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요나 1: 17

김지철 목사

2016.06.19

요나는 하나님의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돌이키기 위해서 요나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네가 내 메신저가 되어라. 니느웨에 가서 내 말을 증거하고 저들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해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했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싫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자비롭고 너무 착하십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폭풍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방 뱃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요나에게도 기도하며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선장이 요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요나 1:6)

선장은 요나에게 기도를 요청했지만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풍 속에서 배가 깨지게 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세 번째, 요나는 이 재앙이 자신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배를 돌리는 등의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뱃사람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도, 용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대로 두면 요나는 끝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 마음대로 도망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계속 요나를 추적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요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시면서 결국 요나가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나가 당한 모든 일들의 주체와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며 요나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요나를 움직이려고 하셨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 (요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 (요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 (요나 4:6)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 (요나 4: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 (요나 4:8)

요나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요나야, 내가 너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사랑한단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계속 도망가기만 했습니다.

결정은 요나가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btn_switch

요나 1: 17

17

요나는 하나님의 기회를 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돌이키기 위해서 요나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 번째, “네가 내 메신저가 되어라. 니느웨에 가서 내 말을 증거하고 저들도 회개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해라”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거절했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이방인들까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싫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자비롭고 너무 착하십니다.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폭풍을 만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방 뱃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요나에게도 기도하며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1장 6절을 보면, 선장이 요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요나 1:6)

선장은 요나에게 기도를 요청했지만 요나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풍 속에서 배가 깨지게 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세 번째, 요나는 이 재앙이 자신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배를 돌리는 등의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뱃사람들에게 맡겨 버렸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도, 용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디어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대로 두면 요나는 끝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나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자기 마음대로 도망가고 있다고 여겼지만, 하나님은 계속 요나를 추적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요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시면서 결국 요나가 다시 돌이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요나가 당한 모든 일들의 주체와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며 요나서를 읽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요나를 움직이려고 하셨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 (요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 (요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 (요나 4:6)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 (요나 4: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 (요나 4:8)

요나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고 계신지를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요나야, 내가 너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을 사랑한단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계속 도망가기만 했습니다.

결정은 요나가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 ‘물고기 뱃속’이란 그의 인생의 무덤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가진 자리였습니다. 2장 2절에 나타나는 ‘스올의 뱃속’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스올’이란 때때로 지옥으로도 표현되지만,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또 ‘뱃속’은 어머니의 자궁을 뜻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큰 물고기의 뱃속은 두 가지의 가능성, 두 가지의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으면 그곳은 무덤이 되지만, 그곳을 탈출하면 그곳은 생명을 낳는 자궁이 됩니다. 마치 고난 속에서 무르익어 열매가 되는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바로 스올의 뱃속인 것입니다.
요나는 이 스올의 뱃속에서 3일을 보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3일은 생명과 죽음을 가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둠의 시간이었고, 기다림과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죽음을 맛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 속에서 요나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가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 것이냐? 네 인생의 종착역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네 인생의 새로운 기회가 싹트고, 새롭게 도전하는 자리로 만들 것이냐?”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것은 요나의 몫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요나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하셔도 마지막은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네가 결단해야 한다. 네가 그곳을 이겨 나갈는지 아니면 그곳에서 주저할는지….” 하나님이 아무리 도와주셔도 마지막은 나,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스올의 뱃속을 무덤이 아닌 생명을 품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바꾸기 위해 요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요나 2: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까? 현실을 뛰어넘겠다는 용기가 있을 때,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때, 현실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기대와 희망이 있을 때 기도가 시작됩니다. 현실에 안주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도할까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한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끝입니다. 제 인생은 더 이상 가능성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인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봐야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기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요나는 이 위기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몰아가신 것을 압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제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을 인생의 종착점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명의 자리로 바꾸느냐를 결정하기 위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 2:3)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요나 2:2)

요나는 가장 깊은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하나님을 향해 외친 것입니다.
2절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 성경에는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영어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달라졌음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와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의 ‘주께서’가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음에는 3인칭 하나님이셨다가 스올의 뱃속에 들어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2인칭으로 요나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3인칭에 머물게 하는 기도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기도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어머니의 하나님, 내 아내의 하나님, 내 남편의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달라졌습니다. 드디어 2인칭이신 하나님께 물으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늘 어머니의 기도, 아버지의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내 영혼이 스올의 뱃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며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고난이 다가오면 누구나 다 겁쟁이가 됩니다. 때로는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싫습니다. 도전하고 시도하기도 전에 안 될 거라며 포기합니다. 때로는 숨어 버리고,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신앙인도 고난이 다가오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여기에 왜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3인칭의 하나님에서 2인칭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내 옆에서 나를 지켜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면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67)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는, 잘나갈 때는 자기 자랑에 빠지고 오만불손했는데, 고난을 당하고 나니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이것이 내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 속에서도 과감히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스올의 뱃속을 새 생명의 자리로 만듭시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어둠의 자리가 있었음을 압니다. 또한 시시각각 내 곁에 다가오는 춥고 시린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떨어지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잘나가던 직장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건강에는 자신 있던 사람이 건강검진 결과 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며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사고로 곁을 떠나면서 스올의 뱃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곳곳에 자리 잡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스올의 뱃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스올의 뱃속처럼 무덤과도 같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자궁과도 같은 축복의 역사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36년간의 일제의 암흑시대, 6·25 전쟁의 아픔, 70년의 세월이 흘러간 분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도 우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북녘에 있는 백성들은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스올의 뱃속처럼 어둠과 외로움이 있고,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스올의 뱃속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래서 생명의 자리로 오게 해 주소서”라고 개인의 삶과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삶의 자리는 개인에게도 있고, 가족에게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이 사회와 대한민국, 또 저 북녘 땅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스올의 뱃속을 무덤으로 만들려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스올의 뱃속에서부터 토해 내게 하시어 우리가 생명의 사람으로, 부활의 존재로 일어설 수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나의 하나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 기도하면서 스올의 뱃속과도 같은 이 암울한 시대를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