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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조국과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6‧25 전쟁이 발발한지 68년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참화를 지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자유와 민주의 나라로 세워 주셨습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게 하셨고, 인권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산업화와 정보화를 통해 제4차 혁명을 준비하며 참여할 수 있는 나라로 발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귀한 사람들을 세워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충성스럽게 헌신한 믿음의 사람을 보내 주셨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며 애통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B.C.587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스라엘은 패망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엘리트층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거기서 2세, 3세가 태어나는데, 이때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등장한 때를, 성경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가 왕이 된 지 20년이 된 때라고 설명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시기는 기슬르월이었는데, 태양력으로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 사이입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거하고 있었는데, 수산 궁은 페르시아 왕의 겨울 별장입니다. 즉 느헤미야는 왕의 별장까지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왕의 최측근이자 보좌관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음식을 맡아 제공하는 신임 받는 직책에 있었습니다. 비록 이국에서 태어났지만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항상 자신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비록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언제나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페르시아 수산 궁까지는 1,000km가 넘게 떨어진 거리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곳을 향한 영적인 그리움과 향수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을 다녀온 사람들의 보고를 듣게 됩니다. 자기 민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예루살렘 성전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 1:2)
느헤미야는 고향에서 돌아온 하나니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잘 있는가? 고향에 어려움은 없는가?” 느헤미야의 애통하는 마음은 이와 같은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묻는다는 건 호기심과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위기를 모르는 이유는, 또한 변화와 개혁이 잘 안 되는 까닭은 진지하게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알고 싶었습니다. 내 민족과 백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고통의 현장에 놓여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 팀을 파송하고, 봉사 현장으로 나가고, 선교 현장을 찾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가운데 고통 받는 사람,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의 소식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리는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도 그런 마음으로 고향의 소식을 물었고, 그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 1:3)
조국의 백성이 큰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다는 소식, 성벽은 다 무너졌으며 불에 타 소실되었다는 소식, 고향 땅이 능욕과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때 느헤미야의 마음이 요동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가다간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이 망하는데….’ 마음속에 격정이 일어나면서 비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4절 말씀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4)
털썩 주저앉아 통곡할 뿐입니다. 여러 날 동안 그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찹니다. 조국의 소식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1,000km나 떨어진 예루살렘의 소식이었으나, 그들의 고난과 아픔, 비애가 느헤미야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것입니다.
본문에도 느헤미야가 수일 동안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2장 1절을 보면, 그가 기슬르월에 본 소식을 접했고 니산월에 결단하게 되는데, 그 기간이 약 3~4개월 정도입니다. 즉 100일 가까운 기간 동안 느헤미야가 탄식하며 애통해 하고, 그 가운데 끊임없이 기도하며 조국을 그리워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한탄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페르시아 왕국에서 이렇게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옳은 일인가? 나만 이렇게 먹고 마시며 자유로운 것이 옳은 일인가? 내가 저 예루살렘에 가서 내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물은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흘린 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결단합니다.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직을 내려놓고 고통 받는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야겠다고, 그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단합니다. 느헤미야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기 신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 그들을 위해 애통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지도자는 공동체를 위해 애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좋은 지도자가 되는 여러 덕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공동체를 위해 애통할 줄 아는 능력과 덕목에 관한 말씀을 전합니다. 애통할 줄 아는 지도자는 연약한 곳이 어디인지, 어디가 무너지고 있는지, 어디에 상처와 아픔이 있는지를 살핍니다.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공동체를 껴안는 자가 애통함의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인 것입니다.
공동체 원 가운데 큰 슬픔이나 아픔을 당한 이가 있을 때, 함께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입니다. 눈물이 없는 메마른 자가 지도자로 있는 공동체는 삭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지도자가 공동체에 상처가 됩니다. 권위가 권위주의가 되고, 소통이 되지 않으며, 명령과 복종만 있는 공동체는 생명의 공동체가 아니라 죽은 공동체입니다.
가정 공동체에서 아버지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권위주의에 빠지면 자녀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을 기피하게 되고, 점차 가정은 딱딱하고 두려운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이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권위는 있되 따뜻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당하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을 발견했다면 자녀와 함께 아파하고 공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훈계나 비난을 쏟아낸다면, 가정에서 좋은 가장이 될 수 없습니다. 같이 애통해 하고 아파하는 아버지가 자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이를 통해 가정이 회복되고 좋은 열매를 맺는 귀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이런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당한 위기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한 일을 살펴보면, 제일 처음에 그는 ‘물었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호기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도 동참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그는 더 큰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묻고 난 다음에는 ‘들었고’, 이후에는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한 일이 ‘기도’였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내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내 가정의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하면, 그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어려움을 내어놓고 기도하면 이제 그 어려움이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교회를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 시작하면 그것은 어느새 하나님의 문제가 되고, 하나님이 해결하시고 동참하시는 역사가 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민족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었습니다.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이 아픔을 느끼고 갈급함을 느낀다는 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비록 고통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내 영혼과 마음이 마비되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여전히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알림인 것입니다. 어떤 문명이 파괴되고, 어떤 국가가 파괴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비통의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없는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모든 잘못을 남에게 돌리거나 탓합니다. 그러면서 살벌해지고, 서서히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사명을 가진 사람들의 가슴에는 공동체를 향한 아픔이 내재돼 있습니다. 가정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면 가정의 지도자가 됩니다. 공동체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됩니다. 국가와 민족의 비애를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애통해 하면 바로 그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공동체를 위해 책임지는 지도자였습니다.
기독교의 치유 방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상처 입은 자가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같은 눈물을 흘려본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 진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애통할 줄 아는 언어, 애통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노라.”
느헤미야 역시 이렇게 애통해 하며 주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6~7절입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 1:6~7 중)
그는 회개 기도를 합니다. 그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이 범죄한 게 아니라 자기 아버지 집이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다고 합니다. 즉 자기 백성의 비극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우리는 언제 눈물을 흘렸습니까? 억울할 때 눈물을 흘렸습니까? 슬프거나 화날 때 눈물을 흘렸습니까? 가슴이 북받치도록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눈물이란 참 신비로운 액체입니다.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이 액체는 알칼리성으로, 98% 이상이 수분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이 하는 역할은 상당합니다. 눈에 각종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하고, 항균 작용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눈을 보호하고, 혹시라도 쌓일 수 있는 노폐물을 배출하도록 돕습니다. 그런 까닭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정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매우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눈물의 효능을 잘 아는 의사들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슬픕니까? 그러면 우세요. 외롭습니까? 그렇다면 우십시오. 상처를 받았습니까? 그럼 울어 보세요.” 목사인 저도 그와 같은 해결책을 드립니다. 만약 흘러야 할 눈물을 내가 막고 있다면, 내 몸의 다른 장기가 대신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눈물은 슬픔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때문에 눈물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도 줍니다. 더욱이 지도자의 자리에서 흘리는 애통의 눈물은 공동체를 살리는 눈물,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눈물이 될 수 있습니다.
1948년 2월,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며 백범 김구 선생은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이라는 제호 아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의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눈앞에 어릿거린다. 붓이 여기에 이름에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하겠노라.”
고난 받는 백성을 보면 가슴이 저리고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가 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는 지도자 말입니다.
애통의 눈물이 흐르는 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초대된 것도 예수님의 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비통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시며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분은 고통당하는 자들 곁에 찾아가셨고, 그들을 치유하셨으며,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셨고, 함께 애통해 하셨으며, 함께 비통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애통함이 들어 있습니다. 애통할 줄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지도자의 복입니다. 애통이란 나 자신을 향한 아픔이기도 하지만, 이웃과 시대를 향한 아픔의 표시입니다. 애통이란 더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애통을 사명의 기반으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도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우리 마음이 너무 냉랭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보다 무자비한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 앞에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느헤미야처럼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을 보면, 내 속에서 애통함이 솟아오릅니까? 바로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애통의 눈물은 생명의 눈물입니다. 그런 눈물이 흐르는 곳에서 삶이 치유되고, 회복되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교회를 보면서 애통해 했고, 민족을 보면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주님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 애통의 눈물을 흘릴 때, 이 시대에도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1: 1 ~ 5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헤미야는 조국과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내일은 6‧25 전쟁이 발발한지 68년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참화를 지나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자유와 민주의 나라로 세워 주셨습니다. 독재정권에 저항하게 하셨고, 인권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산업화와 정보화를 통해 제4차 혁명을 준비하며 참여할 수 있는 나라로 발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귀한 사람들을 세워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충성스럽게 헌신한 믿음의 사람을 보내 주셨기에,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는 나라를 위해 눈물 흘리며 애통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B.C.587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이스라엘은 패망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엘리트층은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거기서 2세, 3세가 태어나는데, 이때 에스라와 느헤미야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등장한 때를, 성경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가 왕이 된 지 20년이 된 때라고 설명합니다. 구체적으로 그 시기는 기슬르월이었는데, 태양력으로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 사이입니다. 이때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거하고 있었는데, 수산 궁은 페르시아 왕의 겨울 별장입니다. 즉 느헤미야는 왕의 별장까지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왕의 최측근이자 보좌관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음식을 맡아 제공하는 신임 받는 직책에 있었습니다. 비록 이국에서 태어났지만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항상 자신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비록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언제나 예루살렘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페르시아 수산 궁까지는 1,000km가 넘게 떨어진 거리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곳을 향한 영적인 그리움과 향수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루살렘을 다녀온 사람들의 보고를 듣게 됩니다. 자기 민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예루살렘 성전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 1:2)
느헤미야는 고향에서 돌아온 하나니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잘 있는가? 고향에 어려움은 없는가?” 느헤미야의 애통하는 마음은 이와 같은 ‘물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묻는다는 건 호기심과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위기를 모르는 이유는, 또한 변화와 개혁이 잘 안 되는 까닭은 진지하게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알고 싶었습니다. 내 민족과 백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고통의 현장에 놓여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 팀을 파송하고, 봉사 현장으로 나가고, 선교 현장을 찾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가운데 고통 받는 사람,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의 소식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을 위해 눈물 흘리는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도 그런 마음으로 고향의 소식을 물었고, 그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 1:3)
조국의 백성이 큰 고통과 환난 가운데 있다는 소식, 성벽은 다 무너졌으며 불에 타 소실되었다는 소식, 고향 땅이 능욕과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때 느헤미야의 마음이 요동합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가다간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이 망하는데….’ 마음속에 격정이 일어나면서 비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4절 말씀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4)
털썩 주저앉아 통곡할 뿐입니다. 여러 날 동안 그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찹니다. 조국의 소식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1,000km나 떨어진 예루살렘의 소식이었으나, 그들의 고난과 아픔, 비애가 느헤미야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것입니다.
본문에도 느헤미야가 수일 동안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 2장 1절을 보면, 그가 기슬르월에 본 소식을 접했고 니산월에 결단하게 되는데, 그 기간이 약 3~4개월 정도입니다. 즉 100일 가까운 기간 동안 느헤미야가 탄식하며 애통해 하고, 그 가운데 끊임없이 기도하며 조국을 그리워했다는 뜻입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한탄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페르시아 왕국에서 이렇게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옳은 일인가? 나만 이렇게 먹고 마시며 자유로운 것이 옳은 일인가? 내가 저 예루살렘에 가서 내 백성과 함께 고통을 나눠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물은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흘린 애통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결단합니다.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직을 내려놓고 고통 받는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야겠다고, 그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단합니다. 느헤미야는 편안하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기 신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 그들을 위해 애통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지도자는 공동체를 위해 애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좋은 지도자가 되는 여러 덕목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공동체를 위해 애통할 줄 아는 능력과 덕목에 관한 말씀을 전합니다. 애통할 줄 아는 지도자는 연약한 곳이 어디인지, 어디가 무너지고 있는지, 어디에 상처와 아픔이 있는지를 살핍니다.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공동체를 껴안는 자가 애통함의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인 것입니다.
공동체 원 가운데 큰 슬픔이나 아픔을 당한 이가 있을 때, 함께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참 지도자입니다. 눈물이 없는 메마른 자가 지도자로 있는 공동체는 삭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지도자가 공동체에 상처가 됩니다. 권위가 권위주의가 되고, 소통이 되지 않으며, 명령과 복종만 있는 공동체는 생명의 공동체가 아니라 죽은 공동체입니다.
가정 공동체에서 아버지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권위주의에 빠지면 자녀들이 아버지를 무서워하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을 기피하게 되고, 점차 가정은 딱딱하고 두려운 곳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들이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권위는 있되 따뜻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통당하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을 발견했다면 자녀와 함께 아파하고 공감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훈계나 비난을 쏟아낸다면, 가정에서 좋은 가장이 될 수 없습니다. 같이 애통해 하고 아파하는 아버지가 자녀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고, 이를 통해 가정이 회복되고 좋은 열매를 맺는 귀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이런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당한 위기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가 한 일을 살펴보면, 제일 처음에 그는 ‘물었습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호기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도 동참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그는 더 큰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묻고 난 다음에는 ‘들었고’, 이후에는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한 일이 ‘기도’였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내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내 가정의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하면, 그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어려움을 내어놓고 기도하면 이제 그 어려움이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교회를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 시작하면 그것은 어느새 하나님의 문제가 되고, 하나님이 해결하시고 동참하시는 역사가 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민족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 되었습니다.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마음이 아픔을 느끼고 갈급함을 느낀다는 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비록 고통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내 영혼과 마음이 마비되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여전히 내가 살아 있고 건강한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알림인 것입니다. 어떤 문명이 파괴되고, 어떤 국가가 파괴되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비통의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없는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모든 잘못을 남에게 돌리거나 탓합니다. 그러면서 살벌해지고, 서서히 해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사명을 가진 사람들의 가슴에는 공동체를 향한 아픔이 내재돼 있습니다. 가정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면 가정의 지도자가 됩니다. 공동체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됩니다. 국가와 민족의 비애를 자신의 아픔으로 삼고 애통해 하면 바로 그 사람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공동체를 위해 책임지는 지도자였습니다.
기독교의 치유 방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상처 입은 자가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은 그와 같은 눈물을 흘려본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 진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애통할 줄 아는 언어, 애통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노라.”
느헤미야 역시 이렇게 애통해 하며 주님 앞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6~7절입니다.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느헤미야 1:6~7 중)
그는 회개 기도를 합니다. 그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이 범죄한 게 아니라 자기 아버지 집이 범죄하여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다고 합니다. 즉 자기 백성의 비극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우리는 언제 눈물을 흘렸습니까? 억울할 때 눈물을 흘렸습니까? 슬프거나 화날 때 눈물을 흘렸습니까? 가슴이 북받치도록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눈물이란 참 신비로운 액체입니다. 눈물샘에서 분비되는 이 액체는 알칼리성으로, 98% 이상이 수분입니다. 그런데 이 눈물이 하는 역할은 상당합니다. 눈에 각종 영양소와 산소를 공급하고, 항균 작용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눈을 보호하고, 혹시라도 쌓일 수 있는 노폐물을 배출하도록 돕습니다. 그런 까닭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정서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매우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눈물의 효능을 잘 아는 의사들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슬픕니까? 그러면 우세요. 외롭습니까? 그렇다면 우십시오. 상처를 받았습니까? 그럼 울어 보세요.” 목사인 저도 그와 같은 해결책을 드립니다. 만약 흘러야 할 눈물을 내가 막고 있다면, 내 몸의 다른 장기가 대신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눈물은 슬픔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때문에 눈물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도 줍니다. 더욱이 지도자의 자리에서 흘리는 애통의 눈물은 공동체를 살리는 눈물,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눈물이 될 수 있습니다.
1948년 2월,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며 백범 김구 선생은 “삼천만 동포에게 눈물로 고함”이라는 제호 아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의 헐벗고 굶주린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눈앞에 어릿거린다. 붓이 여기에 이름에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잇지 못하겠노라.”
고난 받는 백성을 보면 가슴이 저리고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가 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는 지도자 말입니다.
애통의 눈물이 흐르는 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초대된 것도 예수님의 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비통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시며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그분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분은 고통당하는 자들 곁에 찾아가셨고, 그들을 치유하셨으며,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우셨고, 함께 애통해 하셨으며, 함께 비통함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눈물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애통함이 들어 있습니다. 애통할 줄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 지도자의 복입니다. 애통이란 나 자신을 향한 아픔이기도 하지만, 이웃과 시대를 향한 아픔의 표시입니다. 애통이란 더는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애통을 사명의 기반으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는 지도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떤 마음이 있습니까? 혹시 우리 마음이 너무 냉랭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보다 무자비한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 앞에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느헤미야처럼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을 보면, 내 속에서 애통함이 솟아오릅니까? 바로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애통의 눈물은 생명의 눈물입니다. 그런 눈물이 흐르는 곳에서 삶이 치유되고, 회복되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했습니다. 교회를 보면서 애통해 했고, 민족을 보면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주님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역사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 애통의 눈물을 흘릴 때, 이 시대에도 축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8년 6월 2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애통함의 리더십, 느헤미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9장, 45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느1:1~5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2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6.25 전쟁이 발발한지, 68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자유와 민주의 나라로, 독재를 저항하고 인권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나라로, 산업화와 정보화를 통해 제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나라로 발전시켜주셨습니다. 이 나라를 사랑하는 분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충성스런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느헤미야라는 인물을 통해 나라를 위해 애통할 줄 아는 인물의 리더십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교의 요약
이스라엘은 주전 587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말망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인물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느헤미야가 등장하는 때가 바사(페르샤)의 아닥사스다가 왕이 된지 20년이 된 때입니다. 바벨론 포로 중에 태어난 교포 2세/3세였지만 이국땅에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음의 공허, 영혼의 아픔 그리고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영적인 향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자기 고향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은 곧 자기 민족에 대한 관심입니다(2절). 느헤미야는 고향에서 돌아온 하나니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2-3절).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강 건너 불구경 보듯 하지 않았습니다. 주저 안았고, 통곡하였습니다(4절). 그리고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눈물로 기도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 민족의 아픔까지 자기 가슴으로 받아드렸다는 증거입니다. 눈물로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비전을 지닌 사명(리더십)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해야 하는 사명, 업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가장과 공동체, 국가를 위해 가슴 아파한다면 그는 곧 지도자가 일 것입니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있습니다. 눈물 흘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습니다. 애통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람을 보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애통의 언어, 애통하는 마음을 가르치고 배우게 해야만 합니다. 애통함의 범주가 곧 그의 지도력입니다. 우리는 언제 눈물을 흘려보았습니까? 억울할 때, 화가 날 때, 슬플 때, 가슴에 복받칠 때… 눈물의 효용성을 아는 의사들은 “슬플 때 울지 못하면 우리 몸의 다른 장기가 대신 운다”고 합니다. 눈물은 어제의 슬픔으로 탈출하는 자리, 새로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이 눈물의 애통함의 대상이 나에서부터 공동체, 교회, 민족이 되면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슴을 진정으로 따뜻하게 녹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긍휼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대신 아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 공동체의 슬픔과 고난에 참여할 분만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삶에 자기 전체를 투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보면서 애통하셔서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면서 애통해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애통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개인적으로 가장 최근에 눈물 흘렸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느헤미야는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금식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간절함의 기도제목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3. 눈에 눈물이 맺히기 전에 눈물로 아파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제는 주님을 닮아 애통함을 갖고, 이 시대와 우리의 삶의 주위를 돌아볼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