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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과 강함의 신앙 변증법

고린도후서 12: 1 ~ 10

김지철 목사

2009.07.05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쉽게 좌우됩니다.

삶이란 인간관계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관계의 틀 안에서 모두 정의됩니다. 관계의 틀 안에서 우리를 정의해 가다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 이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잘됨, 우리의 높아짐과 우리의 성취는 곧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르게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서 또 하나의 나로 만들어지고, 자기를 의식하게 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 아래서 우리들은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높아지고 기준 이상의 평가를 받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를 안달하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지향하는 바가 그렇습니다. 보다 더 강한 것, 보다 더 많은 것, 보다 더 크고 그럴듯한 외양을 성공하는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이고 힘이며 그것이 바로 승리이고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길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동의 안에는 우리들, 곧 하나님의 성도들도 들어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예수 믿는 우리들과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입니다. 그분의 눈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추구하는 강함이 진정한 강함인가? 우리의 기뻐하는 승리가 진정한 승리인가? 우리가 꿈꾸는 성공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공인가를 우리 스스로 자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적으로 성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목표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목표의식을 가지고 업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성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자랑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늘 남보다 뛰어나기를 열망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훈련도 절제도 할 줄 아는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합니다. 종교적으로도 명문집안의 태생, 곧 베냐민지파 출신이었고, 율법으로는 존경받던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최고의 선생이었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학벌도 좋은 인물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어서, 스스로도 내가 율법에 대하여 흠이 없을 만큼 되었다고 자고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조건이 그를 교만하게 했습니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삶에 모든 자랑거리를 다 내놓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리로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교만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일을 맡기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면, 교만함이 더해지고, 자기자랑이 더해질 것이고, 바울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망하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본성을 적대자를 통하여 다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끈질긴 자기자랑의 본성, 성공지향의 본성, 목표중심의 본성을 조절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두 가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주위에 항상 많은 적대자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들은 늘 바울에게 질문했습니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냐?’ ‘네가 네 욕심을 채우는 사람은 아니냐?’ 그 고난이라고 부르는 질문들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자기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사도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첫째는 스스로 잘못을 해서 악한 일의 결과로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가능하면 피하기를 권합니다. 또, 남이 잘못해서 그 잘못 된 무리에 속하여 함께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는 마땅히 함께 극복하며, 서로를 격려해서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열심히 살려고 하면 많은 장애물들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순종하려고 하면 그 변화를 거스르려고 나의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드리려 하면, 고난은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지금 바울이 당하는 고난은 이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바울이 품고 있던 자기 자랑의 위기를 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본성을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 다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몸에도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스스로 자기 사탄의 사자라고도 부르고, 몸의 가시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고통이 그를 억누르게 했습니다. 학자들이 추정컨대 극심한 편두통이거나, 눈의 질환이거나 간질 증세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몸의 가시가 무엇이든 간에, 바울은 이 일이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든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불편하고, 방해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간구합니다. 바울의 이 간구는 진심으로 드린, 온전한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상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처럼 바울의 이 간절한 기도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했던 것처럼 바울도 육체의 그 고난, 육체의 그 가시를 안고, 하나님의 사도로서의 삶, 곧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기의 고난을 기뻐하며 고백합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고난은 아픈 것입니다. 괴로운 것입니다. 견디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난의 자리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고난의 의미를 알고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연약한 것, 자기의 부족한 것, 자기가 고난당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나를 깔보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자기가 가난했다는 것, 자기가 공부를 못했다는 것, 자기가 가진 삶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억누름이며, 회피입니다. 자기의 참 모습을 감추고 숨는 일입니다. 그 일을 숨기려 다른 것 이를테면 세속적인 성공이나, 일시적인 취미생활, 그밖에 자기의 다른 장점들로 자기를 꾸미고, 위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참 모습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불현듯 허탈한 마음에 무너지는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 분명한 눈가림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문제 자기의 연약함 자기의 약점을 용기 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숨기고 위장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시적인 눈가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정직한 자기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도망침의 문제에서 용기 있게 나오는 바울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풍성하게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의 연약함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과거의 고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 고난 속에 들어가 있는 약한 사람임을 고백함으로, 그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모두를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자랑하려고 한다면 자기의 약한 것들을 자랑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
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10)

우리가 고난을 왜 받을까요? 나의 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일까요? 혹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생명과 진리를 위한 고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위항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바울은 고난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습니다. 남의 탓을 하면서 책임전가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고난과 영광의 역설적인 변증법입니다. 약함과 강함의 역설입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역설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하나님의 거룩함이 만나는 역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자기의 고난을 대하는 자기 삶에 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이 베풀어지는 역설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역설의 은혜를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일 이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비밀을 아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교만해지고, 연약하고 가난할수록 더 낙심이 되고 자기 연민에 갇힐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들에게 말씀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연약함과 고난의 자리는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축복의 장소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갈 사명자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연약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철저하게 깨어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두 손 들어야 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를 다 부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빚음 받는 놀라운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확인한 것은 자기의 능력도 재주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경험한 연약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네 은혜가 충분하다.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오히려 네가 온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약하다고 느끼거든 오히려 기뻐해라. 네가 연약하다고
생각될 때가 하나님의 능력이 너와 함께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십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비로소 진정한 겸손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주저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연약하게 되는 것, 고난 받는 것을 좋게 여겼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내 길인가? 수 없이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야 비로소 생기는 자세입니다. 때로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있을지라도, 본능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게으르거나, 야망을 숨기므로,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겁이 많고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남과 잘 지내기 위해서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자기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 자기 무지를 경험한 사람, 자기 무능과 실패로 좌절의 구렁텅이를 지나간 사람만이 이 보물과 같은 겸손의 능력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양이라도 한번 이상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내 삶의 방향, 내 삶의 목적이 이제는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깨어진 사람’입니다. 혹, 내 육체의 문제로 깨어진 사람입니다. 내 실패와 무능의 경험으로 ‘깨어진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내가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지에 목을 메진 않습니다. 거기에 내 인생의 기준과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이 남들보다 좀 많더라도, 없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멋진 사람들입니다. 배운 것이 많이 있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을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건강함으로 다른 이의 연약함을 품을 수 있고, 나의 힘과 권력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내가 먼저 깨어지고, 먼저 무너진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역설적인 진리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함과 내가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만 신뢰함으로 채워지는 것, 이 역설적인 진리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그 사람에게 맡겨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고난의 길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들로 삼으시려는 진리의 자리임을 우리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연약한 순간, 이 갈급하고 목마른 나날이 오히려 우리를 굳세고 풍요롭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임을 우리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기게 하시고, 다른 누군가의 평가와 기준에 굴하지 않으며 서로를 세워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겸손의 능력을 배우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일구어가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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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 1 ~ 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0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쉽게 좌우됩니다.

삶이란 인간관계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관계의 틀 안에서 모두 정의됩니다. 관계의 틀 안에서 우리를 정의해 가다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 이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잘됨, 우리의 높아짐과 우리의 성취는 곧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을 다르게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서 또 하나의 나로 만들어지고, 자기를 의식하게 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 아래서 우리들은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높아지고 기준 이상의 평가를 받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를 안달하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지향하는 바가 그렇습니다. 보다 더 강한 것, 보다 더 많은 것, 보다 더 크고 그럴듯한 외양을 성공하는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이고 힘이며 그것이 바로 승리이고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길이라고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동의 안에는 우리들, 곧 하나님의 성도들도 들어있습니다.
이런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예수 믿는 우리들과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입니다. 그분의 눈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추구하는 강함이 진정한 강함인가? 우리의 기뻐하는 승리가 진정한 승리인가? 우리가 꿈꾸는 성공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공인가를 우리 스스로 자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적으로 성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인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목표지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목표의식을 가지고 업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성취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자랑할 만한 것을 많이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늘 남보다 뛰어나기를 열망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훈련도 절제도 할 줄 아는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합니다. 종교적으로도 명문집안의 태생, 곧 베냐민지파 출신이었고, 율법으로는 존경받던 바리새파 출신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최고의 선생이었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학벌도 좋은 인물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어서, 스스로도 내가 율법에 대하여 흠이 없을 만큼 되었다고 자고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조건이 그를 교만하게 했습니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삶에 모든 자랑거리를 다 내놓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강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자리로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하나님의 사도로 부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교만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일을 맡기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면, 교만함이 더해지고, 자기자랑이 더해질 것이고, 바울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망하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본성을 적대자를 통하여 다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끈질긴 자기자랑의 본성, 성공지향의 본성, 목표중심의 본성을 조절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두 가지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주위에 항상 많은 적대자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들은 늘 바울에게 질문했습니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냐?’ ‘네가 네 욕심을 채우는 사람은 아니냐?’ 그 고난이라고 부르는 질문들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자기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사도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은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첫째는 스스로 잘못을 해서 악한 일의 결과로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가능하면 피하기를 권합니다. 또, 남이 잘못해서 그 잘못 된 무리에 속하여 함께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는 마땅히 함께 극복하며, 서로를 격려해서 이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열심히 살려고 하면 많은 장애물들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순종하려고 하면 그 변화를 거스르려고 나의 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드리려 하면, 고난은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지금 바울이 당하는 고난은 이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바울이 품고 있던 자기 자랑의 위기를 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본성을 육체의 가시를 통하여 다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몸에도 가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스스로 자기 사탄의 사자라고도 부르고, 몸의 가시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고통이 그를 억누르게 했습니다. 학자들이 추정컨대 극심한 편두통이거나, 눈의 질환이거나 간질 증세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몸의 가시가 무엇이든 간에, 바울은 이 일이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었습니다.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든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불편하고, 방해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이나 간구합니다. 바울의 이 간구는 진심으로 드린, 온전한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상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거절하신 것처럼 바울의 이 간절한 기도도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했던 것처럼 바울도 육체의 그 고난, 육체의 그 가시를 안고, 하나님의 사도로서의 삶, 곧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기의 고난을 기뻐하며 고백합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고난은 아픈 것입니다. 괴로운 것입니다. 견디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고난의 자리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고난의 의미를 알고 기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연약한 것, 자기의 부족한 것, 자기가 고난당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나를 깔보지는 않을까 걱정합니다. 자기가 가난했다는 것, 자기가 공부를 못했다는 것, 자기가 가진 삶에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억누름이며, 회피입니다. 자기의 참 모습을 감추고 숨는 일입니다. 그 일을 숨기려 다른 것 이를테면 세속적인 성공이나, 일시적인 취미생활, 그밖에 자기의 다른 장점들로 자기를 꾸미고, 위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참 모습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불현듯 허탈한 마음에 무너지는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 분명한 눈가림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문제 자기의 연약함 자기의 약점을 용기 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약점을 극복하려고 숨기고 위장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시적인 눈가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정직한 자기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도망침의 문제에서 용기 있게 나오는 바울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풍성하게 다시 태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그의 연약함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과거의 고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 고난 속에 들어가 있는 약한 사람임을 고백함으로, 그는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 모두를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자랑하려고 한다면 자기의 약한 것들을 자랑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
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10)

우리가 고난을 왜 받을까요? 나의 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일까요? 혹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생명과 진리를 위한 고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위항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바울은 고난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지 않습니다. 남의 탓을 하면서 책임전가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깨달은 것은 고난과 영광의 역설적인 변증법입니다. 약함과 강함의 역설입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역설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하나님의 거룩함이 만나는 역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설을 깨닫게 되면서 그는 자기의 고난을 대하는 자기 삶에 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이 베풀어지는 역설의 현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역설의 은혜를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만일 이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비밀을 아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교만해지고, 연약하고 가난할수록 더 낙심이 되고 자기 연민에 갇힐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우리들에게 말씀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연약함과 고난의 자리는 오히려 이것은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축복의 장소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갈 사명자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연약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철저하게 깨어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두 손 들어야 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그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를 다 부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빚음 받는 놀라운 경험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확인한 것은 자기의 능력도 재주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경험한 연약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네 은혜가 충분하다.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오히려 네가 온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약하다고 느끼거든 오히려 기뻐해라. 네가 연약하다고
생각될 때가 하나님의 능력이 너와 함께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십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비로소 진정한 겸손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주저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연약하게 되는 것, 고난 받는 것을 좋게 여겼을 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내 길인가? 수 없이 질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역설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달을 때야 비로소 생기는 자세입니다. 때로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있을지라도, 본능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게으르거나, 야망을 숨기므로,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겁이 많고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남과 잘 지내기 위해서 겸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은 자기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 자기 무지를 경험한 사람, 자기 무능과 실패로 좌절의 구렁텅이를 지나간 사람만이 이 보물과 같은 겸손의 능력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양이라도 한번 이상 깨어진 사람들입니다. 내 삶의 방향, 내 삶의 목적이 이제는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깨어진 사람’입니다. 혹, 내 육체의 문제로 깨어진 사람입니다. 내 실패와 무능의 경험으로 ‘깨어진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하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내가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지에 목을 메진 않습니다. 거기에 내 인생의 기준과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진 것이 남들보다 좀 많더라도, 없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멋진 사람들입니다. 배운 것이 많이 있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을 함께 끌어안을 수 있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건강함으로 다른 이의 연약함을 품을 수 있고, 나의 힘과 권력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섬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내가 먼저 깨어지고, 먼저 무너진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면서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역설적인 진리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함과 내가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만 신뢰함으로 채워지는 것, 이 역설적인 진리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그 사람에게 맡겨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고난의 길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들로 삼으시려는 진리의 자리임을 우리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연약한 순간, 이 갈급하고 목마른 나날이 오히려 우리를 굳세고 풍요롭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임을 우리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시간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기게 하시고, 다른 누군가의 평가와 기준에 굴하지 않으며 서로를 세워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겸손의 능력을 배우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일구어가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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