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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의 영, 사명의 영? – 성령과 악령 21 –

출애굽기 3: 4 ~ 10

김지철 목사

2017.11.12

하나님의 자녀는 사명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5부 예배 시에 아홉 분의 장로 임직식이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이끌어 가실 분들을 세우는 귀중한 자리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참여하셔서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우리 교회가 더 큰 축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임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직분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며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정성을 내고, 내게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주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에너지를 주며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이 장로 직분을 감당하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 사랑과 생명의 길을 우리도 이제 함께 걸어갑니다.
특별히 이번에 장로로 임직하시는 분들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힘들고 아픈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무릎 꿇으며 기도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도 받았습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이 야심이나 야망에 멈춰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약속임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감사했습니다.
사람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야심과 야망도 있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들입니다. 재물이나 지위, 명성과 권력을 갖길 원하는 열망을 야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도 많은 재산과 명예, 권력을 쥐고 있었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그들을 야심가나 야망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합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향해 “너희들이 야심이 많구나.”라고 하시지 않고, “너는 나의 벗이구나. 나의 친구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8절에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사야 41:8)

아브라함이 자신의 친구였다고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자손이라고 명명하십니다.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야망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라 사명의 영에 붙잡힌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친구요, 사명의 영에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야망이 사명으로 변화됩니다.

그렇다면 야망과 사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야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꿈, 나의 비전, 나의 목표, 나의 야망, 이렇게 모든 게 나 자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반면 사명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양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본래 야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둘째’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늘 ‘첫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를 부러워하며 시기했습니다. 결국 형의 것을 갈취하려 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야곱을 단순히 야망의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그가 결국엔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든 결부시키길 원했습니다. 그는 아마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 “얘야, 너는 둘째이지만 첫째가 될 것이다.”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리브가가 아이를 잉태했는데 쌍둥이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다 함께 그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세기 25:23 중)

아마 야곱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야. 너는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뒤따라 나왔지.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길 큰 자가 작은 자가 되고, 작은 자가 큰 자보다 강해질 것이라고 했단다.” 야곱은 어머니로부터 수없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형을 더 아꼈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둘째, 그리고 막내일 뿐입니다. 형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축복 받는 길도 막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첫째가 될 수 있을지 골몰합니다. 온갖 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그는 야심가였습니다. 야망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언제나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 자신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때 야곱이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야곱의 하나님이시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멋진 꿈을 꾸어도, 아무리 그럴 듯한 야망을 품어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야곱과 같은 위기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게 됩니다. 야망과 야심을 반복했던 야곱의 인생 역시 위기가 연속되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변화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방랑생활을 마치고 얍복 나루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 밤에 그는 하나님의 천사와 격렬하게 씨름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32:28)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맞아. 내 이름이 야곱이었지.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듯이 앞의 것만을 붙잡고 추구하려고 했지. 이제 그 이름을 그만두자. 끊임없이 탐욕을 추구했던 과거의 삶도 이제 그만두자.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자. 그분을 놓친다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 바로 그때 야심가이자 야망가였던 야곱을 하나님이 사명자로 바꿔 주셨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예를 삶으로 경험한 또 다른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입니다.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 모세는 자아가 강했습니다. 무엇이든 그가 명령하면 다 이루어졌습니다. 갖고자 하는 것도 다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거대 제국이었던 애굽의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왕자로서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야망심만을 가지고 민족 앞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왕자의 자리도 내려놓고 광야로 도피하는 패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젊은 시절 모세는 자신의 야망을 혈기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토록 강력하게 확신했던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광야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모세에게 광야 길을 열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는 모세를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네가 야망의 영에 붙잡혀 있느냐? 그러는 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람도 될 수 없다. 사명의 영에 이끌려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다.” 이 모든 훈련 과정이 출애굽의 역사 속에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 욕망에 매여 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약속만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야망과 사명의 목표는 언뜻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하나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에 따라 야망가가 될 수도 있고 사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모세의 사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모세의 소명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출애굽기 3장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4)

하나님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즉 가장 친근한 형태로 다가오신 하나님입니다. 종종 우리도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시길 기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주 친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예수 안에 있으면 임마누엘의 하나님, 가장 친밀한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다.”

사명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를 더하십니다.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더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에게 가까이 다가서지만 기억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와 나, 곧 하나님과 모세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고 나는 하나님이다’, ‘너는 죄인이고 나는 거룩한 존재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로 하여금 두 모순을 하나로 묶습니다. 친밀성과 거리감을 하나로 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나와 다른 전적 타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도 그분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양가감정을 느낍니다. 먼저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찾아오시고 동행하신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지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 그러나 그분을 경외하며 두려워 떨라.” 이 얼마나 충돌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역설을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히 그분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강력한 권세를 얻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면서도 겸손한 사람들이 됩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모세가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역동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려 7개의 동사가 연속해서 나옵니다. 7~8절 말씀을 읽어볼 텐데, 그중 동사 표현을 유념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애굽기 3:7~8)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당신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고통 중에 신음하고 탄식하는 백성의 탄식을 듣게 하십니다. 그리곤 “내가 이제 가만히 있지 않겠다. 내가 움직일 것이다. 내가 행동하겠다. 모세야! 네가 이 일에 동참하라. 나의 아픔을 품고 내가 원하는 일을 이제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합니다. 백성의 슬픔, 그들의 고난, 그들의 아픔도 함께 짊어집니다. 그러는 가운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게 됩니다.
사명의 영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탄식을 듣게 되는 것, 이 시대의 고난과 아픔의 현장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동시에 그 속에 하나님의 아픔이 있다는 사실, 하나님의 탄식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할까? 내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순종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의 음성에 민감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야망의 영에 붙잡혀 있는지, 사명의 영에 이끌리는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야망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나를 위해’, ‘내가 잘 되어야’, ‘내가 살아야’, ‘내가 강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야망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어마어마한 열정이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집착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못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면 과시하며 오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때문에 야망을 품은 사람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다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명자는 부르심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르신 분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자신을 내려놓게 됩니다. 자신은 낮아지고 자신을 부르신 분만을 높이며 나아갑니다. 이것이 사명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도 사명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Calling’ 곧 부르심이 없으면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야망에 가깝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분께 붙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바울은 이 원리의 깊은 뜻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중)

그는 매일매일 죽는 연습을 했습니다.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를 부르신 분, 곧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고난과 고통, 죽음도 각오하겠다는 준비를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죽음으로 진정한 생명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즉생(死卽生)입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희 목회자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목사가 죽어야 성도가 산다. 성도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목사가 죽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아파하고, 상처를 입고, 신음합니다. 오늘 5부 예배에서 임직하시는 아홉 분의 장로님들께도 똑같은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장로님들께 대입하면 이렇습니다. “장로가 죽어야 성도들이 살고 교회가 살아납니다.”
장로 직분이란 교회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낮아지는 자리입니다. 장로는 두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성도들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음성을 가슴에 품고, 성도들의 연약함 속에 함께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비단 장로님들께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이웃의 아픔을 읽고, 시대의 사명을 이뤄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야 할지 고민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를 통해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사명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주님의 귀한 종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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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 4 ~ 10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는 사명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5부 예배 시에 아홉 분의 장로 임직식이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이끌어 가실 분들을 세우는 귀중한 자리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참여하셔서 축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분들을 통해 우리 교회가 더 큰 축복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원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임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직분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며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정성을 내고, 내게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여 주님의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기쁨과 에너지를 주며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이 장로 직분을 감당하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 사랑과 생명의 길을 우리도 이제 함께 걸어갑니다.
특별히 이번에 장로로 임직하시는 분들의 신앙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힘들고 아픈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무릎 꿇으며 기도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도 받았습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이 야심이나 야망에 멈춰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약속임을 고백했습니다. 또한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감사했습니다.
사람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야심과 야망도 있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들입니다. 재물이나 지위, 명성과 권력을 갖길 원하는 열망을 야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도 많은 재산과 명예, 권력을 쥐고 있었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그들을 야심가나 야망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칭찬합니다. 하나님도 그들을 향해 “너희들이 야심이 많구나.”라고 하시지 않고, “너는 나의 벗이구나. 나의 친구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8절에서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사야 41:8)

아브라함이 자신의 친구였다고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자손이라고 명명하십니다.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야망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라 사명의 영에 붙잡힌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친구요, 사명의 영에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야망이 사명으로 변화됩니다.

그렇다면 야망과 사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야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꿈, 나의 비전, 나의 목표, 나의 야망, 이렇게 모든 게 나 자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반면 사명은 내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양자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본래 야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둘째’라는 말이 싫었습니다. 늘 ‘첫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를 부러워하며 시기했습니다. 결국 형의 것을 갈취하려 했습니다. 아버지를 속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경은 야곱을 단순히 야망의 사람이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그가 결국엔 신앙의 사람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야망과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든 결부시키길 원했습니다. 그는 아마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것입니다. “얘야, 너는 둘째이지만 첫째가 될 것이다.”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리브가가 아이를 잉태했는데 쌍둥이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다 함께 그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세기 25:23 중)

아마 야곱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야. 너는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뒤따라 나왔지.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길 큰 자가 작은 자가 되고, 작은 자가 큰 자보다 강해질 것이라고 했단다.” 야곱은 어머니로부터 수없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형을 더 아꼈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둘째, 그리고 막내일 뿐입니다. 형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축복 받는 길도 막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첫째가 될 수 있을지 골몰합니다. 온갖 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그는 야심가였습니다. 야망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시기 전까지 그랬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언제나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 자신의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경험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때 야곱이 깨닫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야곱의 하나님이시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멋진 꿈을 꾸어도, 아무리 그럴 듯한 야망을 품어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야곱과 같은 위기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가게 됩니다. 야망과 야심을 반복했던 야곱의 인생 역시 위기가 연속되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변화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방랑생활을 마치고 얍복 나루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 밤에 그는 하나님의 천사와 격렬하게 씨름합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32:28)라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맞아. 내 이름이 야곱이었지.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듯이 앞의 것만을 붙잡고 추구하려고 했지. 이제 그 이름을 그만두자. 끊임없이 탐욕을 추구했던 과거의 삶도 이제 그만두자.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자. 그분을 놓친다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 바로 그때 야심가이자 야망가였던 야곱을 하나님이 사명자로 바꿔 주셨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예를 삶으로 경험한 또 다른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입니다.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 모세는 자아가 강했습니다. 무엇이든 그가 명령하면 다 이루어졌습니다. 갖고자 하는 것도 다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거대 제국이었던 애굽의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왕자로서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지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야망심만을 가지고 민족 앞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왕자의 자리도 내려놓고 광야로 도피하는 패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젊은 시절 모세는 자신의 야망을 혈기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토록 강력하게 확신했던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광야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모세에게 광야 길을 열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이는 모세를 낮추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네가 야망의 영에 붙잡혀 있느냐? 그러는 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람도 될 수 없다. 사명의 영에 이끌려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다.” 이 모든 훈련 과정이 출애굽의 역사 속에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 욕망에 매여 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약속만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야망과 사명의 목표는 언뜻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하나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에 따라 야망가가 될 수도 있고 사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모세의 사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모세의 소명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출애굽기 3장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4)

하나님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즉 가장 친근한 형태로 다가오신 하나님입니다. 종종 우리도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시길 기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아주 친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예수 안에 있으면 임마누엘의 하나님, 가장 친밀한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다.”

사명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고를 더하십니다. 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 3:5)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시더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에게 가까이 다가서지만 기억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와 나, 곧 하나님과 모세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고 나는 하나님이다’, ‘너는 죄인이고 나는 거룩한 존재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우리로 하여금 두 모순을 하나로 묶습니다. 친밀성과 거리감을 하나로 묶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나와 다른 전적 타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도 그분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양가감정을 느낍니다. 먼저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찾아오시고 동행하신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어떻게 설 수 있을지 두려움과 떨림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 그러나 그분을 경외하며 두려워 떨라.” 이 얼마나 충돌되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역설을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히 그분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강력한 권세를 얻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담대하면서도 겸손한 사람들이 됩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모세가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역동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려 7개의 동사가 연속해서 나옵니다. 7~8절 말씀을 읽어볼 텐데, 그중 동사 표현을 유념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출애굽기 3:7~8)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당신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고통 중에 신음하고 탄식하는 백성의 탄식을 듣게 하십니다. 그리곤 “내가 이제 가만히 있지 않겠다. 내가 움직일 것이다. 내가 행동하겠다. 모세야! 네가 이 일에 동참하라. 나의 아픔을 품고 내가 원하는 일을 이제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합니다. 백성의 슬픔, 그들의 고난, 그들의 아픔도 함께 짊어집니다. 그러는 가운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움 받게 됩니다.
사명의 영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탄식을 듣게 되는 것, 이 시대의 고난과 아픔의 현장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동시에 그 속에 하나님의 아픔이 있다는 사실, 하나님의 탄식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무엇을 할까? 내 삶의 현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순종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의 음성에 민감한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야망의 영에 붙잡혀 있는지, 사명의 영에 이끌리는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야망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나를 위해’, ‘내가 잘 되어야’, ‘내가 살아야’, ‘내가 강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야망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어마어마한 열정이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집착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못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면 과시하며 오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때문에 야망을 품은 사람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자는 다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명자는 부르심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르신 분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명자는 자신을 내려놓게 됩니다. 자신은 낮아지고 자신을 부르신 분만을 높이며 나아갑니다. 이것이 사명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도 사명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Calling’ 곧 부르심이 없으면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야망에 가깝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분께 붙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바울은 이 원리의 깊은 뜻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31 중)

그는 매일매일 죽는 연습을 했습니다.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를 부르신 분, 곧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고난과 고통, 죽음도 각오하겠다는 준비를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죽음으로 진정한 생명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즉생(死卽生)입니다. 죽어야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희 목회자들은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목사가 죽어야 성도가 산다. 성도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 목사가 죽지 않기 때문에 성도들이 아파하고, 상처를 입고, 신음합니다. 오늘 5부 예배에서 임직하시는 아홉 분의 장로님들께도 똑같은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장로님들께 대입하면 이렇습니다. “장로가 죽어야 성도들이 살고 교회가 살아납니다.”
장로 직분이란 교회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낮아지는 자리입니다. 장로는 두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성도들의 탄식입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음성을 가슴에 품고, 성도들의 연약함 속에 함께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 말씀이 비단 장로님들께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이웃의 아픔을 읽고, 시대의 사명을 이뤄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야 할지 고민하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를 통해 생명과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사명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주님의 귀한 종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11월 1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야망의 영, 사명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5장, 32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출 3:4-10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우리는 오늘 아홉 명의 장로님 임직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맡아 남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의 이야기 속에서 모두가 힘든 시간들을 보내신 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임직식이 단순한 꿈과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자리임을 고백하셨습니다.

  

설교의 요약

사람에게는 야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기에 갖는 소원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재물, 명예, 권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야심가, 야망가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순종과 겸손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진정한 ‘벗’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사41:8). 야망이 아니라 사명의 영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망과 사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야망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사명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야곱은 야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었습니다.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이고, 야심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아버지 이삭으로부터가 아니라, 어머니 리브가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자기를 향해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사명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넘어 이제는 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고백하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모세도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자기중심적 야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이라는 제국의 왕자였기 때문에 교만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민족 유대인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살인자로서 광야학교로 도피하고 나서야 그곳에서 야망의 영에 붙잡혀 있던 모세는 사명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성숙한 모세로 탈바꿈합니다. 두 가지 깨달음 때문입니다. 첫째는 ‘모세’라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깨닫게 합니다(4절). 둘째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하시는 거리감을 깨닫게 하셨습니다(5절). 하나님의 거룩함이란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습니다. ‘동행’하는 기쁨과 동시에 거룩함 앞에 선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동시에 믿음의 사람들은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의식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고통 중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긍휼입니다(7절). 사명이란 바로 하나님의 탄식을 듣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내 자리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야망과 사명을 구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야망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사명을 깨달으면 그 사람은 겸손해 집니다. 사명은 부르신 분을 위해 나 자신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높아지고, 나는 낮아질 각오를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목사가 죽어야 성도가 살고, 성도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로가 죽어야 우리 성도가 살고, 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명의 영에 붙잡혀 주님의 이름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누기

1. 이스라엘 이전의 야곱처럼, 광야 이전의 모세처럼, 야망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아픔을 주었던 경험, 교만히 행하다 실패하고 좌절하였던 경험이 있나요? 함께 나누며 치유의 은혜를 구합시다.

2. ‘나 정도 되니까(야망의 영)’ 받은 은혜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까지도(사명의 영)’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을 나눠 봅시다.

3. 사명의 영 안에서, 2018년 섬겨야 할 교회의 필요(제직회 각 부서의 필요, 교회학교 교사 등) 구역의 필요(구역장, 권찰 등)를 살펴보고 결단해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야망의 영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원합니다. 이제는 사명의 영,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며 주님의 마음을 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셔서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와 민족의 자리에서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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