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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하나님 사랑의 시작

창세기 12: 1 ~ 4

김지철 목사

2018.04.29

한반도의 평화로운 내일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지난 금요일,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모든 국민이 지켜보았습니다.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쉽게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과 두세 달 전만 해도 북측의 지도자 김정은을 독재자요 악의 축으로 여겼기에, 그가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는지 모두가 놀라워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서 한편에서는 “저것은 평화 위장술이야.”라고 외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동시에 오랫동안 적대했던 사이가 따뜻하게 대화하며 포용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우리의 모습이 다르듯이 감정과 생각도 모두 다를 것입니다. 이번 회담이 한반도에 새로운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동시에 남과 북의 목표도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는 우리가 함께 기도할 제목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전쟁의 기운이 사라지며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전 국민과 온 세계의 소망입니다. 두 번째는 이 땅의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통일보다 중요한 건 사람의 통일입니다. 사람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져서 왕래할 수 있는 자리가 먼저 열려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저 북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육체적 가난과 영적인 가난으로 많은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한반도의 미래 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갈급한 영혼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 것, 그리하여 저 한라에서 백두까지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하나님 앞에 마음껏 예배드리며 찬양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 내용이자 또 하나의 사명입니다.
앞으로 5월 말 혹은 6월 초에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입니다. 그때 세세한 항목들이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이 모든 과정을 아뢰며,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간구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로 알려진 신앙의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평가됩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11:8)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종은 믿음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순종이란 아예 의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종의 순간 의심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 모든 것을 걸려고 할 때마다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 의심 가운데서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의심보다 믿음이 더 크기에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도 때로는 주저합니다. 머뭇거리며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국 의심 대신 믿음을 선택할 때, 우리 삶에 순종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결단의 위기와 삶의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입니다. 그곳은 당시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미신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브라함 집안은 본래 유목민이 아니라 호화스러운 도시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까지도 만든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을 통해서도 그런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 24:2 중)

다른 신들, 여러 우상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우상과 거짓 세력에 둘러싸인 자리에서 탈출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적 결단은 늘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우상들입니다. 환경적 우상, 사람의 우상, 혈연의 우상, 가족의 우상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상을 버려라. 왜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 하느냐? 그 어떤 우상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우상과 하나님을 경쟁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치시키는 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요한일서 5장 2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 하라 (요한일서 5:21)

우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금과 은일 수 있습니다. 직위와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경쟁 상대에 올려두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두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많느냐? 나를 대신해서 네가 그것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그것이 나와 경쟁이 되겠느냐?”

아브라함은 ‘익숙한 것’에서 떠났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오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떠나야 할 우상은 세 가지입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우상이라고 할 때 못된 것, 악한 것, 형편없는 것이란 생각을 먼저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상을 떠나는 게 매우 쉬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상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좋아 보이는 것, 괜찮은 것, 익숙한 것, 내 삶에 스며든 소소한 즐거움, 쾌락들, 바로 그런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약 마귀가 뿔난 짐승의 형상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곧바로 알아채고 거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매우 멋지고 선하고 유용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마귀인지도 모른 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너의 고향을 떠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두 번 고향을 떠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 것이고, 두 번째는 하란에서 떠난 것입니다. 갈대아 우리는 당대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누렸던 모든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떠납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결단일 것입니다. 누릴 게 있고, 붙잡을 게 있고, 소유할 것들이 많은 곳에서 떠난다는 것은, 게다가 앞날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삶의 터전을 떠났습니다. 순종이 자신의 삶의 환경의 안락보다, 친구들과 나눈 친숙함보다, 가족 간의 끈끈한 혈육의 정보다 더 귀중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크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삶의 근거를 바꿔보라는 뜻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에서 탈출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연연하며 살았던 것을 바꾸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습관을 바꾸고, 내 삶의 자리를 과감히 떠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 내가 의지했던 곳이자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단번에 끊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버리고 떠날 수 있습니까? 또한 반대로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것이 나를 혹은 내 삶을 지배했다는 뜻입니다. 나의 환경이 나를 예속하고 나를 가두었다는 뜻입니다. 이 속에 있으면 편안함을 느끼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들을 떠나라! 대신 나의 약속을 바라보아라. 내가 주는 은혜에 만족해 보아라. 내가 주는 능력을 새롭게 경험하길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를 붙들고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떠나라!”
두 번째로 떠나라 한 것은 ‘친척’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내 배경이 되고, 자랑이 되고, 울타리가 되었던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익숙하게 여겼던 것들에게, 그러한 존재 가운데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지명이 ‘하란’입니다. 그런데 이 하란도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하란은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중간 지점으로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이 발달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왼쪽에 지중해가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페르시아 만이 있고, 아래 홍해도 보입니다. 갈대아 우리는 페르시아 만 근방에 위치합니다. 페르시아 만 쪽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하란이 보입니다. 이 거리가 거의 1,000km에 달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약 1,000km니까 부산에서 신의주보다 먼 거리입니다. 또 하란에서 팔레스타인 가나안까지 가게 되는데, 그 거리도 약 1,000km입니다. 그 거리를 뚜벅뚜벅 도보로 이동했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약속만 의지하며 순종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행전 7장 4절에는 눈여겨볼 만한 구절이 나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 7:4)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왔는데, 즉 가나안까지 도달하기 전인데 그 여정 중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데라’라는 이름에는 ‘미루다’, ‘지체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에 도달하기 전, 하란에서 잠시 쉴 것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때 아버지의 신앙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결단해서 인생을 옮길 만한 믿음까지 성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얘야,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왔고 이만큼 왔으면 됐지. 이곳에 더 있어도 돼. 이 정도면 된 거야.”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는 거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에게 우상은 아버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떠나야 하는 건, ‘아버지의 집’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우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함께했던 조카 롯도 그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롯 때문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못 이행해 얻은 아스마엘도 아브라함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이 아들을 어떻게 하지? 하나님 주신 약속의 아들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리고 마지막, 그렇게 사랑한 약속의 아들 이삭마저 하나님을 따라가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그의 마음은 문드러졌습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무섭고 잔혹한 말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갔을 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붙잡고 있는 것, 내가 놓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이것만큼은 내어드릴 수 없다고 여기는 것, 곧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떠나보내니 비로소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선권을 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이끄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투쟁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때문에 그의 순종이 위대합니다. 그는 한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떠났습니다. 이렇듯 삶이란, 믿음이란 매일매일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에서 떠날 수 있는 믿음의 상태, 바로 그때 영혼의 기쁨도 찾아듭니다. 그렇기에 자발적인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4절을 잠깐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가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 7:2~4 중)

‘옮겼다’는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주어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어입니까, 아브라함이 주어입니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까요? 우리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내가 한 것입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 손과 발을 움직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됩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됩니다. 창세기 12장 4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4)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나 자신에게 신뢰의 기초를 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갔고, 당시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75세란 아브라함에게는 인생의 후반전입니다. 75세 이전의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미 있는 믿음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의 삶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는 고향이라는 익숙한 땅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친구와 동료,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떠나 오직 나의 힘과 반석, 구원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 가족을 떠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2차, 3차가 됩니다.
이런 친밀한 존재와 관계로부터 떠나가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분, 또 사랑해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경쟁관계에 들어가려 한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우리가 최고의 우선권을 드려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고백했을 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복 받기 위해 순종하지 말고, 순종하면 복을 넘치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순서가 뒤바뀐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상을 숭배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단순히 복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복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받기 위해 순종하지 말고, 사랑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복덩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복으로 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동안 내 욕망을 충족하며 살아왔습니다. 외면적인 성공과 명예를 위해 달려왔던 우리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인생의 후반전이 달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업적을 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 나이가 몇 세입니까? 아브라함이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을 때가 75세였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인생이 남아 있습니다. 나를 높이는 관심을 내려놓고,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내가 너를 세상의 복이 되게 하겠다.”라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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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 1 ~ 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한반도의 평화로운 내일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지난 금요일,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모습을 모든 국민이 지켜보았습니다. 여러 생각과 감정이 교차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쉽게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불과 두세 달 전만 해도 북측의 지도자 김정은을 독재자요 악의 축으로 여겼기에, 그가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는지 모두가 놀라워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서 한편에서는 “저것은 평화 위장술이야.”라고 외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동시에 오랫동안 적대했던 사이가 따뜻하게 대화하며 포용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은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우리의 모습이 다르듯이 감정과 생각도 모두 다를 것입니다. 이번 회담이 한반도에 새로운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동시에 남과 북의 목표도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적이기보다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는 우리가 함께 기도할 제목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전쟁의 기운이 사라지며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전 국민과 온 세계의 소망입니다. 두 번째는 이 땅의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통일보다 중요한 건 사람의 통일입니다. 사람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져서 왕래할 수 있는 자리가 먼저 열려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저 북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육체적 가난과 영적인 가난으로 많은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한반도의 미래 평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갈급한 영혼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 것, 그리하여 저 한라에서 백두까지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하나님 앞에 마음껏 예배드리며 찬양드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 내용이자 또 하나의 사명입니다.
앞으로 5월 말 혹은 6월 초에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입니다. 그때 세세한 항목들이 결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이 모든 과정을 아뢰며, 한반도의 평화로운 미래를 간구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로 알려진 신앙의 인물입니다. 그는 대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아브라함이 다음과 같이 평가됩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11:8)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종은 믿음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순종이란 아예 의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순종의 순간 의심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 모든 것을 걸려고 할 때마다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이 의심 가운데서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의심보다 믿음이 더 크기에 결단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도 때로는 주저합니다. 머뭇거리며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결국 의심 대신 믿음을 선택할 때, 우리 삶에 순종이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결단의 위기와 삶의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입니다. 그곳은 당시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미신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도시였습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브라함 집안은 본래 유목민이 아니라 호화스러운 도시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까지도 만든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을 통해서도 그런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여호수아 24:2 중)

다른 신들, 여러 우상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우상과 거짓 세력에 둘러싸인 자리에서 탈출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적 결단은 늘 무엇과 싸워야 합니까? 우상들입니다. 환경적 우상, 사람의 우상, 혈연의 우상, 가족의 우상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상을 버려라. 왜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 하느냐? 그 어떤 우상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우상과 하나님을 경쟁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치시키는 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요한일서 5장 2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 하라 (요한일서 5:21)

우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금과 은일 수 있습니다. 직위와 명예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 아내와 남편,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경쟁 상대에 올려두는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두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많느냐? 나를 대신해서 네가 그것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그것이 나와 경쟁이 되겠느냐?”

아브라함은 ‘익숙한 것’에서 떠났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가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1)

오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떠나야 할 우상은 세 가지입니다. 이에 앞서, 우리는 우상이라고 할 때 못된 것, 악한 것, 형편없는 것이란 생각을 먼저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상을 떠나는 게 매우 쉬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상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좋아 보이는 것, 괜찮은 것, 익숙한 것, 내 삶에 스며든 소소한 즐거움, 쾌락들, 바로 그런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약 마귀가 뿔난 짐승의 형상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곧바로 알아채고 거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매우 멋지고 선하고 유용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그것이 마귀인지도 모른 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너의 고향을 떠나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두 번 고향을 떠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 것이고, 두 번째는 하란에서 떠난 것입니다. 갈대아 우리는 당대 번영한 도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누렸던 모든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떠납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결단일 것입니다. 누릴 게 있고, 붙잡을 게 있고, 소유할 것들이 많은 곳에서 떠난다는 것은, 게다가 앞날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삶의 터전을 떠났습니다. 순종이 자신의 삶의 환경의 안락보다, 친구들과 나눈 친숙함보다, 가족 간의 끈끈한 혈육의 정보다 더 귀중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크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삶의 근거를 바꿔보라는 뜻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에서 탈출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연연하며 살았던 것을 바꾸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습관을 바꾸고, 내 삶의 자리를 과감히 떠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 내가 의지했던 곳이자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단번에 끊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버리고 떠날 수 있습니까? 또한 반대로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것이 나를 혹은 내 삶을 지배했다는 뜻입니다. 나의 환경이 나를 예속하고 나를 가두었다는 뜻입니다. 이 속에 있으면 편안함을 느끼지만, 사실은 그 안에서 시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들을 떠나라! 대신 나의 약속을 바라보아라. 내가 주는 은혜에 만족해 보아라. 내가 주는 능력을 새롭게 경험하길 원하느냐? 그렇다면 너를 붙들고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떠나라!”
두 번째로 떠나라 한 것은 ‘친척’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내 배경이 되고, 자랑이 되고, 울타리가 되었던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익숙하게 여겼던 것들에게, 그러한 존재 가운데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지명이 ‘하란’입니다. 그런데 이 하란도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하란은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중간 지점으로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이 발달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왼쪽에 지중해가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페르시아 만이 있고, 아래 홍해도 보입니다. 갈대아 우리는 페르시아 만 근방에 위치합니다. 페르시아 만 쪽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하란이 보입니다. 이 거리가 거의 1,000km에 달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약 1,000km니까 부산에서 신의주보다 먼 거리입니다. 또 하란에서 팔레스타인 가나안까지 가게 되는데, 그 거리도 약 1,000km입니다. 그 거리를 뚜벅뚜벅 도보로 이동했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약속만 의지하며 순종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행전 7장 4절에는 눈여겨볼 만한 구절이 나옵니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 7:4)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왔는데, 즉 가나안까지 도달하기 전인데 그 여정 중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데라’라는 이름에는 ‘미루다’, ‘지체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 데라가 가나안에 도달하기 전, 하란에서 잠시 쉴 것을 요청했을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때 아버지의 신앙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결단해서 인생을 옮길 만한 믿음까지 성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얘야,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왔고 이만큼 왔으면 됐지. 이곳에 더 있어도 돼. 이 정도면 된 거야.”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는 거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에게 우상은 아버지였는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떠나야 하는 건, ‘아버지의 집’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우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함께했던 조카 롯도 그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롯 때문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못 이행해 얻은 아스마엘도 아브라함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이 아들을 어떻게 하지? 하나님 주신 약속의 아들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리고 마지막, 그렇게 사랑한 약속의 아들 이삭마저 하나님을 따라가는 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그의 마음은 문드러졌습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무섭고 잔혹한 말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갔을 때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붙잡고 있는 것, 내가 놓지 못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이것만큼은 내어드릴 수 없다고 여기는 것, 곧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떠나보내니 비로소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우선권을 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이끄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투쟁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때문에 그의 순종이 위대합니다. 그는 한 번이 아니라 반복해서 떠났습니다. 이렇듯 삶이란, 믿음이란 매일매일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에서 떠날 수 있는 믿음의 상태, 바로 그때 영혼의 기쁨도 찾아듭니다. 그렇기에 자발적인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2~4절을 잠깐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가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 7:2~4 중)

‘옮겼다’는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주어로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어입니까, 아브라함이 주어입니까?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까요? 우리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내가 한 것입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 손과 발을 움직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됩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됩니다. 창세기 12장 4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4)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나 자신에게 신뢰의 기초를 둔 게 아니라 하나님만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갔고, 당시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75세란 아브라함에게는 인생의 후반전입니다. 75세 이전의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미 있는 믿음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의 삶이 소중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그는 고향이라는 익숙한 땅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친구와 동료,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을 떠나 오직 나의 힘과 반석, 구원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 가족을 떠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2차, 3차가 됩니다.
이런 친밀한 존재와 관계로부터 떠나가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분, 또 사랑해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하나님을 대체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경쟁관계에 들어가려 한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우리가 최고의 우선권을 드려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고백했을 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2:2)

복 받기 위해 순종하지 말고, 순종하면 복을 넘치게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순서가 뒤바뀐 삶을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상을 숭배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고,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이유는 단순히 복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면, 복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받기 위해 순종하지 말고, 사랑으로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복덩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복으로 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동안 내 욕망을 충족하며 살아왔습니다. 외면적인 성공과 명예를 위해 달려왔던 우리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인생의 후반전이 달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업적을 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 나이가 몇 세입니까? 아브라함이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을 때가 75세였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인생이 남아 있습니다. 나를 높이는 관심을 내려놓고, 나를 통해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도 우리에게 “내가 너를 세상의 복이 되게 하겠다.”라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8년 4월 2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순종: 하나님 사랑의 시작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8장, 46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12:1~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2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지난 금요일남북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사건은 하나인데이것을 바라보는 평가는 좀 갈리는 것 같습니다위장평화 전술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신중한 평가를 내리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이제는 서로 화해와 평화의 날을 맞이해야 한다는 젊은 세대들의 긍정적 평가가 그렇습니다각각의 다른 평가이지만성도로서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땅의 통일을 넘어 복음 안에서 하나 되어 제사장 나라로 세워지는 것을 기대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의 주인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그것을 알기에 앞서먼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의심 없음이 믿음이 아닙니다의심보다 믿음이 더 커서의심하면서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의심으로 인해 결단의 위기가 있었지만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24:2). 그리고 그 영향 아래 아브라함이 살았습니다우리에게 우상이란 무엇일까요우리의 신앙적 결단을 막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그리고 이 우상은 못된 것악한 것이 아니라좋은 것익숙한 것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오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이러한 우상으로부터 두 번의 떠남을 통해 의식을 이기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첫째, “너의 고향을 떠나라” 갈데아 우르에서 모든 생활의 안락한 기반을 버리고 떠납니다그동안 내가 의지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새로운 경험을 시작합니다.  둘, “친척과 친구들을 떠나라”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오랫동안 지체하게 됩니다바로 아버지 데라가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고아들인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도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7:4). 그렇기에 데라가 죽고 나서야 비로서 두 번째 떠남을 갖습니다

   내 신앙이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아버지에 붙잡힌 신앙이었습니다계속해서조카 롯이 걸림돌이 되고첫 아들 이스마엘이마지막에는 그렇게 사랑하던 약속의 아들 이삭까지도 걸림돌이 됩니다. “네가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은 위대한 것입니다아브라함이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한 나이를 사도행전은 75세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7:4). 그 전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말씀에 순종하면서 드디어 의미 있는 믿음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최고의 우선권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인생의 전반전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면이제 인생의 후반전은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진정 복 받는 놀라운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나에게 우상은 무엇입니까누구입니까어디입니까?(자녀사업명예직분 등)

   2. 우상에 사로잡혀 고난 당하고힘들었던 경험을 나누고 회개합시다.

3.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결국 신뢰로서 온전히 승리하였던 은혜의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감사를 올립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의심을 넘어 믿음으로 이어지게 하소서아브라함처럼 우리 안의 우상을 버리고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먼저 주님 사랑하고먼저 주님 자랑하는 기쁨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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