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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갈등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 7월에 한 언론매체(파이낸셜뉴스)가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대한민국이 ‘갈등 공화국’의 덫에 빠졌다. … 대내외 불확실성 파고를 넘기 위해 국민통합이 요구되는 시점이지만 지역갈등, 이념갈등, 남남갈등, 세대갈등이 대한민국을 혼돈의 블랙홀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갈등사회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단갈등의 인식지수를 묻는 국민여론 조사에서는 근로자와 경영자의 갈등(86%), 가난한 자와 부자의 갈등(85%), 진보와 보수의 갈등(81%) 순으로 대답이 나왔습니다. 내부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소통과 신뢰의 결핍’을 이야기했습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 신뢰를 잃어버린 교육, 신뢰를 잃어버린 산업현장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의 결핍은 교회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면한 위기를 보며 우리는 “왜?”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의 원인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유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다음 단계를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어떤 대안과 정책을 내놓아도 용납하기를 거부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믿지 못해서입니다. 불신은 소통의 부재를 낳습니다. 그리고 소통의 부재는 또다시 불신을 낳습니다. 악순환의 구조 안에 갇히는 된 것입니다.
불신과 소통의 부재로 인한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상대방을 멸시하는 의미의 신조어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단어 뒤에 벌레 ‘충’(蟲)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벌레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가부장적이고 배려심 없는 한국 남자를 빗대어 ‘한남충’이라고 하고, 자기 아이만 아는 몰지각한 엄마를 ‘맘충’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비판을 넘어선 비난이고, 조롱입니다.
비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은 열린 사회 안에서 좋은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비판을 넘어 비난과 조롱으로 인간 사이의 신뢰를 깨뜨리는 말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그러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 자기 가치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며 배려할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과 소통하는 데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상응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서로 믿고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엄청난 자산일 뿐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기도 합니다. 공동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상호신뢰와 협력의 태도로 소통 네트워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다툼이 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목표, 공동의 선을 위해서는 양보할 줄 알고, 때로는 손해 볼 각오로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것이 잘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열등감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믿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전과 통제의 부제는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성경은 믿음과 신뢰를 매우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과의 관계에서나 믿음과 신뢰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 중 하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면 사람을 믿고 신뢰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 않으면 사람 사이의 신뢰관계도 깨지게 될 것이다’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자 이 시대에는 두 가지 위기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비전의 부재’입니다. 비전이 없는 것이 왜 위기가 될까요? 비전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든 동기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전이 없는 학생에게는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직장인에게는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두 번째, ‘통제의 부재’입니다. 통제의 부재 속에서 질서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갔습니다. 무질서와 방종 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사기 기자는 21장 25절에 결론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비전과 통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무너지면, 인간은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잇속만 차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게 피해가 되고 방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 공동체는 몰락하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안에 이러한 위기가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어떻게 해야 회복될 수 있을까요?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광복 71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945년 해방 후에 이 민족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아직도 저 북녘 땅에는 광복의 빛이 비추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위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복이 주어졌습니다. 해방 후 우리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발전과 도약을 이루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반세기만에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풍요를 누리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의 축복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하여 대한민국 국민 1/5 이상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초청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나라의 경제와 정치, 그리고 교회를 진단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이 총체적으로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로 인해 멸망하게 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남유다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대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다스렸던 55년간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어떤 인물입니까? 병 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15년을 더 허락받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때 낳은 아들이 므낫세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매우 악한 왕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이방인보다도 더 악했다고 기록합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열왕기하 21:11)
므낫세에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은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므낫세의 손자로, 아버지가 빨리 죽어서 여덟 살에 왕위를 계승하여 31년을 다스립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던 그는 즉위 18년째인 26살에 말씀을 읽으면서 ‘이 나라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개혁을 시작합니다.
개혁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곳곳에서 개혁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개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많이 봐 오지 않았습니까? 특히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개혁일 경우 더욱 어렵습니다. 정부가 내세운 사대구조 개혁도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려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개혁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내년이 되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변화에 대한 긴박한 요청이 있는 한국교회를 돌아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시야 왕의 개혁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나부터, 본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려 하지 않자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마지막 재앙은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집의 문인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을 영어로 ‘the Passover’(넘어감)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즉, 이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자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시야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백성인가? 나의 자존감과 가치는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묻는 데서부터 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시야의 개혁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왕 자신부터 시작했습니다. 개혁은 힘 있는 자, 가진 자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피와 눈물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열왕기하 23:3)
왕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먼저 뜻을 정하자 온 백성이 그 뜻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개혁이 잘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개혁을 먼저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부터, 저 공동체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솔선수범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변화를 요구하기에 앞서 자신이 변화에 앞장섰습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왕의 뜻을 따르겠다고 뜻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의 대표가 자신이 먼저 변화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야 그 기업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국가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바로 서면 그 공동체가 바로 서고, 지도자가 무너지면 그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내가 소통하지 않고 남에게 소통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사람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신뢰를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개혁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관행을 깨부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악한 습관과 관행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선왕들이 남겨 둔 잘못된 것들을 하나하나 해체했습니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 (열왕기하 23:24)
이스라엘은 그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우상을 섬겨 왔습니다. 요시야는 그 거짓 우상들을 없애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면서 내 안에 욕심과 정욕, 야망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 상태가 개혁되려면,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개혁을 원한다면 먼저 내 안에, 내 가정과 공동체 안에 있는 잘못된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개혁입니다.
세 번째, 본질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본질이 명백해야 부분적인 것을 고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 이스라엘 백성의 자기됨을 확인하며 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열왕기하 23:21)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해방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된 역사를 기억하자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생겼습니다.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 감동으로 개혁에 열심을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해방의 복을 주셨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광복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동안의 축복을 기억하면서 다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문제와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며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해 기도하며 방법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명이란 문제점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문제를 보는 것으로부터 개혁은 시작됩니다. 둘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나쁜 습관들, 기업의 잘못된 관행들, 정치·교육·문화 등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옳지 못한 모습들을 파악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경제적인 복, 민주화의 복, 교회 성장의 복에 감사하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개혁 정치를 펼친 요시야를 매우 칭찬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열왕기하 23:25)
요시야 전에도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니 얼마나 큰 칭찬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유다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악에 젖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요시야 때를 지나 다음 세대에 멸망시킬 뿐이었습니다.
변화와 개혁은 내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깨달았을 때, 바로 지금 하는 것입니다. 개혁은 늦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보이는 바로 그때가 변화할 시간이자 사명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개혁을 이루어 나갈 때, 하나님은 변화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감사하고 주실 축복을 믿으며 갈등과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신뢰와 평화와 화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23: 21 ~ 27
21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대한민국은 갈등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 7월에 한 언론매체(파이낸셜뉴스)가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대한민국이 ‘갈등 공화국’의 덫에 빠졌다. … 대내외 불확실성 파고를 넘기 위해 국민통합이 요구되는 시점이지만 지역갈등, 이념갈등, 남남갈등, 세대갈등이 대한민국을 혼돈의 블랙홀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갈등사회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단갈등의 인식지수를 묻는 국민여론 조사에서는 근로자와 경영자의 갈등(86%), 가난한 자와 부자의 갈등(85%), 진보와 보수의 갈등(81%) 순으로 대답이 나왔습니다. 내부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소통과 신뢰의 결핍’을 이야기했습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정치, 신뢰를 잃어버린 교육, 신뢰를 잃어버린 산업현장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의 결핍은 교회에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면한 위기를 보며 우리는 “왜?”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의 원인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유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다음 단계를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어떤 대안과 정책을 내놓아도 용납하기를 거부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믿지 못해서입니다. 불신은 소통의 부재를 낳습니다. 그리고 소통의 부재는 또다시 불신을 낳습니다. 악순환의 구조 안에 갇히는 된 것입니다.
불신과 소통의 부재로 인한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상대방을 멸시하는 의미의 신조어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단어 뒤에 벌레 ‘충’(蟲)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벌레 같은 존재’라는 의미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가부장적이고 배려심 없는 한국 남자를 빗대어 ‘한남충’이라고 하고, 자기 아이만 아는 몰지각한 엄마를 ‘맘충’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비판을 넘어선 비난이고, 조롱입니다.
비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은 열린 사회 안에서 좋은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비판을 넘어 비난과 조롱으로 인간 사이의 신뢰를 깨뜨리는 말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그러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을 지닌 사람, 자기 가치를 아는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며 배려할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과 소통하는 데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상응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서로 믿고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엄청난 자산일 뿐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기도 합니다. 공동의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상호신뢰와 협력의 태도로 소통 네트워크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 안에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다툼이 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목표, 공동의 선을 위해서는 양보할 줄 알고, 때로는 손해 볼 각오로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것이 잘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대방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열등감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남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나 자신도 믿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전과 통제의 부제는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성경은 믿음과 신뢰를 매우 강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과의 관계에서나 믿음과 신뢰는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성경은 끊임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 중 하나는,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되면 사람을 믿고 신뢰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지 않으면 사람 사이의 신뢰관계도 깨지게 될 것이다’입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자 이 시대에는 두 가지 위기가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비전의 부재’입니다. 비전이 없는 것이 왜 위기가 될까요? 비전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든 동기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전이 없는 학생에게는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전이 없는 직장인에게는 일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두 번째, ‘통제의 부재’입니다. 통제의 부재 속에서 질서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갔습니다. 무질서와 방종 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사기 기자는 21장 25절에 결론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비전과 통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무너지면, 인간은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잇속만 차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게 피해가 되고 방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인물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 공동체는 몰락하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안에 이러한 위기가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어떻게 해야 회복될 수 있을까요?
개혁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올해는 광복 71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945년 해방 후에 이 민족은 둘로 갈라졌습니다. 아직도 저 북녘 땅에는 광복의 빛이 비추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위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복이 주어졌습니다. 해방 후 우리에게는 두 가지 과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발전과 도약을 이루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반세기만에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풍요를 누리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더 큰 축복이 있습니다. 바로 신앙의 축복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하여 대한민국 국민 1/5 이상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초청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 나라의 경제와 정치, 그리고 교회를 진단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이 총체적으로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누어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로 인해 멸망하게 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남유다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대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다스렸던 55년간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어떤 인물입니까? 병 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15년을 더 허락받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때 낳은 아들이 므낫세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매우 악한 왕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이방인보다도 더 악했다고 기록합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열왕기하 21:11)
므낫세에 이어서 왕이 된 사람은 요시야입니다. 요시야는 므낫세의 손자로, 아버지가 빨리 죽어서 여덟 살에 왕위를 계승하여 31년을 다스립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던 그는 즉위 18년째인 26살에 말씀을 읽으면서 ‘이 나라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개혁을 시작합니다.
개혁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곳곳에서 개혁을 추진한다고 하지만 개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우리는 많이 봐 오지 않았습니까? 특히 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개혁일 경우 더욱 어렵습니다. 정부가 내세운 사대구조 개혁도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려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개혁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내년이 되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변화에 대한 긴박한 요청이 있는 한국교회를 돌아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시야 왕의 개혁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나부터, 본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나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려 하지 않자 하나님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마지막 재앙은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집의 문인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넘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유월절을 영어로 ‘the Passover’(넘어감)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즉, 이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자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시야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백성인가? 나의 자존감과 가치는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묻는 데서부터 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시야의 개혁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왕 자신부터 시작했습니다. 개혁은 힘 있는 자, 가진 자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피와 눈물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왕이 단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따르기로 하니라 (열왕기하 23:3)
왕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먼저 뜻을 정하자 온 백성이 그 뜻에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개혁이 잘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개혁을 먼저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부터, 저 공동체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솔선수범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변화를 요구하기에 앞서 자신이 변화에 앞장섰습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왕의 뜻을 따르겠다고 뜻을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의 대표가 자신이 먼저 변화하겠다고 마음을 먹어야 그 기업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국가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지도자가 바로 서면 그 공동체가 바로 서고, 지도자가 무너지면 그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내가 소통하지 않고 남에게 소통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사람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신뢰를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개혁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잘못된 관행을 깨부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악한 습관과 관행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선왕들이 남겨 둔 잘못된 것들을 하나하나 해체했습니다.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하였으니 … (열왕기하 23:24)
이스라엘은 그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우상을 섬겨 왔습니다. 요시야는 그 거짓 우상들을 없애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기도하면서 내 안에 욕심과 정욕, 야망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적 상태가 개혁되려면, 내 속에 있는 악한 것들을 내려놓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개혁을 원한다면 먼저 내 안에, 내 가정과 공동체 안에 있는 잘못된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개혁입니다.
세 번째, 본질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본질이 명백해야 부분적인 것을 고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의 정체성, 이스라엘 백성의 자기됨을 확인하며 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왕이 뭇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열왕기하 23:21)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해방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된 역사를 기억하자 마음속에 감사와 기쁨이 생겼습니다. 무엇이든지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 감동으로 개혁에 열심을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해방의 복을 주셨습니다. 바로 대한민국의 광복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동안의 축복을 기억하면서 다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문제와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며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 아니라, 변화를 위해 기도하며 방법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명이란 문제점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문제를 보는 것으로부터 개혁은 시작됩니다. 둘째,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나쁜 습관들, 기업의 잘못된 관행들, 정치·교육·문화 등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옳지 못한 모습들을 파악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경제적인 복, 민주화의 복, 교회 성장의 복에 감사하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의 내용입니다.
성경은 개혁 정치를 펼친 요시야를 매우 칭찬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열왕기하 23:25)
요시야 전에도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다니 얼마나 큰 칭찬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유다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악에 젖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요시야 때를 지나 다음 세대에 멸망시킬 뿐이었습니다.
변화와 개혁은 내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깨달았을 때, 바로 지금 하는 것입니다. 개혁은 늦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보이는 바로 그때가 변화할 시간이자 사명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개혁을 이루어 나갈 때, 하나님은 변화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감사하고 주실 축복을 믿으며 갈등과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신뢰와 평화와 화해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주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