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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면보다 외모를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걸스 그룹(Girls Group)’입니다. 2009년에는 노래와 춤을 겨냥한 가요계의 여성그룹들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선덕 아이’입니다. 이것은 방송드라마로 막강한 시청률을 과시하였던 선덕여왕과 아이리스의 첫 두 글자를 뽑아 만든 키워드입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파워 커플’입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결혼하고 연예하는 내용들이 신문지상에 많이 보도되면서, 자신이 좋아했던 연예인들이 결혼하거나 애인이 생기는 것을 지칭하는 ‘품절남’, ‘품절녀’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대중성에 역행하는 말 또한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루저’(loser)라는 단어입니다. 한 방송에서 젊은 여대생이 키 큰 남자를 선호한다고 하면서 180cm가 못되는 남자들은 ‘루저’라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고 사회에도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루저라는 말은 승부에서 진 패배자를 뜻합니다. 낙오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전과자의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낮아지고 약자 앞에서는 거만해지고 싶은 우리의 욕망도 들어있습니다. 또한 대중문화가 얼마나 위험수위를 달리고 있는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외모에 끊임없이 집착합니다. 키가 크고 멋지며 힘이 있는 것을 숭배합니다. 동시에 작고 못생기고 연약한 것을 조롱합니다. 마음속으로는 키가 작다고 무시해서는 안 되며 못생겼다고 비아냥거려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문화가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것에 깊이 빠져들고 있는 우리 자신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시대가 인간을 평가할 때 내면적인 성숙보다는 외모로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루저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수많은 루저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실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루저들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스스로가 루저인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과감하게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인 가인이 아니라 둘째 아들인 아벨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였던 에서가 아니라 둘째 아들인 야곱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 째 아들인 요셉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요셉은 오랫동안 루저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종살이를 했고 감옥에도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엘가나라는 자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와 한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신음하는 여인 한나에게 있었습니다. 결국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왕권국가로 세워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아들인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루저의 아픔 속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큰 백성이거나 힘이 센 백성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작은 자들이었고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너무 적고 별 볼일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7)
예수님은 루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인데 예수님께서 루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위세가 당당하고 절대 권력을 갖고 있던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오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대 헤롯이라는 권세 아래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곳은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양과 소의 배설물의 냄새가 나는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아마 늦게까지 결혼을 못한 노총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런 노총각에게 시집간 시골 처녀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하고 간 사람들 또한 궁전에 있던 호화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반갑게 맞이했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소외시켰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삶의 정황 속에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사람들은 낙오자였고 패배자였습니다. 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었고 창녀들이었습니다. 과부들이었고 세상에서 조롱받던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들, 나병환자들,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불법자들, 존경받지 못했던 어부들과 농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친히 다가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을 것이다.” 애통하는 자들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죄 많아서 고통 받는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죄가 용서받았다.” 허무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인생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되고 값진 존귀한 인생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위는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관을 전복시켰습니다. 세상은 외모를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세계를 보셨습니다. 세상은 물질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셨습니다. 세상은 신분을 따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애통하며 사모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인생관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저들에게 오셔서 진정한 승리가 어디 있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외형으로는, 가진 돈과 재물로는 패배자와 승리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세상에 가진 자들, 권력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자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종교인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부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루저의 인생이었습니다.
우리는 버림받으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버림받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랑에 버림받은 분이셨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들에게 “하나님 사랑해요” 라는 말을 그토록 듣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필요 없다며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애인들끼리는 서로 만날 때 “사랑해” 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랑으로서 신부된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해요” 라는 말을 꼭 듣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에 목말라 호소할 때 인간들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배반당한 아버지처럼 가슴을 치며 통곡하십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연인처럼 아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인간들에게 사랑의 애원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갑게 맞이하기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로마서 10:21)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배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백성을 향하여 하루 종일 두 손을 벌린 채 기다리시면서 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아픔과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땅에서 버림 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그의 손을 펼쳐 끌어안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께 이 감정이 없으셨으면 우리는 인생의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일 두 손을 벌린 채 우리를 기다리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거짓신인 바알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바알 신에게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예레미야 7:31)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계속 행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의 절대권력 앞에 서게 되었고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너무나 마음 아프셨습니다. 아버지로서 탄식하셨습니다. 선한 목사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예레미야 31:9)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예레미야 31:10)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다. 그리고 너희는 내 아들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품고 계셨던 마음입니다. 또한 그분은 양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이 겪었던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자존감을 다시 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렸던 눈물을 닦아주기 원하셨습니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31:13)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같이 다가오십니다. 너희가 더 이상 슬픔의 사람이 아니라 기쁨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어둠 속에서 이를 갈며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영혼이 춤추고 기뻐하며 노래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네 인생을 그대로 방치하겠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내게로 오라. 나의 사랑을 받으라. 온종일 내 손을 벌리고 너를 기다리고 있노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때 진정한 승리자가 됩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요 적대자요 루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우리는 이제 주님과 더불어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비록 이 땅에 가진 것이 없고 신분과 지위가 없어도, 예수님과 더불어 살기에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제의 슬픔으로 오늘을 옭아매지 마십시오. 더 이상 어제의 죄책감으로 나를 붙들어 매지 마십시오. 더 이상 어제의 낙담과 무능함 속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이미 예수님께서 그것을 경험하셨고 하나님도 경험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새해에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동행하겠다고 주님 앞에 아뢰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알고,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사랑의 은총과 더불어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올 한해, 아니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매일매일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이 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31: 7 ~ 14
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10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11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내면보다 외모를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09년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걸스 그룹(Girls Group)’입니다. 2009년에는 노래와 춤을 겨냥한 가요계의 여성그룹들이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선덕 아이’입니다. 이것은 방송드라마로 막강한 시청률을 과시하였던 선덕여왕과 아이리스의 첫 두 글자를 뽑아 만든 키워드입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파워 커플’입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결혼하고 연예하는 내용들이 신문지상에 많이 보도되면서, 자신이 좋아했던 연예인들이 결혼하거나 애인이 생기는 것을 지칭하는 ‘품절남’, ‘품절녀’라는 단어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대중성에 역행하는 말 또한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루저’(loser)라는 단어입니다. 한 방송에서 젊은 여대생이 키 큰 남자를 선호한다고 하면서 180cm가 못되는 남자들은 ‘루저’라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고 사회에도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루저라는 말은 승부에서 진 패배자를 뜻합니다. 낙오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전과자의 의미까지 포함합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 시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낮아지고 약자 앞에서는 거만해지고 싶은 우리의 욕망도 들어있습니다. 또한 대중문화가 얼마나 위험수위를 달리고 있는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외모에 끊임없이 집착합니다. 키가 크고 멋지며 힘이 있는 것을 숭배합니다. 동시에 작고 못생기고 연약한 것을 조롱합니다. 마음속으로는 키가 작다고 무시해서는 안 되며 못생겼다고 비아냥거려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문화가 그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것에 깊이 빠져들고 있는 우리 자신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시대가 인간을 평가할 때 내면적인 성숙보다는 외모로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루저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수많은 루저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실패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루저들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스스로가 루저인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과감하게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인 가인이 아니라 둘째 아들인 아벨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였던 에서가 아니라 둘째 아들인 야곱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 째 아들인 요셉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요셉은 오랫동안 루저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종살이를 했고 감옥에도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엘가나라는 자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와 한나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신음하는 여인 한나에게 있었습니다. 결국 한나의 아들인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왕권국가로 세워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아들인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루저의 아픔 속에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성장해갑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큰 백성이거나 힘이 센 백성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작은 자들이었고 버려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너무 적고 별 볼일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명기 7:7)
예수님은 루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인데 예수님께서 루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위세가 당당하고 절대 권력을 갖고 있던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오셨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대 헤롯이라는 권세 아래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곳은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양과 소의 배설물의 냄새가 나는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아마 늦게까지 결혼을 못한 노총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런 노총각에게 시집간 시골 처녀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하고 간 사람들 또한 궁전에 있던 호화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반갑게 맞이했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소외시켰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삶의 정황 속에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사람들은 낙오자였고 패배자였습니다. 그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었고 창녀들이었습니다. 과부들이었고 세상에서 조롱받던 세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들, 나병환자들,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불법자들, 존경받지 못했던 어부들과 농부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친히 다가가셔서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을 것이다.” 애통하는 자들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죄 많아서 고통 받는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죄가 용서받았다.” 허무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인생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복되고 값진 존귀한 인생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위는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관을 전복시켰습니다. 세상은 외모를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세계를 보셨습니다. 세상은 물질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셨습니다. 세상은 신분을 따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애통하며 사모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인생관의 모든 것들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저들에게 오셔서 진정한 승리가 어디 있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외형으로는, 가진 돈과 재물로는 패배자와 승리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세상에 가진 자들, 권력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권력자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종교인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부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인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루저의 인생이었습니다.
우리는 버림받으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버림받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랑에 버림받은 분이셨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들에게 “하나님 사랑해요” 라는 말을 그토록 듣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필요 없다며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애인들끼리는 서로 만날 때 “사랑해” 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랑으로서 신부된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해요” 라는 말을 꼭 듣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에 목말라 호소할 때 인간들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배반당한 아버지처럼 가슴을 치며 통곡하십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연인처럼 아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인간들에게 사랑의 애원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의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반갑게 맞이하기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로마서 10:21)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배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백성을 향하여 하루 종일 두 손을 벌린 채 기다리시면서 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버림받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아픔과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땅에서 버림 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그의 손을 펼쳐 끌어안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께 이 감정이 없으셨으면 우리는 인생의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일 두 손을 벌린 채 우리를 기다리시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거짓신인 바알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바알 신에게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예레미야 7:31)
이스라엘 백성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계속 행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의 절대권력 앞에 서게 되었고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너무나 마음 아프셨습니다. 아버지로서 탄식하셨습니다. 선한 목사로서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예레미야 31:9)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예레미야 31:10)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다. 그리고 너희는 내 아들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품고 계셨던 마음입니다. 또한 그분은 양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이 겪었던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기를 열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자존감을 다시 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흘렸던 눈물을 닦아주기 원하셨습니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31:13)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같이 다가오십니다. 너희가 더 이상 슬픔의 사람이 아니라 기쁨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어둠 속에서 이를 갈며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영혼이 춤추고 기뻐하며 노래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네 인생을 그대로 방치하겠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내게로 오라. 나의 사랑을 받으라. 온종일 내 손을 벌리고 너를 기다리고 있노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때 진정한 승리자가 됩니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요 적대자요 루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심으로 우리는 이제 주님과 더불어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비록 이 땅에 가진 것이 없고 신분과 지위가 없어도, 예수님과 더불어 살기에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제의 슬픔으로 오늘을 옭아매지 마십시오. 더 이상 어제의 죄책감으로 나를 붙들어 매지 마십시오. 더 이상 어제의 낙담과 무능함 속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이미 예수님께서 그것을 경험하셨고 하나님도 경험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새해에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동행하겠다고 주님 앞에 아뢰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알고,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사랑의 은총과 더불어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올 한해, 아니 평생을 살아가면서 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매일매일 경험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이 복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