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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찾아서 -야곱 이야기 1-

창세기 47: 7 ~ 10

김지철 목사

2012.06.24

모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큰 의미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아들들의 경우 아버지의 영향력은 더욱 큽니다. 모든 아들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어린 시절 가장 큰 충격은,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거나 혹은 아버지와 따로 사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버지가 곁에 있어도 아버지가 없다고 느끼는, 다시 말하면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부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빠는 왜?’ 라는 한 초등학생의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일 것입니다.

<아빠는 왜?>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냉장고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강아지보다도 아빠의 역할이 없다는 아이의 목소리입니다.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 사망을 통한 아버지 부재의 경험이 아니라,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게도 아버지 부재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란 이름을 불러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것이 어린 시절 항상 열등감으로 작용했습니다. 제 마음은 늘 시리고 아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부터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를 때까지 그 아픔은 계속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가 없어서 가슴이 텅텅 빈 듯한 느낌을 가진 적 있습니까? 구약의 창세기에도 아버지 부재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이삭과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태도가 아들의 모습을 만들어갑니다.

이삭은 많은 사람들에게 겸손한 인물, 순종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삭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삭은 유약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큰 아버지 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크다보니 아들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위대해 보였기 때문에 아들 이삭은 늘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도 세상에서 잘나가는 아버지들이 앉아 계실 겁니다. 아주 특별한 아버지들, 존경과 사랑을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들은 바빠서 집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들들은 아버지의 실제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보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바로 이삭이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이삭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 사건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꽁꽁 묶고서 칼로 자기를 내려치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를 불에 태워버리는 재물로 하나님께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브라함의 이 모습이 위대한 순종과 믿음의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아들 이삭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만, 어린 이삭에게 아버지의 이 행동은 배신행위였고, 큰 상처였을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와의 관계와 사건들을 생각했을 때, 이삭이 조용하고 겸손한 순종의 인물이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삭의 아들 야곱은 어떠했을까요?
야곱도 심각하게 아버지 부재를 경험을 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한 후, 쌍둥이인 두 아들을 얻게 됩니다. 형의 이름은 에서였고 동생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고 붉은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으며, 매우 남성적이고 외향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내성적이고,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삭이 누구를 더 좋아했을까요? 이삭은 에서를 더 예뻐하였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모습의 야곱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자신이 살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는 에서에게서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야성적이고 저돌적인 사냥꾼.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고, 투쟁적이고 저항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부모들도 자녀를 키우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 나는 이런 것 못했는데 넌 꼭 해봐라. 나는 이런 직업 가지고 싶었는데 못했다. 너는 꼭 이 직업을 가져라.”라며 강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리만족을 위해 자녀를 키우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편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어떤 아들, 어떤 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자녀는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자녀의 자발성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의사결정권을 아버지, 어머니가 갖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결국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자녀가 살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생각들을 쏟아 붓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나는 나고 자녀는 자녀입니다. 자녀는 나와 독립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야곱의 평생 소원은 축복받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야곱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야곱은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소외된 아들이었습니다. 늘 관심 밖에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소원은 한가지뿐이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일관되고도 간절한 바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받을 소중한 아들인 것을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축복을 염원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복을 받기 위해 나선 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야 참된 위로와 힘을 얻게 되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 인생의 결론 부분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어서 먹고 마실 것이 하나도 없던 중에 야곱은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 땅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애굽의 왕 바로를 만납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세기 47:8-9)

야곱은 바로 왕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의 지난날들이 험악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야곱의 생애를 뒤돌아보면 정말 그러합니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화난 형 에서를 피해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집에서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에 집에서는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무려 7년 동안 수고하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또다시 7년을 땀 흘려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을 고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예뻐하던 아들 요셉이 형제들, 즉 자신의 아들들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는 일을 겪습니다. 야곱은 다시 요셉을 만날 때까지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탄식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참 슬픈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험악하고 척박한 세월을 지낸 야곱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메(창세기 47:7)

야곱은 바로를 만나서 그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두 세절 뒤에 바로를 또 축복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세기 47:10)

야곱의 평생 소원은 축복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인생이 많이 변했습니다. 축복을 구하던 자가 축복을 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야곱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것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해서 나왔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세상과 이웃에게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만 붙잡히면, 다른 세계가 차단됩니다. 오직 자기만을 향해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구하는 만큼 받은 축복을 매일매일 확인해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닫혀진 문이 열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고 축복받기를 원했던 야곱은 굉장히 처절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던 것도 바로 그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먹이고 장자권을 탈취한 것도 그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육신의 형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축복을 향한 나그네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무엇일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복,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나를 확인하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야곱을 변화시켰습니다.

야곱은 크게 두 번 하나님을 만납니다. 첫 번째는 고향을 떠나면서 벧엘이라는 곳에서입니다. 그는 나그네 신세였습니다. 길에서 잠을 자기 위해 돌을 베게 삼아 누웠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는데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부모에게 주었던 그 약속을 네게 주겠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하십니다.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세기 28:14)

야곱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의 역사가 흐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나만 움켜쥐고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고,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라는 믿음의 사건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이제 남을 축복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의심하고, 욕심을 부립니다. 야곱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잘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그에게는 이제 여유와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경제적인 풍요도 얻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두려움이 남아있습니다. ‘형 에서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아직도 화를 내고 있으면 어쩌지? 어떻게 내가 형 에서를 만날 수 있을까?’ 그는 두려움으로 고통 받으면서 얍복강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만남입니다.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야곱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6)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세기 32:28)

이제는 더 이상 발꿈치나 잡는 탐욕스런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하나님과 싸워 이긴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 받기를 바라는 야곱의 간절함을 보시고 친히 져주셨습니다.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열망을 통해서 온 세계가 축복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아버지는 아들에게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아버지는 이웃을 축복하는 거룩한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역할을 한다 해도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의 아버지를 뛰어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무한한 에너지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너를 축복함은 내가 너를 통해서 세상이 축복받기를 원함이다. 내가 너를 축복함은 네가 밟는 땅이 복 받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해서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에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로 세워지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렇게도 축복받기를 원했던 야곱이 이제는 바로왕을 향해서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들어가면서 축복하고 나오면서 축복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불만과 불평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렇게 섭섭하십니까? 내 인생은 왜 이따위인가 하고 스스로 삶을 내려 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버지 부재 경험을 인생 마지막까지 끌고 갈 생각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훨씬 더 위대하게 여기십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이 놀라운 축복의 비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세상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아들이고, 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이제 제가 밟는 땅에 복 내려주세요. 하나님 이제 제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깊은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마음껏 선포하고, 세상을 향해서 축복하는 그런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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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7: 7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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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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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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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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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모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큰 의미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아들들의 경우 아버지의 영향력은 더욱 큽니다. 모든 아들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어린 시절 가장 큰 충격은,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거나 혹은 아버지와 따로 사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버지가 곁에 있어도 아버지가 없다고 느끼는, 다시 말하면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부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빠는 왜?’ 라는 한 초등학생의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일 것입니다.

<아빠는 왜?>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냉장고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강아지보다도 아빠의 역할이 없다는 아이의 목소리입니다. 부모의 이혼이나 별거, 사망을 통한 아버지 부재의 경험이 아니라, 곁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게도 아버지 부재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란 이름을 불러보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것이 어린 시절 항상 열등감으로 작용했습니다. 제 마음은 늘 시리고 아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부터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를 때까지 그 아픔은 계속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가 없어서 가슴이 텅텅 빈 듯한 느낌을 가진 적 있습니까? 구약의 창세기에도 아버지 부재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이삭과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태도가 아들의 모습을 만들어갑니다.

이삭은 많은 사람들에게 겸손한 인물, 순종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삭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삭은 유약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큰 아버지 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크다보니 아들은 스스로를 왜소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위대해 보였기 때문에 아들 이삭은 늘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도 세상에서 잘나가는 아버지들이 앉아 계실 겁니다. 아주 특별한 아버지들, 존경과 사랑을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들은 바빠서 집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들들은 아버지의 실제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보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바로 이삭이 그러했습니다. 게다가 이삭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 사건을 겪게 됩니다.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꽁꽁 묶고서 칼로 자기를 내려치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를 불에 태워버리는 재물로 하나님께 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브라함의 이 모습이 위대한 순종과 믿음의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아들 이삭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아버지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테지만, 어린 이삭에게 아버지의 이 행동은 배신행위였고, 큰 상처였을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와의 관계와 사건들을 생각했을 때, 이삭이 조용하고 겸손한 순종의 인물이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삭의 아들 야곱은 어떠했을까요?
야곱도 심각하게 아버지 부재를 경험을 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한 후, 쌍둥이인 두 아들을 얻게 됩니다. 형의 이름은 에서였고 동생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에서는 털이 많고 붉은 피부색을 지니고 있었으며, 매우 남성적이고 외향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내성적이고,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이삭이 누구를 더 좋아했을까요? 이삭은 에서를 더 예뻐하였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모습의 야곱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자신이 살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는 에서에게서 대리만족을 느꼈습니다. 야성적이고 저돌적인 사냥꾼.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고, 투쟁적이고 저항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부모들도 자녀를 키우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야, 나는 이런 것 못했는데 넌 꼭 해봐라. 나는 이런 직업 가지고 싶었는데 못했다. 너는 꼭 이 직업을 가져라.”라며 강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대리만족을 위해 자녀를 키우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는, 편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어떤 아들, 어떤 딸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자녀는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자녀의 자발성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의사결정권을 아버지, 어머니가 갖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결국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자녀가 살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의 생각들을 쏟아 붓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나는 나고 자녀는 자녀입니다. 자녀는 나와 독립된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야곱의 평생 소원은 축복받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야곱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야곱은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소외된 아들이었습니다. 늘 관심 밖에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소원은 한가지뿐이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일관되고도 간절한 바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약속을 이어받을 소중한 아들인 것을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축복을 염원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복을 받기 위해 나선 길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야 참된 위로와 힘을 얻게 되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 인생의 결론 부분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뭄이 들어서 먹고 마실 것이 하나도 없던 중에 야곱은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 땅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애굽의 왕 바로를 만납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세기 47:8-9)

야곱은 바로 왕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의 지난날들이 험악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야곱의 생애를 뒤돌아보면 정말 그러합니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화난 형 에서를 피해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집에서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에 집에서는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무려 7년 동안 수고하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의 속임수에 걸려들어 또다시 7년을 땀 흘려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을 고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예뻐하던 아들 요셉이 형제들, 즉 자신의 아들들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가는 일을 겪습니다. 야곱은 다시 요셉을 만날 때까지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탄식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야말로 참 슬픈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험악하고 척박한 세월을 지낸 야곱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메(창세기 47:7)

야곱은 바로를 만나서 그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두 세절 뒤에 바로를 또 축복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세기 47:10)

야곱의 평생 소원은 축복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인생이 많이 변했습니다. 축복을 구하던 자가 축복을 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야곱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축복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것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해서 나왔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세상과 이웃에게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만 붙잡히면, 다른 세계가 차단됩니다. 오직 자기만을 향해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구하는 만큼 받은 축복을 매일매일 확인해야 됩니다. “하나님, 제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닫혀진 문이 열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도 이러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고 축복받기를 원했던 야곱은 굉장히 처절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았던 것도 바로 그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먹이고 장자권을 탈취한 것도 그 간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육신의 형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축복을 향한 나그네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무엇일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복,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나를 확인하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야곱을 변화시켰습니다.

야곱은 크게 두 번 하나님을 만납니다. 첫 번째는 고향을 떠나면서 벧엘이라는 곳에서입니다. 그는 나그네 신세였습니다. 길에서 잠을 자기 위해 돌을 베게 삼아 누웠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오는데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부모에게 주었던 그 약속을 네게 주겠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하십니다.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세기 28:14)

야곱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이유는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복의 역사가 흐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나만 움켜쥐고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고,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라는 믿음의 사건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이제 남을 축복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의심하고, 욕심을 부립니다. 야곱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잘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그에게는 이제 여유와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경제적인 풍요도 얻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두려움이 남아있습니다. ‘형 에서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아직도 화를 내고 있으면 어쩌지? 어떻게 내가 형 에서를 만날 수 있을까?’ 그는 두려움으로 고통 받으면서 얍복강가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만남입니다.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야곱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6)

그때 하나님의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세기 32:28)

이제는 더 이상 발꿈치나 잡는 탐욕스런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하나님과 싸워 이긴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 받기를 바라는 야곱의 간절함을 보시고 친히 져주셨습니다.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열망을 통해서 온 세계가 축복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아버지는 아들에게 에너지의 원천입니다. 아버지는 이웃을 축복하는 거룩한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역할을 한다 해도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의 아버지를 뛰어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무한한 에너지 원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너를 축복함은 내가 너를 통해서 세상이 축복받기를 원함이다. 내가 너를 축복함은 네가 밟는 땅이 복 받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해서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에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로 세워지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렇게도 축복받기를 원했던 야곱이 이제는 바로왕을 향해서 축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들어가면서 축복하고 나오면서 축복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불만과 불평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렇게 섭섭하십니까? 내 인생은 왜 이따위인가 하고 스스로 삶을 내려 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버지 부재 경험을 인생 마지막까지 끌고 갈 생각이십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훨씬 더 위대하게 여기십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바로 이 놀라운 축복의 비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세상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십시오.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귀한 아들이고, 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이제 제가 밟는 땅에 복 내려주세요. 하나님 이제 제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을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깊은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을 마음껏 선포하고, 세상을 향해서 축복하는 그런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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