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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야곱의 위기 -야곱 이야기 11-

창세기 34: 25 ~ 31

김지철 목사

2012.09.09

야곱은 자녀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했습니다.

아버지가 된 야곱의 이야기로 야곱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도망치듯 고향땅을 떠났던 야곱은, 이제 두 손 가득 넘치게 가진 부자가 되어 고향땅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외적, 육체적 열매는 엄청났습니다.
먼저 가족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네 명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정식 부인으로는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첩으로는 시중드는 여인이었던 빌하와 실바가 있었습니다. 자녀 또한 많았습니다. 레아에게서 낳은 여섯 아들과 딸 디나,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그리고 빌하와 실바에게 각기 두 아들이 있어서 아들만 열두 명이었습니다. 이만큼 풍성한 자녀의 결실을 누가 또 가질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자녀가 많으면 인생에서 풍파가 끊이지 않고, 요란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렵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녀들로 인해 여러 어려움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외동딸 디나는 이방인 지역에 나갔다가 세겜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맏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을 하는 매우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게다가 열 명의 형들은 열한 번째 동생인 요셉을 합심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애굽의 장사꾼에게 동생을 팔아넘겼습니다.
야곱은 후에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30년 동안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 이 고백처럼, 야곱은 개인의 경험뿐 아니라 자녀들의 문제까지 더하여져 실로 고난과 슬픔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자녀들에게 발생한 사건들, 그들이 벌인 사건들에 아버지로서 야곱의 책임은 없을까요? 어쩌면 아버지인 야곱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야곱의 문제들을 통해서 아버지 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은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첫 번째 문제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골고루 나눠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편애적인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 편애적인 사랑은 먼저 남녀 간의 차이로 드러났습니다.
외동딸인 디나가 세겜 땅에서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입니까? 이 일은 그녀를 모독한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아버지 야곱은 크게 슬퍼하지 않습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딸의 아픔에 동참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의 마음이 뒤틀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므온과 레위가 잔인한 행동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편애적인 사랑에 상처를 입고 있던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아들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면서,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게는 때때옷을 입히고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높여 세웠습니다. 창세기 37장 4절을 보면 편애하는 아버지를 둔 형제들 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창세기 37:4)

아버지가 동생 요셉만을 사랑하는 것에 형들은 화가 났습니다. 동생을 향한 질투와 미움이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서 어린 동생 요셉에게 친절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가정에 분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열 아들들은 아버지가 어머니 라헬만 예뻐하고 자기들의 어머니는 업신여기며 무시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자신들의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는 소리를 매일 듣고 자랐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녀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어렸을 때부터 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눈물 흘리게 하는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녀들의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야곱의 또 다른 문제는 자녀들과 소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건에서 자녀들은 그저 엑스트라처럼 잠깐 나왔다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중요한 가치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알기 위해 대화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많이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꿈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의 사건들은 자식들에게 신앙의 사건으로 전수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원하면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는 나이는 기껏해야 10살까지입니다. 10살이 지나고 사춘기가 되면, 모든 아들들의 생각은 이렇게 바뀝니다.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탈출할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일찍 죽어주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억압 받아온 아들들이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입니까. 오죽 답답했으면 아버지가 일찍 죽는 것을 바라는 것일까요. 사르트르는 소통의 부재, 아버지의 억압, 폭력, 독선 등이 얼마나 아들들을 숨 막히게 하는지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감정계좌’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플러스 계좌와 마이너스 계좌가 있습니다. 플러스 계좌는, 은행에 돈을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따듯한 배려, 이해하는 마음, 공감하는 능력, 격려와 인정, 칭찬 등으로 감정계좌의 잔고를 늘리는 것입니다. 한편 마이너스 계좌는 돈을 찾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불평과 조롱, 무시, 위협 등을 통해 그동안 쌓아놨던 감정계좌의 잔고를 줄이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아들들의 관계를 감정계좌로 살펴보면, 그 잔고는 이미 바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보면 내 아버지, 내 아들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처음부터 아버지 야곱과 아들들 사이에는 좋은 기억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마음에 잔인함을 심어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아들들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그들의 잔인성이 잘 나타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외동딸 디나는 세겜의 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벗어나 화려한 세겜 땅으로 구경을 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주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한 사건 앞에서 정작 아버지는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침묵 앞에서 디나의 오빠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되로 받고 말로 갚아주는 복수극을 꾸밉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그 악한 일을 진행합니다. 오빠들은 동생 디나를 사랑하여 그녀를 얻고자 하는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요구대로 할례를 받고 아파하고 있는 그 땅의 남자들을 모두 잔혹하게 죽여 버립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털어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가운데 가장 잔혹했던 인물은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였습니다. 아버지가 침묵하는 것, 아버지가 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그리고 가족의 문제에서 아버지 자신만 보호하려는 모습이 이 아들들로 하여금 잔인한 행동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을 옆에서 지켜본 야곱은 탄식합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창세기 34:30)

야곱의 탄식 속에 어떠한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지 발견하셨습니까? 바로 ‘나’입니다. 이 위기 속에서도 야곱은 이기적입니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위협을 받고,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고 염려였습니다. 명예도, 정의도 다 뒷전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의롭고 올바른 격정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아들들이 이렇게 반격을 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창세기 34:31)

“아버지, 왜 침묵하세요? 우리 누이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우리 가족의 명예가 실추되었는데 아버지는 도대체 뭐하고 계세요?” 아들들은 아버지의 탄식에 더욱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망감은 또 다른 잔인함을 낳습니다. 바로 동생 요셉을 향해서입니다. 아들들의 잔인함과 폭력성은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게 되었을 때 절정에 이릅니다. 창세기 37장 1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창세기 37:18)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창세기 37:20)

동생을 죽이고는, 짐승이 와서 요셉을 잡아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거짓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모두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졌던 품성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고 젊었을 때,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은 안 살 거야.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하고 결심했던 기억이 있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마음을 한 번쯤은 품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보니, 아버지만큼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문득 내 안에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어머니의 모습들이 잠재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위기는 나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야곱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문제에 골몰하느라 신앙의 꿈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나누는 것에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들이 그저 자기에게 멈추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꿈이 연결된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이었습니다. 문제는 요셉은 너무 빨리, 그의 나이 10대 중반에 아버지의 품을 떠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일까요?
저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요셉을 아버지로부터 빨리 떼어놓아 아버지 야곱의 못된 성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으로부터 요셉을 탈출시킨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야곱은 어느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부장적인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의 관계에서 대화와 사랑의 단절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들과도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 인물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것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아픔 그대로, 소통의 부재를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아버지에게, 아니 아버지가 된 나에게 이런 야곱의 위기는 없습니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에게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있고, 그로인해 자녀들과 점점 단절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의 의견을 묻기 보다는 마음대로 결정했던 독단과 독선들, 자녀들을 인정하고 칭찬하기 보다는 명령하며 복종하기를 원하던 권위적인 모습이 내 안에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은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없고, 아들과 딸을 편애하고, 어머니를 하녀 취급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영향을 받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아버지 야곱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들을 찾고, 새로운 변화를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자신에게 닥친 아버지로서의 위기를 어떻게 탈출하게 될까요?

예배의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위기 속에 빠진 야곱, 어찌할 줄 모르는 야곱을 다시 부르십니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고 있던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낮아졌던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약속을 받았던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다시 재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다시 벧엘을 찾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야곱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이스라엘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 왜 자꾸만 야곱처럼 살려고 하느냐?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제발 이스라엘처럼 살아라.” 새 이름을 확인시키심으로 그가 그를 괴롭히는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야곱의 회복은 시작됩니다.
여러분, 특히 아버지인 분들은 아들, 딸들과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만약 그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먼저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전화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들아, 잘 있냐? 보고싶구나. 딸아, 건강하냐? 우리 함께 예배드리자. 그리고 함께 식사도 하자. 오랫동안 너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구나.”
우리의 귀한 아버지들이 다시금 벧엘,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고,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녀들에게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깨어진 가정이 회복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가정 안에서 보여주고 실천하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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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 25 ~ 31

25

제삼일에 아직 그들이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야곱은 자녀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야했습니다.

아버지가 된 야곱의 이야기로 야곱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도망치듯 고향땅을 떠났던 야곱은, 이제 두 손 가득 넘치게 가진 부자가 되어 고향땅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외적, 육체적 열매는 엄청났습니다.
먼저 가족 이야기를 하자면, 그는 네 명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정식 부인으로는 레아와 라헬이 있었고, 첩으로는 시중드는 여인이었던 빌하와 실바가 있었습니다. 자녀 또한 많았습니다. 레아에게서 낳은 여섯 아들과 딸 디나, 라헬에게서 낳은 두 아들, 그리고 빌하와 실바에게 각기 두 아들이 있어서 아들만 열두 명이었습니다. 이만큼 풍성한 자녀의 결실을 누가 또 가질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자녀가 많으면 인생에서 풍파가 끊이지 않고, 요란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렵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녀들로 인해 여러 어려움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외동딸 디나는 이방인 지역에 나갔다가 세겜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맏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을 하는 매우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게다가 열 명의 형들은 열한 번째 동생인 요셉을 합심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애굽의 장사꾼에게 동생을 팔아넘겼습니다.
야곱은 후에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30년 동안 나그네 인생을 살았다” 이 고백처럼, 야곱은 개인의 경험뿐 아니라 자녀들의 문제까지 더하여져 실로 고난과 슬픔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자녀들에게 발생한 사건들, 그들이 벌인 사건들에 아버지로서 야곱의 책임은 없을까요? 어쩌면 아버지인 야곱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야곱의 문제들을 통해서 아버지 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은 한쪽으로 치우친 사랑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첫 번째 문제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골고루 나눠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편애적인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습니다. 그 편애적인 사랑은 먼저 남녀 간의 차이로 드러났습니다.
외동딸인 디나가 세겜 땅에서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입니까? 이 일은 그녀를 모독한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가족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아버지 야곱은 크게 슬퍼하지 않습니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딸의 아픔에 동참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의 마음이 뒤틀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므온과 레위가 잔인한 행동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편애적인 사랑에 상처를 입고 있던 아들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아들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면서,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에게는 때때옷을 입히고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높여 세웠습니다. 창세기 37장 4절을 보면 편애하는 아버지를 둔 형제들 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창세기 37:4)

아버지가 동생 요셉만을 사랑하는 것에 형들은 화가 났습니다. 동생을 향한 질투와 미움이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서 어린 동생 요셉에게 친절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가정에 분란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열 아들들은 아버지가 어머니 라헬만 예뻐하고 자기들의 어머니는 업신여기며 무시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자신들의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는 소리를 매일 듣고 자랐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자녀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어렸을 때부터 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들은 어머니를 눈물 흘리게 하는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녀들의 생각에 관심을 두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야곱의 또 다른 문제는 자녀들과 소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건에서 자녀들은 그저 엑스트라처럼 잠깐 나왔다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중요한 가치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알기 위해 대화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많이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꿈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의 사건들은 자식들에게 신앙의 사건으로 전수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원하면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는 나이는 기껏해야 10살까지입니다. 10살이 지나고 사춘기가 되면, 모든 아들들의 생각은 이렇게 바뀝니다.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탈출할까?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철학자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일찍 죽어주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억압 받아온 아들들이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입니까. 오죽 답답했으면 아버지가 일찍 죽는 것을 바라는 것일까요. 사르트르는 소통의 부재, 아버지의 억압, 폭력, 독선 등이 얼마나 아들들을 숨 막히게 하는지 역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감정계좌’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플러스 계좌와 마이너스 계좌가 있습니다. 플러스 계좌는, 은행에 돈을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따듯한 배려, 이해하는 마음, 공감하는 능력, 격려와 인정, 칭찬 등으로 감정계좌의 잔고를 늘리는 것입니다. 한편 마이너스 계좌는 돈을 찾아 쓰는 것과 같습니다. 불평과 조롱, 무시, 위협 등을 통해 그동안 쌓아놨던 감정계좌의 잔고를 줄이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과 아들들의 관계를 감정계좌로 살펴보면, 그 잔고는 이미 바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보면 내 아버지, 내 아들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을 읽어보면, 처음부터 아버지 야곱과 아들들 사이에는 좋은 기억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의 마음에 잔인함을 심어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아들들은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그들의 잔인성이 잘 나타나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외동딸 디나는 세겜의 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자들만 있는 곳에서 벗어나 화려한 세겜 땅으로 구경을 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주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한 사건 앞에서 정작 아버지는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침묵 앞에서 디나의 오빠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되로 받고 말로 갚아주는 복수극을 꾸밉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그 악한 일을 진행합니다. 오빠들은 동생 디나를 사랑하여 그녀를 얻고자 하는 세겜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는 요구대로 할례를 받고 아파하고 있는 그 땅의 남자들을 모두 잔혹하게 죽여 버립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털어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가운데 가장 잔혹했던 인물은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였습니다. 아버지가 침묵하는 것, 아버지가 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그리고 가족의 문제에서 아버지 자신만 보호하려는 모습이 이 아들들로 하여금 잔인한 행동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을 옆에서 지켜본 야곱은 탄식합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창세기 34:30)

야곱의 탄식 속에 어떠한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지 발견하셨습니까? 바로 ‘나’입니다. 이 위기 속에서도 야곱은 이기적입니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위협을 받고, 자신이 죽게 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고 염려였습니다. 명예도, 정의도 다 뒷전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의롭고 올바른 격정을 상실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아들들이 이렇게 반격을 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창세기 34:31)

“아버지, 왜 침묵하세요? 우리 누이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우리 가족의 명예가 실추되었는데 아버지는 도대체 뭐하고 계세요?” 아들들은 아버지의 탄식에 더욱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망감은 또 다른 잔인함을 낳습니다. 바로 동생 요셉을 향해서입니다. 아들들의 잔인함과 폭력성은 동생 요셉을 팔아넘기게 되었을 때 절정에 이릅니다. 창세기 37장 1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창세기 37:18)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창세기 37:20)

동생을 죽이고는, 짐승이 와서 요셉을 잡아먹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거짓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배운 것입니까? 모두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졌던 품성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고 젊었을 때,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은 안 살 거야.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하고 결심했던 기억이 있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런 마음을 한 번쯤은 품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보니, 아버지만큼 사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문득 내 안에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했던 아버지의, 어머니의 모습들이 잠재해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자녀들은 부모의 모습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위기는 나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야곱에게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문제에 골몰하느라 신앙의 꿈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나누는 것에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들이 그저 자기에게 멈추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꿈이 연결된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이었습니다. 문제는 요셉은 너무 빨리, 그의 나이 10대 중반에 아버지의 품을 떠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일까요?
저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요셉을 아버지로부터 빨리 떼어놓아 아버지 야곱의 못된 성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탐욕으로부터 요셉을 탈출시킨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야곱은 어느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부장적인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의 관계에서 대화와 사랑의 단절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들과도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 인물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배웠던 것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아픔 그대로, 소통의 부재를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아버지에게, 아니 아버지가 된 나에게 이런 야곱의 위기는 없습니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에게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남아있고, 그로인해 자녀들과 점점 단절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의 의견을 묻기 보다는 마음대로 결정했던 독단과 독선들, 자녀들을 인정하고 칭찬하기 보다는 명령하며 복종하기를 원하던 권위적인 모습이 내 안에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은 따뜻한 사랑과 배려가 없고, 아들과 딸을 편애하고, 어머니를 하녀 취급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영향을 받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아버지 야곱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들을 찾고, 새로운 변화를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자신에게 닥친 아버지로서의 위기를 어떻게 탈출하게 될까요?

예배의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위기 속에 빠진 야곱, 어찌할 줄 모르는 야곱을 다시 부르십니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고 있던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세기 35:1)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낮아졌던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약속을 받았던 하나님의 집, 벧엘에서 다시 재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다시 벧엘을 찾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야곱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이스라엘로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 왜 자꾸만 야곱처럼 살려고 하느냐?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제발 이스라엘처럼 살아라.” 새 이름을 확인시키심으로 그가 그를 괴롭히는 문제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야곱의 회복은 시작됩니다.
여러분, 특히 아버지인 분들은 아들, 딸들과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만약 그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와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먼저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전화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아들아, 잘 있냐? 보고싶구나. 딸아, 건강하냐? 우리 함께 예배드리자. 그리고 함께 식사도 하자. 오랫동안 너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구나.”
우리의 귀한 아버지들이 다시금 벧엘,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고,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녀들에게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흩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모이고, 깨어진 가정이 회복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가정 안에서 보여주고 실천하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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