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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야곱이야기9-

창세기 32: 22 ~ 29

김지철 목사

2012.08.26

고향을 향하는 야곱의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야곱의 아홉 번째 이야기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야곱 인생의 절정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야곱이 가장 낮은 자리,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자리에 내려갔을 때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20년 만에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4명의 아내, 11명의 아들들, 그리고 여러 종들과 수천마리의 가축들을 지닌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무장군사들을 데리고 자기에게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공포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그는 ‘형이 아직도 분노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구나.’ 생각하며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그 때 야곱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무장한 군사 하나 없었습니다. 야곱 곁에는 많은 가축들과 이 가축을 기르는 종들, 그리고 연약한 여인들과 어린 아들들이 전부였습니다. 창세기 32장 7절은 형을 만나기에 앞서 이런 자신을 바라보는 야곱의 심정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창세기 32:7)

두려움 앞에서 야곱은 기도했습니다.

두려움 말고는 없었습니다. 야곱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공포와 답답함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가 가진 연약한 모습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이유입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창세기 32:11)

야곱은 20년 전,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였던 자기의 나쁜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탐욕에 붙잡히고, 거짓과 속임수가 가득했던, 그래서 형을 분노하게 했던 지난날의 사건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에서의 화난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인간적인 꾀로 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는 가족들을 두 패로 나누어 한 무리가 앞서 가게 하고, 나머지 한 무리는 뒤따르게 했습니다. 만약 형 에서가 앞 무리를 치면, 뒤에 따르던 무리는 그 사이에 도망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형 에서를 달랠 계략을 세웠습니다. 우선 형 에서가 좋아하는 예물을 택했습니다. 그는 하인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 마다 가축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형이 와서 저 가축이 뭐냐고 물으면, ‘당신의 동생 야곱이 당신에게 줄 선물입니다’라고 이야기하라” 형 에서를 만날 때마다 이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하인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이 가축들은 분명 형에게 주는 선물이었지만, 한편으론 뇌물의 성격이 컸습니다. 형 에서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은 화가 난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한 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준비들을 마치고 나서도 그는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인 채로 야곱은 한밤중에 두 아내와 두 여종, 11명의 아들들을 인도하여 얍복강을 건너가게 하고 자신은 홀로 남아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홀로 남은 야곱은 어느 것도 자기를 안심시킬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많은 제물도, 가축들도,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도 자신을 안심시키고 위로해 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오래된 고질병인 열등감, 탐욕, 그리고 죄책감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절망 속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로 있던 야곱에게 어떤 남자가 격하게 달려들어 야곱을 붙잡아 메쳤습니다. 처음에 야곱은 그저 자기에게 도전하는 어떤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격렬하게 대응했습니다.
본래 야곱이라는 이름이 ‘씨름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발꿈치를 잡고 둘러메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형과 씨름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 낯선 남자에게서 쉽게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야곱이 움켜쥔 손을 쉽게 놓지 않으리란 것을 알게된 상대는 야곱의 환도뼈를 치게 됩니다. 그 순간 야곱의 환도뼈가 어긋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환도뼈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허벅지 관절부분인 엉덩이뼈입니다. 그곳 뼈가 어긋났으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아마도 어마어마한 통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제서야 함께 씨름을 한 상대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큰 고통 속에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나를 축복해주세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와 절망, 불안, 두려움을 해결해 줄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6)

생명을 건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실 때까지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야곱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축복을 요청했습니다.
과거 야곱이 가졌던 축복의 개념은 보이는 축복이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와 함께 있었을 때 그것은 장자권이었습니다. 그는 맏아들처럼 대우받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받고자 했던 것은 결혼의 축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얻어 가정을 꾸리고, 더불어 수많은 가축을 얻는 재물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두 다 지나가는 것일 뿐, 그러한 것들은 결코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보호자 되시며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얍복강의 위기 속에서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위로할 수가 있다. 하나님만이 나의 이 두려움을 물리쳐 주실 수 있다’ 이 새로운 깨달음을 확인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복으로 삼겠다는 처절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씨름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얻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요청보다 더 중요한 요청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요청은,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전부로 삼기 원합니다” 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야곱을 하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진정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본질이 담겨있는 이름을 물으시는 것은, 다시 말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지금까지 너를 억눌렀던 너의 삶이 무엇이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세기 32:27)

“네 이름이 무엇이냐?” 20년 전,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인척 행동하는 야곱에게 아버지가 하셨던 질문입니다. 그 때 야곱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형 에서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야곱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 예전에 너는 아버지 앞에서 에서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과거에 너의 정체성은 왔다 갔다 하지 않았느냐. 너 정말 움켜잡는 자라는 뜻을 가진 야곱 맞느냐? 속임수를 쓰고 거짓말을 하고 교활한 자, 야곱이 맞느냐?”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앞을 잘 보지 못하던 아버지 앞에서는 속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뼈 속 깊이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야곱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기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예, 맞습니다.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발뒤꿈치를 움켜잡았던 자, 남의 것을 탈취하기 원했던 자입니다. 거짓말을 했던 자입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영혼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찌꺼기들을 모두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일어난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깨끗하게 닦여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여전히 깊은 곳에서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죄책감과 불안, 두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악하고 못된 삶의 기질들이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강제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으시고 마지막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을 비굴하게 만들거나, 절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이 진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항복하면 비굴해집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의 항복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은 자녀가 되는 축복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시작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다시 새로운 힘을 얻고,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억압받는 인생이 아니라 자유자로 인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들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세기 32:28)

“네가 스스로 야곱인 줄 알고 있으니 됐다. 이제 더 이상 야곱이라고 말하지 말자. 이제는, 그동안 가졌던 형 에서 앞에서의 열등감과 오랫동안 네 속에 있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렇게도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했던 때의 서운함과 섭섭함에서부터 벗어나라. 어머니의 애정 속에서 너 자신을 잃고 마마보이로 살았던 그 자리에서 독립하라.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살았던 세월의 억울함과 분함의 악몽에서 해방되라. 이제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가 되었다고 선포하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야곱에게 져주셨을까요? 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그것은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다. 이제는 이 이름과 이 기억을 가지고 살아라. 움츠러들지 말고 겁먹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살아라. 이름처럼 하나님에게 이긴 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신 이유이고, 지금 우리에게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키워보신 아버지들은 아실 것입니다. 아들이 어린 아이였을 때,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도전장을 내밉니다. “너 아빠하고 씨름 한번 해보자.” 그리고 격렬하게 자녀와 씨름을 합니다. 자녀와 씨름을 할 때마다 매번 이기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일부러 져줍니다. 그렇다고 자녀가 빤히 알도록 금방 져주지는 않습니다. 이길 듯, 이길 듯 하다가 져줍니다. 그러면 아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가서 자랑을 합니다. “와, 내가 아빠 이겼다.” 그럼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장한 내 아들아.” 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러줍니다.
그런데 그 때는 아버지가 져주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버지들은 왜 어린 아들에게 질까요? 왜 져줄까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얘야, 넌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자가 되라. 너는 아버지보다 더 나은 자가 되라.” 이것이 아들에게 기꺼이 져주는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하는 야곱에게 져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다시 힘과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어 억압된 삶에서 자유자가 되고, 두려움 속에서 해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에게 져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담대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져주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패배하시는 역사입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던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패배의 길, 지는 길을 대신 가신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주시기 위해서, 다시 말해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져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해 “너는 보배 같이 빛나는 존재”라고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져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에게 져줄 테니 너희는 세상을 이기거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나를 보호해준다고 믿으며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나 재물입니까? 가족입니까? 직장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야곱은 이것들이 모두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내게 만족을 주시고, 하나님만이 내 반석이시고, 하나님만이 내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를 아프게 하고 부끄럽게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외롭게 하고, 억눌렀던 죄책감이 무엇입니까? 지금도 나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초청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야곱 같았느냐? 더 이상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라. 너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 이스라엘이다. 이제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 그리고 세상을 이기라.” 라고 말입니다. 야곱을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을 이긴 사람으로 세워주신 것처럼 날마다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우리는 옛 야곱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로 바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를 가슴에 앉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담대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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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 22 ~ 29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고향을 향하는 야곱의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야곱의 아홉 번째 이야기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야곱 인생의 절정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야곱이 가장 낮은 자리,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자리에 내려갔을 때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20년 만에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4명의 아내, 11명의 아들들, 그리고 여러 종들과 수천마리의 가축들을 지닌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무장군사들을 데리고 자기에게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공포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그는 ‘형이 아직도 분노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구나.’ 생각하며 무서움에 떨었습니다.
그 때 야곱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무장한 군사 하나 없었습니다. 야곱 곁에는 많은 가축들과 이 가축을 기르는 종들, 그리고 연약한 여인들과 어린 아들들이 전부였습니다. 창세기 32장 7절은 형을 만나기에 앞서 이런 자신을 바라보는 야곱의 심정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창세기 32:7)

두려움 앞에서 야곱은 기도했습니다.

두려움 말고는 없었습니다. 야곱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공포와 답답함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가 가진 연약한 모습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이유입니다. 그는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창세기 32:11)

야곱은 20년 전,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였던 자기의 나쁜 행동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탐욕에 붙잡히고, 거짓과 속임수가 가득했던, 그래서 형을 분노하게 했던 지난날의 사건들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에서의 화난 마음을 누그러뜨려야 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인간적인 꾀로 계략을 세우게 됩니다. 그는 가족들을 두 패로 나누어 한 무리가 앞서 가게 하고, 나머지 한 무리는 뒤따르게 했습니다. 만약 형 에서가 앞 무리를 치면, 뒤에 따르던 무리는 그 사이에 도망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형 에서를 달랠 계략을 세웠습니다. 우선 형 에서가 좋아하는 예물을 택했습니다. 그는 하인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 마다 가축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에게 당부했습니다. “형이 와서 저 가축이 뭐냐고 물으면, ‘당신의 동생 야곱이 당신에게 줄 선물입니다’라고 이야기하라” 형 에서를 만날 때마다 이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하인들에게 지시했습니다. 이 가축들은 분명 형에게 주는 선물이었지만, 한편으론 뇌물의 성격이 컸습니다. 형 에서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은 화가 난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한 계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준비들을 마치고 나서도 그는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인 채로 야곱은 한밤중에 두 아내와 두 여종, 11명의 아들들을 인도하여 얍복강을 건너가게 하고 자신은 홀로 남아 얍복강 나루터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홀로 남은 야곱은 어느 것도 자기를 안심시킬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많은 제물도, 가축들도,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도 자신을 안심시키고 위로해 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오래된 고질병인 열등감, 탐욕, 그리고 죄책감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절망 속에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은 절망 속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로 있던 야곱에게 어떤 남자가 격하게 달려들어 야곱을 붙잡아 메쳤습니다. 처음에 야곱은 그저 자기에게 도전하는 어떤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격렬하게 대응했습니다.
본래 야곱이라는 이름이 ‘씨름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발꿈치를 잡고 둘러메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형과 씨름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그 낯선 남자에게서 쉽게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날이 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야곱이 움켜쥔 손을 쉽게 놓지 않으리란 것을 알게된 상대는 야곱의 환도뼈를 치게 됩니다. 그 순간 야곱의 환도뼈가 어긋났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환도뼈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허벅지 관절부분인 엉덩이뼈입니다. 그곳 뼈가 어긋났으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아마도 어마어마한 통증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제서야 함께 씨름을 한 상대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큰 고통 속에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나를 축복해주세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와 절망, 불안, 두려움을 해결해 줄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6)

생명을 건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실 때까지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야곱은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축복을 요청했습니다.
과거 야곱이 가졌던 축복의 개념은 보이는 축복이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와 함께 있었을 때 그것은 장자권이었습니다. 그는 맏아들처럼 대우받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받고자 했던 것은 결혼의 축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얻어 가정을 꾸리고, 더불어 수많은 가축을 얻는 재물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모두 다 지나가는 것일 뿐, 그러한 것들은 결코 자신을 보호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보호자 되시며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신다는 것을 얍복강의 위기 속에서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위로할 수가 있다. 하나님만이 나의 이 두려움을 물리쳐 주실 수 있다’ 이 새로운 깨달음을 확인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을 나의 복으로 삼겠다는 처절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씨름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얻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요청보다 더 중요한 요청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요청은, “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전부로 삼기 원합니다” 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야곱을 하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진정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그것은 이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본질이 담겨있는 이름을 물으시는 것은, 다시 말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지금까지 너를 억눌렀던 너의 삶이 무엇이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세기 32:27)

“네 이름이 무엇이냐?” 20년 전,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인척 행동하는 야곱에게 아버지가 하셨던 질문입니다. 그 때 야곱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형 에서의 이름을 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야곱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 예전에 너는 아버지 앞에서 에서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과거에 너의 정체성은 왔다 갔다 하지 않았느냐. 너 정말 움켜잡는 자라는 뜻을 가진 야곱 맞느냐? 속임수를 쓰고 거짓말을 하고 교활한 자, 야곱이 맞느냐?” 이렇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앞을 잘 보지 못하던 아버지 앞에서는 속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라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뼈 속 깊이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야곱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기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예, 맞습니다.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발뒤꿈치를 움켜잡았던 자, 남의 것을 탈취하기 원했던 자입니다. 거짓말을 했던 자입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영혼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찌꺼기들을 모두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일어난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깨끗하게 닦여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여전히 깊은 곳에서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죄책감과 불안, 두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악하고 못된 삶의 기질들이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강제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으시고 마지막 항복을 받아내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을 비굴하게 만들거나, 절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이 진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항복하면 비굴해집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세상에서의 항복은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은 자녀가 되는 축복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시작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다시 새로운 힘을 얻고,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억압받는 인생이 아니라 자유자로 인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몰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대답을 들으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세기 32:28)

“네가 스스로 야곱인 줄 알고 있으니 됐다. 이제 더 이상 야곱이라고 말하지 말자. 이제는, 그동안 가졌던 형 에서 앞에서의 열등감과 오랫동안 네 속에 있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렇게도 받고 싶었지만 받지 못했던 때의 서운함과 섭섭함에서부터 벗어나라. 어머니의 애정 속에서 너 자신을 잃고 마마보이로 살았던 그 자리에서 독립하라.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살았던 세월의 억울함과 분함의 악몽에서 해방되라. 이제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가 되었다고 선포하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야곱에게 져주셨을까요? 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그것은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너는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다. 이제는 이 이름과 이 기억을 가지고 살아라. 움츠러들지 말고 겁먹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살아라. 이름처럼 하나님에게 이긴 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신 이유이고, 지금 우리에게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키워보신 아버지들은 아실 것입니다. 아들이 어린 아이였을 때,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도전장을 내밉니다. “너 아빠하고 씨름 한번 해보자.” 그리고 격렬하게 자녀와 씨름을 합니다. 자녀와 씨름을 할 때마다 매번 이기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는 일부러 져줍니다. 그렇다고 자녀가 빤히 알도록 금방 져주지는 않습니다. 이길 듯, 이길 듯 하다가 져줍니다. 그러면 아들은 소리를 지르며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가서 자랑을 합니다. “와, 내가 아빠 이겼다.” 그럼 엄마는 미소를 지으며, “장한 내 아들아.” 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러줍니다.
그런데 그 때는 아버지가 져주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나서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아버지들은 왜 어린 아들에게 질까요? 왜 져줄까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얘야, 넌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자가 되라. 너는 아버지보다 더 나은 자가 되라.” 이것이 아들에게 기꺼이 져주는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하는 야곱에게 져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다시 힘과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어 억압된 삶에서 자유자가 되고, 두려움 속에서 해방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에게 져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담대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져주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패배하시는 역사입니다. 그 대표적인 역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던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패배의 길, 지는 길을 대신 가신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꿔주시기 위해서, 다시 말해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져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해 “너는 보배 같이 빛나는 존재”라고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 져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에게 져줄 테니 너희는 세상을 이기거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거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나를 보호해준다고 믿으며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나 재물입니까? 가족입니까? 직장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야곱은 이것들이 모두 부질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내게 만족을 주시고, 하나님만이 내 반석이시고, 하나님만이 내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를 아프게 하고 부끄럽게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외롭게 하고, 억눌렀던 죄책감이 무엇입니까? 지금도 나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두려움과 불안과 근심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초청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야곱 같았느냐? 더 이상 야곱이라고 부르지 말라. 너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 이스라엘이다. 이제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 그리고 세상을 이기라.” 라고 말입니다. 야곱을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을 이긴 사람으로 세워주신 것처럼 날마다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우리는 옛 야곱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로 바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를 가슴에 앉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담대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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