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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영, 빛의 영? – 성령과 악령 6 –

요한복음 1: 1 ~ 5

김지철 목사

2017.07.09

지금이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청년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조금 천천히 믿으면 안 될까요? 젊어서 하고 싶은 것 좀 즐기다가 느지막이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될까요?” 예수님을 믿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도도 하게 됩니다. “제게 순결을 주옵소서. 절제도 주옵소서. 그러나 아직은 그리하지 마옵소서.” 사실 이 기도는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젊은 시절에 드린 기도입니다. 어둠 속에서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도 있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조금 더 즐기다 빛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또한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이런 물음을 던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좋은데, 나중에 죽기 한 5분 전에 예수 믿으면 안 될까?” 아마 천국 가는 것을 소망하며 이런 바람을 갖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죽는 날을 알지 못하므로,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오산입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처럼 예수님을 믿으려고 합니까? 그러면 인생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깨달았을 때,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되었을 때,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축복입니다.
우리에게는 물론 욕망이 있습니다. 생리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 있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욕구, 소유욕, 자아실현의 욕구도 있습니다. 권력욕도 있으며, 성취욕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욕망과 욕구가 나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이란 우리의 꿈이며 비전이기도 합니다. 욕망이 있어야 우리가 기도도 합니다. 욕망이 우리 삶을 생기 있게도 하며, 희망차게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욕망이 다 선한 것일까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욕망의 방향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욕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어둠을 향해 내 욕망이 확대되는가? 아니면 빛의 세계를 향해 확대되는가?’ 항상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며 유의해야 합니다. 이 방향성에 따라 우리가 어둠의 영에 붙잡힐 수도 있고, 빛의 영에 인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비추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주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본 내용은 창세기 1장과 아주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고 합니까? 요한은 ‘말씀’이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예수님을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이미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또 ‘태초’는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보다 앞선 개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창세기 1장 1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여기도 ‘태초’가 나옵니다. 이 태초란 시간과 공간을 만든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보다 앞선,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셨던 그 태초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

여기서 ‘그’는 ‘말씀’이자 ‘예수님’을 뜻합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예수님 없이 지어진 것이 없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셨고, 이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선포입니다. 그럼 그 예수님이란 어떤 분일까요? 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4)

예수님이 생명이시며, 이 생명이신 예수님이 사람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5절 말씀도 읽겠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어둠’이란 ‘세상 사람’을 뜻합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빛이 우리 가운데 왔지만, 우리가 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축복의 사건입니다.
왜 비극일까요? 생명으로 오신 빛을 어둠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만 봐도 뚜렷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아기 예수로 성육신하실 때부터 세상에서 거부 당하셨습니다. 공생애 역시 고난과 배반의 연속이었습니다. 생을 마감한 십자가조차 당대 최악의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그 위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며 생을 끝내셨습니다. 그야말로 비극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빛이신 예수께서 어둠을 비추셨을 때, 이 빛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도 더하셨습니다. 성경 역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합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그분을 만납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소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그리하여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빛의 역사를 오늘도 경험하게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킵니다.

우리가 생수를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폭우가 너무 심해 홍수가 나면 먹을 물이 없습니다. 물이 곳곳에 가득 차 있지만 다 구정물일 뿐입니다. 정수를 하지 않으면 어떤 물도 먹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어도 먹을 물이 없습니다.
욕망이란 이와 비슷합니다. 욕망이 흘러넘치면 홍수가 난 것처럼 우리 삶이 방종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그대로 놔두면 구정물이 되고 폐수가 되어 나중엔 오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욕망이 너무 없어도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왜 사냐고 물어도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욕망이 필요합니다. 욕망이 있어야 기도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게도 됩니다. 다만 진정한 욕망, 참된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방향성을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입니다. 건강한 욕망으로 나를 세울 때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수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 생수를 구하지 않고 세상의 구정물만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배가 아프고 탈이 났다고 한탄합니다. 영적으로 외롭고 슬프다고, 허망하다고 탄식합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세상의 쾌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의 만족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영원할 수 없기에 금방 목이 마릅니다. 진정한 빛은 예수님이신데, 우리는 세상에서 다른 빛을 구합니다. 그러다가도 ‘왜 아직도 어둠에 있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시리지? 왜 이렇게 춥지?’ 하며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빛을 찾기 시작합니다. 나를 따뜻하게 하고 감싸는 빛이 어디 있는지 샅샅이 뒤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바라보십니다. 안타까워하시며 아파하십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처럼 밤 문화가 발달된 데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한민국의 밤은 낮보다 더 밝다.” 인공조명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곳곳엔 어둠의 문화를 조장하는 것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새벽까지 밤거리가 밝혀져 있고, 우리를 타락과 음란의 세계로 몰아갑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밤거리입니다. 더욱이 일상적으로 어둠의 문화와 쾌락을 탐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둠은 숨깁니다. 감춥니다. 어둠의 욕망에 들어선 자들은 익명성을 이용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어둠의 자리에 들어가 쾌락을 즐깁니다. 이사야 29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이사야 29:15)

‘누가 우리를 보겠냐’ 하며 어둠으로 들어가 죄악을 즐기려는 자의 모습입니다. 마치 하나님도 모를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불의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처럼 어둠의 세력은 빛이신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면 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내가 누구며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숨길 수가 없다면서 하나님을 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삶에서 추방시키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에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마음이 미련해졌고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는 압니다. 이 세상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하기엔 무리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뭔가 조물주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분을 알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을 인정하면 삶에 부담감이 찾아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억압 받는 것 같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러니 미련한 마음에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한 삶도 살지 않습니다.
이 어둠의 영이 바로 사탄의 영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자꾸 떼어내게 하는 영입니다. 왜 자꾸 떼어내려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영혼이 만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본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로마서 13장 12절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12)

어둠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입니다. 과거에는 형상을 만들어 절하며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나 현대판 우상숭배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것입니다. 바로 돈, 권력, 성적 쾌락을 향한 숭배입니다. 여기에 한 번 매몰되면 중독에 빠집니다. 알코올의존증 환자처럼, 마약 중독자처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의 것에 자신을 던져 넣고 인생을 허비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 욕망을 부추깁니다.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게 합니다. 갈증을 일으킵니다. 해소되지 않은 어둠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이 쓴 『팡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은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기 전에는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와야 내 영이 다시 평안하고 기뻐 뛰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고 하니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갈증, 권력에 대한 갈증, 성적 쾌락에 대한 갈증,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입니다.

주님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갑시다.

바울이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8)

우리가 전에는 어둠 자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 안에서 빛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어둠은 몸부림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쫓아내려고 방망이질을 해도 쫓겨나지 않습니다. 어둠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빛입니다. 빛을 비추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 빛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자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 바로 그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을 이기고자 한다면,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몇 가지가 필요한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내가 빛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빛이 되었다는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빛이 됩니다. 만약 내가 어둠에 거하고 있다면,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면 됩니다. 세상의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회개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다시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빛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 한 번 같이 따라해 봅시다. “나는 주님 안에서 빛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내가 발광체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발광체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품 안에서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빛 되신 하나님을 조금씩 닮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닮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면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구획을 정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나누시며, 해와 달과 별을 나누고, 육지와 물을 나누고, 새와 짐승을 나누며,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또한 시간을 나누시며,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라고 일컬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구획하는 능력 곧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우리 삶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눌 줄 아는 것, 분별할 줄 아는 것, 시간을 분별하고 우선순위를 분별하기 시작하면 우리 삶이 생기 있게 움직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획하시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분별력 있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주부로 즐겁게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하나님도 기쁘게 바라보십니다. 학생으로서 열심히 배우고, 선생으로 열심히 가르치면, 그 또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입니다. 사업가이면 사업가답게, 정치인이면 바른 정치인으로, 전문가라면 그 분야에 성실히 임하며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자신에게도 즐거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일을 하며 즐거워야 하나님께서도 기쁘게 바라보시며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욕망의 방향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어둠을 향해 갈 것인지 빛을 향해 갈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빛이다. 주 안에서 빛의 자녀다.” 이것을 확인했다면, 그 다음엔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면 됩니다. 내가 빛으로서 빛 된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도 삶의 현장에서 귀한 빛의 역사를 잘 감당하시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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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 1 ~ 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지금이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청년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조금 천천히 믿으면 안 될까요? 젊어서 하고 싶은 것 좀 즐기다가 느지막이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될까요?” 예수님을 믿는 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도도 하게 됩니다. “제게 순결을 주옵소서. 절제도 주옵소서. 그러나 아직은 그리하지 마옵소서.” 사실 이 기도는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젊은 시절에 드린 기도입니다. 어둠 속에서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 마음이 그에게도 있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조금 더 즐기다 빛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또한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이런 물음을 던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좋은데, 나중에 죽기 한 5분 전에 예수 믿으면 안 될까?” 아마 천국 가는 것을 소망하며 이런 바람을 갖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죽는 날을 알지 못하므로,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오산입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라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처럼 예수님을 믿으려고 합니까? 그러면 인생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깨달았을 때,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되었을 때,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축복입니다.
우리에게는 물론 욕망이 있습니다. 생리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수면욕이 있습니다. 의식주에 대한 욕구, 소유욕, 자아실현의 욕구도 있습니다. 권력욕도 있으며, 성취욕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욕망과 욕구가 나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욕망이란 우리의 꿈이며 비전이기도 합니다. 욕망이 있어야 우리가 기도도 합니다. 욕망이 우리 삶을 생기 있게도 하며, 희망차게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욕망이 다 선한 것일까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욕망의 방향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욕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어둠을 향해 내 욕망이 확대되는가? 아니면 빛의 세계를 향해 확대되는가?’ 항상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지며 유의해야 합니다. 이 방향성에 따라 우리가 어둠의 영에 붙잡힐 수도 있고, 빛의 영에 인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비추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주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본 내용은 창세기 1장과 아주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고 합니까? 요한은 ‘말씀’이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예수님을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이미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또 ‘태초’는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보다 앞선 개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창세기 1장 1절도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여기도 ‘태초’가 나옵니다. 이 태초란 시간과 공간을 만든 시점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보다 앞선,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셨던 그 태초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말씀도 읽어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

여기서 ‘그’는 ‘말씀’이자 ‘예수님’을 뜻합니다.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예수님 없이 지어진 것이 없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셨고, 이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선포입니다. 그럼 그 예수님이란 어떤 분일까요? 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4)

예수님이 생명이시며, 이 생명이신 예수님이 사람을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5절 말씀도 읽겠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어둠’이란 ‘세상 사람’을 뜻합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빛이 우리 가운데 왔지만, 우리가 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비극이면서 동시에 축복의 사건입니다.
왜 비극일까요? 생명으로 오신 빛을 어둠이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만 봐도 뚜렷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순간부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아기 예수로 성육신하실 때부터 세상에서 거부 당하셨습니다. 공생애 역시 고난과 배반의 연속이었습니다. 생을 마감한 십자가조차 당대 최악의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그 위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시며 생을 끝내셨습니다. 그야말로 비극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빛이신 예수께서 어둠을 비추셨을 때, 이 빛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도 더하셨습니다. 성경 역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합니다.
이 땅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통해 그분을 만납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소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그리하여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빛의 역사를 오늘도 경험하게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킵니다.

우리가 생수를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폭우가 너무 심해 홍수가 나면 먹을 물이 없습니다. 물이 곳곳에 가득 차 있지만 다 구정물일 뿐입니다. 정수를 하지 않으면 어떤 물도 먹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어도 먹을 물이 없습니다.
욕망이란 이와 비슷합니다. 욕망이 흘러넘치면 홍수가 난 것처럼 우리 삶이 방종으로 흘러들어 갑니다. 통제되지 않은 욕망, 절제되지 않은 욕망을 그대로 놔두면 구정물이 되고 폐수가 되어 나중엔 오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욕망이 너무 없어도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왜 사냐고 물어도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욕망이 필요합니다. 욕망이 있어야 기도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돌아보게도 됩니다. 다만 진정한 욕망, 참된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방향성을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입니다. 건강한 욕망으로 나를 세울 때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생수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 생수를 구하지 않고 세상의 구정물만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배가 아프고 탈이 났다고 한탄합니다. 영적으로 외롭고 슬프다고, 허망하다고 탄식합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세상의 쾌락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의 만족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영원할 수 없기에 금방 목이 마릅니다. 진정한 빛은 예수님이신데, 우리는 세상에서 다른 빛을 구합니다. 그러다가도 ‘왜 아직도 어둠에 있지? 내 마음이 왜 이렇게 시리지? 왜 이렇게 춥지?’ 하며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빛을 찾기 시작합니다. 나를 따뜻하게 하고 감싸는 빛이 어디 있는지 샅샅이 뒤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바라보십니다. 안타까워하시며 아파하십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처럼 밤 문화가 발달된 데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한민국의 밤은 낮보다 더 밝다.” 인공조명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곳곳엔 어둠의 문화를 조장하는 것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새벽까지 밤거리가 밝혀져 있고, 우리를 타락과 음란의 세계로 몰아갑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밤거리입니다. 더욱이 일상적으로 어둠의 문화와 쾌락을 탐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어둠은 숨깁니다. 감춥니다. 어둠의 욕망에 들어선 자들은 익명성을 이용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어둠의 자리에 들어가 쾌락을 즐깁니다. 이사야 29장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이사야 29:15)

‘누가 우리를 보겠냐’ 하며 어둠으로 들어가 죄악을 즐기려는 자의 모습입니다. 마치 하나님도 모를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불의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처럼 어둠의 세력은 빛이신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되면 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내가 누구며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숨길 수가 없다면서 하나님을 피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삶에서 추방시키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1절에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마음이 미련해졌고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는 압니다. 이 세상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하기엔 무리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뭔가 조물주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분을 알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을 인정하면 삶에 부담감이 찾아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억압 받는 것 같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러니 미련한 마음에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한 삶도 살지 않습니다.
이 어둠의 영이 바로 사탄의 영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자꾸 떼어내게 하는 영입니다. 왜 자꾸 떼어내려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영혼이 만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영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본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로마서 13장 12절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12)

어둠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입니다. 과거에는 형상을 만들어 절하며 숭배하는 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나 현대판 우상숭배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것입니다. 바로 돈, 권력, 성적 쾌락을 향한 숭배입니다. 여기에 한 번 매몰되면 중독에 빠집니다. 알코올의존증 환자처럼, 마약 중독자처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거짓의 것에 자신을 던져 넣고 인생을 허비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 욕망을 부추깁니다. 우리로 하여금 목마르게 합니다. 갈증을 일으킵니다. 해소되지 않은 어둠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파스칼이 쓴 『팡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이 있다. 이 공백은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기 전에는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와야 내 영이 다시 평안하고 기뻐 뛰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으로 그 자리를 채우려고 하니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갈증, 권력에 대한 갈증, 성적 쾌락에 대한 갈증,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입니다.

주님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갑시다.

바울이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을 가르칩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8)

우리가 전에는 어둠 자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 안에서 빛이 됐다고 합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둠을 이기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어둠은 몸부림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쫓아내려고 방망이질을 해도 쫓겨나지 않습니다. 어둠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빛입니다. 빛을 비추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 빛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자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 바로 그 빛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을 이기고자 한다면,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몇 가지가 필요한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내가 빛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빛이 되었다는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빛이 됩니다. 만약 내가 어둠에 거하고 있다면,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면 됩니다. 세상의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회개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다시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빛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 한 번 같이 따라해 봅시다. “나는 주님 안에서 빛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내가 발광체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발광체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품 안에서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빛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빛 되신 하나님을 조금씩 닮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닮아간다는 것은 어떤 삶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면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구획을 정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나누시며, 해와 달과 별을 나누고, 육지와 물을 나누고, 새와 짐승을 나누며, 공간을 나누셨습니다. 또한 시간을 나누시며,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라고 일컬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구획하는 능력 곧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분별력을 갖지 않으면 우리 삶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눌 줄 아는 것, 분별할 줄 아는 것, 시간을 분별하고 우선순위를 분별하기 시작하면 우리 삶이 생기 있게 움직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획하시며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분별력 있게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주부로 즐겁게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하나님도 기쁘게 바라보십니다. 학생으로서 열심히 배우고, 선생으로 열심히 가르치면, 그 또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입니다. 사업가이면 사업가답게, 정치인이면 바른 정치인으로, 전문가라면 그 분야에 성실히 임하며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자신에게도 즐거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일을 하며 즐거워야 하나님께서도 기쁘게 바라보시며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욕망의 방향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어둠을 향해 갈 것인지 빛을 향해 갈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빛이다. 주 안에서 빛의 자녀다.” 이것을 확인했다면, 그 다음엔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면 됩니다. 내가 빛으로서 빛 된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도 삶의 현장에서 귀한 빛의 역사를 잘 감당하시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2017년 7월 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어둠의 영, 빛의 영?”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40, 28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1:1-5 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아,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 근데 좀 천천히 믿으면 안 될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 좋은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면 변화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하지 마옵소서.” 사실 이것은 어거스틴(Augustine)이 그가 젊을 때 타락하면서 그러나 언젠가는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언제 죽을 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깨달았을 때, 지금이 기회라고 했을 때, 지금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 참 된 지혜이면서 축복입니다.

설교의 요약

여러분 우리에게는 살아가면서 욕망들이 있습니다. 이런 욕망들은 나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욕망이란, 우리의 꿈이고 우리의 비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모든 욕망은 다 선한 것일까요? 그것도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문제는 욕망의 방향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창세기 1장과 아주 비슷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선언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요1:1).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보다 더 앞서있는,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함께 계신 그 태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3). 예수님이 생명이고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요1:4) 예수님의 빛이 우리 가운데 왔지만, 이 땅에 빛으로 오셨지만 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1:5). 이 말씀은 그래서 이 땅에서 나타났던 비극이었고 동시에 축복이 된 이야기입니다. 왜 비극일까요? 어둠이 생명으로 오신 빛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사건은 우리에게 축복이 됐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녀가 되는 축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홍수 중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가뭄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우리의 욕망도 비슷합니다. 욕망이 흘러넘치면, 그걸 그대로 놔두면 홍수처럼 우리의 삶은 방종으로 흐릅니다. 반면에 욕망이 너무 없으면 우리에게 생기가 모자랍니다. “당신 왜 사시오?” “그냥 사니까 살지.“ 그렇기에 진정한 욕망, 참된 소원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처럼 밤의 문화가 발달된 곳이 없을 것입니다. 어둠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어둠은 숨고 감춥니다(사29:15).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어둠의 세력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내 삶의 세계에서 추방시키려고 합니다. 이 어둠의 영은 사탄의 영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거짓된 욕망을 자꾸만 부추깁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이 있다. 하지만 이 공백은 예수그리스도로 채우기 전에는 어떤 것으로도 매울 수가 없다.‘(파스칼)

어둠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빛이 비춰지는 길입니다. 그 빛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십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내가 빛의 자녀인 것을 확인하는 자존감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발광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발광체요. 우리는 주님의 그 품안에 들어가야 진정한 빛을 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인 것입니다. ‘너는 빛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 빛이다.’ 이것을 확인하면 그 다음엔 기쁨으로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be동사가 become동사가 되고, 빛처럼 살아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누기

1. 홍수 중에 마실 물이 없는 거처럼,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돌아보고 반성합시다.

2. 의욕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갔던 시간들을 또한 돌아봅시다.

3. 우리의 욕망이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한 우리의 다짐을 나눠 봅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둠이었지만 이제 주님 안에서 빛이 됐습니다. 이제 빛의 자녀들 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내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허락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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