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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걸었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제와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반박문이자 조항문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이 종교개혁 정신에 기초합니다.
종교개혁 정신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이는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오직 성경에 있음을 뜻하며,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구호입니다. 둘째,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이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원리에 입각합니다. 셋째,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죄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대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네 가지 종교개혁 원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으로 영광 돌려야 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를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선언입니다.
루터가 95개조 논제에서 첫 번째로 우리에게 요청하는 건 ‘회개’입니다. 95개 조항 중 제1조항이 다음과 같습니다.
1조: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깊이 뉘우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면,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해야 합니다. 회개가 바로 개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개혁은 성경에 입각한 종교개혁입니다.
당대 교회의 대문은 일종의 게시판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루터도 자신의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 대한 항의이자, 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토의하자는 의도로 반박문을 건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루터는 끊임없이 ‘당대 독일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을 가져야 될 것인지’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3년 후에 쓴 1520년의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라는 글에서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쌓아놓았던 세 장벽을 공격합니다. 첫째, 세속 군주보다 더 높은 교황의 지위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입니다. 둘째, 성경 해석의 최종 권한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셋째, 공의회 소집 권한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사실도 비판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교황이 모든 권력을 가질 게 아니라 만인제사장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든 그와 같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교황, 주교들, 사제와 수도승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제후들, 영주들, 장인들,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며 꾸며낸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아무도 놀라서는 안 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이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다 한몸이나 각각의 지체는 다른 지체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의미이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의 세례, 하나의 복음, 하나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세례, 하나의 복음, 하나의 신앙고백만이 사람들을 영적이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 중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차별이나 분리가 없고, 한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루터의 선언은 이처럼 성경에 근거합니다.
또한 루터는 같은 해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갖고 있음을 설파한 글입니다. 이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서한입니다. 이 서한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죄 사함의 은총을 서술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 중 일부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황에게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만물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인이기 때문에 이웃을 섬기고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가 비록 율법의 행위로부터 전적으로 자유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과 교제하시되 모든 것을 대가 없이 해 주신 것처럼 자진해서 이웃을 돕는 종이 되어 이웃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발적으로 종의 모습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선하며 복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최고의 축복은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면서도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선물로 받아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루터의 선언입니다.
루터의 신앙적 양심이 성도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몇몇 글들을 로마 교황청이 문제 삼습니다. 1520년 11월에 루터를 이단자로 확정 짓더니 파문을 결정합니다. 사실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그를 파문합니다. 당시 루터의 후원자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다시 한 번 요청하여 최종 결론이 유보되긴 했습니다. 이후 공정성 확보를 위해 1521년 4월 보름스(Worms) 회의에 루터가 소환됩니다. 며칠간의 심문 끝에 심문관이 루터에게 “네 사상을 버려라. 네 책을 불태워라. 그리고 더는 그런 주장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가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근거(이성)’에 의해 다른 확신을 갖지 않는 이상 –왜냐하면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결정만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종 실수를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에 의해 사로잡혀 있으며,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내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도전이었고, 저항이었으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포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담대함과 용기를 가진 루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루터는 도피 생활도 하게 됩니다. 1521년 5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약 10개월간 바르트부르크(Wartburg)라는 성에 숨어 지냅니다. 그때 그가 한 일은 다름 아닌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성서연구에 몰두하며 11주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1522년 9월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합니다. 번역에 있어서 루터는 첫째, 부정확한 라틴어 불가타 역보다는 헬라어 원문에 기초해 번역하자는 취지 아래 번역을 완성했습니다. 둘째, 당대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 문체를 사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1522년부터 1533년 사이에 그의 독일어 신약성경이 무려 85판이나 인쇄됩니다. 인쇄술 발명과 더불어 구라파 지역에 번역판이 흩어지면서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당대는 아무나 성경을 읽을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교황이 허락한 성직자들 외에는 누구도 성경을 직접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당시 성경이 라틴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갖고 있어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경 해석 권한을 교회로만 한정했습니다. 심지어 최종적인 성경 해석 권한은 교황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을 루터가 뒤집은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성경을 읽는 누구나 성경 해석의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도 카톨릭교회는 성서를 규정하는 주체로 교회를 둡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교회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선에 둡니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 교회가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개신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가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엘리야입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셨는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 중 베드로가 가장 먼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때 예수님이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맞다. 네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그 말을 하고 있구나.”라고 칭찬하시며,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이 18절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반석’을 베드로로 생각합니다. 인간 베드로, 즉 인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가 됩니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교황들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수장이 베드로요, 그 뒤를 이어 2대, 3대 교황들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선언까지 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이러한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수장권이 왜 문제가 될까요? 수장권을 허용함으로써 카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을 둘로 나누고 맙니다. 하나는 사제 그리스도인들이요, 하나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연히 사제들이 특권층이 됩니다. 계층적인 차별 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맨 위에 교황이 있습니다. 그 아래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가 사제 계급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신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교황을 향해 절대 순종이라는 명령을 강화하면서 사제 그룹과 신도 그룹을 구분 짓고 계층을 나눕니다. 고해성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 년에 한두 번 신부 앞에 나가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부의 입을 통해 죄 용서의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 앞에 고해성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직접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했지만, 개신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습니다. 즉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고,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주님의 몸 된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황일 수 없습니다. 신부도 아닙니다. 목사도 아닙니다. 장로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을 가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적입니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지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연구와 해석도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성경 읽기를 그토록 강조할까요? 왜 새벽에 나와 성경을 자꾸 읽을까요? 읽으면서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시는지 깨닫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토록 애쓰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개혁은 내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 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며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라는 표어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무엇을 다시 새롭게 해야 할까요? 또 무엇을 다시 거룩하게 해야 할까요? 많은 문제가 있지만,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카톨릭교회의 교권주의를 닮아가고 있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 권력을 독점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의 사유화가 일어납니다. 세습이라는 안타까운 일들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계급 구조(hierarchy)가 생기는 것은 반개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교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요, 믿음의 지체들입니다. 그분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로, 왜곡된 자본주의의 모습이 우리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주의 말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고 얼마나 큰가를 자랑하는 교회성장주의가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더 큰 교회,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재물을 추구하고, 그러한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물질만능주의적 사고와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건강한 교회, 주님만이 주인 되시는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를 위해 어디서부터, 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나 자신부터, 내 가정에서부터, 내 직장에서부터, 내 삶의 현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내 삶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우리에게 있는 어둠, 죄악, 잘못을 타파해 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결단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는 음악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편 46편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작사를 했습니다. 찬송가 585장이 루터가 만든 찬양합니다. 오늘은 저의 마무리 기도 대신 이 찬양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양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부르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 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 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마태복음 16: 13 ~ 18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개신교는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합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 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걸었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제와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반박문이자 조항문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이 종교개혁 정신에 기초합니다.
종교개혁 정신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이는 신앙과 생활의 표준이 오직 성경에 있음을 뜻하며,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구호입니다. 둘째,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이는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원리에 입각합니다. 셋째,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죄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며,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을 대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네 가지 종교개혁 원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으로 영광 돌려야 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를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선언입니다.
루터가 95개조 논제에서 첫 번째로 우리에게 요청하는 건 ‘회개’입니다. 95개 조항 중 제1조항이 다음과 같습니다.
1조: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깊이 뉘우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면,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해야 합니다. 회개가 바로 개혁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개혁은 성경에 입각한 종교개혁입니다.
당대 교회의 대문은 일종의 게시판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루터도 자신의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 대한 항의이자, 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토의하자는 의도로 반박문을 건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루터는 끊임없이 ‘당대 독일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을 가져야 될 것인지’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3년 후에 쓴 1520년의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라는 글에서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쌓아놓았던 세 장벽을 공격합니다. 첫째, 세속 군주보다 더 높은 교황의 지위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입니다. 둘째, 성경 해석의 최종 권한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것을 비판합니다. 셋째, 공의회 소집 권한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사실도 비판합니다. 이를 통해 그는 교황이 모든 권력을 가질 게 아니라 만인제사장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든 그와 같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교황, 주교들, 사제와 수도승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제후들, 영주들, 장인들, 농부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며 꾸며낸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아무도 놀라서는 안 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영적 계급에 속하며, 그들이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다 한몸이나 각각의 지체는 다른 지체들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의미이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의 세례, 하나의 복음, 하나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세례, 하나의 복음, 하나의 신앙고백만이 사람들을 영적이게 만들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 중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떤 차별이나 분리가 없고, 한 공동체라는 말씀입니다. 루터의 선언은 이처럼 성경에 근거합니다.
또한 루터는 같은 해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글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갖고 있음을 설파한 글입니다. 이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서한입니다. 이 서한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죄 사함의 은총을 서술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 중 일부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만물의 지배자이며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충실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황에게 지배되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만물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공표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유인이기 때문에 이웃을 섬기고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가 비록 율법의 행위로부터 전적으로 자유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과 교제하시되 모든 것을 대가 없이 해 주신 것처럼 자진해서 이웃을 돕는 종이 되어 이웃과 교제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발적으로 종의 모습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이웃에게 도움이 되고 선하며 복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최고의 축복은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면서도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선물로 받아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자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루터의 선언입니다.
루터의 신앙적 양심이 성도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몇몇 글들을 로마 교황청이 문제 삼습니다. 1520년 11월에 루터를 이단자로 확정 짓더니 파문을 결정합니다. 사실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가 그를 파문합니다. 당시 루터의 후원자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다시 한 번 요청하여 최종 결론이 유보되긴 했습니다. 이후 공정성 확보를 위해 1521년 4월 보름스(Worms) 회의에 루터가 소환됩니다. 며칠간의 심문 끝에 심문관이 루터에게 “네 사상을 버려라. 네 책을 불태워라. 그리고 더는 그런 주장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가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근거(이성)’에 의해 다른 확신을 갖지 않는 이상 –왜냐하면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결정만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종 실수를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에 의해 사로잡혀 있으며,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내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도전이었고, 저항이었으며,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포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담대함과 용기를 가진 루터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루터는 도피 생활도 하게 됩니다. 1521년 5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약 10개월간 바르트부르크(Wartburg)라는 성에 숨어 지냅니다. 그때 그가 한 일은 다름 아닌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성서연구에 몰두하며 11주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1522년 9월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합니다. 번역에 있어서 루터는 첫째, 부정확한 라틴어 불가타 역보다는 헬라어 원문에 기초해 번역하자는 취지 아래 번역을 완성했습니다. 둘째, 당대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 문체를 사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1522년부터 1533년 사이에 그의 독일어 신약성경이 무려 85판이나 인쇄됩니다. 인쇄술 발명과 더불어 구라파 지역에 번역판이 흩어지면서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당대는 아무나 성경을 읽을 수 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교황이 허락한 성직자들 외에는 누구도 성경을 직접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당시 성경이 라틴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갖고 있어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경 해석 권한을 교회로만 한정했습니다. 심지어 최종적인 성경 해석 권한은 교황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을 루터가 뒤집은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성경을 읽는 누구나 성경 해석의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지금도 카톨릭교회는 성서를 규정하는 주체로 교회를 둡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교회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우선에 둡니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 교회가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개신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지나가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엘리야입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셨는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 중 베드로가 가장 먼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때 예수님이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맞다. 네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그 말을 하고 있구나.”라고 칭찬하시며, 그 다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이 18절입니다.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반석’을 베드로로 생각합니다. 인간 베드로, 즉 인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교황이 베드로가 됩니다.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교황들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수장이 베드로요, 그 뒤를 이어 2대, 3대 교황들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교황은 오류가 없다는 선언까지 하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이러한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수장권이 왜 문제가 될까요? 수장권을 허용함으로써 카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을 둘로 나누고 맙니다. 하나는 사제 그리스도인들이요, 하나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연히 사제들이 특권층이 됩니다. 계층적인 차별 구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맨 위에 교황이 있습니다. 그 아래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가 사제 계급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신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교황을 향해 절대 순종이라는 명령을 강화하면서 사제 그룹과 신도 그룹을 구분 짓고 계층을 나눕니다. 고해성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 년에 한두 번 신부 앞에 나가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부의 입을 통해 죄 용서의 확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 앞에 고해성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직접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했지만, 개신교는 다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습니다. 즉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고,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주님의 몸 된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교황일 수 없습니다. 신부도 아닙니다. 목사도 아닙니다. 장로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을 가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임시적입니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고백하고, 믿음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지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연구와 해석도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다고 강조하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성경 읽기를 그토록 강조할까요? 왜 새벽에 나와 성경을 자꾸 읽을까요? 읽으면서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말씀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시는지 깨닫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토록 애쓰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개혁은 내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 교회 창립 40주년을 맞이하며 ‘다시 새롭게, 다시 거룩하게’라는 표어를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무엇을 다시 새롭게 해야 할까요? 또 무엇을 다시 거룩하게 해야 할까요? 많은 문제가 있지만,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카톨릭교회의 교권주의를 닮아가고 있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교회 권력을 독점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의 사유화가 일어납니다. 세습이라는 안타까운 일들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계급 구조(hierarchy)가 생기는 것은 반개혁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교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요, 믿음의 지체들입니다. 그분을 더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두 번째로, 왜곡된 자본주의의 모습이 우리의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적 성장주의 말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고 얼마나 큰가를 자랑하는 교회성장주의가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더 큰 교회,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재물을 추구하고, 그러한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물질만능주의적 사고와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주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건강한 교회, 주님만이 주인 되시는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이를 위해 어디서부터, 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나 자신부터, 내 가정에서부터, 내 직장에서부터, 내 삶의 현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내 삶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우리에게 있는 어둠, 죄악, 잘못을 타파해 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결단할 수 있길 바랍니다.
마르틴 루터는 음악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편 46편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고 작사를 했습니다. 찬송가 585장이 루터가 만든 찬양합니다. 오늘은 저의 마무리 기도 대신 이 찬양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양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부르겠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 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 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2017년 10월 2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안주의 영, 개혁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4, 58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 16:13-18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15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며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날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통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드리기 위함 이었습니다.
설교의 요약
루터는 1520년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고함』을 통해 만인제사장직의 개념을 언급하며 교황권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교황이 세속 군주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다는 점과, 교황만이 성경해석의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는 점, 공의회 소집권이 교황에게만 있다는 점 등을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루터는 영적계급과 세속적 계급을 나누는 당시 주장을 비판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계급에 속하며, 각각은 고유한 일(역할)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주장하였습니다(고전12장).
이러한 루터의 주장으로 인해, 루터는 1520년 이단으로 확정되어 파문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1521년 보름스회의에서 루터는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 받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내가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근거에 의해 다른 확신을 갖지 않는 이상,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며 철회 요구를 거절합니다.
이후 루터는 가명을 사용하며 숨어 지내게 되는데, 이때에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며 일부 특정한 성직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숨어 있는 기간 동안, 백성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모국어(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최종적 성경해석의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던 당시 세상에서, 성도들에게로 그 권한을 돌려준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오늘의 본문(마16:18)에 등장하는 ‘반석’을 ‘베드로’와 동일시하며 베드로가 교회의 수장이며, 베드로의 후계자만이 그것을 이을 수 있고, 더 나아가 교황은 무오류 하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교황을 권력과 지배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하였습니다. 루터를 시작으로 한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는 ‘반석’을 ‘베드로’가 아닌 ‘베드로가 한 신앙고백’에 두며,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곧 교회이고, 따라서 ‘베드로적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적 교회’가 참된 교회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 교권주의입니다. 교회를 사유화 하고 세습하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일 뿐입니다. 둘째, 자본주의적 성장주의입니다. 우리는 그간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기보다 ‘큰 교회’를 지향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물질만능주의를 붙잡아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오직 성경을 기초로, 오직 믿음 안에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외치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일은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삶이 주님께 드려질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소망의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어두움의 것들을 타파하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시기를 결단하는 소망의 가족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만일 내가 루터였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시대와 타협했을까요? 아니면 목숨을 내 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갈 수 있었을까요? 루터의 입장에서 각자 자신의 믿음을 평가해 봅시다.
2. 예수님만이 나의 주인이어야 합니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또 다른 주인(개혁의 대상)은 무엇이고, 누구입니까?(예 : 자녀, 건강, 나의 능력, 재물, 명예 등) 그것을 위한 우리의 결단을 나눠 봅시다.
3. 나와 우리를 개혁하는 방법, “오직 성경”입니다. 나는 성경을 얼마나 가까이 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성경을 더 가까이 하기 위한 방법과 결단을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 오직 말씀과 믿음과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