신다면 창조 세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러한 일들을 하실까요?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될 때입니다.
기드온의 시작은 작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억압받고 고통 받을 때 그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셨습니다. 인간의 좌절을 소망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원리를 열어주셨습니다. 소외된 자가 기득권자를 물리칠 수 있다는 소망도 열어주셨습니다.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주류에 들어올 수 있는 길도 열어주셨습니다. 비겁한 자, 소심한 자가 용기 있고 담대한 자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 가운데 기억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리고 어린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곧 교만으로 왜곡된 삶의 질서를 하나님이 은혜의 질서로 바꾸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주제를 가르쳐 줍니다. 기드온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수만 명의 미디안 군사를 물리친 인물로 기억되지 않습니까? 100대1로 싸워서 승리한 자입니다. 일당백의 용사들을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시작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미미하고, 미약합니다. 그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소심한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당대의 미디안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추수할 때가 되면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추수한 곡식들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본래 타작이란 넓은 들판이나 마당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이물질이 들어가면 안 되기에 좁은 곳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드온은 미디안 백성들이 빼앗을까봐 그들이 보지 못하는 은밀하고 밀폐된 곳에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당면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드온의 심리상태가 어떠했는가를 가르쳐 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사사기 6:11)
타작은 일상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지금 그것을 숨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삶이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싫어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겁이 나고 두려워서 일상적인 삶에 그대로 매달려 있으면 마치 기드온의 모습과 같아지고 맙니다. 일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피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일상을 핑계로 그저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정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자신의 삶을 체념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변할 수 있을까.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드온은 자기연민을 갖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었습니다. 패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사사기 6:12)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겁한 자라고 여기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몰래 타작하고 있는 나를 큰 용사라고 부르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 물음을 가진 삶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삶에 대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삶의 현장과 자기 민족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왜 억압받으며, 종처럼, 노예처럼 살아야 되는가.’ 그는 처절하게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실존을 묻는 사람은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묻는다는 것은 변화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질문을 가득 품고 있던 기드온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물음을 합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사사기 6:13)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했는데, 이 백성의 모습을 보세요. 억압받고 있잖아요. 모든 삶을 다 잃어버리고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던 그 기적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슨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그는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사사기 6:13)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포기하셨으면서 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게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항의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 거기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 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겠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왜 우리를 버리십니까?”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변화를 기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새롭게 시도해 보겠다는 내용이 물음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풀리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 갇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래부터 담대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대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용기가 있다?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누구나 비겁해지고 겁쟁이가 됩니다. 아프면 울고, 상처가 나면 얼굴을 찡그리고, 답답하면 슬퍼하고, 무서운 것이 다가오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나는 늘 두려워하는 사람’, ‘나는 매일 실패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패배주의 속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두려움이 자꾸만 커집니다. 더 이상 시도를 안 하게 됩니다. 노력을 하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젊은이들이 연애를 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직장을 선택했다가 그 직업이 마음에 안 들고 부딪쳐서 그곳에서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업을 이끄는 사람이 바닥을 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어려움은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나는 또 해도 실패할 거야. 나는 어떤 것을 시도해도 안 될 거야…’ 하면서 실패한 그 자리에 멈춰서는 패배주의적인 사고입니다.
‘왜 내가 실패했을까,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무엇을 몰랐기 때문일까, 이제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될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도하려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패배주의적 사고입니다. 그 안에 빠져 있으면 새롭게 시도한다 해도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불행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집요하게 현재의 생각을 붙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걷어차야 합니다. “불행아, 너는 과거에 속한 것이지 내 현재와 미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절을 선언해야 합니다.
기드온의 문제는 불행한 과거에 붙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백성이었는데 그 약속이 다 어디 간 걸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위해서 가나안까지 왔는데 이제 미디안 백성 때문에 자유를 다 잃어버리는구나. 이제 우리는 끝장났구나. 우리는 미디안 사람들의 노예가 되고 말 거야. 이제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러한 생각에 붙잡혀 있으니 그 다음 것은 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몸이 연약해진 것도 아닙니다. 몸의 모든 것들은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단지 생각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찾아오셨을 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기드온의 생각을 깨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소심한 자, 겁내는 자, 두려워하는 자를 향해 하나님이 하신 첫 말씀은 ‘큰 용사여’ 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무슨 의미입니까? 너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보라는 권유와 격려였습니다. 함께하는 자리로의 초청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절망 속에 있지만 희망의 질문을 다시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비겁한 자, 소심한 자가 담대한 자, 큰 용사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의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것을 준비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변화된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묶여있는 네 생각을 깨뜨려라. 절망하며 패배주의 속에 가두었던 생각을 깨뜨려라. 그리고 내가 네게 준 생각, ‘너는 큰 용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나는 안 돼!’하고 멈춰서서는 그저 절망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 안에 가능성이 있음을 깨우쳐 주시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시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말아라. 너부터 해봐라. 다른 사람이 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라. 네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네게 소명이 생겼을 때 너부터 해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가나안까지 오게 된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던 기드온에게 ‘네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사사기 6:14)
‘네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에게서부터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 갈 때 내가 너와 함께 갈 테니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핑계대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지 말고, 네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 때 너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구체적으로 움직일 전략까지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3만 2천명이 너무 많다고 하시며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을 다 보낼 것을 명하십니다. 들은 말씀대로 전하자 2만 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너무 많다. 물가로 데려가서 그들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아라. 만약 무릎을 꿇고 개처럼 입을 대고 물을 먹는 자들은 모두 제외시켜라. 손으로 물을 떠서 먹는 자들만 데리고 가거라.”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자 300명만 데리고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보내고 지혜로운 자들만 뽑게 하신 것입니다.
…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사사기 6:16)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 치듯이 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전략은 밤중에 기습공격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큰 나팔을 불고 그 앞에서 항아리를 깨뜨리면서 소리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횃불을 들고 “하나님을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했을 때 미디안 군사들은 혼비백산해서 서로 치고 박으며 전멸하게 되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용사로서 살아가십시오.
생각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 속에 두려움이 들어오면 체념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체념하기 시작하면 패배주의로 가게 됩니다. 패배주의 속에 붙잡히기 시작하면 꼼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비겁한 자라고 여겼던 나를 향해서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니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다짐했던 것들에 실패하고 ‘아 나는 안 돼. 역시 나는 못 해’ 하는 생각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생각을 훌훌 벗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생각해 봐라. 왜 부족했는지, 왜 멈춰섰는지, 왜 안됐는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를 생각할 때 네 마음에 안타까움이 있느냐? 그것이 바로 내가 네게 준 소명이다.”
2014년이 열한 달 남았습니다.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남은 열한 달을 살아가는 귀한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사기 6: 11 ~ 16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두 가지 삶의 원칙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의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의 원리입니다. 즉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땀 흘려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친히 일하시니 인간아, 너도 일하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창조의 원리는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는 ‘더 있게’ 되어 있습니다. 즉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없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이 창조의 세계 속에서는 죄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름이 불의한 인간의 삶의 모습이라고 지적하십니다.
하지만 이 창조의 원리를 인간의 욕심대로 내버려두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있는 자는 더 많아지고, 없는 자는 더 없어집니다. 소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 갈등과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두 번째 원리, 특별히 믿는 자에게 주시는 원리를 통해서 넘어서려고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의 원리입니다.
은혜의 원리는 인간이 쌓아놓은 것들을 하나님이 뒤바꾸시는 역전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선포할 때 이 은혜의 원리를 높여 외칩니다. 높은 산들은 깎일 것이고, 깊은 구렁텅이는 메워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누가복음 3:4~5)
낮은 자가 세움을 입고, 높은 자는 낮은 자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강한 자는 연약한 자를 돌아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강한 자가 자기 교만으로 남게 되면 하나님이 그를 낮추시고, 낮고 천한 자는 하나님이 높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능력이 많고 힘이 넘치는 동시에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는 것도 세상이 만들어놓은 삶의 극단적인 틀을 뒤집어 놓으시겠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아무 때나 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하신다면 창조 세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러한 일들을 하실까요?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될 때입니다.
기드온의 시작은 작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억압받고 고통 받을 때 그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셨습니다. 인간의 좌절을 소망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작은 것이 큰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원리를 열어주셨습니다. 소외된 자가 기득권자를 물리칠 수 있다는 소망도 열어주셨습니다.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이 주류에 들어올 수 있는 길도 열어주셨습니다. 비겁한 자, 소심한 자가 용기 있고 담대한 자로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 가운데 기억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리고 어린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곧 교만으로 왜곡된 삶의 질서를 하나님이 은혜의 질서로 바꾸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주제를 가르쳐 줍니다. 기드온 하면 뭐가 생각나십니까?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수만 명의 미디안 군사를 물리친 인물로 기억되지 않습니까? 100대1로 싸워서 승리한 자입니다. 일당백의 용사들을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시작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주 미미하고, 미약합니다. 그는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소심한 자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당대의 미디안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때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추수할 때가 되면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추수한 곡식들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본래 타작이란 넓은 들판이나 마당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다른 이물질이 들어가면 안 되기에 좁은 곳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드온은 미디안 백성들이 빼앗을까봐 그들이 보지 못하는 은밀하고 밀폐된 곳에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당면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드온의 심리상태가 어떠했는가를 가르쳐 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사사기 6:11)
타작은 일상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지금 그것을 숨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일상적인 삶이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싫어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 겁이 나고 두려워서 일상적인 삶에 그대로 매달려 있으면 마치 기드온의 모습과 같아지고 맙니다. 일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피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일상을 핑계로 그저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정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자신의 삶을 체념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변할 수 있을까.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드온은 자기연민을 갖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었습니다. 패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사사기 6:12)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겁한 자라고 여기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미디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몰래 타작하고 있는 나를 큰 용사라고 부르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 물음을 가진 삶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삶에 대한 물음이 있었습니다. 삶의 현장과 자기 민족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왜 억압받으며, 종처럼, 노예처럼 살아야 되는가.’ 그는 처절하게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질문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실존을 묻는 사람은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묻는다는 것은 변화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질문을 가득 품고 있던 기드온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물음을 합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사사기 6:13)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고 했는데, 이 백성의 모습을 보세요. 억압받고 있잖아요. 모든 삶을 다 잃어버리고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던 그 기적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슨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그는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사사기 6:13)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포기하셨으면서 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게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항의에는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 거기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께 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하겠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하나님, 왜 가만히 계십니까? 왜 우리를 버리십니까?” 하나님 앞에 묻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변화를 기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새롭게 시도해 보겠다는 내용이 물음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풀리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두려움 속에 갇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래부터 담대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대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용기가 있다?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누구나 비겁해지고 겁쟁이가 됩니다. 아프면 울고, 상처가 나면 얼굴을 찡그리고, 답답하면 슬퍼하고, 무서운 것이 다가오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나는 늘 두려워하는 사람’, ‘나는 매일 실패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패배주의 속에 가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두려움이 자꾸만 커집니다. 더 이상 시도를 안 하게 됩니다. 노력을 하지 않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젊은이들이 연애를 했다가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직장을 선택했다가 그 직업이 마음에 안 들고 부딪쳐서 그곳에서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업을 이끄는 사람이 바닥을 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나, 언제나 어려움은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나는 또 해도 실패할 거야. 나는 어떤 것을 시도해도 안 될 거야…’ 하면서 실패한 그 자리에 멈춰서는 패배주의적인 사고입니다.
‘왜 내가 실패했을까,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내가 무엇을 몰랐기 때문일까, 이제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될까.’ 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도하려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패배주의적 사고입니다. 그 안에 빠져 있으면 새롭게 시도한다 해도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불행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집요하게 현재의 생각을 붙잡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걷어차야 합니다. “불행아, 너는 과거에 속한 것이지 내 현재와 미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단절을 선언해야 합니다.
기드온의 문제는 불행한 과거에 붙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백성이었는데 그 약속이 다 어디 간 걸까.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위해서 가나안까지 왔는데 이제 미디안 백성 때문에 자유를 다 잃어버리는구나. 이제 우리는 끝장났구나. 우리는 미디안 사람들의 노예가 되고 말 거야. 이제 내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러한 생각에 붙잡혀 있으니 그 다음 것은 행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몸이 연약해진 것도 아닙니다. 몸의 모든 것들은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단지 생각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찾아오셨을 때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기드온의 생각을 깨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소심한 자, 겁내는 자, 두려워하는 자를 향해 하나님이 하신 첫 말씀은 ‘큰 용사여’ 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무슨 의미입니까? 너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꿔보라는 권유와 격려였습니다. 함께하는 자리로의 초청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절망 속에 있지만 희망의 질문을 다시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비겁한 자, 소심한 자가 담대한 자, 큰 용사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의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것을 준비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변화된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과거에 묶여있는 네 생각을 깨뜨려라. 절망하며 패배주의 속에 가두었던 생각을 깨뜨려라. 그리고 내가 네게 준 생각, ‘너는 큰 용사’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 이것을 기억해야 변화가 시작됩니다. ‘나는 안 돼!’하고 멈춰서서는 그저 절망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 안에 가능성이 있음을 깨우쳐 주시며,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시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말아라. 너부터 해봐라. 다른 사람이 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라. 네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 네게 소명이 생겼을 때 너부터 해라.”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가나안까지 오게 된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던 기드온에게 ‘네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사사기 6:14)
‘네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에게서부터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 갈 때 내가 너와 함께 갈 테니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핑계대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넘기지 말고, 네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 때 너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구체적으로 움직일 전략까지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3만 2천명이 너무 많다고 하시며 먼저 두려워하는 자들을 다 보낼 것을 명하십니다. 들은 말씀대로 전하자 2만 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만 명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너무 많다. 물가로 데려가서 그들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아라. 만약 무릎을 꿇고 개처럼 입을 대고 물을 먹는 자들은 모두 제외시켜라. 손으로 물을 떠서 먹는 자들만 데리고 가거라.”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자 300명만 데리고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보내고 지혜로운 자들만 뽑게 하신 것입니다.
…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사사기 6:16)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 치듯이 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전략은 밤중에 기습공격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큰 나팔을 불고 그 앞에서 항아리를 깨뜨리면서 소리를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횃불을 들고 “하나님을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했을 때 미디안 군사들은 혼비백산해서 서로 치고 박으며 전멸하게 되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용사로서 살아가십시오.
생각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 속에 두려움이 들어오면 체념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체념하기 시작하면 패배주의로 가게 됩니다. 패배주의 속에 붙잡히기 시작하면 꼼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비겁한 자라고 여겼던 나를 향해서 “큰 용사”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니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다짐했던 것들에 실패하고 ‘아 나는 안 돼. 역시 나는 못 해’ 하는 생각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그 생각을 훌훌 벗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생각해 봐라. 왜 부족했는지, 왜 멈춰섰는지, 왜 안됐는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를 생각할 때 네 마음에 안타까움이 있느냐? 그것이 바로 내가 네게 준 소명이다.”
2014년이 열한 달 남았습니다.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것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남은 열한 달을 살아가는 귀한 주님의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