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신앙은 감탄사다! – 우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신앙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신앙은 감탄사다.”
신앙을 가지면 주어진 삶이 얼마나 경이롭고,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인지 스스로 감탄하는 삶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울긋불긋한 아름다운 가을 풍경과 겨울의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면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때도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의 입과 마음에서 감탄사가 나올 때 우리 마음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감탄하며 사는 것은 인생을 멋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도 자기 삶에서 신비를 경험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감탄하면서 살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어떤 시인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불행은 감탄사를 잃어버린 데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이유는 감탄사를 잊고 사는 우리의 마음과 모습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생텍쥐베리가 쓴 「어린 왕자」에서 무감각해진 어른들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본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나비를 수집하는지?’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가 몇인가?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계란형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봤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친다.”
생텍쥐베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어른들,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지 않는 어른들, 과거에만 집착하는 어른들을 경고하는 글을 썼습니다. 어른들은 상상력이 없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에 대한 마음을 열어놓지 않아서 진정한 경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감탄사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감탄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139:17)
시인은 하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하나님의은혜, 하나님의 축복, 이 모든 것이 시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너무나 놀랍고 보배로운 하나님을 찬탄하며 노래를 쓰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런 감탄사는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찬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최고의 걸작품인 남자와 여자를 친히 만드시고 당신 스스로 ‘보시기에 정말 좋구나!’하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감탄하신 대상은 자연만물이었고 마지막 지으신 인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탄하시면서 인간들에게도 감탄하는 마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나서 하와를 만드신 후 친히 하와를 데리고 아담에게 오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여자를 멋있게 만드셨는지 아담을 통해서 감탄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인을 보면서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로다!”라고 감탄하면서 기뻐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첫 번째 감탄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 만물과 인간을 보면서 감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감탄은 인간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감탄 없는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겠습니까? 반복되는 허무감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감탄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어쩌다 살게 된 지루한 인생, 반복되는 인생, 경탄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고통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도 경탄하신 하나님의 세계, 자연만물, 인간의 모든 것에 경탄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인간들은 감탄하면서 살 이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감탄하지 않고 사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 하나하나에 감탄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탄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감탄은 가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감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 삶이 활력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개봉된 “식객”이라는 영화를 보면 두 요리사 중 누가 진정한 최고의 요리사인지 겨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리사들은 목숨까지 걸면서 자신의 요리가 최고인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한 요리사는 음식에 자신의 마음 전부를 쏟아 넣으면서 음식을 만듭니다. 또 한 요리사는 승리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처럼 음식을 만듭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카피라이터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음식의 맛은 혀끝이 아닌 가슴으로 느껴보아야 진짜 맛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음식의 맛은 혀로 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음식의 맛은 혀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음식의 맛을 정신적인 차원까지 승화시키려고 애쓰면서 결론으로 이런 말을 영화 속에 집어넣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맛있는 음식은 세상 엄마의 숫자와 동일하다.”
가장 맛있는 최고의 음식은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는 것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가슴으로 느낄 때 최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루번스타인(Root-Bernstein)이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가슴으로 느끼는 창조적 생각과 직관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음악가 베토벤은 귀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음악을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베토벤의 말입니다.
“나는 악상을 악보로 옮기기 전에 아주 오랫동안, 어느 때는 하루 종일이라도 머릿속에 품고 있곤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것은 버린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작품을 정밀하게 다듬는다. 악곡의 이미지를 모든 각도에서 보고 듣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조각품과 같다. 그리고 나면 이 곡을 악보로 옮겨 적는 일만 남게 된다.”
이 책은 놀랍게도 음악이나 예술방면의 세계에서만 창조적 생각과 직관적 가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983년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바버라 맥클린턱(Babara McClintock)이라는 생물학자가 있습니다. 옥수수 밭에서 유전학 연구를 하면서 노벨상을 받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옥수수를 연구할 때 나는 그것들의 외부에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서 그 체계의 일부로 존재했다. 나는 염색체 내부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 옥수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나 자신처럼 느껴졌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내가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진정한 과학자가 되면 예술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직관으로 정신적인 세계, 마음의 세계로 자기 분야 속에 깊이 뛰어 들어가게 됩니다. 예술가와 과학자의 세계도 이렇다면 영적인 세계는 얼마나 계시적이고 영적이며 직관적인 사고가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자신이 만들어 주셨던 놀라운 솜씨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경이롭게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생각이 깊어지면 감사가 됩니다.
감사가 충만하면 경탄이 됩니다.
경탄이 축적되면 찬양이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 안에 경탄과 경이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가슴 떨리는 기쁨과 감사가 있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신앙, 계시의 영을 느끼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으로 오는 경지에 들어 갈 때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신앙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시인은 잠자고 깨는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감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탄은 일상적인 영역으로 확대됩니다. 잠을 잘 때와 깰 때에도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함께 계시고 그 생각이 얼마나 놀라우신지 감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 139:18)
시인은 주님이 누구이신지,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생각만 해도 셀 것이 너무 많아서 불면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 불면증이 있다면 놀라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지켜주신 하나님, 축복해 주신 하나님, 자신을 만들어주신 하나님 때문에 잠이 안 들기에 하나님만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하는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잠이 푹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생각에 열중하면 잠에 빠져 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탄하는 마음이 불면증을 다스리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 불면증이 앓고 계십니까? 불면증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남들은 다 자는데 자신만 혼자 깨어있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불면증이 있는 분들은 약도 먹어보고, 하나부터 시작해서 천까지 숫자를 세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불면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세요.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영점에서부터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세요. 그러면 시인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그냥 잠에 들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 139:18)
시인은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 생각에서 떠나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고 지켜주시며 잠들 때에도 함께 계시고 눈을 떴을 때에도 바라보시는 은혜의 역사에 너무 놀라고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리셔서 ‘하나님, 저런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나를 왜 버리십니까?’하고 예수님께서 질투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매일매일 우리 삶을 감탄스럽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피 값을 주고 사신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축복 받은 자신, 은총 받은 자신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축복해 주시기에 우리는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관찰을 하면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활기가 넘칠 수 있도록 초청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감탄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계획, 하나님 선물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탄하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감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오! 놀랍도다!
나의 심장이 뛰다니!
내가 숨을 쉬다니!
내가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니!
내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니!
내가 두발로 걷고 산책할 수 있다니!
내가 땀 흘릴 수 있는 건강을 가졌다니!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니!
찬란한 삶, 소중한 삶에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는 축복을 가슴으로 느끼고, 인생의 소중함을 감사하고 감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감탄사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이 얼마나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가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내 눈이 보입니다.
내 귀가 들립니다.
내 가슴이 뜁니다.
내 손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에 감탄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감격하게 하시고, 내게 주어진 자연 만물과 삶의 환경 속에 감격하며 감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살면서 억눌리고 주눅 들어 움츠리지 말고 생명의 주님과 기뻐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시편 139: 13 ~ 18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신앙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신앙은 감탄사다.”
신앙을 가지면 주어진 삶이 얼마나 경이롭고,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존재인지 스스로 감탄하는 삶의 모습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울긋불긋한 아름다운 가을 풍경과 겨울의 눈 덮인 산을 바라보면서 저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때도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우리의 입과 마음에서 감탄사가 나올 때 우리 마음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감탄하며 사는 것은 인생을 멋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신앙을 지니지 않은 사람도 자기 삶에서 신비를 경험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 감탄하면서 살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어떤 시인은 현대인에게 있어서 불행은 감탄사를 잃어버린 데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이유는 감탄사를 잊고 사는 우리의 마음과 모습 때문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생텍쥐베리가 쓴 「어린 왕자」에서 무감각해진 어른들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본 적이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나비를 수집하는지?’라는 말을 그들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나이가 몇이지? 형제가 몇인가? 체중은 얼마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하고 그들은 묻는다. 그제야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계란형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분홍빛의 벽돌집을 봤어요.’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참 좋은 집이구나!’하고 소리친다.”
생텍쥐베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어른들, 새로운 것에 마음을 열지 않는 어른들, 과거에만 집착하는 어른들을 경고하는 글을 썼습니다. 어른들은 상상력이 없고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에 대한 마음을 열어놓지 않아서 진정한 경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감탄사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감탄하는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139:17)
시인은 하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하나님의은혜, 하나님의 축복, 이 모든 것이 시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너무나 놀랍고 보배로운 하나님을 찬탄하며 노래를 쓰고 있습니다. 시인의 이런 감탄사는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나서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찬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최고의 걸작품인 남자와 여자를 친히 만드시고 당신 스스로 ‘보시기에 정말 좋구나!’하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감탄하신 대상은 자연만물이었고 마지막 지으신 인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탄하시면서 인간들에게도 감탄하는 마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나서 하와를 만드신 후 친히 하와를 데리고 아담에게 오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여자를 멋있게 만드셨는지 아담을 통해서 감탄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여인을 보면서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로다!”라고 감탄하면서 기뻐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인간의 첫 번째 감탄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 만물과 인간을 보면서 감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감탄은 인간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감탄 없는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겠습니까? 반복되는 허무감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감탄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어쩌다 살게 된 지루한 인생, 반복되는 인생, 경탄할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고통 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도 경탄하신 하나님의 세계, 자연만물, 인간의 모든 것에 경탄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인간들은 감탄하면서 살 이유와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감탄하지 않고 사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 하나하나에 감탄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탄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감탄은 가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감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을 지니기 때문에 우리 삶이 활력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개봉된 “식객”이라는 영화를 보면 두 요리사 중 누가 진정한 최고의 요리사인지 겨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리사들은 목숨까지 걸면서 자신의 요리가 최고인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합니다. 한 요리사는 음식에 자신의 마음 전부를 쏟아 넣으면서 음식을 만듭니다. 또 한 요리사는 승리하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처럼 음식을 만듭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카피라이터가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음식의 맛은 혀끝이 아닌 가슴으로 느껴보아야 진짜 맛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음식의 맛은 혀로 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음식의 맛은 혀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음식의 맛을 정신적인 차원까지 승화시키려고 애쓰면서 결론으로 이런 말을 영화 속에 집어넣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맛있는 음식은 세상 엄마의 숫자와 동일하다.”
가장 맛있는 최고의 음식은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 있는 것이라는 글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가슴으로 느낄 때 최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루번스타인(Root-Bernstein)이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가슴으로 느끼는 창조적 생각과 직관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음악가 베토벤은 귀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음악을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연주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베토벤의 말입니다.
“나는 악상을 악보로 옮기기 전에 아주 오랫동안, 어느 때는 하루 종일이라도 머릿속에 품고 있곤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부분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것은 버린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 그리고 나서 나는 작품을 정밀하게 다듬는다. 악곡의 이미지를 모든 각도에서 보고 듣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조각품과 같다. 그리고 나면 이 곡을 악보로 옮겨 적는 일만 남게 된다.”
이 책은 놀랍게도 음악이나 예술방면의 세계에서만 창조적 생각과 직관적 가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과학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983년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바버라 맥클린턱(Babara McClintock)이라는 생물학자가 있습니다. 옥수수 밭에서 유전학 연구를 하면서 노벨상을 받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옥수수를 연구할 때 나는 그것들의 외부에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서 그 체계의 일부로 존재했다. 나는 염색체 내부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내 친구처럼 느껴졌다. 옥수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나 자신처럼 느껴졌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내가 나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진정한 과학자가 되면 예술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직관으로 정신적인 세계, 마음의 세계로 자기 분야 속에 깊이 뛰어 들어가게 됩니다. 예술가와 과학자의 세계도 이렇다면 영적인 세계는 얼마나 계시적이고 영적이며 직관적인 사고가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시인은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부터 자신이 만들어 주셨던 놀라운 솜씨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경이롭게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생각이 깊어지면 감사가 됩니다.
감사가 충만하면 경탄이 됩니다.
경탄이 축적되면 찬양이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 안에 경탄과 경이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가슴 떨리는 기쁨과 감사가 있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신앙, 계시의 영을 느끼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으로 오는 경지에 들어 갈 때 우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신앙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시인은 잠자고 깨는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감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탄은 일상적인 영역으로 확대됩니다. 잠을 잘 때와 깰 때에도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함께 계시고 그 생각이 얼마나 놀라우신지 감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 139:18)
시인은 주님이 누구이신지, 주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생각만 해도 셀 것이 너무 많아서 불면증에 걸린 것 같습니다. 시인에게 불면증이 있다면 놀라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지켜주신 하나님, 축복해 주신 하나님, 자신을 만들어주신 하나님 때문에 잠이 안 들기에 하나님만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랑하는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잠이 푹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생각에 열중하면 잠에 빠져 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탄하는 마음이 불면증을 다스리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 불면증이 앓고 계십니까? 불면증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남들은 다 자는데 자신만 혼자 깨어있다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불면증이 있는 분들은 약도 먹어보고, 하나부터 시작해서 천까지 숫자를 세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은 모두 소용이 없습니다.
불면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세요. 아무 것도 아닌 나를 영점에서부터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세요. 그러면 시인처럼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그냥 잠에 들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편 139:18)
시인은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 생각에서 떠나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고 지켜주시며 잠들 때에도 함께 계시고 눈을 떴을 때에도 바라보시는 은혜의 역사에 너무 놀라고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리셔서 ‘하나님, 저런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나를 왜 버리십니까?’하고 예수님께서 질투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복음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매일매일 우리 삶을 감탄스럽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의 피 값을 주고 사신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축복 받은 자신, 은총 받은 자신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축복해 주시기에 우리는 인생을 수동적으로 살지 않고 적극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관찰을 하면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인생의 활기가 넘칠 수 있도록 초청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감탄하면서 감사와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계획, 하나님 선물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탄하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감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오! 놀랍도다!
나의 심장이 뛰다니!
내가 숨을 쉬다니!
내가 저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니!
내가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니!
내가 두발로 걷고 산책할 수 있다니!
내가 땀 흘릴 수 있는 건강을 가졌다니!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니!
찬란한 삶, 소중한 삶에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는 축복을 가슴으로 느끼고, 인생의 소중함을 감사하고 감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은 감탄사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이 얼마나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가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내 눈이 보입니다.
내 귀가 들립니다.
내 가슴이 뜁니다.
내 손이 움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에 감탄하는 축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감격하게 하시고, 내게 주어진 자연 만물과 삶의 환경 속에 감격하며 감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살면서 억눌리고 주눅 들어 움츠리지 말고 생명의 주님과 기뻐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