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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 안에서 사도 바울의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고백하게 된 것은 대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도 다녔고, 예배도 잘 드렸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알게 되고,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주님을 위해서 내 일생을 드리고 싶다’고 결정한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복음서를 읽는 것이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만나셨구나, 예수님은 성품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읽게 되면서 예수님이 정말로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의 글을 통해 알게 된 바울의 생각과 그의 삶의 모습은 제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본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유대 바리새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매우 핍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일까요?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경의 1/3가량이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안에서 그의 영향력은 아주 놀랄 만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어거스틴(St. Augustine)도 바울의 로마서를 읽으면서 회심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장로교를 세운 요한 칼빙(Calvin, Jean)도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감리교회의 시조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신학자들과 신앙인들이 바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생명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글에 무엇이 있기에 그런 것일까요?
저도 로마서를 읽으면서 회심하게 되었고, 고린도서를 읽으면서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도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울의 이성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첫 번째는 제자 베드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인격을 목격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예수님의 더 깊은 뜻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자기의 몸으로, 자기의 삶으로 가장 잘 따라간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울은 젊은 시절, 유대 랍비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 교육, 즉 히브리 종교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장성해서는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였던 ‘다소’라는 곳에서 헬라 철학을 배우게 되고 거기에 심취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철저한 히브리적 종교인인 동시에 헬라 철학을 갖고 있던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주 거북하고 역겨웠습니다. 심지어 화가 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상한 이단이 들어와서 히브리 종교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성과 지혜를 중시하는 헬라 철학의 가치관을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종교인, 지성인으로서 ‘예수’라는 인물을 연구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라는 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저 사람들이 저렇게 그를 따라갈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여기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는 소식은, 쓰레기와도 같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예수님을 믿는 집단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유대 공의회의 허락을 받아 그들을 다 잡아 들여야겠다고 다짐하며 다메섹을 향해 나간 것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의 도를 알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이 갖고 있었던 생각, 사고방식과 함께 예수님을 믿은 후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린도전서 1:22∼23)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이 유대인인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아주 거리끼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거리낀다’는 것은 헬라어로 스칸달론(skandalon)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 즉 걸림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스캔들(scandal), 추문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거리끼는 것, 스캔들 중에 스캔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누명을 쓰셨습니다. ‘왕으로 오셨는데 어찌 소와 양이 잠드는 구유에서 나실 수가 있는가?’, ‘인간 대접도 못 받는 왕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왕이면서 어떻게 가난하고 낮은 자들의 친구가 되실 수 있는가?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는가? 손가락질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예수님을 향한 숱한 의문과 의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왕인데 어떻게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가 있는가?’
당대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에게는 행하지 않는 형벌이었습니다. 반역자들에게, 그것도 아주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폭도에게 행하는 끔찍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느냐? 어떻게 메시아라는 구원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느냐? 이것을 좀 해결해봐라. 이것이 타당한 이야기냐?”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스캔들이고, 헬라 문화의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눈에는 미련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그는 치부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80도 전환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십자가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미련한 것이라고 느꼈지만, 이제 보니 자기가 멸망할 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알게 된 후에 십자가의 도를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고백입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4)
십자가 속에 있는 것은, 스캔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속의 그것은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과 지혜라고 아주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종교성을 지닌 유대인들아, 철학적인 이성에 의지하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아,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메시아다. 유대인들아, 너희가 표적을 구하느냐? 이 땅에 나타난 가장 구체적인 하나님의 표적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다. 헬라인들아, 너희가 지혜를 찾느냐? 가장 참된 지혜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고 지혜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울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힘과 능력이 많으신 강력한 분’을 늘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비천해지고, 연약해지고, 가장 낮아졌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분으로 다가오신 것을 보며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우리의 죄, 인간의 죄 때문에 아들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왕인 줄 알았는데 종처럼 왔다. 세상을 호령하며 지배할 자인 줄 알았는데 세상을 섬기는 자로 왔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비참한 자리에 내려갔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당대에는 왕이 고난을 당한다,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이라면 당연히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통치하고, 악과 불의를 심판하며, 세상의 무질서와 편견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 왕이 고난을 당하고 패배의 자리에 들어갔으니, 통치해야 할 악에 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 속에서 그때까지의 그의 생각과 판단을 다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죽음이다. 너희의 죄악과 너희의 불의와 너희의 모든 악함을 내가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버리고 또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방법이 있었습니다. “너희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라.”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린 양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죄 값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양 한 마리의 죽음으로 너희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이스라엘의 대속적인 죽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갈라디아서 3:13)
내가 받을 죄, 내가 받을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믿은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매년 어린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피의 제물을 드리던 모든 제사 행위를 멈춘 것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바로 그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셨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을 야기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놓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 이것이 초대교회가 갖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깨달은 복음이자 그가 갖게 된 믿음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죄가 죽고 생명이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 (마가복음 1:11)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놓으심으로 새로운 아들과 새로운 딸을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신 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악과 불의와 허물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이 보이는 장소이고, 우리의 가식과 거짓됨과 인간의 무력과 폭력이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는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의 죄를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에 나타나듯 예수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 그것이었습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 (마가복음 15:34)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버리신 것입니다. 죽음 속에,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 우리의 탄식, 우리의 절망, 우리의 분노,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다 쏟아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버렸다’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고 사랑의 사건입니다.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입니다.
이 시간 짧은 영상 하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영 상 –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축복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길을 손수 여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당신의 아들에게 인간의 모든 죄와 불의를 다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어린 양이 되어 하나님 앞에 당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땅의 생명을 새롭게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딸이라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놓을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가슴을 쭉 펴 봅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을 누립시다. 나를 억눌렀던 죄악들, 교만함, 거짓, 슬픔, 탄식, 외로움…,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과 생명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로 살아야 합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축복을 매일 경험하며 누리는 주님의 복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 18 ~ 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기독교 역사 안에서 사도 바울의 영향력은 상당합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제 인생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고백하게 된 것은 대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도 다녔고, 예배도 잘 드렸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알게 되고,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 ‘주님을 위해서 내 일생을 드리고 싶다’고 결정한 것은 대학생 때였습니다.
복음서를 읽는 것이 제게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을 만나셨구나, 예수님은 성품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읽게 되면서 예수님이 정말로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의 글을 통해 알게 된 바울의 생각과 그의 삶의 모습은 제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본래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유대 바리새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매우 핍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일까요?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경의 1/3가량이 바울이 직접 쓴 서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 안에서 그의 영향력은 아주 놀랄 만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어거스틴(St. Augustine)도 바울의 로마서를 읽으면서 회심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장로교를 세운 요한 칼빙(Calvin, Jean)도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감리교회의 시조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수많은 신학자들과 신앙인들이 바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생명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의 글에 무엇이 있기에 그런 것일까요?
저도 로마서를 읽으면서 회심하게 되었고, 고린도서를 읽으면서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도 경험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바울의 이성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첫 번째는 제자 베드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인격을 목격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읽다 보면 예수님의 더 깊은 뜻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자기의 몸으로, 자기의 삶으로 가장 잘 따라간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울은 젊은 시절, 유대 랍비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 교육, 즉 히브리 종교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조금 장성해서는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였던 ‘다소’라는 곳에서 헬라 철학을 배우게 되고 거기에 심취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철저한 히브리적 종교인인 동시에 헬라 철학을 갖고 있던 지성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주 거북하고 역겨웠습니다. 심지어 화가 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상한 이단이 들어와서 히브리 종교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성과 지혜를 중시하는 헬라 철학의 가치관을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종교인, 지성인으로서 ‘예수’라는 인물을 연구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라는 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저 사람들이 저렇게 그를 따라갈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자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여기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는 소식은, 쓰레기와도 같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예수님을 믿는 집단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유대 공의회의 허락을 받아 그들을 다 잡아 들여야겠다고 다짐하며 다메섹을 향해 나간 것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의 도를 알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이 갖고 있었던 생각, 사고방식과 함께 예수님을 믿은 후 그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린도전서 1:22∼23)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이 유대인인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아주 거리끼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거리낀다’는 것은 헬라어로 스칸달론(skandalon)입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 즉 걸림돌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스캔들(scandal), 추문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결국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거리끼는 것, 스캔들 중에 스캔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누명을 쓰셨습니다. ‘왕으로 오셨는데 어찌 소와 양이 잠드는 구유에서 나실 수가 있는가?’, ‘인간 대접도 못 받는 왕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왕이면서 어떻게 가난하고 낮은 자들의 친구가 되실 수 있는가?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셨는가? 손가락질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가?’ 예수님을 향한 숱한 의문과 의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왕인데 어떻게 가장 비참한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가 있는가?’
당대 십자가형은 로마인들에게는 행하지 않는 형벌이었습니다. 반역자들에게, 그것도 아주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폭도에게 행하는 끔찍한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느냐? 어떻게 메시아라는 구원주가 십자가에 못 박히느냐? 이것을 좀 해결해봐라. 이것이 타당한 이야기냐?”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스캔들이고, 헬라 문화의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눈에는 미련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그는 치부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80도 전환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십자가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미련한 것이라고 느꼈지만, 이제 보니 자기가 멸망할 자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알게 된 후에 십자가의 도를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고백입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4)
십자가 속에 있는 것은, 스캔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속의 그것은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과 지혜라고 아주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종교성을 지닌 유대인들아, 철학적인 이성에 의지하고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아,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봐라.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메시아다. 유대인들아, 너희가 표적을 구하느냐? 이 땅에 나타난 가장 구체적인 하나님의 표적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다. 헬라인들아, 너희가 지혜를 찾느냐? 가장 참된 지혜가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고 지혜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바울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힘과 능력이 많으신 강력한 분’을 늘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비천해지고, 연약해지고, 가장 낮아졌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분으로 다가오신 것을 보며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 우리의 죄, 인간의 죄 때문에 아들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왕인 줄 알았는데 종처럼 왔다. 세상을 호령하며 지배할 자인 줄 알았는데 세상을 섬기는 자로 왔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비참한 자리에 내려갔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은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당대에는 왕이 고난을 당한다,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이라면 당연히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통치하고, 악과 불의를 심판하며, 세상의 무질서와 편견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래야 하는 왕이 고난을 당하고 패배의 자리에 들어갔으니, 통치해야 할 악에 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 속에서 그때까지의 그의 생각과 판단을 다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죽음이다. 너희의 죄악과 너희의 불의와 너희의 모든 악함을 내가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린 것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버리고 또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방법이 있었습니다. “너희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라.” 일 년에 한 번,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린 양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 죄 값을 치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양 한 마리의 죽음으로 너희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이스라엘의 대속적인 죽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갈라디아서 3:13)
내가 받을 죄, 내가 받을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믿은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매년 어린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피의 제물을 드리던 모든 제사 행위를 멈춘 것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이 바로 그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셨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권세를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죽음을 야기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놓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와 죽음을 이기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 이것이 초대교회가 갖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깨달은 복음이자 그가 갖게 된 믿음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죄가 죽고 생명이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 (마가복음 1:11)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놓으심으로 새로운 아들과 새로운 딸을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신 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악과 불의와 허물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이 보이는 장소이고, 우리의 가식과 거짓됨과 인간의 무력과 폭력이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는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의 죄를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외면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4절에 나타나듯 예수님의 마지막 부르짖음이 그것이었습니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 (마가복음 15:34)
하나님이 예수님을 저주하신 것입니다. 버리신 것입니다. 죽음 속에,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 우리의 탄식, 우리의 절망, 우리의 분노,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다 쏟아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버렸다’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고 사랑의 사건입니다.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입니다.
이 시간 짧은 영상 하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 영 상 –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축복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길을 손수 여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당신의 아들에게 인간의 모든 죄와 불의를 다 넘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어린 양이 되어 하나님 앞에 당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 땅의 생명을 새롭게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딸이라고,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내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놓을 정도로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가슴을 쭉 펴 봅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을 누립시다. 나를 억눌렀던 죄악들, 교만함, 거짓, 슬픔, 탄식, 외로움…,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과 생명의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로 살아야 합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성도님들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축복을 매일 경험하며 누리는 주님의 복된 자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