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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에게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특별히 ‘애(哀)’라는 슬픔의 감정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물론 슬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때로는 내면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이런 감정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전능성’보다는 ‘하나님의 연약함’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을 범하며 고통 받는 인간을 보시며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보시며 “도대체 어찌할꼬?”라며 슬픔의 탄식을 터뜨리기도 하십니다.
창세기 6장 5~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를 방종으로 바꾼 인간의 완악한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이 한탄과 근심을 쏟아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슬픔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내보이십니다. 예레미야 8장 18~21절 말씀입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예레미야 8:18~19,21 중)
하나님에게서 떠나가는 백성들을 보시며 슬픔과 아픔을 토해내시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슬픔은 악령의 역사라거나 기쁨은 성령의 역사라고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슬픔의 깊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시편 90편 10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10)
생의 연수가 칠십이나 팔십이지만, 돌아보니 수고와 슬픔뿐이라며 지난날을 회고하는 모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윗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슬픔을 깊이 맛 본 인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슬픔을 토로합니다. 왜 슬프다고 합니까? 육체적인 질병과 아픔이 그를 괴롭혔는지도 모릅니다. 그를 모욕하고 공격하는 적대자가 등장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노여움을 받았구나.’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슬픔은 어제로 족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슬픔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호소하며 간구합니다. 이는 기도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며 질문을 쏟아내는 모습입니다. 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편 30:9)
“내가 지금 너무 힘이 듭니다.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몸도 아픕니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끝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찬송도 못 할 텐데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실 것입니까? 원수들이 나를 조롱하는데, 내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걸 그저 지켜보고 계시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괜찮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고 찬양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려고 하는데, 내 원수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이렇게 호소하며 온갖 질문을 쏟아내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한때 자신이 교만했다는 사실을, 우쭐하고 오만했던 모습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이런 고백도 더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편 30:6)
내가 잘나간다고, 나는 안전하다고, 내 터전은 튼튼하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탄탄대로라면 앞으로 어려움이 없을 거야. 내게 주어진 권력과 소유가 그대로 지속될 거야.’라는 마음이 다윗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음껏 뽐내며 살았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근심과 걱정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슬픔과 절망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이 슬픔이 변해 노래로 바꿔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며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5)
다윗은 고백합니다. 지금은 어둡고 외롭고 모든 게 막혀 있는 것 같지만 여태껏 살아온 하나님과 나의 인생 스토리를 돌이켜 보니,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평생이라고,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것도 다 내 잘못 때문이며, 내가 그로 인해 슬피 울며 잠들어도 아침엔 다시 하나님께서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그렇기에 그는 당당히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더는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들어가겠다고, 어제의 슬픔은 어제에 남겨 놓겠다고, 더는 어제의 슬픔과 탄식이 오늘의 나를 억누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어제의 슬픔은 어제로 족하다고!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반대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제의 슬픔을 자꾸 오늘로 끌어들입니다. 어제의 기쁨은 어제로 끝내버리고 또 슬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슬픔을 반복적으로 끌어들이는 게 문제입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좋아할까요? 사탄이 좋아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어제 슬펐냐? 그럼 오늘도 계속 슬퍼하라. 오늘도 슬프냐? 내일도 그 슬픔을 지속시켜라.” 우리는 이 유혹을 당당히 거절해야 합니다.
상실과 좌절의 경험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상실’의 아픔 때문입니다. 내게 많은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보물들이 사라져갑니다. 건강만큼 소중한 보물도 없습니다. 나만큼 건강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며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쑤시고 아프며 눕고 싶기만 합니다. 마음은 청춘이라고 생각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느덧 중년이 되고, 노년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또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명예라는 보물도 점점 내 손아귀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떠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불현듯 나를 떠나버립니다. 이러한 상실의 아픔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상실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사람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친구, 연인, 배우자, 부모, 자식이 나를 떠나갈 때 커다란 상실감을 느낍니다. 이별의 아픔입니다. 심지어 내가 떠나가야 하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에서 내가 떠나가야 합니다.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고, 수십 년간 몸담았던 곳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이 모든 상실의 아픔을 우리가 경험해 왔습니다. 이별의 아픔, 죽음의 아픔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좌절감’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것을 이룰 수 없을 때 좌절감이 찾아옵니다. 방해물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희망과 기대도 점점 사라집니다. 나 홀로 떨어진 것만 같습니다. 다시 일어서고 싶은데 일어설 힘조차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자책하며 세상에 내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학연, 지연, 지역주의에 묶여 움직이는 세상을 보면서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좌절과 절망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러한 슬픔을 가장 깊이 느끼는 분들이 누구일까요? 중년의 가정주부들입니다. 그분들에게도 꿈 많던 처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낭만과 부푼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가정주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녀를 낳았을 땐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러다 자녀들이 자라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가정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는데, 모든 게 망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아실현의 꿈도 포기하고 남편과 자녀만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남편과 자녀들과도 대화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나만 덩그러니 내버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슬픔이 찾아듭니다. 나도 내 자신 편을 들어주지 못합니다. 자신이 초라하게만 보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좌절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기운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슬픔에도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밑바닥을 경험하게 합니다. ‘아, 나는 한계성에 부딪혔구나. 나는 참 못난 사람이구나. 난 참 부끄러운 존재구나.’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렇게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만 하는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슬픔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도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유리잔과 같을 수 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지면 산산조각 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인생은 공과 같기도 합니다. 땅바닥에 떨어져도 반사적인 힘을 통해 높이 솟아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공과 같은 인생을 살려면, 그 안에 잔뜩 공기를 넣어줘야 합니다. 그 공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그것은 바로 ‘성령의 기운’입니다. 그 안에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의 기운이 들어가면, 누군가 나를 박살내려 해도 다시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큰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다시 일어서고 도약하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성령을 내 안에 모시면, 바닥을 치는 그 순간 새로운 날개가 펼쳐집니다. 그것이 기쁨의 날개입니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기에,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왜 끊임없이 고난을 이야기할까요? 왜 비천함과 연약함을 이야기할까요? 왜 죽음과 십자가의 아픔을 이야기할까요? 그것이 인간의 바닥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가 다시 바닥에서 일어설 수 있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추락하는 하향성이 상향성으로 바뀌어갑니다. 추락하는 만큼 튀어 오르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모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윗도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다시 일어섰습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으며, 어거스틴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때 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리에서 기대와 희망이 꽃피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변증법은 놀랍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변증법입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이는 당대 사람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시편 30편 11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11)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아, 잊자. 슬픔과 괴로움도 다 잊어버리자. 아니,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그런데 그게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때가 되면 다시 기억납니다. 불쑥불쑥 내 마음을 괴롭힙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슬픔과 아픔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슬퍼하고, 예수님 안에서 슬픔을 떠나보냅시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똑같이 할 수 있는 복된 해결책이 있습니다. 슬퍼하는데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함께 슬퍼하면 슬픔이 반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연약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슬픔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면, 누군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야기로 바꾼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추도문입니다. 애도문을 함께 나누며 슬픔에 동참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떠나보내고, 서서히 슬픔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죽었을 때,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한 일이 이것입니다. 온 백성으로 하여금 애도하게 했습니다. 함께 울게 했습니다. 당시 다윗은 백성들에게 추도문을 읊으며, 떠나보낸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하고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애도하며 슬픔을 삭여나갔던 것입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해야 합니다. 눈물 흘릴 일이 있으면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떠나보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시간 없이 슬픔을 끌어안기만 한다면, 슬픔에 갇힌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그 슬픔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슬픔을 전가하기도 합니다. 파괴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잔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슬퍼한 다음에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슬픔에 거리두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슬픔을 타자화 시켜야 합니다. “슬픔아, 가거라! 나는 충분히 슬퍼했으니, 이제 나를 괴롭히지 말거라. 나는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다.” 이렇게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슬픔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슬픔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떠나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큰 슬픔을 경험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처절한 고통에 처하신 분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며 절규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나의 모든 슬픔, 외로움, 탄식, 절망보다 더 큰 아픔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그때 내가 비로소 슬픔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깨닫게 되면서 나의 슬픔을 넘어서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얻게 됩니다. 내가 절망하면서 다른 사람의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 흘리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의 마음도 알게 되고, 그들을 돕겠다는 의지도 생깁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생명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슬픔을 대신 지셨습니다. 이제 내게 슬픔 대신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네 슬픔은 일시적인 것이다. 이제 다시 하늘의 기쁨으로 일어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슬픔과 아픔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슬픔을 맡기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믿음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성숙되어 갑니다.
우리가 슬픔을 떠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이길 수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기쁨과 생명,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의 삶이 다시 기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바로 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삶을 충만하게 채워 나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30: 5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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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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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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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슬픔의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인간에게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특별히 ‘애(哀)’라는 슬픔의 감정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물론 슬픔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이란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때로는 내면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이런 감정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전능성’보다는 ‘하나님의 연약함’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을 범하며 고통 받는 인간을 보시며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보시며 “도대체 어찌할꼬?”라며 슬픔의 탄식을 터뜨리기도 하십니다.
창세기 6장 5~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를 방종으로 바꾼 인간의 완악한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이 한탄과 근심을 쏟아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슬픔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구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내보이십니다. 예레미야 8장 18~21절 말씀입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예레미야 8:18~19,21 중)
하나님에게서 떠나가는 백성들을 보시며 슬픔과 아픔을 토해내시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슬픔은 악령의 역사라거나 기쁨은 성령의 역사라고 구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슬픔의 깊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었던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시편 90편 10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10)
생의 연수가 칠십이나 팔십이지만, 돌아보니 수고와 슬픔뿐이라며 지난날을 회고하는 모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다윗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슬픔을 깊이 맛 본 인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슬픔을 토로합니다. 왜 슬프다고 합니까? 육체적인 질병과 아픔이 그를 괴롭혔는지도 모릅니다. 그를 모욕하고 공격하는 적대자가 등장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노여움을 받았구나.’라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슬픔은 어제로 족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슬픔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호소하며 간구합니다. 이는 기도라기보다 하나님을 향해 저항하며 질문을 쏟아내는 모습입니다. 9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시편 30:9)
“내가 지금 너무 힘이 듭니다.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몸도 아픕니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끝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찬송도 못 할 텐데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실 것입니까? 원수들이 나를 조롱하는데, 내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걸 그저 지켜보고 계시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괜찮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고 찬양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려고 하는데, 내 원수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이렇게 호소하며 온갖 질문을 쏟아내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한때 자신이 교만했다는 사실을, 우쭐하고 오만했던 모습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이런 고백도 더합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편 30:6)
내가 잘나간다고, 나는 안전하다고, 내 터전은 튼튼하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탄탄대로라면 앞으로 어려움이 없을 거야. 내게 주어진 권력과 소유가 그대로 지속될 거야.’라는 마음이 다윗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음껏 뽐내며 살았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근심과 걱정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슬픔과 절망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이 슬픔이 변해 노래로 바꿔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며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편 30:5)
다윗은 고백합니다. 지금은 어둡고 외롭고 모든 게 막혀 있는 것 같지만 여태껏 살아온 하나님과 나의 인생 스토리를 돌이켜 보니,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평생이라고,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것도 다 내 잘못 때문이며, 내가 그로 인해 슬피 울며 잠들어도 아침엔 다시 하나님께서 기쁨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그렇기에 그는 당당히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더는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들어가겠다고, 어제의 슬픔은 어제에 남겨 놓겠다고, 더는 어제의 슬픔과 탄식이 오늘의 나를 억누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어제의 슬픔은 어제로 족하다고!
여러분,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반대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제의 슬픔을 자꾸 오늘로 끌어들입니다. 어제의 기쁨은 어제로 끝내버리고 또 슬퍼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슬픔을 반복적으로 끌어들이는 게 문제입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좋아할까요? 사탄이 좋아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어제 슬펐냐? 그럼 오늘도 계속 슬퍼하라. 오늘도 슬프냐? 내일도 그 슬픔을 지속시켜라.” 우리는 이 유혹을 당당히 거절해야 합니다.
상실과 좌절의 경험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가 슬퍼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는 ‘상실’의 아픔 때문입니다. 내게 많은 보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보물들이 사라져갑니다. 건강만큼 소중한 보물도 없습니다. 나만큼 건강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며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쑤시고 아프며 눕고 싶기만 합니다. 마음은 청춘이라고 생각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느덧 중년이 되고, 노년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면서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또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명예라는 보물도 점점 내 손아귀에서 벗어납니다. 내가 떠나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불현듯 나를 떠나버립니다. 이러한 상실의 아픔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상실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사람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친구, 연인, 배우자, 부모, 자식이 나를 떠나갈 때 커다란 상실감을 느낍니다. 이별의 아픔입니다. 심지어 내가 떠나가야 하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에서 내가 떠나가야 합니다.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고, 수십 년간 몸담았던 곳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이 모든 상실의 아픔을 우리가 경험해 왔습니다. 이별의 아픔, 죽음의 아픔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좌절감’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세웠는데 그것을 이룰 수 없을 때 좌절감이 찾아옵니다. 방해물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희망과 기대도 점점 사라집니다. 나 홀로 떨어진 것만 같습니다. 다시 일어서고 싶은데 일어설 힘조차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습니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자책하며 세상에 내가 설 자리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학연, 지연, 지역주의에 묶여 움직이는 세상을 보면서 절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좌절과 절망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러한 슬픔을 가장 깊이 느끼는 분들이 누구일까요? 중년의 가정주부들입니다. 그분들에게도 꿈 많던 처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낭만과 부푼 희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그렇게 가정주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녀를 낳았을 땐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러다 자녀들이 자라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가정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살았는데, 모든 게 망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아실현의 꿈도 포기하고 남편과 자녀만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남편과 자녀들과도 대화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나만 덩그러니 내버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슬픔이 찾아듭니다. 나도 내 자신 편을 들어주지 못합니다. 자신이 초라하게만 보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좌절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기운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슬픔에도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밑바닥을 경험하게 합니다. ‘아, 나는 한계성에 부딪혔구나. 나는 참 못난 사람이구나. 난 참 부끄러운 존재구나.’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렇게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만 하는 게 아니란 사실입니다. 슬픔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도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유리잔과 같을 수 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지면 산산조각 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인생은 공과 같기도 합니다. 땅바닥에 떨어져도 반사적인 힘을 통해 높이 솟아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공과 같은 인생을 살려면, 그 안에 잔뜩 공기를 넣어줘야 합니다. 그 공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그것은 바로 ‘성령의 기운’입니다. 그 안에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의 기운이 들어가면, 누군가 나를 박살내려 해도 다시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큰 시련과 어려움이 닥쳐와도 다시 일어서고 도약하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성령을 내 안에 모시면, 바닥을 치는 그 순간 새로운 날개가 펼쳐집니다. 그것이 기쁨의 날개입니다.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기에,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왜 끊임없이 고난을 이야기할까요? 왜 비천함과 연약함을 이야기할까요? 왜 죽음과 십자가의 아픔을 이야기할까요? 그것이 인간의 바닥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가 다시 바닥에서 일어설 수 있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 추락하는 하향성이 상향성으로 바뀌어갑니다. 추락하는 만큼 튀어 오르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모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윗도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다시 일어섰습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으며, 어거스틴도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때 바닥에서부터 다시 일어서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리에서 기대와 희망이 꽃피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의 변증법은 놀랍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변증법입니다. 예수님도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이는 당대 사람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던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시편 30편 11절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편 30:11)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아, 잊자. 슬픔과 괴로움도 다 잊어버리자. 아니,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그런데 그게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때가 되면 다시 기억납니다. 불쑥불쑥 내 마음을 괴롭힙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슬픔과 아픔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슬퍼하고, 예수님 안에서 슬픔을 떠나보냅시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똑같이 할 수 있는 복된 해결책이 있습니다. 슬퍼하는데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함께 슬퍼하면 슬픔이 반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연약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슬픔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면, 누군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야기로 바꾼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추도문입니다. 애도문을 함께 나누며 슬픔에 동참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떠나보내고, 서서히 슬픔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죽었을 때,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한 일이 이것입니다. 온 백성으로 하여금 애도하게 했습니다. 함께 울게 했습니다. 당시 다윗은 백성들에게 추도문을 읊으며, 떠나보낸 사울과 요나단을 칭송하고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애도하며 슬픔을 삭여나갔던 것입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슬퍼해야 합니다. 눈물 흘릴 일이 있으면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떠나보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시간 없이 슬픔을 끌어안기만 한다면, 슬픔에 갇힌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그 슬픔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슬픔을 전가하기도 합니다. 파괴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잔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슬퍼한 다음에는 떠나보내야 합니다. 슬픔에 거리두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슬픔을 타자화 시켜야 합니다. “슬픔아, 가거라! 나는 충분히 슬퍼했으니, 이제 나를 괴롭히지 말거라. 나는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다.” 이렇게 선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슬픔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슬픔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떠나보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큰 슬픔을 경험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혹독한 시련과 처절한 고통에 처하신 분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며 절규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나의 모든 슬픔, 외로움, 탄식, 절망보다 더 큰 아픔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축복입니다.
그때 내가 비로소 슬픔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깨닫게 되면서 나의 슬픔을 넘어서고 다른 사람의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얻게 됩니다. 내가 절망하면서 다른 사람의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 흘리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의 마음도 알게 되고, 그들을 돕겠다는 의지도 생깁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겠다.”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들으면서 우리는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생명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슬픔을 대신 지셨습니다. 이제 내게 슬픔 대신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다시 말씀해 주십니다. “네 슬픔은 일시적인 것이다. 이제 다시 하늘의 기쁨으로 일어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치유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슬픔과 아픔을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슬픔을 맡기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믿음의 사람, 기쁨의 사람으로 성숙되어 갑니다.
우리가 슬픔을 떠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이길 수는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에게 기쁨과 생명,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우리의 삶이 다시 기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바로 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삶을 충만하게 채워 나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10월 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슬픔의 영, 기쁨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60, 9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시 30:5-12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우리에게는 희로애락이라는 하나님이 주신 감성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슬퍼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감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감정을 느끼셨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심보다 하나님의 연약함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인간이 죄악 중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창6:5, 렘8:18). 따라서 슬픔을 악령의 역사라고 단순히 이분법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의 시인은 슬픔을 깊이 맛본 사람입니다. 그는 육체적인 아픔(3절) 속에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9절). “죽으면 끝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찬송도 받지 못하실 텐데 나를 그냥 버려두시렵니까? 나를 미워했던 원수들의 조롱도 괜찮습니까?” 더불어 자기 자신이 교만해서 우쭐대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하며 슬퍼합니다(6절). 그리고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시켜 달라 선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라고 결단하며 노래합니다.
슬픔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슬픔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슬퍼하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슬픔의 본질은 첫째 ‘상실의 아픔’입니다. 내가 가진 건강이라는 보물이, 재산이라는 보물이, 청춘과 지위, 명예의 보물이 사라집니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사람이라는 보물, 친구와 연인과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죽음과 이별에 대한 아픔입니다. 둘째는 ‘좌절의 슬픔’입니다. 나의 인생의 목표를 상실했습니다. 일어나야 하지만 일어날 힘이 없습니다. 이유도 없습니다. 조소와 비난을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꽃다운 젊은 시절의 낭만이 결혼하고 가정주부가 되어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망가진 것처럼 여겨져 슬픔에 잠깁니다. 좌절의 슬픔입니다.
슬픔의 메커니즘입니다. 슬픔은 우리에게 저 밑바닥, 나의 한계를 경험하게 합니다. 나의 죄성, 나의 부끄러운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탱탱한 공을 땅바닥을 향해 던지면 그 반사적 힘을 통해 더 높이 뛰어오릅니다. 이 힘이 바로 내 안에 모시는 성령의 힘입니다. 바로 기쁨의 날개입니다. 기독교는 왜 죽음을, 고난과 십자가를 말할까요? 추락하는 ‘하향성’은 성령 안에서 곧 날아오르는 ‘상향성’으로 바뀝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고,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이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시30:11) 첫째, 그냥 잊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다시 기억이 나겠지요. 온전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둘째, 함께 슬퍼함으로 그 슬픔을 나눕니다. 공동체로서 슬픔을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슬픔에 동참하면서 슬픔과의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많은 애가들(삼하1:17-27)의 이유입니다. 셋째, 슬픔의 자리에 나보다 더 슬픔을 경험한 분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아들을 내어 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때에 슬픔은 나를 넘어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 보게 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시적’ 슬픔대신 ‘영원한’ 기쁨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보다 더 슬퍼하신 예수님께 이 슬픔을 맡기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바라보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거두어 가시고, 다시 밑바닥에서 성령님과 함께 튀어 올라,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도 치유할 수 있는 복된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지금 나에게 있는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인가요?
2. 주님 안에서 슬픔을 이겨냈던 은혜의 경험이 있다면 함께 나눠 봅시다.
3. 다른 사람의 슬픔에 동참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세워주었던 은혜의 경험을 나눠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주신 것 너무 고맙습니다. 나보다 더 큰 아픔, 나보다 더 큰 슬픔과 좌절을 나 때문에 겪으셨습니다. 주님께 이 모든 것을 맡깁니다. 슬픔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인도하셔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슬픔이 되도록, 기쁨과 감사의 삶이 되도록 축복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