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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포용의 경계선에서

사무엘상 18: 6 ~ 9

김지철 목사

2014.03.02

모두에게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단테가 쓴 신곡을 보면 시기심과 질투로 가득했던 자들이 연옥에서 고통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삶을 고백합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비통해하는 것을 내가 지닌 행운보다 더 즐겼지요. 내가 받은 축복을 즐거워하기보다는 남이 안되고 힘들어하고 애통해하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피는 언제나 질투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어요. 혹시나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그 기쁨에 창백해지는 내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거예요. 남의 기쁨, 남이 잘되는 것을 도무지 봐줄 수가 없었다는말입니다. 그들이 파멸해야 오히려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단테가 시기심과 질투가 가득한 이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에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질투를 이긴 자여, 즐거워하라.”
이런 시기심과 질투를 경험해 본 적 없으십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적인 태도일까요?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고,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하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하는 옛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말입니다. 저 먼 데 있는 사람이 땅을 사는 것은 그리 문제가 아닙니다. 저 돈 많은 사람이 땅을 사는 것도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 아는 사람, 자주 보는 사람, 바로 내 옆에 있는 사촌이 땅을 사면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배가 아픈 것은 도무지 못 참겠다는 것이 바로 시기심 가득한 이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기하는 마음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친구가 연봉 1억을 받고 나는 8천만원을 받는 것보다, 내가 6천만원을 받고 내 친구가 5천만원을 받는 것이 더 속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심과 질투에 빠져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이 잘되는 것은 그냥 봐 줄 수 없는 마음, 즉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이미 구약의 잠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잠언 14:30)

시기는 남을 무너지게 하지만 내 속에 있는 뼈도 문드러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의 타락과 무너짐이 바로 이 시기심으로부터 시작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반역을 했습니다. 동생 아벨을 참혹하게 죽인 가인에게는 부정적인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형들이 어린 요셉의 꿈 자랑을 그냥 귀엽게 봐주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이란 얼마나 사람의 마음 깊은 뿌리 속에 놓여 있는지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이 시기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도 아버지의 특권을 시기하는 아들의 열등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잘 살다가도 다투고 싸움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누가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더 많은 유산을 받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 아닙니까? 시기와 질투심에 붙잡히게 되면 그 가정공동체는 금방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 시기심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시기심이란 무조건 없애야 할 ‘악덕 중의 악’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시기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몇 가지 정의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심이란, 다른 이가 잘되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 ‘남들이 즐기는 것을 왜 나는 즐기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즐길 수 없는 것들을 왜 남들은 즐길 수 있는가?’ 라는 고압적인 질문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시기심입니다.
온전한 시기심은 스스로를 낙담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상대방이 파괴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면서 의구심이 생기는 자리에 시기심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자존감에 상처를 입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왜 너는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갔는가!”하고 끌어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성공이 나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기심이란 그냥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기심의 중요한 점 중에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심각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별것 아님을 아프게 깨닫게 하는 것이 시기심입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시기심이란 중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부족하구나. 나도 저 사람처럼 시도해 봐야지.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뭐지? 저 사람은 저런 것을 갖고 있는데 내게는 어떤 소중한 것이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가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점검하여 분발하고, 도전을 하도록 하는 축복된 자리가 사실은 시기심을 가질 때입니다.
성공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시기심의 나쁜 점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의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면, ‘경쟁과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나는 마음 속 열망을 모두 버리겠어!’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답답할 때가 있고, 애통할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고, 스스로 가진 것이 없음을 처절하게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배부른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자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본적인 하늘의 위로와 풍요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시기심의 고통과 절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정적인 질문을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남이 나보다 더 가진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남은 가졌는데 나는 왜 없지!’ 그렇게 질문하면서 탄식합니다. 엄청난 경쟁심에 시달리면서, 최고가 되지 못하고 마음대로 누리지 못하면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불의하고 못된 놈들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에 응어리가 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의와 정의를 세우려고 하는 노력은 언제나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와 정의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면, 분명히 마음속에 시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시기심에는, 남의 뒷면을 캐내기 좋아하고 올라간 자들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하향평등화의 성격이 있다고 분석가들은 지적합니다. 하향평준화는 진정한 공평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의 발로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같이 성장하는 것, 즉 상향평준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으십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더 크고 좋은 집을 갖고 있네. 나보다 더 멋진 차를 몰고 있네. 나보다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명예를 갖고 있네. 저 망할 녀석을 실제로 보니까 그럴 자격도 없는데 말이지. 내가 저 친구보다 나은데…’ 시기심은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하게 하고, 그래서 세상을 향해 원망하게 만듭니다.

사울왕을 무너뜨린 것은 시기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왕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왕은 참으로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남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습니다.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얼짱이었고, 몸짱이었습니다. 지혜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에서 선택된 자랑스러운 왕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지도자의 품격도 있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청년을 만났을 때, 그는 다윗의 뛰어난 지략과 용기를 인정할 줄 아는 멋진 지도자였습니다. 다윗을 자기 수하에 두었고 그를 군대장관으로 임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쓸 줄 아는 사람, 아니 때로는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쓸 줄 아는 지도자는 참 괜찮은 지도자 아닙니까? 복 받은 지도자 아닙니까?
이렇듯 사울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감사할 충분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군대와 싸울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도 있었습니다. 그는 전사였고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왕에게 갑자기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문제였을까요? 바로 시기심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의 가슴에 시기심이 발동하면서 그 위대함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자신만 괜찮게 여기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젊은 청년인 그를 군대장관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지켜보니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딸 미갈도 다윗을 연모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로서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내 아들이 나도 저 다윗만큼 사랑하는 걸까. 내 딸이 저 다윗만큼 나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일까…’ 그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모든 것을 맡겼는데 그가 하는 일마다 사람들이 그를 인정했고 칭찬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의 앞부분인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사무엘상 18:5)

아들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딸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이 다윗을 좋아하고 심지어 자기의 신하들까지도 다윗을 보며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왕은 가슴이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울왕이었다면, 우리는 달랐을까요? 저는 본문을 보면서 만약 내가 사울왕이었다면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 나보다 젊은 사람이 내 아들과 내 딸에게 사랑을 받고, 내 백성에게 사랑을 받고, 내 신하들에게마저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받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 ‘합당히 여겼다’라는 말은 좋아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세계를 우리 남성들은 잘 알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 곁에 잘 안 가려고 합니다. 아니 나보다 뛰어난 사람 곁에는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보다 더 잘생긴 사람 옆에서 누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겠습니까? 남자의 세계는 자기보다 더 괜찮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남자들이 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에 붙들리면 자신의 참모습을 잃게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을 물리치고 사울이 다윗과 함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민심을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사울왕은 여인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무엘상 18:7)

사울이 화를 냈을까요, 안 냈을까요? 성경은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로다’에서 노래가 끝냈으면 사울은 아주 신이 났을 겁니다. ‘그렇지, 내가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지!’ 하고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민심과 여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또 백성들이 함께 불렀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사울이 죽인 블레셋 사람은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었습니다.
몇 배입니까? 열 배입니다. 다윗에게 열 배의 찬양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울왕의 시기심과 질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저는 사울왕을 보면서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화를 낼 수 있었던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자기 신하가 자신보다 더 높여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군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무엘상 18:9)

‘주목하였다’라는 히브리 원어의 뜻이 영어성경에는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a jealous eye on David. 즉 질투하는 눈, 시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랬을까요? 죽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사울은 무너진 것입니다. 한때 잠깐 주목했다가 놓았어야 했는데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시기심에 시달렸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집착증에 붙잡혔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강박관념에 붙잡혔습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다윗만 보였습니다. 왕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서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다윗을 죽이기 위해 그의 생 전체를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왕의 비극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행복하고, 누군가 나보다 더 칭찬받고, 누군가 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 어떻습니까? 견딜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시기심을 갖는 건 아닙니다. 교수는 교수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의사는 의사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CEO는 CEO에게 시기심을 갖고, 가수는 가수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너무 뛰어난 사람에게는 또 시기심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김연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을 때,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시기심이 나셨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칭찬하고 싶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구는 시기심을 가졌을까요? 아사다 마오는 아마 김연아를 시기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실패를 했을 때, 입으로는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너 참 잘 됐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시기심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식에 잡히면, 저급한 욕망이 우리를 붙잡게 되고 편협하고 야비한 인간으로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시기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만 고정시켰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상대방에게서 내게로 돌려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 나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으로 돌려야 합니다.
세상의 인기, 세상의 풍족함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르게 행동했을까요? 제가 볼 땐 시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나는 한 달란트예요. 저 사람은 두 달란트, 저 사람은 다섯 달란트인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땅 속에 집어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열심히 해서 한 달란트가 두 달란트가 되고, 다시 열심히 해서 네 달란트가 되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것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가진 축복을 놓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공동체의식이 있어야 시기심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에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 입, 이마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여 얼굴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얼굴이 찌그러집니다. 또 몸에는 손과 발과 가슴이 있습니다. 안쪽에는 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장 한 군데만 망가져도 몸 전체가 무너집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 이 사회의 공동체, 대한민국의 공동체, 인류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시기심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의해 나를 규정해야 합니다. 사람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게 되면, 내가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모릅니다. 환경에 의해 나를 규정하면 내가 얼마나 오르락내리락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하는 것입니다. 나를 말씀에 의해서 규정하고, 예수님에 의해서 규정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존감이 세상 어떤 사람들의 판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는 확인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나다. 나는 내 인생의 우주에서 엑스트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드셨다.”하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시기심과 질투를 이겨나가는 힘일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규정받는, 그래서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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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8: 6 ~ 9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모두에게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단테가 쓴 신곡을 보면 시기심과 질투로 가득했던 자들이 연옥에서 고통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삶을 고백합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비통해하는 것을 내가 지닌 행운보다 더 즐겼지요. 내가 받은 축복을 즐거워하기보다는 남이 안되고 힘들어하고 애통해하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피는 언제나 질투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어요. 혹시나 기뻐하는 사람을 보면 그 기쁨에 창백해지는 내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거예요. 남의 기쁨, 남이 잘되는 것을 도무지 봐줄 수가 없었다는말입니다. 그들이 파멸해야 오히려 속이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단테가 시기심과 질투가 가득한 이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에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렸습니다. “질투를 이긴 자여, 즐거워하라.”
이런 시기심과 질투를 경험해 본 적 없으십니까? 인간이 갖고 있는 시기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적인 태도일까요?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고,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하는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하는 옛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말입니다. 저 먼 데 있는 사람이 땅을 사는 것은 그리 문제가 아닙니다. 저 돈 많은 사람이 땅을 사는 것도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 아는 사람, 자주 보는 사람, 바로 내 옆에 있는 사촌이 땅을 사면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배가 아픈 것은 도무지 못 참겠다는 것이 바로 시기심 가득한 이 시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기하는 마음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친구가 연봉 1억을 받고 나는 8천만원을 받는 것보다, 내가 6천만원을 받고 내 친구가 5천만원을 받는 것이 더 속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심과 질투에 빠져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이 잘되는 것은 그냥 봐 줄 수 없는 마음, 즉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이미 구약의 잠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잠언 14:30)

시기는 남을 무너지게 하지만 내 속에 있는 뼈도 문드러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의 타락과 무너짐이 바로 이 시기심으로부터 시작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 즉 하나님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하나님께 반역을 했습니다. 동생 아벨을 참혹하게 죽인 가인에게는 부정적인 시기심이 있었습니다. 형들이 어린 요셉의 꿈 자랑을 그냥 귀엽게 봐주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시기심이란 얼마나 사람의 마음 깊은 뿌리 속에 놓여 있는지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자들이 이 시기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도 아버지의 특권을 시기하는 아들의 열등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잘 살다가도 다투고 싸움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누가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더 많은 유산을 받을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 아닙니까? 시기와 질투심에 붙잡히게 되면 그 가정공동체는 금방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 시기심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시기심이란 무조건 없애야 할 ‘악덕 중의 악’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시기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몇 가지 정의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심이란, 다른 이가 잘되는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 ‘남들이 즐기는 것을 왜 나는 즐기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즐길 수 없는 것들을 왜 남들은 즐길 수 있는가?’ 라는 고압적인 질문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 시기심입니다.
온전한 시기심은 스스로를 낙담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게 만듭니다. 거기에 상대방이 파괴되기를 도모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면서 의구심이 생기는 자리에 시기심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자존감에 상처를 입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왜 너는 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갔는가!”하고 끌어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성공이 나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기심이란 그냥 나쁘기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기심의 중요한 점 중에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심각하게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별것 아님을 아프게 깨닫게 하는 것이 시기심입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시기심이란 중성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부족하구나. 나도 저 사람처럼 시도해 봐야지.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뭐지? 저 사람은 저런 것을 갖고 있는데 내게는 어떤 소중한 것이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가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점검하여 분발하고, 도전을 하도록 하는 축복된 자리가 사실은 시기심을 가질 때입니다.
성공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시기심의 나쁜 점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의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면, ‘경쟁과 열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나는 마음 속 열망을 모두 버리겠어!’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답답할 때가 있고, 애통할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고, 스스로 가진 것이 없음을 처절하게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배부른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자가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본적인 하늘의 위로와 풍요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시기심의 고통과 절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정적인 질문을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남이 나보다 더 가진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남은 가졌는데 나는 왜 없지!’ 그렇게 질문하면서 탄식합니다. 엄청난 경쟁심에 시달리면서, 최고가 되지 못하고 마음대로 누리지 못하면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불의하고 못된 놈들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에 응어리가 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공의와 정의를 세우려고 하는 노력은 언제나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와 정의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려고 하면, 분명히 마음속에 시기심이 있는 것입니다.
시기심에는, 남의 뒷면을 캐내기 좋아하고 올라간 자들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하향평등화의 성격이 있다고 분석가들은 지적합니다. 하향평준화는 진정한 공평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의 발로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같이 성장하는 것, 즉 상향평준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으십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더 크고 좋은 집을 갖고 있네. 나보다 더 멋진 차를 몰고 있네. 나보다 더 높은 지위와 더 큰 명예를 갖고 있네. 저 망할 녀석을 실제로 보니까 그럴 자격도 없는데 말이지. 내가 저 친구보다 나은데…’ 시기심은 끊임없이 이런 질문을 하게 하고, 그래서 세상을 향해 원망하게 만듭니다.

사울왕을 무너뜨린 것은 시기심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왕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왕은 참으로 뛰어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남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습니다.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얼짱이었고, 몸짱이었습니다. 지혜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에서 선택된 자랑스러운 왕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는 사람을 볼 줄 아는 지도자의 품격도 있었습니다. 다윗이라는 청년을 만났을 때, 그는 다윗의 뛰어난 지략과 용기를 인정할 줄 아는 멋진 지도자였습니다. 다윗을 자기 수하에 두었고 그를 군대장관으로 임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쓸 줄 아는 사람, 아니 때로는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쓸 줄 아는 지도자는 참 괜찮은 지도자 아닙니까? 복 받은 지도자 아닙니까?
이렇듯 사울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감사할 충분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군대와 싸울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도 있었습니다. 그는 전사였고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울왕에게 갑자기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문제였을까요? 바로 시기심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의 가슴에 시기심이 발동하면서 그 위대함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자신만 괜찮게 여기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젊은 청년인 그를 군대장관으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지켜보니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딸 미갈도 다윗을 연모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로서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내 아들이 나도 저 다윗만큼 사랑하는 걸까. 내 딸이 저 다윗만큼 나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일까…’ 그의 마음은 흔들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모든 것을 맡겼는데 그가 하는 일마다 사람들이 그를 인정했고 칭찬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의 앞부분인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사무엘상 18:5)

아들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딸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이 다윗을 좋아하고 심지어 자기의 신하들까지도 다윗을 보며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왕은 가슴이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울왕이었다면, 우리는 달랐을까요? 저는 본문을 보면서 만약 내가 사울왕이었다면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 나보다 젊은 사람이 내 아들과 내 딸에게 사랑을 받고, 내 백성에게 사랑을 받고, 내 신하들에게마저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받았을 것 같습니다.
여기 ‘합당히 여겼다’라는 말은 좋아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세계를 우리 남성들은 잘 알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 곁에 잘 안 가려고 합니다. 아니 나보다 뛰어난 사람 곁에는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보다 더 잘생긴 사람 옆에서 누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겠습니까? 남자의 세계는 자기보다 더 괜찮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남자들이 힘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심에 붙들리면 자신의 참모습을 잃게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을 물리치고 사울이 다윗과 함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민심을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사울왕은 여인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무엘상 18:7)

사울이 화를 냈을까요, 안 냈을까요? 성경은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로다’에서 노래가 끝냈으면 사울은 아주 신이 났을 겁니다. ‘그렇지, 내가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지!’ 하고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민심과 여론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여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또 백성들이 함께 불렀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사울이 죽인 블레셋 사람은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었습니다.
몇 배입니까? 열 배입니다. 다윗에게 열 배의 찬양을 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울왕의 시기심과 질투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저는 사울왕을 보면서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그래서 화를 낼 수 있었던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자기 신하가 자신보다 더 높여지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 군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무엘상 18:9)

‘주목하였다’라는 히브리 원어의 뜻이 영어성경에는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a jealous eye on David. 즉 질투하는 눈, 시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랬을까요? 죽을 때까지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사울은 무너진 것입니다. 한때 잠깐 주목했다가 놓았어야 했는데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시기심에 시달렸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집착증에 붙잡혔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강박관념에 붙잡혔습니다.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다윗만 보였습니다. 왕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서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한 사람, 다윗을 죽이기 위해 그의 생 전체를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왕의 비극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행복하고, 누군가 나보다 더 칭찬받고, 누군가 나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 어떻습니까? 견딜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시기심을 갖는 건 아닙니다. 교수는 교수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의사는 의사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CEO는 CEO에게 시기심을 갖고, 가수는 가수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너무 뛰어난 사람에게는 또 시기심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시기심을 갖습니다.
김연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을 때, 김연아 선수를 보면서 시기심이 나셨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칭찬하고 싶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구는 시기심을 가졌을까요? 아사다 마오는 아마 김연아를 시기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기심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실패를 했을 때, 입으로는 위로하지만 속으로는 ‘너 참 잘 됐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시기심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식에 잡히면, 저급한 욕망이 우리를 붙잡게 되고 편협하고 야비한 인간으로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시기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만 고정시켰던 눈을 돌려야 합니다. 상대방에게서 내게로 돌려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 나만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으로 돌려야 합니다.
세상의 인기, 세상의 풍족함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다르게 행동했을까요? 제가 볼 땐 시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나는 한 달란트예요. 저 사람은 두 달란트, 저 사람은 다섯 달란트인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땅 속에 집어 넣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열심히 해서 한 달란트가 두 달란트가 되고, 다시 열심히 해서 네 달란트가 되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것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가진 축복을 놓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공동체의식이 있어야 시기심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얼굴에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 입, 이마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여 얼굴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얼굴이 찌그러집니다. 또 몸에는 손과 발과 가슴이 있습니다. 안쪽에는 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장 한 군데만 망가져도 몸 전체가 무너집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 이 사회의 공동체, 대한민국의 공동체, 인류 공동체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시기심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의해 나를 규정해야 합니다. 사람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게 되면, 내가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모릅니다. 환경에 의해 나를 규정하면 내가 얼마나 오르락내리락 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하나님에 의해서 규정하는 것입니다. 나를 말씀에 의해서 규정하고, 예수님에 의해서 규정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존감이 세상 어떤 사람들의 판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는 확인해야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나다. 나는 내 인생의 우주에서 엑스트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드셨다.”하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시기심과 질투를 이겨나가는 힘일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규정받는, 그래서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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