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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 모세 이야기 7 –

출애굽기 4: 10 ~ 17

김지철 목사

2016.12.11

지도자는 자신감과 겸손을 겸비해야 합니다.

지난달 13일에 일곱 분의 장로님이 임직했고, 오늘 5부 예배에서는 아흔아홉 분의 권사님이 임직하게 됩니다. 교회 직분을 맡는다는 것은 신앙의 지도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공동체를 섬기는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맡게 되면 보통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나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어. 내가 배운 것, 경험한 것, 꿈꾸는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을 거야. 누구보다 열심히 직분을 감당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적격자일까? 다른 사람들처럼 잘 섬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내 신앙이 혹시 너무 모자란 것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입니다.
담임목사인 저 역시도 이 두 마음을 매 순간 느낍니다. 특히 강단 위에 올라설 때마다 그런 경험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잘 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자부심이 교차됩니다. 저는 일주일에 보통 열 번 이상 강단 위에 섭니다. 새벽 강단까지 합산하면 일 년에 보통 육백 번 정도 강단에 서는 것 같습니다. 소망교회에서 십사 년 동안 강단에 섰으니, 약 칠천 번에서 팔천 번 정도 강단 위에 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익숙하지 않고 낯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정말 말씀을 잘 증거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게 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심은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택하기 위해 이만큼 공을 들이신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님이 애를 쓰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겠습니까? 한 사람이 바로 서야 공동체가 선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세워지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엄청난 정성을 들이시는데, 마치 밥할 때 뜸을 들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시려고 하셨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모세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잘나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이 약속의 하나님이요,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때문에 애굽 왕의 압제 아래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비참함에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아픔을 대신할 지도자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지도자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나아가는 지도자를 원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 곧 하나님 성품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오,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며 긍휼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지도자를 세우길 원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강제로 지도자를 세우는 건 원치 않으십니다.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지도자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탐하는 교만한 지도자를 원치 않으시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지도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가 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로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이스라엘 앞에 당당하게 나섰으나 동족이 모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때 하나님도 아직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런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기 이익을 탐하면서 권력을 남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해 백성에게 분풀이하는 지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누구도 그런 지도자를 말릴 수가 없고, 제어하거나 통제하기도 쉽기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지도자가 세워지면 백성이 고통 받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 욕심과 교만으로 행한 일을 백성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킬 때도 있고, 자기 야망을 하나님의 섭리로 변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흔 살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무려 사십 년 동안 기다리시고 인내하신 후 모세가 여든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모세가 지도자가 되기에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기던 때입니다.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벌써 사십 년이 지나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을까 겁이 났습니다. 이렇게 늙은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나 걱정도 되고, 주책을 떤다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까 봐 불안했습니다. 사십 년 전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 실패한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번에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날의 악몽이 그를 더욱 뒷걸음치게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모세가 갖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지팡이 하나 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황금으로 번쩍이는 왕궁에 들어가 거대한 권력자 바로 앞에 설 수 있단 말입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천해 보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고 안전하게도 여겨지는 광야를 떠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곳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인데, 이곳을 버리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한복판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그에겐 모험이었습니다. 위기였습니다. 그동안 목자로 산 것밖에 없는데, 이제부턴 전사로, 투사로 나아가야 한다니, 그것도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니, 커다란 벽 앞에 선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그의 앞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도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할까? 어떻게 못 가겠다고 핑계를 댈까?’ 하고 꾀를 내려 했습니다. 그렇게 가상의 시나리오도 만들었습니다. 도망갈 준비를 하며 그가 꺼낸 이야기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4장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애굽기 4:1)

이 말씀은 가정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 what if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갔는데, 그 백성이 이렇게 저렇게 대꾸하면 어떻게 답변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지도자로 나설 수가 있겠냐고 말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가정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시며 모세를 설득하십니다.

여러분, 대화에서 가정법을 많이 사용하시는 분들은 사실 매우 섬세한 분들입니다. 준비성도 강한 사람들입니다. 대처도 잘하고 꼼꼼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 가정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인데도 스스로 과장해 생각합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습관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어쩌면 모세도 그렇게 스스로를 방어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려고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선입견을 갖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가정 상황을 미리 만들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그대로 수용하십니다. 모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처방하십니다. “모세야, 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져 보거라.” 모세가 말씀대로 땅바닥에 지팡이를 던집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으로 변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그 뱀을 붙잡아라. 뱀의 꼬리를 잡아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그 말씀대로 행하니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합니다.
그뿐만 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가슴에 넣어 보라고 반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손에 나병 증세가 나타났다가 다시 깨끗한 손으로 치유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아니, 그가 그 현장의 직접적인 경험자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정 상황에 매어 있는 모세를 구체적인 현실로 이끌어 오십니다. 눈으로 보게 하시고, 손으로 만지게 하셨습니다. 그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기적을 모세에게 직접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다시 핑계를 대며 하나님을 노하게 만드는 모세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인정할 법도 한데, 모세의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나 봅니다. 그는 다시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출애굽기 4:10 중)

여전히 핑계를 대는 모세입니다. “저는 제 생각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너무나 떨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입니다.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제게 상상불허입니다. 그간 사십 년 동안이나 사람들과 대화해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목동 생활을 하면서 단순한 말만 하고 지냈단 말입니다. 저, 정말 말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모세마저도 받으십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십니다. 성경에서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면해 대화를 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모세가 독보적입니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애굽기 4:12)

“말 못한다고 이야기하지 말거라. 언어 장애가 있다고 도망가지도 말라. 네가 달변가가 아닌 걸 내가 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떨린다는 것도 내가 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 입과 내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할 말을 줄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거라.”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를 설득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모세가 어눌하고 언어 장애가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조금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지내면서 애굽의 지혜와 전술 등을 익혔고, 때문에 하는 말과 일들이 능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어쩌면 지금 모세가 엄살을 피우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뒤로 숨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해야 할 말까지 직접 주실 것이라고 하는데도 모세는 거절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가를 보십시오. 13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애굽기 4:13)

“왜 하필 나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더러 가라고 하십니까? 내가 적격자라도 됩니까? 제발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렇게 몇 번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는 모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이제 하나님도 노하십니다. 수차례 참으신 하나님도 더 이상 때를 미루실 수가 없습니다. “모세야, 네가 잘나서 너를 보내려는 줄 아느냐? 네가 능력이 많아서 너를 보내려는 줄 아느냐? 네가 가진 것이 많아서 너를 보내려는 줄 아느냐? 보냄 받은 자가 누군지 아느냐? 나 여호와가 보내면 그 사람이 바로 보냄 받은 자다. 네가 비록 능력이 없는 것 같아도 내가 보내겠다고 하면 네가 보낼 만한 자가 되는 것이다. 네가 건강해서, 네가 잘나서, 네가 능력 많아서가 아니라 나 여호와가 보내기 때문에 보낼 만한 자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서 혹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기에 내가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감히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에 내가 감사함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의와 정의, 사랑과 긍휼의 역사도 만들어 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기독교는 나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심을 기억하는 공동체입니다.

유가의 지도자론에 보면, 왕도와 패도를 구분합니다. 왕도는 덕을 세우고 의를 우선하는 정치지도력입니다. 패도는 힘을 드러내고 자기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지도력입니다. 인품을 평가할 때도 군자인지 소인배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를 추구하면 군자이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탐내면 소인배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군자로 혹은 소인배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교 전통에서도 끊임없이 교육을 강조합니다.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덕과 의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배움의 공동체입니다. 기독교만큼 배우고 또 배우는 공동체가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유교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가르칩니다. 특별히 힘 있는 자, 권력을 가진 자에게 경고를 더합니다. “네가 힘을 가졌느냐? 권력을 가졌느냐? 그러나 너보다 더 큰 권력과 권세를 가진 분이 있다. 너보다 더 크신 분이 있다. 하늘의 권력자가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 네가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고 긍휼과 인자로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지 하늘에 계신 분이 바라보고 계신다.”라는 이 사실을 기독교 공동체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쥔 자라면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권력이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힘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어떻게 이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렇게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네가 너를 믿고 가면 실패하니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본래 훌륭했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연약함이 있었고 부끄러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존재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열등감이 해결되지 않고 지도자가 되면 쉽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저 도망가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교만이 해결되지 않고 지도자가 되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선가와 독재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을 휘두르는 지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섬기는 지도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지도자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순종하길 원하다가도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흔들리고 또 흔들립니다.
여러분,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순종하고 싶은 마음 50이 있고,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도 50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훈련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불순종에 있던 하나를 순종에 더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순종이 51이 됩니다. 불순종은 49가 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내 결단과 삶의 추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뀌어 갑니다. 점점 그렇게 하나씩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이 52, 불순종이 48이 됩니다. 그러면서 순종 편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럼 점점 더 빨리 순종의 방향으로 우리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내게 주어진 돈과 재물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삶의 어떤 여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 이러한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만 의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의 지팡이가 아니다. 그것이 내 지팡이가 되게 하여라.”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고, 주님이 다시 가라고 하시면 움직이는 것입니다. 강제적 혹은 억압적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길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사회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을 감당해 나갈 때, 내가 조금 가졌다고, 내가 조금 잘났다고 생각하고 임하면 어느 순간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네가 가진 것을 내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으로, 내가 너와 함께하는 것으로, 내가 네게 주는 지혜와 총명으로 네 역할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흔들릴 때, “주님, 내가 주님의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또, 주님이 말씀하시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처지가 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맡겨 주신 일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행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겠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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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 10 ~ 17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지도자는 자신감과 겸손을 겸비해야 합니다.

지난달 13일에 일곱 분의 장로님이 임직했고, 오늘 5부 예배에서는 아흔아홉 분의 권사님이 임직하게 됩니다. 교회 직분을 맡는다는 것은 신앙의 지도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공동체를 섬기는 일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맡게 되면 보통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나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어. 내가 배운 것, 경험한 것, 꿈꾸는 비전을 잘 실천할 수 있을 거야. 누구보다 열심히 직분을 감당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정말 적격자일까? 다른 사람들처럼 잘 섬길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내 신앙이 혹시 너무 모자란 것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입니다.
담임목사인 저 역시도 이 두 마음을 매 순간 느낍니다. 특히 강단 위에 올라설 때마다 그런 경험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잘 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자부심이 교차됩니다. 저는 일주일에 보통 열 번 이상 강단 위에 섭니다. 새벽 강단까지 합산하면 일 년에 보통 육백 번 정도 강단에 서는 것 같습니다. 소망교회에서 십사 년 동안 강단에 섰으니, 약 칠천 번에서 팔천 번 정도 강단 위에 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익숙하지 않고 낯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정말 말씀을 잘 증거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게 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심은 이스라엘 백성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택하기 위해 이만큼 공을 들이신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님이 애를 쓰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러셨겠습니까? 한 사람이 바로 서야 공동체가 선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세워지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엄청난 정성을 들이시는데, 마치 밥할 때 뜸을 들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시려고 하셨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모세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잘나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이 약속의 하나님이요,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때문에 애굽 왕의 압제 아래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비참함에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아픔을 대신할 지도자를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지도자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나아가는 지도자를 원하십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 곧 하나님 성품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오,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며 긍휼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지도자를 세우길 원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강제로 지도자를 세우는 건 원치 않으십니다.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지도자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탐하는 교만한 지도자를 원치 않으시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지도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가 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되기로 자발적으로 나섰습니다. 이스라엘 앞에 당당하게 나섰으나 동족이 모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때 하나님도 아직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런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기 이익을 탐하면서 권력을 남발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해 백성에게 분풀이하는 지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누구도 그런 지도자를 말릴 수가 없고, 제어하거나 통제하기도 쉽기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지도자가 세워지면 백성이 고통 받습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 욕심과 교만으로 행한 일을 백성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킬 때도 있고, 자기 야망을 하나님의 섭리로 변장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흔 살의 모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무려 사십 년 동안 기다리시고 인내하신 후 모세가 여든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모세가 지도자가 되기에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기던 때입니다.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벌써 사십 년이 지나 자기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을까 겁이 났습니다. 이렇게 늙은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나 걱정도 되고, 주책을 떤다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까 봐 불안했습니다. 사십 년 전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 실패한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번에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날의 악몽이 그를 더욱 뒷걸음치게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모세가 갖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지팡이 하나 쥐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황금으로 번쩍이는 왕궁에 들어가 거대한 권력자 바로 앞에 설 수 있단 말입니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천해 보입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고 안전하게도 여겨지는 광야를 떠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곳이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인데, 이곳을 버리고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한복판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그에겐 모험이었습니다. 위기였습니다. 그동안 목자로 산 것밖에 없는데, 이제부턴 전사로, 투사로 나아가야 한다니, 그것도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니, 커다란 벽 앞에 선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그의 앞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도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할까? 어떻게 못 가겠다고 핑계를 댈까?’ 하고 꾀를 내려 했습니다. 그렇게 가상의 시나리오도 만들었습니다. 도망갈 준비를 하며 그가 꺼낸 이야기가 다음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4장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애굽기 4:1)

이 말씀은 가정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 what if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갔는데, 그 백성이 이렇게 저렇게 대꾸하면 어떻게 답변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지도자로 나설 수가 있겠냐고 말입니다. 모세는 그렇게 가정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 주시며 모세를 설득하십니다.

여러분, 대화에서 가정법을 많이 사용하시는 분들은 사실 매우 섬세한 분들입니다. 준비성도 강한 사람들입니다. 대처도 잘하고 꼼꼼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에 가정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인데도 스스로 과장해 생각합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습관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어쩌면 모세도 그렇게 스스로를 방어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려고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선입견을 갖고 지레 겁을 먹었습니다. 가정 상황을 미리 만들어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하나님과 대화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그대로 수용하십니다. 모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처방하십니다. “모세야, 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져 보거라.” 모세가 말씀대로 땅바닥에 지팡이를 던집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으로 변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그 뱀을 붙잡아라. 뱀의 꼬리를 잡아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모세가 그 말씀대로 행하니 뱀이 다시 지팡이로 변합니다.
그뿐만 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가슴에 넣어 보라고 반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손에 나병 증세가 나타났다가 다시 깨끗한 손으로 치유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아니, 그가 그 현장의 직접적인 경험자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정 상황에 매어 있는 모세를 구체적인 현실로 이끌어 오십니다. 눈으로 보게 하시고, 손으로 만지게 하셨습니다. 그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게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기적을 모세에게 직접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또다시 핑계를 대며 하나님을 노하게 만드는 모세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인정할 법도 한데, 모세의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나 봅니다. 그는 다시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출애굽기 4:10 중)

여전히 핑계를 대는 모세입니다. “저는 제 생각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너무나 떨려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입니다.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제게 상상불허입니다. 그간 사십 년 동안이나 사람들과 대화해 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목동 생활을 하면서 단순한 말만 하고 지냈단 말입니다. 저, 정말 말할 줄 모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핑계를 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모세마저도 받으십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십니다. 성경에서 모세처럼 하나님과 대면해 대화를 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모세가 독보적입니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모세와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출애굽기 4:12)

“말 못한다고 이야기하지 말거라. 언어 장애가 있다고 도망가지도 말라. 네가 달변가가 아닌 걸 내가 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떨린다는 것도 내가 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 입과 내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할 말을 줄 것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거라.”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를 설득하십니다.
그런데 정말 모세가 어눌하고 언어 장애가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22절을 보면 조금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지내면서 애굽의 지혜와 전술 등을 익혔고, 때문에 하는 말과 일들이 능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어쩌면 지금 모세가 엄살을 피우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두렵고 무서워서 뒤로 숨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해야 할 말까지 직접 주실 것이라고 하는데도 모세는 거절합니다.
여러분,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가를 보십시오. 13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애굽기 4:13)

“왜 하필 나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더러 가라고 하십니까? 내가 적격자라도 됩니까? 제발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렇게 몇 번이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는 모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이제 하나님도 노하십니다. 수차례 참으신 하나님도 더 이상 때를 미루실 수가 없습니다. “모세야, 네가 잘나서 너를 보내려는 줄 아느냐? 네가 능력이 많아서 너를 보내려는 줄 아느냐? 네가 가진 것이 많아서 너를 보내려는 줄 아느냐? 보냄 받은 자가 누군지 아느냐? 나 여호와가 보내면 그 사람이 바로 보냄 받은 자다. 네가 비록 능력이 없는 것 같아도 내가 보내겠다고 하면 네가 보낼 만한 자가 되는 것이다. 네가 건강해서, 네가 잘나서, 네가 능력 많아서가 아니라 나 여호와가 보내기 때문에 보낼 만한 자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잘나서 혹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기에 내가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감히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기에 내가 감사함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의와 정의, 사랑과 긍휼의 역사도 만들어 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기독교는 나보다 더 크신 분이 계심을 기억하는 공동체입니다.

유가의 지도자론에 보면, 왕도와 패도를 구분합니다. 왕도는 덕을 세우고 의를 우선하는 정치지도력입니다. 패도는 힘을 드러내고 자기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지도력입니다. 인품을 평가할 때도 군자인지 소인배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를 추구하면 군자이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탐내면 소인배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군자로 혹은 소인배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교 전통에서도 끊임없이 교육을 강조합니다.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덕과 의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배움의 공동체입니다. 기독교만큼 배우고 또 배우는 공동체가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유교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가르칩니다. 특별히 힘 있는 자, 권력을 가진 자에게 경고를 더합니다. “네가 힘을 가졌느냐? 권력을 가졌느냐? 그러나 너보다 더 큰 권력과 권세를 가진 분이 있다. 너보다 더 크신 분이 있다. 하늘의 권력자가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 네가 공의와 정의로 다스리고 긍휼과 인자로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지 하늘에 계신 분이 바라보고 계신다.”라는 이 사실을 기독교 공동체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력을 쥔 자라면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권력이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힘이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어떻게 이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겸손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렇게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네가 너를 믿고 가면 실패하니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본래 훌륭했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연약함이 있었고 부끄러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존재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열등감이 해결되지 않고 지도자가 되면 쉽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저 도망가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 교만이 해결되지 않고 지도자가 되면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독선가와 독재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을 휘두르는 지배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섬기는 지도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지도자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순종하길 원하다가도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흔들리고 또 흔들립니다.
여러분,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순종하고 싶은 마음 50이 있고,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도 50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훈련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불순종에 있던 하나를 순종에 더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순종이 51이 됩니다. 불순종은 49가 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내 결단과 삶의 추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뀌어 갑니다. 점점 그렇게 하나씩 더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이 52, 불순종이 48이 됩니다. 그러면서 순종 편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럼 점점 더 빨리 순종의 방향으로 우리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모세의 지팡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내게 주어진 돈과 재물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고, 삶의 어떤 여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 이러한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만 의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의 지팡이가 아니다. 그것이 내 지팡이가 되게 하여라.”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멈추라고 하시면 멈추고, 주님이 다시 가라고 하시면 움직이는 것입니다. 강제적 혹은 억압적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길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사회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들을 감당해 나갈 때, 내가 조금 가졌다고, 내가 조금 잘났다고 생각하고 임하면 어느 순간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네가 가진 것을 내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으로, 내가 너와 함께하는 것으로, 내가 네게 주는 지혜와 총명으로 네 역할을 감당하라고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순종과 불순종 사이에서 흔들릴 때, “주님, 내가 주님의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또, 주님이 말씀하시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결단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삶의 처지가 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맡겨 주신 일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행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겠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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