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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큰 자의 자리에 어린 아이를 세우셨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복되다. 이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믿어왔다. 그 복을 많이 가져온 이가 어린이다. 그래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준다. 어린이는 순 복덩어리다.
그의 말처럼 우리도 어린이를 보면서 하늘이 주신 생명의 소중함과 큰 기쁨을 느낍니다. 아기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은 다 똑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생명은 예외였습니다. 아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미숙하고 무지하다는 이유에서 그들의 생명은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사람을 셀 때, 여자와 어린아이는 포함시키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어린 아이는 삶의 자리에서도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인지를 새롭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어린 아이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더 많은가? 얼마나 더 큰가? 얼마나 더 높은가?’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남자 제자들의 모습을 잘 담고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는 누가 크니이까 (마태복음 18:1)
이 남자 제자들에게는 두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패배주의로 살아왔다는 마음입니다. 갖고 있는 직업, 공부한 것, 사회적 지위 등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들의 모습에서 그럴싸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지금껏 당신을 따라왔는데 당신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우리의 지위가 좀 높아집니까? 세상에서 명예를 좀 가질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패배주의적 삶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며 묻고 있는 것입니다. 더 커지고, 더 많아지고, 더 높아지는 것. 그들은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을 향한 동물적 성향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마태복음 18:2)
“큰 자가 되고 싶으냐?” 예수님은 가장 작은 어린 아이를 부르셨습니다. “힘 있는 자가 되고 싶으냐?” 예수님은 가장 힘없는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 중심에 서고 싶으냐?” 예수님은 가장 변두리에서 멸시받는 어린 아이를 제자들 한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런 대조적인 행동으로 시작됩니다.
어린 아이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 가까이 올 때마다 나무랐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을 향해 ‘너희는 아직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야. 너희는 엑스트라에 불과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이 어린이를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고방식을 180도 전환시키셨습니다. 어린이는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미숙하고 우둔하고 무능력한 자의 표상으로 이해되었던 어린 아이에게서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작은 자,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워놓으시며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뒤집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길도 막혀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듣는 말이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제자들은 매우 이상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최고의 학문을 가졌던 니고데모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다른 대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어린이가 어른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릴 때부터 교만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뻐기기를 원하고, 최고라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오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어린이는 탐욕스럽습니다. 매우 이기적이고 욕심쟁이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내 것은 본래 내 것이고, 네 것도 내가 만지면 내 것’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마이다스의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지면 다 ‘내 것’이라고 떼를 씁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어린이에게도 반항심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부모를 이겨보려고 합니다. 앙탈을 부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엄마에게서 얻어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걸까요? 예수님이 아이들의 부정적인 속성을 모르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어른과 비슷한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차이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삶에 대한 경이(驚異)가 있습니다.
첫째, 아이들은 삶을 경이롭게 봅니다. 모든 것에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자기의 인생 속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세상을 향한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뻔한 것,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은 세상에 대해 놀랄 것이 없다고 자기 자신을 폐쇄시킵니다. 이것이 어른과 어린이의 큰 차이입니다. 방정환 선생의 글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아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볕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요, 눈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계시(啓示)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움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감동을 잘 받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감동을 잘 받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아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자꾸만 막아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에서 신기한 것, 놀라운 것이 사라집니다. 아니 세상 것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가로막는 불신앙과 불순종의 자리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 바로 어른들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단순함과 겸손함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아이들은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세상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걱정 근심도 많습니다. 때로는 생각을 뒤틀고, 꼬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감사와 만족감과도 연결됩니다. 어린 아이는 단순하기 때문에 금방 만족하고 금방 감사할 줄 압니다. 있는 그대로를 소중하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린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만 옆에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안심이 됩니다. 절대적인 신뢰를 부모에게 보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겸손’입니다. 단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만 생각하면 만족이 됩니까? “예수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고 있습니까? 어린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아, 여기까지 온 것이 감사구나. 내게 가족을 주신 것이 감사구나. 내가 이만큼 살 수 있도록 직업을 주신 것이 감사구나. 나의 삶 모든 것이 감사구나’ 하는 감탄과 놀라움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단순함이 사라지고 어른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이러한 감탄과 감사가 어느 날 멈춰버리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사가 없었습니다. 아니, 말로는 감사하다고 하지만 마음에 경탄과 감사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경이로우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경이로우심에 감탄하면서 하나님께 놀라움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명 주신 것, 믿음 주신 것, 가족 주신 것 감사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듯 우리가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우리는 어린 아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시편 40편 5절에는 모든 것을 놀라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편 40:5)
시인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새로움과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움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너무 많아서 도저히 세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며 섬세하게 반응할 때, 그 고백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됩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깨달아지는 모든 것에 감탄할 때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찬양이 내 영혼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인들과 신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어린 아이의 눈으로 하늘과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 많은 세월을 불평과 불만으로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기한 행적들을 익숙함과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들을 닫아놓으면 나는 더 이상 알아야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제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감탄과 감사를 놓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향해서 나의 마음과 사고를 활짝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을 힘들게 올라가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여기 수도원에 올라오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수도승 지망생은, “너무 열심히, 그리고 빨리 오느라고 제대로 본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자네가 산길을 올라오는 동안 그냥 스쳐지나간 것들, 나무들과 꽃들, 그것들의 아름다운 색깔, 그리고 시냇물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그것을 듣고, 보고,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진리를 찾고 어디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가?”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고 싶으십니까?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경탄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었지만, 이미 인생길에서 많은 일들을 경험했지만, 영혼과 마음만큼은 어린 아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태복음 18:5)
어린 아이는 부모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연약한 자들을 향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가 되면, 어린 아이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왜 고통을 받고 있을까? 저 사람은 왜 힘들어 하는 걸까?’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연약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이웃들의 연약함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기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이만 어린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나도 주님 앞에서 어린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우리말로는 ‘아빠’입니다. 아빠라는 단어는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아빠’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네댓 살 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삶의 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날마다 경탄하면서 삶을 즐거워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특별히 어린이 주일이 될 때마다 반복하는 권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1:1 데이트를 먼서 신청해 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기쁘고 힘든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시에,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우리 자녀들이 갖고 있는 아픔도 껴안을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 1 ~ 6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큰 자의 자리에 어린 아이를 세우셨습니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제정한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예찬’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복되다. 이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믿어왔다. 그 복을 많이 가져온 이가 어린이다. 그래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준다. 어린이는 순 복덩어리다.
그의 말처럼 우리도 어린이를 보면서 하늘이 주신 생명의 소중함과 큰 기쁨을 느낍니다. 아기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은 다 똑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생명은 예외였습니다. 아이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미숙하고 무지하다는 이유에서 그들의 생명은 존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사람을 셀 때, 여자와 어린아이는 포함시키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어린 아이는 삶의 자리에서도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인지를 새롭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어린 아이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더 많은가? 얼마나 더 큰가? 얼마나 더 높은가?’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런 남자 제자들의 모습을 잘 담고 있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이르되 천국에는 누가 크니이까 (마태복음 18:1)
이 남자 제자들에게는 두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패배주의로 살아왔다는 마음입니다. 갖고 있는 직업, 공부한 것, 사회적 지위 등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들의 모습에서 그럴싸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지금껏 당신을 따라왔는데 당신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우리의 지위가 좀 높아집니까? 세상에서 명예를 좀 가질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의 패배주의적 삶에 대한 변화를 기대하며 묻고 있는 것입니다. 더 커지고, 더 많아지고, 더 높아지는 것. 그들은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을 향한 동물적 성향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마태복음 18:2)
“큰 자가 되고 싶으냐?” 예수님은 가장 작은 어린 아이를 부르셨습니다. “힘 있는 자가 되고 싶으냐?” 예수님은 가장 힘없는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 중심에 서고 싶으냐?” 예수님은 가장 변두리에서 멸시받는 어린 아이를 제자들 한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런 대조적인 행동으로 시작됩니다.
어린 아이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예수님께 가까이 올 때마다 나무랐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을 향해 ‘너희는 아직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야. 너희는 엑스트라에 불과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이 어린이를 불러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사고방식을 180도 전환시키셨습니다. 어린이는 그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미숙하고 우둔하고 무능력한 자의 표상으로 이해되었던 어린 아이에게서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작은 자,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워놓으시며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뒤집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길도 막혀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듣는 말이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제자들은 매우 이상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최고의 학문을 가졌던 니고데모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갑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다른 대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어린이가 어른의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릴 때부터 교만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뻐기기를 원하고, 최고라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오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어린이는 탐욕스럽습니다. 매우 이기적이고 욕심쟁이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내 것은 본래 내 것이고, 네 것도 내가 만지면 내 것’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마이다스의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지면 다 ‘내 것’이라고 떼를 씁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어린이에게도 반항심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부모를 이겨보려고 합니다. 앙탈을 부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엄마에게서 얻어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걸까요? 예수님이 아이들의 부정적인 속성을 모르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어른과 비슷한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차이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삶에 대한 경이(驚異)가 있습니다.
첫째, 아이들은 삶을 경이롭게 봅니다. 모든 것에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것들이 자기의 인생 속으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세상을 향한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뻔한 것,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은 세상에 대해 놀랄 것이 없다고 자기 자신을 폐쇄시킵니다. 이것이 어른과 어린이의 큰 차이입니다. 방정환 선생의 글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아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볕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요, 눈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계시(啓示)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움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감동을 잘 받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감동을 잘 받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아도 거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자꾸만 막아 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에서 신기한 것, 놀라운 것이 사라집니다. 아니 세상 것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가로막는 불신앙과 불순종의 자리에 들어가고 마는 것이 바로 어른들입니다.
아이들에게는 단순함과 겸손함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아이들은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세상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그대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걱정 근심도 많습니다. 때로는 생각을 뒤틀고, 꼬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감사와 만족감과도 연결됩니다. 어린 아이는 단순하기 때문에 금방 만족하고 금방 감사할 줄 압니다. 있는 그대로를 소중하게 받아드립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린 아이들은 엄마나 아빠만 옆에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안심이 됩니다. 절대적인 신뢰를 부모에게 보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겸손’입니다. 단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만 생각하면 만족이 됩니까? “예수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고 있습니까? 어린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아, 여기까지 온 것이 감사구나. 내게 가족을 주신 것이 감사구나. 내가 이만큼 살 수 있도록 직업을 주신 것이 감사구나. 나의 삶 모든 것이 감사구나’ 하는 감탄과 놀라움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단순함이 사라지고 어른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이러한 감탄과 감사가 어느 날 멈춰버리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사가 없었습니다. 아니, 말로는 감사하다고 하지만 마음에 경탄과 감사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경이로우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경이로우심에 감탄하면서 하나님께 놀라움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명 주신 것, 믿음 주신 것, 가족 주신 것 감사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듯 우리가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우리는 어린 아이가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시편 40편 5절에는 모든 것을 놀라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고백이 나옵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편 40:5)
시인은 삶의 모든 자리에서 새로움과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움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너무 많아서 도저히 세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며 섬세하게 반응할 때, 그 고백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됩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깨달아지는 모든 것에 감탄할 때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찬양이 내 영혼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인들과 신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어린 아이의 눈으로 하늘과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무 많은 세월을 불평과 불만으로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기한 행적들을 익숙함과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들을 닫아놓으면 나는 더 이상 알아야할 것이 없다고 스스로를 제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감탄과 감사를 놓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향해서 나의 마음과 사고를 활짝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을 힘들게 올라가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여기 수도원에 올라오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수도승 지망생은, “너무 열심히, 그리고 빨리 오느라고 제대로 본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그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자네가 산길을 올라오는 동안 그냥 스쳐지나간 것들, 나무들과 꽃들, 그것들의 아름다운 색깔, 그리고 시냇물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그것을 듣고, 보고,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진리를 찾고 어디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가?”
아이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고 싶으십니까?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경탄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었지만, 이미 인생길에서 많은 일들을 경험했지만, 영혼과 마음만큼은 어린 아이와 같아져야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함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다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비결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태복음 18:5)
어린 아이는 부모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약한 자에 대한 배려와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연약한 자들을 향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가 되면, 어린 아이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은 왜 고통을 받고 있을까? 저 사람은 왜 힘들어 하는 걸까?’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연약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이웃들의 연약함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기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연약한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이만 어린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나도 주님 앞에서 어린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우리말로는 ‘아빠’입니다. 아빠라는 단어는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늘 ‘아빠’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네댓 살 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고 삶의 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날마다 경탄하면서 삶을 즐거워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특별히 어린이 주일이 될 때마다 반복하는 권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1:1 데이트를 먼서 신청해 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기쁘고 힘든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시에,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우리 자녀들이 갖고 있는 아픔도 껴안을 수 있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